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가 ‘모방의 천재’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작품 중에서 <햄릿>은 중세 이래 덴마크 사람들에게 구전되어 온 슬픈 왕자의 전설을 소재로 하여 쓴 것이다. <오셀로>는 ‘베니스의 무어 인’이라는 이탈리아 작품을 소재로 하여 쓴 것이다. <맥베스>는 스코틀랜드의 역사극에서 모티브를 갖고 쓴 것이다.
이처럼 셰익스피어는 ‘옛 것’의 영향을 받아 재창조한 작품이 오히려 그 ‘옛 것’을 뛰어넘어 탁월한 세계문학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작가다. 그렇다면 예술작품에서만 ‘모방’이 필요한 것일까.
1. 새 아이디어는 낡은 아이디어로부터 나온다
최근 출간된 책으로, ‘세상을 바꾼 창조는 모방에서 시작되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 있다. 바로 데이비드 코드 머레이 저, <바로잉>이다. 저자는 천재들과 훌륭한 기업인들도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빌려와 새롭게 발전시켰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 책은 혁신과 창조를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어느 날 갑자기 번뜩 떠오른다는 데 반기를 든다. ‘바로잉(빌려오기)’의 의미처럼, 저자인 데이비드 코드 머레이는 “이 세상에 독창적인 것은 없다”며 ‘아이디어 빌리기’ 6단계를 제안한다. 또 ‘남의 아이디어를 빌리는 행위’는 지적인 절도 행위가 아니라 창의적인 사고 기법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책에는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구글 가이즈뿐 아니라 아이작 뉴턴, 조지 루카스 등의 사례를 들면서 그들의 독창적인 아이디어 또한 기존에 있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준다.“(알라딘, 책소개)
바로잉이란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 빌려오기(또는 모방)를 통한 창의성을 강조함으로써 누구든지 학습하면 창조적일 수 있다는 주장하는 책이다. 여기서 저자가 제안한 ‘아이디어 빌리기’ 6단계란 남의 아이디어가 자신의 것이 되기 위해 몇 단계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1) 문제를 정의하라 2) 빌려라 3) 결합하라 4) 숙성시켜라 5) 판단하라 6) 끌어올려라 등을 말하고 있다.
여태까지 지구에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창의성이 넘치는 몇몇은 남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거나 표절했다는 의심과 비판을 받았다. 아이작 뉴턴이 그랬고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그랬다.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이디어는 기존의 다른 아이디어들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아이디어의 세계에서는 독창성과 도둑질이 종이 한 장 차이다.
데이비드 코드 머레이 저, <바로잉>,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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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독창성은 기존의 다른 아이디어들을 도둑질해서 태어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겠다. 이 책 속에서 발견한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창의성의 비밀은 그 창의성의 원천을 숨기는 방법을 아는 데 있다.”(앨버트 아인슈타인) 창의성의 원천을 숨기려면 아이디어를 도둑질할 때 모방의 모델이 된 그것을 단순히 모방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방의 모델이 된 그것을 뛰어넘는 재창조를 함으로써 빼어난 성과를 거두어야 하는 게 중요하다. 앞서 말한 셰익스피어처럼.
2. 새 저술은 낡은 저술로부터 나온다
내가 읽은 유명한 저술에는 유난히 ‘인용문’이 많았다. 에리히 프롬 저,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그랬고, 임어당 저, <생활의 발견>도 그랬다. 이렇게 저술에 인용문이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 유명한 저술가들조차도 자신의 생각만으로 저술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이것은 곧 기존의 낡은 저술을 학습해야만 뛰어난 새로운 저술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바로잉>의 저자가 ‘새 아이디어는 낡은 아이디어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다면, 나는 ‘새 저술은 낡은 저술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고 싶다.
‘인용문’이 많이 들어 있는 책은 의외로 많았다. 그 중에서 다음의 세 권을 뽑아 정리해 보았다.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저자는 근대인에게 있어서의 ‘자유’의 의미에 연구를 집중하여, 근대인을 속박으로부터 구했던 ‘자유’가 독립성과 합리성을 가져다주는 한편 고립과 무기력도 동시에 가져왔음을 지적하고, 결국 자유가 주는 부정적 측면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우, 비록 민주주의 사회라 할지라도 전체주의의 심리적 온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자유’에 대해서도 새롭게 고찰할 기회를 갖게 한다.
