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교를 배우다

 

가이 해리슨 저, <사람들이 신을 믿는 50가지 이유>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것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타 종교의 경전을 읽어보지도 않고 자기들의 신앙 체제가 다른 것들보다 월등하다고 믿는 것은 마치 다른 팀과 한 번도 경기를 해 보지 않은 축구팀이 자기들이 대회의 우승자라고 우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그리고 신에 대한 예배가 넘쳐나는 가장 종교적인 국가들이 세계에서 가장 불안하고 폭력적이고 가난하다는 것.

 

 

다른 팀과 경기를 해 보지 않고는 자신의 축구팀의 실력을 알 수 없듯이, 종교 역시 타 종교에 대해 공부해 보지 않고는 자신의 종교가 월등하다는 것을 알 수 없다는 지적이다. 또 가장 종교적인 국가들이 사랑과 평화가 있는, 살기 좋은 국가가 되어야 할 텐데, 그 반대로 가장 불안하고 폭력적이고 가난한 국가라는 지적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현재 가장 인기 있는 몇몇 종교만을 다루지 않는다. 긴 역사 속에서 모든 신은 동등하다며, 다음과 같이 일침을 가한다.

 

 

“물론 세상의 종교들은 좋은 점도 많이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종교의 어두운 점이 지나치게 간과되는 것을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어린이 교육이나 새로운 치료법의 개발, 여성의 안전과 평등, 그리고 과학의 발전과 같은 것들을 위협하고, 세계 평화에 악영향을 미친다면 그 주장은 반드시 도전받아야만 한다.”(<사람들이 신을 믿는 50가지 이유>)

 

 

 

이 책은, 저자가 사람들이 신을 믿는 이유에 대한 일반적인 답변 50가지를 모아서 그것들을 조목조목 따지고 분석하면서, 그 이유들이란 게 믿을 게 못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책이다. 그 50가지 이유 중엔 신이 나를 보호해 주기 때문에, 심판이 두렵기 때문에, 라는 이유도 있다.

 

 

이것을 읽으니 다음의 글이 생각났다.

 

 

“우리는 자식과 부모를 사랑하고, 배우자들에게 충실하며, 친구들에게 진실하고, 공동체에 이바지하며, 우리가 속한 집단에 헌신한다.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 까닭은 사전에 그것들이 어떤 가치와 장점이 있는지 따져보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이득이 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 아니라, 직감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고, 가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지를 논리적으로 따져보고 고민하는 사람은 위의 인간관계에 ‘적응하지 못했음’을 드러낼 뿐이다. (…) 따라서 신성한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아주 중요하다.”(존 브록만 엮음, <위험한 생각들>)

 

 

우리가 속한 집단(종교 집단도 가능함)에 헌신하는 것은 그것이 올바른지를 논리적으로 따져 봐서가 아니라 직감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고 가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란다. 이것을 우리는 ‘실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종교’하면 떠오르는 건 ‘과학’이다. 그 둘의 세계는 서로 반대의 편에 있으므로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신념은 종교적인 사람들이 합리적인 설명에 실패할 때, 그러한 명제를 믿기 위하여 서로에게 주는 면허증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과 종교의 차이는, 새로운 증거와 주장을 냉정하게 고찰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가에서 생긴다. 그 구별은 명백하고, 필연적이지만, 아직도 곳곳에서, 심지어 상아탑에서마저 묵살되고 있다.”(<위험한 생각들>)

 

 

 

 

 

 

 

내게 확고한 종교관을 갖게 해 준 책은 A. J. 크로닌 저, <천국의 열쇠>이다. 이것은 프랜치스 치셤 신부의 생애를 보여 주는 이야기로, 회고하는 형식의 소설이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단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쪽 문을 택했듯이 새로 오시는 선교사들은 또 다른 쪽의 문을 택했다는 것이 다르지요. (…)”(<천국의 열쇠>)

 

 

치셤 신부는 자신의 종교만을 최고의 위치에 놓지 않고 어느 종교에도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있다고 말한다.

