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2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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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지른 전두환정권은 피로 얼룩진 정권 이미지에 부드러운 가면을 씌우고 국민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각종 화려한 이벤트와 조치를 양산해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5일간 열린 '국풍 81'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이것이었을까? '5공화국의 태평성대'를 선전하기 위한 대대적인 대중조작 이벤트였다. 일본의 극우에 심취한 허문도가 일본의 카미카제 정신을 본따 이름을 붙이고 적극 밀어붙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국풍이었다. -48쪽

신현준은 "한마디로 80년대의 문화정책은 대중문화를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방향은 대체로 '규제완화'의 방향을 취했다"면서 "문제는 이런 규제완화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가라는 점"이라고 말한다. "먼저 지적할 것은 대중문화에 대한 규제완화가 선별적이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한 예로 영화검열 완화의 경우 주로 '저급한' 영화에만 선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즉, '불온한' 문화의 금기는 여전했고, 1981~83년 사이에는 이전보다 더욱 강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온한' 반대자들이 '3s정책'(스포츠, 스크린, 섹스)이라고 불렀던 표현은 당시 정책의 새로운 기조를 말해준다. 70년대의 문화정책이 원칙적으로 외래 퇴폐문화를 금지하면서 실제로는 모든 문화에 대한 규제를 단행했던 반면, 80년대는 퇴폐문화에 대한 선별적 해금을 실시하면서 이런 조치가 체제와 그리 불편하지 않게 어울리도록 관리하는 양상을 취했다. 즉, 정책담당자가 보기에 '퇴폐적'이지만 별달리 '위협적'이지 않은 한도 내에서는 방치한다는 것이 당시의 문화정책의 이데올로기로 보인다. 70년대와 비교한다면 정책의 지배적 원리가 금지의 논리에서 방치의 논리로 전화-54쪽

한 것이다. '국풍 81'을 비롯한 관제행사들은/새로운 문화적 '모델'을 제공하지 못했다. 이를 통해 '문화의 탈정치화를 통한 정치적 이용'이라는 80년대 문화정책의 기조가 형성되었다는 '성과'를 빼면 말이다."(신현준, <1980년대 문화적 정세와 민중문화운동> 재인용) 5공은 '퇴폐'를 부추기면서도 또 그로 인한 결과를 빌미로 '통제'를 시도하는 이중적인 대중문화정책을 구사하였다. 그래서 이른바 '국민정신개혁운동'이라는 '정화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는데, 음반의 마지막 트랙에 건전가요를 삽입하는 것과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전에 애국가를 틀어주는 것이 '정화운동'의 이름으로 행해진 대표적인 것들이었다.(신현준,<1980년대 문화적 정세와 민중문화운동> 재인용)-54~55쪽

1945년 9월 7일 미 군정치하에서 미군사령관 하지의 군정포고 1호로 시작된 통행금지가 그로부터 36년만인 1982년 1월 5일 밤 12시를 기해 전방 접경지역과 후방 해안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해제되었다.-83쪽

통금해제 후, 해방감을 만끽하고자 했던 보통 사람들이 즐겨 찾은 곳은 심야극장이었다. 컬러tv 방송으로 불황에 시달리던 영화계가 통금해제 후 영화계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나이트 쇼'라는 이름으로 시사회를 여는 등 심야극장 판촉에 공을 들인 결과이기도 했다. 통금이 해제된 지 꼭 한 달 뒤인 2월 6일, 첫 심야 상영영호인 <애마부인>이 개봉됐다. -88쪽

"탱크로 광주를 깔아뭉개며 등장한 전두환정권은 폭압과 자유화라는 양날의 정책을 썼다. 교복과 통행금지 폐지 그리고 두발 자유화는 전두환정권의 선물이다. 충무로에 대한 전두환정권의 선물은 에로영화에 대한 검열완화였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참으로 그로테스크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낮에는 전두환의 폭압정치에 맞서 돌을 던지고 밤에는 전두환의 자유화정책에 발맞춰 싸구려 에로영화를 보며 킬킬댔던 것이다."(심산, <애마부인의 아버지> 재인용)-91쪽

이문열의 '교양주의'는 대학생 수가 늘어난 것 못지않게 '교양'을 찾게 된 중산층의 부상으로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서구적 교양을 원하는 중산층 말이다. 물론 이문열의 교양주의는 서구적 교양주의이며, 이는 한국사회의 문화적 사대주의와도 잘 맞아떨어졌다.-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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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에 대학원 종합시험에서 시험비용을 내지 않을 생각이다. 이 문제를 갖고 몇 친구들이 학교측에 항의를 했지만, 결국 무성의한 답변만 듣고 말았다. 

