1.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며칠 전, 친구들을 만났다. 넷이 만났는데 내게 한 친구가 물었다. 요즘도 블로그에 글을 쓰느냐고. 그렇다고 답했더니 무슨 글을 쓸 게 그리 많으냐고 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서재에 리뷰와 페이퍼를 합쳐 266편을 올렸는데 내가 생각해도 무슨 글을 쓸 게 그리 많았을까 싶었다.
어디에 있는 블로그냐고 다른 친구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난 왜 그때 알라딘이라는 인터넷 서점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까? 왜 블로그의 주소를 가르쳐 주지 않았을까? (참고로, 내 친구들의 반쯤은 이미 이곳 서재를 알고 있다. 이곳을 알지 못하는 나머지 친구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집에 와 생각해 보니 이런 것 같다. 난 내가 쓴 글을 친구들이 보는 게 창피한 것이다. 당당하게 내 글을 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내 글에 자신이 없는 것이다. 친구들과 얘기를 나눈 일로 내가 내 글쓰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인간은 그렇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모른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을 계기로 자신에 대해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뻔뻔해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저를 시장으로 뽑아 주세요. 제가 시장으로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뻔뻔해져야겠다고 다짐했다. 뻔뻔함이 없다면 시장으로 출마할 수 없는 것처럼, 뻔뻔함이 없다면 글을 계속 쓸 수 없을 것 같아서다.
2. 아십니까?
독자 여러분은 위의 1번의 글에서 제가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1) 글에 자신이 없다는 것.
2) 뻔뻔함이 필요하다는 것.
3)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모르고 있다는 것. 어떤 일을 계기로 알게 될 뿐이라는 것.
어떤 문제이든 길게 쓴 것이 정답일 가능성이 높다. 정답이기 위해서 자세하게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3)번이 정답이다. 나는 독자들이 1)번과 2)번은 물론이고 3)번까지 알아주길 바라는 것이고 특히 3번을 강조하고 싶은 거였다. 하지만 독자들은 다 알지 못한다고 서머싯 몸은 말한다.
작가는 책 한 권을 쓰느라 몇 달을 보내며 자신의 진심을 쏟아붓지만, 그 진심을 읽는 독자는 거의 없다.(윌리엄 서머싯 몸)
- 도러시아 브랜디 저, <작가 수업>, 111쪽.
서머싯 몸의 말에서 진심을 ‘성의’로 해석할 수도 있고 ‘진실’로 해석할 수도 있고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나는 진심을 ‘진실’로 해석하였다.
‘글을 쓰는 이는 자신이 깨달은 진실을 담아 글을 쓰지만 그 진실을 읽는 독자는 거의 없다.’는 것.
나 역시 남들이 쓴 글의 진실을 알기가 쉽지 않다는 걸 느끼곤 한다. 책을 읽으며 또는 이웃 님들의 서재에서 글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제대로 읽은 걸까?’라고.
3. 왜 글의 진실을 말로 설명하지 않는가?
이렇게 글의 진실을 알기가 쉽지 않은데, 왜 작가들은 소설에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진실을 말로 설명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어떤 소설을 읽으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모를 때가 있어서다. 어째서 ‘해설’은 없고 ‘상황’만 있을까?
나중에 이것에 대한 답을 찾았다.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의 답일 뿐이다.) 작가는 전하고 싶은 것을 상황으로만 보여 주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 그것을 말로 설명하는 순간 그 소설은 중요한 것 하나를 잃기 때문이라는 것. 바로 독자에게 ‘스스로 해석하는 능력’을 줄 기회를 잃기 때문이라는 것. 그것이 작가가 해설가로 나서지 않는 이유라는 것.
예를 들어 설명해 본다.
<안나 카레니나>라는 소설에서 안나는 기차 안에서 매력적인 브론스키를 알게 되고 나서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온 남편을 보고 생각에 잠긴다.
페테르부르크에서 기차가 멈추자마자 그녀는 내렸다. 맨처음 그녀의 눈에 띈 것은 남편의 얼굴이었다. ‘세상에! 어째서 저이의 귀는 저렇게 생겼을까?’ (…) 특히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남편을 보는 순간 일어났던 자신에 대한 불만의 감정이었다. 이것은 그녀가 남편과의 관계에서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던 익숙하고 위선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녀는 이전에는 이 감정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뚜렷하고 가슴 아프게 그것을 의식한 것이었다.
- 톨스토이 저, <안나 카레니나>에서.
‘세상에! 어째서 저이의 귀는 저렇게 생겼을까?’의 문장은 남편의 귀가 못생겼음을 느꼈다는 걸 뜻한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박웅현 저, <책은 도끼다>에 나와 있다.)
<인생의 베일>이라는 소설에서 키티는 매력적인 타운센드를 알게 된 뒤 타운센드와 남편을 보고 생각에 잠긴다.