 

 

“(…) 어떤 것인가 하면 확고한 믿음만 가지면 결코 지옥으로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그렇지요. 불교도든 회교도든, 또한 도교를 믿든……선교사를 죽인 후 그 고기를 먹어 버렸다는 식인종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부끄럽지 않게끔 자신의 삶에 성실한 자세를 갖는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지요. 최후의 심판 때에 결코 신의 존재를 알 수 없노라 대답하는 사람들에게도 진노의 채찍을 내리지는 않으실 겁니다. 아마 ‘여기를 보아라, 네가 그토록 부정하려 했던 나와 천국이 있지 않느냐. 자, 들어오너라’하고 말씀하시겠지요.”((<천국의 열쇠>)

 

 

이 글을 읽고 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이런 내용이 아직까지도 내 머릿속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 책을 참 오래 전에 읽었는데도(2000년에 읽었다) 지금도 이 내용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건 그만큼 내 마음속에 깊게 각인된 소설이어서다. 주인공 치셤 신부를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가질 수 있었던, 유익한 독서 경험이었다.

 

 

 

 

 

2. 기도의 효과

 

일 년에 몇 번쯤 절에 간다. 지난 5월의 석가탄신일에도 어머니와 함께 절에 갔다 왔다. 절에서 기도할 땐 나의 가족은 물론 친정 식구들과 시집 식구들이 건강하고 무탈하길 비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기도는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기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만약 그들 중 누구라도 큰 병에 걸린다면 내가 편히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문병을 가야 하고, 약값에 보태 쓰라며 얼마의 돈을 건네야 하고, 안부를 묻는 전화를 자주 해야 하고, 환자로 인한 걱정을 달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내가 아프지 말고 무탈하게 살아야 한다. 한마디로 ‘서로의 삶에 폐를 끼치기 없기’가 중요한 것이다.)

 

 

아무리 이기심으로 기도를 한다고 해도 기도는 아름다운 것이다. 기도란 인간의 가장 겸손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가 아니라 ‘운명아 도와 줘, 나 여기 있어’와 같이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가장 낮은 마음으로 엎드려 비는 것이니까. 나의 경우에 기도의 제일의 효과는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기도한 내용에 대해 최선을 다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서 절에 갔다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3. 종교와의 거리

 

종교에 너무 깊게 빠진 광신도들이 인생을 망치게 된 신문 기사를 접할 때가 있다. 종교에 대한 믿음도 지나치면 독이 되나 보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고 할지라도 나쁜 쪽으로 왜곡하여 읽는 독자에겐 그 책이 독이 될 수 있듯이, 종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나는 종교인들 중에서 타 종교를 존중할 줄 아는 종교인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은 광신도가 되지 않는다.

 

 

종교에 대한 믿음은, 공자가 말한 것과 같이 “(정도가)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과유불급:過猶不及)”고 생각한다. 좋은 종교라고 할지라도 종교에 지나치게 빠진 사람에겐 이로운 종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종교가 이로운 종교인가, 해로운 종교인가 하는 것은 그 종교를 믿는 신도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말이 된다. 거리, 여기서 중요한 건 ‘거리’이다. 이 세상의 모든 관계는 적당한 거리를 필요로 하지 않던가. 부모 자식 간에도 그렇고, 부부 간에도 그렇고, 연인 간에도 그렇듯이, 종교와 신도와의 관계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것이다.

 

 

생각도 습관처럼 굳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인간은 고정관념의 노예가 되고 편견의 노예가 된다. 어떤 것에 대해 머릿속에 박혀 버린 생각을 지우고 좀처럼 새로운 생각을 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이런 우리에게 때에 따라선 자신의 생각(종교에 대한 생각)을 수정할 줄 아는 열린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지성인다운 태도가 아니겠는가. 지성인에 대해 러셀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실 단지 자신의 의견을 취한다고 해서 지식인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식인이란 이러저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타당한 논거를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교조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다.”(버트런드 러셀 저, <런던통신 1931 - 1935>)

 

 

‘교조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종교도 한 가지만 보지 말고 다른 종교를 비교하며 종합적으로 보는 균형 감각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4. 좋은 인생이란

 

며칠 전 <탈무드>라는 책에서 ‘인생의 비결’이란 글을 읽었다.

 

 

한 사나이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목청 높여 소리쳤다.

“여러분, 인생의 비결을 팝니다! 필요하신 분 없으십니까?”