종합시험을 내기 위해 드는 비용은 총 6만원이라고 한다. 각 항목 당 출제비용 및 조교 감독비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종합시험이라는 것이 엄연히 정식 학기 내 커리큘럼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인지라, 왜 이 시험을 보는데 비용이 지불되는 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렇다. 

내가 다니는 대학원은 원래 두 대학원이 통합되어, 이전의 일반대학원이었던 A대학원이 특수대학원으로  바뀌었다. 일반대학원이었던 A대학원은 종합시험 비용을 그동안 내지 않았는데, 특수대학원으로 변화, 통합되면서, 기존의 A대학원생들은 종합시험 비용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작년에 뜻있는 A대학원생 한 분이 용기를 내어, 교학과측에 정당한 항의를 했지만, 교학과측은 나몰라라 하는 투로, 대충 알겠다는 어조로 얼버무렸으며, 다음 학기 때부터는, 종합시험비용을 내지 않을 수 있다는 답변도 들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결국 그 답변은 묵과되었고, 이번에도 종합시험비용을 내게 된 상황이 발생했다. 

이번에도 친구들이 종합시험비용을 왜 내야 하는지, 교학과 측에 따졌으나, 교학과 측은 웃기게도,학교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의 선물을 사기 위해 비용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정말 이 상황에서 분노를 안 느낄 사람이 있을까. 학교 측은 지난 번에  등록금 항목에 학생들이 모르는 내역이 붙었을 때도, 그것을 공개하라는 나의 항의에 대해 성의없는 자세를 보였다. 학교 홈페이지에 가서 항목을 확인해 보라는데, 그것은 대학정보공개제도를 통해 나타나는 개략 정보였던 것이다.  

대학원사회는 다들 알다시피, 정치가 없다. 진보니, 좌파니, 민주주의니, 신자유주의니, 논문에는 수업시간에는 신랄하게 그리고 열정적인 태도로, 자신의 에너지를 쏟는 사람들이 결국 현실에서는 그게 뭐야라고 조용히 있다. 이건 단순한 돈 문제가 아니라는 건 입이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나는 대학원 사회의 이 한심한 상태에 대해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바닥까지 가는 각성과 성찰을 해야 함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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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10-01-16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학원 다니던 시절에, 내야 했던 각종 비용들 아주 아깝습니다. 종합시험본다고, 논문심사한다고, 지도한다고 별도로 돈이 들어가는데, 화나더군요. 마지막에는 졸업 까운까지 돈 내라고 해서 까운 안 입고 사진도 안 찍었습니다. 졸업장만 낼름 받아가지고 왔죠. 대학원 비용도 장난이 아닌데, 여러 항목으로 돈을 뜯어먹으려 드네요.

얼그레이효과 2010-01-17 18:55   좋아요 0 | URL
아프락사스님, 저도 졸업 때 그럴려고 합니다.^^;

qualia 2010-01-16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강도가 따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준)불법적인 작태가 대학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그것도 대학생/대학원생들을 상대로, 벌어지고 있다는 게 정말 분노스럽습니다. 불의에 끝까지 항거하시고, 절대로 시험비용 내지 마시길 바랍니다. 제발 저린 놈들은, 뒤가 구린 놈들은, 분명 따로 있고, 적법하고 준열하게 항의하고 파고들어가면, 저놈들 분명 깨갱거리고 꼬리를 내릴 것입니다. (준)사기고, (준)불법이고, 엉큼한 편법입니다. 대체 대학본부 측은 뭐한답니까? 대학이라는 곳도 이제는 지성이고 양심이고 정의고 진리고 나발이고 간에 별별 부정부패와 협잡질이 판치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부조리한 세상입니다. 부디 진리와 정의를 위해 싸워주시길(소극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얼그레이효과 2010-01-17 18:56   좋아요 0 | URL
제가 그리 거창한 사람은 못되지만..의지가 있는 부분에 대해선, 마음 먹고 실천해보겠습니다.

2010-01-17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7 1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10-01-18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놀랍고 놀라운 행태네요!
등록금은 건물 짓는데다 쓰나보죳!!