129쪽 : 개인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자유롭다고 느낀다. 즉, 그는 혼자 떨어져 있으며, 낯설고 적의에 찬 세계와 대립해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인간이라는 불쌍한 동물은 타고난 자유라는 선물을 가능한 한 빨리 양도해 줄 수 있는 상대방을 찾고자 하는 강한 염원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카라마조프의 형제>의 뛰어난 서술을 인용해 본다.
189쪽 : 히틀러는 오직 평화와 자유만을 바라고 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합리화의 첫 번째 예는 <나의 투쟁>의 ‘만약 독일 국민이 역사적 발전에서 다른 나라 국민이 향수한 것과 같은 집단적 통일을 가지고 있었다면, 독일제국은 아마도 오늘날 이 지구상의 주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 히틀러, 휴즈, 샤피로, 루터, 칼뱅, 그린, 발자크 등을 비롯한 많은 저술가들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임어당, <생활의 발견>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가장 행복할 수 있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객관적 진리보다는 오히려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방법이다.”라고 밝혔듯이, 사물을 보는 그의 개성적 견해를 감상할 수 있다. 그는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성보다는 정열’로 보고, “사상교육보다는 오히려 감각과 정서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또 유머감을 중요시하며, 중국인의 한적한 생활을 예찬한다. 그의 사고법을 따라가다 보면 삶을 어떻게 즐기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150쪽~151쪽 : 노자가 거의 공자와 동시대의 사람이었던 것처럼 장자는 맹자와 동시대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맹자와 장자는 다음에서 일치하고 있다. 즉, 인간은 무언가 중대한 것을 잃고 있으며, 철학의 임무는 그 잃은 것, 여기서는 맹자의 이른바 ‘적자지심’(赤子之心, 죄악에 물들지 아니한 깨끗한 마음)을 발견하여 그것을 되찾는 데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뛰어난 현인이란 그 적자지심을 잃지 않는 자다”라고 말하고 있다. 맹자는 문명의 기교적 생활이 인간의 나면서부터의 생생한 마음에 주는 영향을 산림의 남벌(濫伐)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152쪽 : 장조(張潮)의 말처럼, “정이 있는 사람은 늘 이성을 사랑하고 있으나, 이성을 사랑하는 자가 늘 정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 “정은 인간세계의 밑바닥을 버티고 있는 것이지만 재(才)는 그 지붕을 채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이라는 것이 없다면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맹자, 장자, 노자, 장조, 도연명, 김성탄, 월트 휘트먼, 소로우, 플라톤, 퍼거슨 등을 비롯한 많은 저술가들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세속적인 성공만을 위해 바쁘게 사는 문명사회의 사람들이 과연 행복한가를 스스로 묻게 만든다. 소로우는 실제로 문명을 등지고 월든 호숫가에서 원시적인 삼림 생활을 했는데, 그 생활을 이 책을 통해 엿볼 수 있다.
203쪽~204쪽 : 다음 시는 어떤 방문객이 명함 대신 노란 호두나무 잎에 적어 놓고 간 스펜서의 시이다. 이것을 내 오두막의 표어로 자랑스럽게 내걸 수도 있겠다.
“그곳에 이르러 그들은 오두막을 가득 채웠으나
도락이 원래 없는 곳이니 도락을 찾지 않는다.
휴식이 그들의 만찬이며 모든 것이 뜻대로이다.
가장 고귀한 정신이 가장 큰 만족을 얻는다.”
359쪽 : 저술가 길핀은 영국의 숲 주변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기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숲을 무단출입하거나, 개인의 주택이나 울타리가 숲의 경계를 침범하는 것은 옛 삼림법에서는 중대한 불법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러한 행위는 새와 짐승을 놀라게 하고 삼림을 해칠 우려가 있으므로 불법 삼림 침해라는 죄명으로 엄한 처벌을 받았다.”
(이 책은 스펜서, 길핀, 공자, 맹자, 사아디, 이블린, 카토, 초서, 커비와 스펜스, 오비디우스 등을 비롯한 많은 저술가들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3. 결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학문에서든, 예술에서든, 기업에서든 기존의 것을 단순하게 모방만 하면 '표절'이 되지만 모방의 모델이 된 그것들을 결합하고 재배열하고 숙성시켜 새로움을 낳는 재창조를 할 때 ‘창조’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끝으로 ‘모방’에 관한 명언을 옮겨 둔다.
“모든 것에 관련되는 세 가지 기술은 이용하고, 만들고, 모방하는 것이다.”(플라톤)
“모방하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그것은 창조를 위해 필수적인 예비 작업이다.”(호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