사나이의 외침에 사람들이 인생의 비결을 사기 위해 너나없이 모여들어 순식간에 북새통을 이루었다. 사람들 틈에는 랍비도 몇 사람 끼여 있었다. 시장에 모인 사람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사나이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디 인생의 비결을 사 가십시오. 인생을 보람 있고 참 되게 사는 비결은 바로 여러분의 혀를 주의하는 겁니다.”(<탈무드>)

 

 

좋은 인생의 비결은 혀를 주의하는 것. 이 말은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한다는 뜻이다. 누군가에게 표독스레 내뱉은 한마디의 말이 그에겐 평생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다. 또 무심코 흘린 말도 그럴 수 있다.

 

 

어떻게 사는 게 좋은 인생인가. 종교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말로 인해 누군가를 불행에 빠뜨리지 않는 게 좋은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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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9-25 0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잘 살아가면 '좋은 삶'이에요. 혀이든 무엇이든 모두 스스로 잘 살아가느냐를 말하는 대목이에요.

종교와 과학은 갈래가 다르다 하지만, 밑바탕은 둘 모두 같아요. 믿음이 종교가 되고, 삶이 과학이 되면, 종교와 과학은 모두 권력과 독재가 되지요. 종교가 언제 어디에서 왜 생겼고, 과학이 언제부터 진보와 발전을 대변하는가 하는 뿌리를 헤아리면, 둘은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속내가 똑같은 줄 깨달을 수 있어요.

아이들은 모두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까닭이란, 어른 누구나 모두 하느님이란 뜻이에요. 다만, 어른이 되며 스스로 사회 제도권에 스스로 톱니바퀴 되어 들어가니, 어른은 스스로 하느님인 줄 잊거나 내버린 셈이에요.

모든 사람이 서로 같은 하느님인 줄 아는 일이 '믿음'이고, 이 믿음을 비틀어서 '지옥과 구원과 기도'를 만든 제도권 권력이 종교예요. 종교인이 스스로를 깨닫는다면, 이이는 이녁 종교조차 얼마나 허울이고 껍데기인 줄 알아차릴 수 있어요. 곧, 천주교이든 개신교이든 불교이든 겉옷을 벗고 알맹이를 찾아서 홀가분해지겠지요.

...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니, 잘 헤아리며 느껴 보셔요 ...

페크pek0501 2012-09-25 13:14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잘 헤아리며 느껴 볼게요. ^^
이렇게 길게 쓰는 것,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
제가 댓글을 써 보니까 , 어려운 걸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댓글을 소중히 받아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프레이야 2012-09-25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좋은인생관에 끄덕끄덕하며 혀단속, 생각단속,마음단속 잘하며 살아겠구나 새삼 느껴요. 러셀의 인용구 마지막 문장도 새깁니다. 믿되, 내믿음을 의심하라, 이 정도 뜻이 될까요. 기도의 본성에 대한 말씀에도 공감해요. 낮게 엎드린 절박한 마음이 기도겠지요. 진정한 기도를 잊고 산 것 같아요. 오늘밤엔 잠시라도 나만의 기도를 하고 그런 마음으로 잠을 청해야겠어요.^^

페크pek0501 2012-09-26 15:00   좋아요 0 | URL
예 맞아요. 백 퍼센트의 확신은 금물이라는 것이죠.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자만하지 않게 살 수 있을 듯해요.

기도, 저도 잊고 살아요. 다급할 때만 기도를 하는 경향이 있어요.ㅋ 절에 자주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되질 않네요.
절에 들어서면 우선 절 입구에서부터 기분이 좋아져요. 나무들이 많아 맑은 공기가 느껴지고 자비의 공기가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그런데 제가 다니는 절이 멀어서 좀 가까운 곳을 알아 두려 하고 있어요.
반가웠어요, 프레이야 님. 추석 잘 보내세요.

oren 2012-09-26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아주 가벼운 필치로 사뿐사뿐 써내려간 글이어서 읽기가 참 좋네요. '서양종교'에 관해서라면 이미 그 핵심적 존립기반인 '신의 존재증명'에 관한 수많은 해명에도 불구하고, 그 오랜 믿음 때문에 앞으로도 오랫동안 인류의 생각을 '계속 지배'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페크님께서 인용해 주신 러셀의 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타당한 논거를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교조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가져봅니다.