얼그레이효과 2010-01-19 06:32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보헤미안 2015-10-01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이번에 종합시험을 보는 대학원생으로 의문이 들어서 검색을 했더니 좋은 글을 보고 투지가 불타오르네요
4학기중 외국어시험 2번만 3만원씩 내고 봤는데..토익도 아니고 그냥 해석정도의 일반 영어고요...이번에 종합시험인데
그것도 돈내라고 하는데...정말 부조리한 생각이 드네요

얼그레이효과 2015-10-12 22:27   좋아요 0 | URL
답장이 늦어 죄송합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등록금 투쟁은 실패했지만, 당시 종합시험비용은 결국 안 받는 것으로 결과를 받아냈어요. 그 이후 후배들도 종합시험비용 안 내고 계속 그대로 시험 본다는군요. 보헤미안 님에게 좋은 기운 전달되기를요.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53

 박권일의 <'공부의 신'도 못 따라 갈 현실>을 읽고, 몇몇 단상을 정리해 본다.  

  <공부의 신>에서 김수로와 함께 말썽꾸러기들을 천하대로 보내는 것을 돕게 된 배두나는, 오래 전 드라마 <학교>에서 제도권에 저항하던 아이콘이었다. 감히 격세지감이라는 말을 붙여도 될까. 김수로는 1화에서 과감하게 말한다. 천하대에 가서, 너희들이 그렇게 비뚤게 바라보는 사회의 룰을 바꾸라고. 그 룰을 바꾸는 건, 결국 사회가 인정하는 최정상에 올라가야 하는 게 우선되어야 한다고.   

갑자기 그 장면을 곱씹어보다가, 매년 수능 때만 되면, 1인 시위를 하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피켓엔 학벌로 인한 차별을 반대하며, 수능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것을 비판하는 그들의 소망이 달려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제 사람들은 이런 소망, 이런 희망이 담긴 시도를 환영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하라고 외친다. 작년에도 어김없이 수능을 비판하던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덧글에는 그들을 비난하는 어투로 넘쳐났고, 그나마 정성스럽게 반응을 보여준 사람들중엔 너희들이 바꾸고 싶은 게 있으면, 서울대 들어가서, 바꾸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 개무시 당한다는 공통된 반응이 제법 있었다. <공부의 신>에서 김수로가 학생들에게 외친 그 몇 마디는 드라마에만 적용되는 대사는 아니다. 그렇다. 이 대사는 현실을 깊숙 찌르면서, 이제 사람들에게 제도를 바꾼다는 것, 제도에 일탈하여, 그 제도의 틀 자체를 바꾼다는 건 별 소득이 없다는 걸 공인한다. 그리고 사람들 속에 그 대사는 공명의 기운을 뻗친다. 

<공부의 신>의 압권은 드라마가 끝나고 나오는 '내신 잘받는 방법'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귀여운 공포'를 체감했다. 설마 이 장면을 보면서, 배우들이 제시하는 방법론을 수첩에 깨알처럼 적는 부모와 학생은 없겠지? 그런 상상을 했다. 이 상상의 곁에서 점점 커져가는 건 이제 '교육 혁명'이라는 건 기대하기 어렵나, 하는 것이었다. 아니, 우리 사회는 이제 혁명을 문화 속에서만 체험한 채, 그것에 안주하는 것으로 삶을 잘 살고 있다고 할 지 모르지, 그 오래된 우려가 자연스러운 문화적 코드로, 진부하게, 그것도 매우 친숙하게 유머라는 코드와 섞어 나왔을 때, 나는 이 드라마를너무 우울해서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보여준 자살의 절규는, 우리 사회에 어떤 공명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그 절규는 그 누군가에게는 한심한 자의 어리석음으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의 친구들은 죽음으로까지 우리 시대의 교육이 보여주는 모순을 상징화하는 것에 그 어떤 애도를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애도의 가능성을 대신하는 것은 이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다. 그러나 이 생존의 의지 가운데서, 우리는 '편안하게 스며드는 사회적 불안'이란 가스에 몽롱해지고 있음을 꾹 참은 채, '일단 살아간다'. 천하대에 가기 전에, 우리 아이들은 이미 힘이 다 빠졌다. 영리해져라, 정신차려라, 일단 잘해보고 봐라. 이 3계명을 부여잡은 채. 부들부들. 더 안타까운 건 이런 소리 자체를 '헛소리'로 잠식해버린, 이 사회의 현실이다. '공부의 신'이 다시 알려준 어떤 현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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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의 위기는 문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와 함께 늘 대두되던 문제였다. 이제 영화전문기자라든가, 영화평론가들은 알아서 기는 듯, 아니면 진짜 풀이 죽은 듯, 상당히 '타인지향형'적인 기사와 비평을 양산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의 위기가 우리에게 주는 최대한의 효과가 '혁신'이기보다는, 약간의 '각성'정도로만 다가올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늘 체험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위기담론의 위기를 내놓으며, 또 종언담론의 종언을 주장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엇인가는 남아있지 않겠냐라는 안타까운 옹알이를 해댄다.  <씨네21>의 최근 몇몇 글 중 나는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아바타>에 대한 평자들과 글쟁이들의 시각을 보면서, 감히 '이 정도 밖에 안되는 영화비평'의 어떤 수준에 대해 생각해봤다. 이 수준을 생각하면서, 나는 <아바타>를 통해 그들이 제시하는 영화의 미래를 상상하기보다는, 그런 영화의 미래를 제시하는 그들의 미래를 고심해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울하기 짝이 없다고 해야 하나.  이런 우울함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부족한 소견 몇 개를 끄적여보면 다음과 같다.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4009&article_id=59314  