타운센드는 키가 컸다. 최소한 185센티미터는 될 거라고 키티는 생각했다. 게다가 외모도 아름다웠다. 첫눈에 봐도 아주 건강했고 군살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방 안에서 옷맵시가 가장 뛰어날 정도로 옷을 입는 감각도 좋았다. 게다가 그는 그녀가 좋아하는 똑똑한 남자이기도 했다. 그녀의 눈은 월터(남편)에게로 옮아갔다. 월터는 앞으로 좀 더 신경 써서 옷을 입어야 할 것이다.
- 서머싯 몸 저, <인생의 베일>, 61쪽.
‘월터는 앞으로 좀 더 신경 써서 옷을 입어야 할 것이다.’의 문장은 남편의 모습이 후졌음을 느꼈다는 걸 뜻한다.
이 두 가지의 소설에서 모두, 작가는 해설가의 역할을 하지 않고 등장인물들의 상황만 보여 준다. 만약 작가가 해설가의 역할까지 한다면 이렇게 썼으리라.
톨스토이는 이렇게 썼으리라.
페테르부르크에 내린 안나는 남편을 보자마자 꼴보기 싫음을 느꼈다. 매력적인 남자인 브론스키을 만난 직후였기 때문이다. 기혼자가 배우자 아닌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상대적으로 배우자가 볼품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법이다.
서머싯 몸은 이렇게 썼으리라.
매력적인 타운센드를 알게 된 뒤 키티는 남편이 후져 보였다. 기혼자가 배우자 아닌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상대적으로 배우자가 볼품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법이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 친절하게 해설해 주는 소설을 읽는다면 소설이 얼마나 재미없겠는가. 그건 마치 작가가 음식을 씹어서 독자에게 먹여 주는 것과 같다. 작가의 할 일은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상을 독자에게 주는 것일 뿐이다. 그것을 맛보는 것은 독자의 몫이어야 한다.
4. 해설가는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앞의 1번에서 이렇게 쓴 글이 있다.
집에 와 생각해 보니 이런 것 같다. 난 내가 쓴 글을 친구들이 보는 게 창피한 것이다. 당당하게 내 글을 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내 글에 자신이 없는 것이다. 친구들과 얘기를 나눈 일로 내가 내 글쓰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인간은 그렇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모른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을 계기로 자신에 대해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만약 내가 1번의 얘기로 소설을 쓴다면 위의 글에서 괄호 안에 있는 글을 빼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해설이기 때문이다. 이런 해설은 소설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소설은 현실의 삶을 겪으며 그것을 해석하는 우리의(독자의) 능력을 키워 줄 수 있는 소설이 될 때 가치 있는 소설이 된다. 그러므로 소설가는 해설가로 나설 것이 아니라 해설가의 역할을 독자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작가의 할 일은 ‘등장인물들의 상황을 읽고 무엇을 느끼고 생각해야 하는지’를 독자에게 과제로 내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과제를 독자 스스로 해결하도록 훈련을 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훈련을 통해 독자는 현실의 삶을 읽어 내는 능력 즉 해석(해설)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것이다. 이 능력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현실의 삶은 상황만 있고 해설가가 없기 때문이다. 현실의 삶에서 해설가는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해설가가 없다. 소설을 읽는 사람이 해설해야 한다. 현실의 삶에서도 해설가가 없다. 현실의 삶을 사는 사람이 해설해야 한다.
이 글의 마지막은 다음의 글로 장식한다.
지혜란 누구한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고, 다만 그 누구도 우리를 위해 대신 수행해주지는 않는 여행을 통해, 그 누구도 우리를 위해 면제해주지는 않는 노력을 통해 우리가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일세.
- 알랭 드 보통 저,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94쪽.
지혜란 누구한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고, (…) 우리가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임을 기억하자는 뜻에서 이 글을 뽑아 옮겼다.
(참고 사항) : 옮긴 글에서 '여행'을 '정신적인 여행'이라고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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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1>
이 글의 소제목으로 네 개를 썼다. 네 개의 소제목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렇다. 1번과 2번이 서로 짝을 이루고, 3번과 4번이 서로 짝을 이룬다.
1.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2. 아십니까?
3. 왜 글의 진실을 말로 설명하지 않는가?
4. 해설가는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건 사족이다. 이렇게 일일이 설명하면 글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사족이다. 독자 스스로 알아차릴 기회를 필자가 빼앗았다는 얘기다. 독자의 상상력을 필자가 차단시켰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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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2>
나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않고 글을 끝내면 답답하다. 독자가 모를까 봐 걱정이 된다. 그래서 나 같이 소심한 사람은 소설을 쓰면 안 되는 것이다.
소설을 읽는 것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