페크pek0501 2012-09-26 15:01   좋아요 0 | URL

“'종교'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아주 가벼운 필치로 사뿐사뿐 써내려간 글이어서 ...”
- 이런 호평을 해 주시다니요. 고맙습니다. 그냥 아는 데까지 쓴 것이라, 더 많이 알았다면 더 좋은 글이 될 수 있는 건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글은 딱 자신이 아는 만큼만 쓰는 것 같아서 공부가 많이 필요하단 생각이 듭니다.

oren 2012-09-26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읽었던 쇼펜하우어의 몇몇 책에서도 '종교'에 관한 '인상적인' 구절들을 참 많이 발견했는데 몇 가지만 덧붙여 보고 싶네요.

* * *

"불교 체계는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은, 모든 시간 이전에 있었고 모든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창조한 유일한 신적 존재를 알지 못한다. 이런 이념은 불교에 전혀 생소하며 불교 서적에는 이에 대한 최소한의 흔적도 없다."(238쪽)

"중국에서는 마호메트 교도도 기독교도도 신성의 이론적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중국어 낱말도 찾지 못했다. ······ 물질로부터 독립적이고 물질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것으로서 신, 영혼, 정신이라는 단어들은 중국어에는 전혀 없다. ······ 이런 사유 과정은 언어 자체와 매우 밀접하게 얽혀 있어서 창세기의 첫 구절을 광범위하게 고쳐 쓰지 않는다면 실제로 중국어가 되도록 중국어로 번역할 수 없다." 바로 그래서 스톤턴 경은 1848년에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데서 신이라는 단어를 표현하는 적절한 방법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출판했다.(240쪽)

-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中에서

* * * * *

그것이 그래도 더 이전에 알려졌더라면!

말하자면 칸트가 왔고, 이미 60년보다 더 이전에 『순수이성비판』이 저술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기독교의 세기 동안 신의 현존을 위해 세워졌고, 세 개로만 가능한 증명방식(존재론적, 우주론적, 자연신학적 신 존재 증명)으로 소급되는 모든 증거들은 절대로 요구되는 것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그 결과 누구도 칸트의 주장에 대해 결정적인 반박을 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 결과로 신의 현존에 대한 증거들이 완전히 신용을 잃었고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 일은 자명한 것이어서, 그것을 증명하려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이런, 이런, 이런! 그것이 그래도 더 이전에 알려졌더라면! 그랬다면 사람들은 수 세기 동안 그 증명을 위해 애쓰지 않았을 것이고, 칸트는 그것을 이성비판의 모든 무게로 부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157쪽)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中에서

페크pek0501 2012-09-26 15:04   좋아요 0 | URL
쇼펜하우어의 '종교'에 관한 구절들을 옮겨 주시니 매우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좀 어렵군요. 으음~~ 쇼펜하우어의 저작은 세 권 읽었는데, 이런 구절은 보지 못한 것 같군요.
<쇼펜하우어 인생론>이란 책이 가장 맘에 들어 곁에 두고 애독하고 있답니다. 제게 글감을 많이 주는 책이랍니다.

추석 잘 보내시고 자주 글 올리시길 바라겠습니다. (아, 최근에 올리신 멋진 사진들 잘 보았답니다. 추천만 누르고 왔답니다. 9번째 추천은 저예요.ㅋㅋ)

노이에자이트 2012-09-26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속에서도 치셤의 신앙관 선교관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등장하잖아요.기득권을 가진 성직자뿐 아니라 인습화된 신앙에 물든 일반신자들도 그런 반응을 보일 겁니다.

페크pek0501 2012-09-27 09:47   좋아요 0 | URL
아, 님도 읽으셨군요. 저는 이 책을 (제 독서목록을 보니까) 2000년 7월에 읽었더라고요. 줄거리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고 치셤 신부의 훌륭한 말만 기억이 나요. 인품이 훌륭하다고 할까요. 그런 곳에 밑줄이 많이 그어져 있어요. 하서출판의 책으로 읽었는데 이곳 알라딘에선 책 이미지를 찾을 수가 없더군요. 오래되어서인가 봐요. 이 책에 반해 크로닌의 다른 책을 읽은 게 <성채>인데 이 책도 좋았어요. 크로닌의 전집을 사고 싶을 정도로 팬입니다.

제게 드라마 작법이란 책이 있는데, 이 책 제1장의 제목이 '드라마는 갈등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드라마뿐만 아니라 소설도 마찬가지겠죠. 이런 측면에서 보면 작가란 갈등을 제시하고 그 갈등을 풀어 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겠죠.

반가웠어요. ㅋ

2012-10-05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07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