-> 김중혁, 카메론의 시간은 거꾸로 가나 

엄밀히 말하자면, 김중혁은 전문적인 영화평론가는 아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한국 문단에서 나름 유익한 발견이라는 칭호를 부여할 수 있는 작가이다. 작가의 생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중의 지각을 인식하며 그 지각에 자극을 주는 스토리텔링을 고민하는 꾼이다. 그래, 이 측면에서 그가 <아바타>에 느끼고 있는 실망감의 타겟. 바로 이야기의 허술함을 꼬집는 건 이해해주겠다. 그런데,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이번 글은 이 좁디 좁아진 영화잡지에서 엄하게 큰 두 페이지를 책임질 수 있는 내용으로선 최하의 레벨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아바타>를 대하는 시선은 늘 이럴 때 나오는, 내가 '홍대주의'라 부르는 특유의 스노비즘이다. 그는 마치 모두가 다 환호하는 것에 나는 그 환호가 그리 대단하지 못하겠다라고 하는 90년대식 홍대형 스노비즘을 보여준다. 근데 그의 이런 시선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늘 이럴 때 나오는' 어떤 관행으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영화에 나타나는 어떤 측면, 그 측면이 갖고 있는 새로움이 사실상 별 새롭지 않다는 류의 지적은 내가 보기엔 어떤 '문화적 고집'으로서 갖는 비평의 지향이 아니라, 마치 7080담론의 과잉이나, 90년대 대중문화에 대한 향수 과잉에 머무른 지양되어야 할 평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지양되어야 할 시각은 <씨네21>에 <아바타>를 평한 이들이 모두다 한 걸치고 있는 그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모두 이 '호들갑스러움'의 스펙터클을 좀 차분히 보기 위해서 이런 비평의 수사를 활용한다. "사실 <아바타>가 보여준 면모들은 이미 예전에 나타난 것이지요". 결국 평자들은 영화적 교양주의를 다시 챙겨, <아바타>를 정리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우려하는 것은 그렇게 "이미 예전에 나타난 것"이어서, <아바타>를 "이미 예전에 나타난 것" 그 위치에서만 머무르게 한다면, 그것은 '창조력' 제로인 비평이라는 점이다. '창조력 제로'인 비평의 위치에 근접한 평자들이 쓰는 어설픈 '영화적 교양주의'로 결국 영화세계사 책을 다시 끄집어 내게 하여, <아바타>에 숨어 있는 다른 영화들의 기시감을 언급하는 수준으로만 끝나는 비평들은 폐기처분해야 마땅하다.  

그나마 허문영이 737호에서 <놀라운 현실감 갖춘 퇴행적인 동화>란 비평에서, <아바타>를 둘러싼 '수정주의 서부극'이란 형태의 시각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 수정주의 서부극이란 용어를 제대로 알고 써라라고 말하는 점은, 오히려 권장할만한 것이다. 어설픈 영화적 교양주의가 하나의 대단하다고 평가받는 작품의 특징을 해부하면서, 주는 쾌감은 기껏해야, "내가 이 영화를 예전에 알았나, 봤나"정도로 마무리되는 '정보 차원'의 언급이다. 그러한 언급은 영화를 성찰할 수 있는 '진정성'의 에토스를 확보할 수 없다. 단지 내가 <아바타>를 통해 얼마나 많은 옛 영화를 알고 있다는 '스노비즘'에 머무른 채, 아무런 발전 없는 시각에 머무르고, 그 머무름을 머무르지 않음으로 착각하는 위치까지 나아가는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가장 실망스러운 글은 736호 <아바타, 과연 혁명적인 대작인가>라는 제목의 4인 대담이다.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 제법 괜찮은 것 같은데, 이 선수들은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다가와, 영화를 자극했을 때, 우리가 고수하고 있는 영화적 본질이란 지켜보자라는 구태의연한 자장 안에 눌러 앉은 시선으로 영화를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혁명'이란 수사 앞에서, 평자의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아바타>의 '혁명'이, '혁명이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과정에서, 자신의 비평적 시선이 '혁명이지 않음'을 보여주고 만다.  

