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경숙 작가의 책을 오랜만에 읽었다. 짧은 소설 26편이 담겨 있는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라는 책이다. 이 책을 읽은 독자가 작가 지망생이라면 아마, 나도 이런 소설이라면 쓸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다. 구성이 단순하고 작품의 길이가 짧아 ‘간단한 소설’로 읽히기 때문이다.
- 작가가 ‘패러독스나 농담이 던져주는 명랑함의 소중한 영향력은 나에게도 날이 갈수록 매혹적으로 다가온다’라고 후기에 밝혔듯이, 이 책의 소설들 중에는 명랑함이 느껴지는 것들이 있어서 내가 읽었던 그의 작품들(아픔, 고통, 서글픔 등이 느껴지는 작품들)에서 볼 수 없었던 다른 면(밝음, 유머 등)을 볼 수 있다.
- 누구든지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모든 것이 부질없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특히 죽는 순간에 그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깨닫게 될 터이다.
그러나 단 하나, 부질없지 않고 무의미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고흐의 답변에서 찾는다. 바로 무언가에 도움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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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친구가 고흐에게 삶의 신조가 무엇이냐? 묻는다. 친구의 질문에 고흐의 답변은 이와 같았단다.
“침묵하고 싶지만 꼭 말을 해야 한다면 이런 걸세.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산다는 것. 곧 생명을 주고 새롭게 하고 회복하고 보존하는 것. 불꽃처럼 일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하게. 쓸모 있게 무언가에 도움이 되는 것. 예컨대 불을 피우거나, 아이에게 빵 한 조각과 버터를 주거나, 고통받는 사람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는 것이라네.”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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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살다 보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조차 마음을 써 줄 여유가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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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나는 이런 시를 읽었습니다.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브레히트라는 시인의 ‘나의 어머니’라는 시입니다.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97쪽~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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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뻔히 알면서도 그 마음속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것은. 뒤늦게 헤아리게 된다는 것은.
- 하
하하~ 웃게 만든 이야기로 이것을 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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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1 : 야야! 근데 예수가 죽었다 카대.
할머니2 : 와?
할머니1 : 못에 찔려 죽었다 카네.
할머니3 : 낸 그리될 줄 알았고마. 머리를 그리 산발하고 허구헌 날 맨발 벗고 길거리를 그리 싸돌아댕기싸니 못에 안 찔리고 배기겠나.
할머니4 : 근데 예수가 누구꼬?
할머니5 : 글쎄…… 모르긴 해도 우리 며늘애가 자꼬 아부지, 아부지, 해쌌는 거 보이 우리 사돈영감 아닌가 싶네.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204쪽~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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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 깊게 읽은 이야기로 이것을 뽑는다.
소설 속 ‘나’는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찬장에서 접시 세 개를 꺼내 두 개의 접시엔 사료를 나눠서 붓고 다른 한 접시엔 물을 담아서 고양이가 지나다니던 곳에 내다 놓았다. 며칠 뒤 사료가 반쯤 비어 있음을 알았다. 아, 드디어 고양이가 먹이를 발견했군, 싶었다. 그다음 날은 고양이들이 접시의 사료를 다 먹은 것 같았다. 잘 먹네, 하면서 접시에 좀 더 많이 사료를 부어 놓았다. 그다음 날은 조금 더더 많이 부어 놓았다. 그러면서 자신이 맘에 들었다. 텅 빈 접시에 사료를 부어 놓을 때의 자신의 모습이 맘에 들었던 것이다. 타자를 위해 공을 들이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은 뜻밖에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하는 것이므로.
그런데 ‘나’는 뜻밖의 결과를 발견하게 된다. 접시에 있는 사료를 먹은 것은 고양이가 아니었던 것. 까치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어 접시의 사료를 정신없이 쪼아 먹고 있었던 것. 한두 마리가 아니라 한 떼가 몰려들어 먹고 있었다. 그제야 그동안 저 까치들이 고양이 밥을 다 빼앗아 먹었다는 것을 알았다. 까치들이 등장하면서 고양이들이 마당 근처에 얼씬도 않는 것 같았다. 아, 고양이들은 어디서 물을 마시나, 싶었지만 까치도 살아야 할 것 같아서 그 다음부턴 까치를 위해 고양이 사료를 접시에 계속 부어 놓았다.
그런데 오늘 해 저물녘에 ‘나’는 놀라서 뒤로 자빠질 뻔했다. 까치들이 난리가 난 것이다. 분위기로 보아 까치들이 패를 갈라 싸우는 듯했다. 사납게 서로를 향해 날아들고 도망치고 쪼아댔다. 처음 고양이 먹으라고 내놓은 것을 까치들이 차지하더니 어쩌면 다른 영역에 살던 까치들까지 그 사료를 차지하려고 몰려들어 생긴 일일까? ‘나’는 한참 지켜보다가 그 싸움이 무서워서 얼른 현관문을 닫고 들어왔다. 한 떼의 까치들이 다른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그 치열한 소란은 계속되었다.
‘나’는 다음 날 세 개의 접시를 조용히 집 안으로 들여놨다. 그들의 세계에 내가 개입하면서 생긴 이 싸움을 그치게 하는 길은 내놓았던 세 개의 접시를 들여놓는 일밖에는 없었으므로.(19쪽~23쪽을 요약함.)
자신이 하는 일이 누군가를 위하는 일이라고 여길 수는 있어도 확신할 수는 없다. 그 결과는 두고 봐야 아는 것이니까. 어떤 일의 의도가 좋았다고 해서 그 결과까지 좋다는 법은 없는 것이니까. 그런데 우리 인생이란 게 예상했던 대로 결과가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가 많은 것 아닌가. 이 소설에서 우리의 인생을 본다.
- 이 책을 읽으면서 내 가슴에 꽂힌 글귀가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는 죽을 때까지 사는 법을 새로 배워야 한다.’라는 글귀다.
어느 날 내가 본 거리의 풍경이 있다. 자전거를 탄 젊은 남자가 뭔가를 땅에 떨어뜨리고 지나가더니 자신도 떨어뜨린 것을 알았는지 자전거를 멈췄다. 땅에 떨어진 것은 작은 수첩인 것 같았다. 그것을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부부인 듯한 사람들이 보았다. 그중 남편인 듯한 사람이 그 수첩을 주워 자전거를 탔던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자전거를 탔던 남자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인사도 없이 그냥 수첩을 건네받더니 자전거를 타고 휑 가 버렸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예의가 없잖아, 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생각도 했다. 수첩을 주워 준 그 사람은 무안하지 않았을까. 좋은 일을 했건만 상대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아내 앞에서 체면이 구겨진 건 아니었을까.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가 버린 사람을 붙잡고 인터뷰를 하고 싶었다. 도대체 왜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인지를 묻고 싶었다.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남에게 섭섭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사실 이와 비슷한 경우를 몇 번이나 봤다. 지하철에서 누군가가 자리를 양보해 주었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좌석에 앉아 버리는 사람도 봤다.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올바르게 처신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나도 그런 사람일 때가 있겠지.) 상황에 맞게 처신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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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을 때까지 사는 법을 새로 배워야 한다.’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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