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
이것은 G. 버나드 쇼의 말을 인용해서 쓴 것으로 박범신 저, <은교>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을 변형해 다음과 같이 써 본다.
“늙음은 늙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가엾다.” - pek0501
나이를 한 살씩 먹는다는 것은 죽을 나이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늙은이가 되어 죽음을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가는 것도 가여운데, 주름살이 생기고 흰 머리가 생기는 ‘늙음’까지 얹혀 주다니…. 잔인한 세월이여.
2.
처음 30세가 되었을 때 ‘3’이라는 숫자에 기절할 뻔했다. 내가 30대에 들어서다니, 이러면서... 처음 40세가 되었을 때 ‘4’라는 숫자에 기절할 뻔했다. 내가 40대에 들어서다니, 이러면서... 지금도 내 나이의 숫자를 생각하면 기절할 것 같다.
이런 나를 보고 60대나 70대의 사람들은 “뭐, 그 정도의 나이 가지고 그래. 그 정도면 젊은 축에 드는 거야.”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60대나 70대의 사람들도 30대에 들어섰을 때, 또는 40대에 들어섰을 때 나와 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이것이다.
“누구나 자기 나이에 대해서만 심각한 법이다.” - pek0501
3.
이곳 알라딘 서재에는 추천 수와 댓글 수가 유난히 높은 블로거들이 있다. 그런 블로거들의 글을 보면 내가 봐도 잘 쓴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글에 만족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글 쓰는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글을 보는 안목도 높아져서 자신의 글에 결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걸 어떻게 알았을까. 내 경험을 통해서 알았다. 예전에 잘 썼다고 생각한 글이 지금 보면 형편없는 글로 생각된다. 내 글에 대한 만족도가 낮아진 것이다. 글을 많이 쓰면 쓸수록 글을 보는 눈은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느끼는 일이 많으리라.
그러니까 글을 잘 쓰는 인기 블로거에게 악성 댓글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만약 인기 블로거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은 심리로 악성 댓글을 쓰는 경우라면 말이다. 왜냐하면 이미 스스로 자신에게 찬물을 끼얹고 있을 테니까. (이것, 나의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4.
시를 쓰는 친구와 전화 통화로 한두 시간쯤 수다를 떠는 일이 있다. 책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전화를 했다. (그 친구의 이름을 A라고 하자. 내 이름을 B라고 하자.)
친구 : 내가 글 써야 할 게 있어서 묻는 건데, 내가 묻는 말에 한참 생각하지 말고 바로 대답해야 돼.
나 : 알았어.
친구 : A 하면 떠오르는 건?
나 : 시.
우리는 깔깔깔 웃었다. 그 친구가 물어본 사람들 열 명 중 다섯 명은 나처럼 ‘시’라고 대답을 했단다. (그 친구는 산문을 쓰기도 하는데 시를 더 많이 쓴다.) 그러니까 그 친구의 이미지는 ‘시’였던 것이다.
그 다음엔 내가 물었다. ‘나’하면 떠오르는 게 뭔지 궁금했기 때문.
나 : 나도 물을게. B 하면 떠오르는 건?
친구 : 방대한 독서량.
우리는 또 깔깔깔 웃었다. 그 친구가 덧붙여 말했다.
친구 : 너한테 책에 대해 물으면 뭐든 척척 대답하잖아.
그런데 재밌는 건 다른 친구들의 반응이다. 이런 걸 묻진 않았지만 학교 동창생들은 내가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이렇게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니가 글을 써? 블로그가 있어? 되게 안 어울려.”
내가 글 쓰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글쟁이 스타일은 아니다. 그래서 깔깔깔 웃고 만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책을 읽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책 얘기를 하지 않으니까.
누구나 상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한 사람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시각이 제각각이다.
5.
얼마 전, 똥을 밟은 적이 있다. 개똥인 것 같다. 거리를 걷다가 바로 내 앞에 똥이 있는 게 보였는데, 피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냥 관성으로 걷다가 밟고 나서야, 아 조금 전 똥을 분명히 보았는데 밟다니, 이랬다. 엠피쓰리로 음악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면서 걷다가 당한 일이다.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저, <새로운 무의식>에 따르면 모든 감각은 ‘무의식의 체’를 거친 뒤에야 의식에 입력된다. ‘무의식의 체’로부터 의식에 입력되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똥을 보았으면서도 밟았다는 얘기다.
친정에 가는 길이었는데 똥을 밟아 불쾌했다. 그날 부모님과 점심을 먹는데 똥 밟은 일 때문에 비위가 상해 점심을 맛있게 먹질 못했다. 그 똥은 거리에 며칠째 그렇게 있었다. 만약 애완견을 기르는 사람이 개똥을 치우지 않은 부주의로 내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그 사람을 비난하고 싶었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사는 게 우리가 꼭 지켜야 하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길을 또 걷게 되었는데 똥이 없어졌다. 생각해 보니 바로 그 전날에 내린 비 때문이었다. 비가 똥을 치운 것이다. 사람들은 거리에 침을 뱉기도 한다. 그런데 비가 한 번 내리고 나면 거리에 있던 침마저도 없어진다. 가뭄을 해결하기 위해서만 비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세상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도 ‘비’였다. 비가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를 알겠다.
지금 비가 오고 있다. 세상을 청소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