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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이문재
대학 본관 앞
부아앙 좌회전하던 철가방이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저런 오토바이가 넘어질 뻔했다.
청년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꽃을 찍는다.
아예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아래에서 찰칵 옆에서 찰칵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찰칵찰칵
백목련 사진을 급히 배달할 데가 있을 것이다.
부아앙 철가방이 정문 쪽으로 튀어나간다.
계란탕처럼 순한
봄날 이른 저녁이다.(17쪽)
- <지금 여기가 맨 앞>에서.
다음에
박소란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에서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보다 먼저 다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22~23쪽)
-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에서.
....................
다음에 될 거야 하면서 기대했다가 다음에, 라는 말에 속곤 했지.
그래도 다음에, 라는 말을 버릴 순 없었지.
어둠 속에 있는 내게 환한 빛을 던져 주는 것이 다음에, 라는 말이었거든.
빛을 받는 동안 희망을 품고 견딜 수 있었거든.
인생이란 다음에, 라는 말에 속으며 견디는 거였어.
그러다 보면 뜻밖의 좋은 일도 생겼지.
내가 어떻게 원망할 수 있었겠어.
다음에, 라는 말에 감사할 뿐이야.
- by 페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