영화 평론가들의 게으름을 탓하고 싶다. 영화가 새롭다, 혁명적이다 라는 것을 평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것에 기반한 자세가, 퇴행적이어야 하나. 그리하여, 혁명적임을 조금 누그러뜨려, 그 퇴행이 아바타를 둘러 싼 광풍 어린 혁명이란 수사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만약 과감하게 외치는대로, 아바타가 그리 혁명적이지 않은 영화라면, 그들마저 혁명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맞불을 놓을 필요는 없었다. 즉, 그들은 아바타의 혁명이란 수사를 영화가 갖고 있는 어떤 역사적 본질이란 견고한 덩어리로 무너뜨리려 했는데, 그 역사적 본질의 틀이 과연 영화를 둘러싼 불변의 진리인지는 의문에 붙여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의문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퇴행적 비평으로 혁명이란 수사를 깨뜨리려는 우를 범한다.  

흑백 영화에서 칼라 영화로,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의 전이, 그 전이의 공포가 준 역사적 체험이 있었다. 그리고 영화평론가들은 그 역사적 체험의 교훈에 찰싹 붙어, 그 교훈이 주는 사례들은 지나치게 모범적으로 따르는 듯하다. 물론 <아바타>가 가진 테크놀로지의 혁신이, 영화판의 엄청난 변혁을 도모하진 않으리라 본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제3의 지점을 찾아보려 하지 않은 영화평자들의 자세가 안타깝다. 기술의 다가옴, 영화와의 접촉, 그리고 이어지는 기술에 대한 부정과 영화가 갖고 있는 본질의 고수. 이 안에서 호불호가 갈리고, 그 호불호를 깨는 새로운 틀의 시각은 시도조차 않는다. 

그러면서, 오히려 늘어나는 것은 영화의 내부가 아닌, 영화의 외부다. 어떤 '경제주의'에 침윤된 일련의 현대 영화비평이 갖는 위험성을 여기서 바라본다. <디 워>의 난분분한 비평 장이 그랬듯이, 결국 <아바타>를 수놓는 돈다발, 그것을 촉발한 테크놀로지와 영화의 커넥션. 그러면서 늘어나는 것은 영화가 아닌, 영화를 둘러싼 숫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 숫자 안에서 멀티 플렉스와 아이맥스, 입체안경 등의 수용 환경과 문화 산업은 영화 내부에 대한 심층적 해석의 자리를 강탈한다.  

우리가 여기서 봐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아바타>를 통해 보는 우리 사회의 과학에 대한 게으른 그리고 정체된 그 무엇의 시선을 느낀다. 과학과 사회, 그리고 과학과 문화이 접촉하는 그 지점 안에서, 나오는 반응들, 그리고 그 반응들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자들이 내놓는 시선의 정체와 퇴행은 비평의 시간이 갈수록 거꾸로 가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다시 새겨 넣게 만든다.  

그들은 비평 속에서 실컷 과학과 영화를 매개하는 새 시대의 영화철학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결국 그들이 고수하는 것은 영화에 내재된 '인문주의'를 어설프게 옹호하면서, 각자가 어설프게 공유하려는 듯한 영화적 교양주의를 설파하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한다. '영화는 영화다'라는 명제 안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두려움을 고작 지금의 수준에서 활용한다면, 나는 영화의 미래보다 비평의 미래가 더 불확실함을 과감히 말하고 싶다.  

지금 그들이 보여주는 '영화적 고집'이 오히려 평자로서의 강인한 고집이라기보다, 대중들이 자신들의 시선을 더 이상 보지 않으려한다는 기죽음에서 발생한 '타인지향적 고집'이기때문에, 그들이 보여준 고집의 시선은 더 퇴행적으로 느껴진다. 깔려면 더 새롭게 까고, 옹호하려면 더 진득하게 옹호해라. 죽도 밥도 아닌 눈치 보는 비평을 하지 말고,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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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01-15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시는 부분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창조적 비평'이란 정말 가능할까요. 어떤 비평이 창조적일때, 왕왕 텍스트는 그 비평을 위한 재료로서만 제약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형태가 될 때, 비평은 비평에서 벗어나 새로운 담론으로 들어서고, 그럼 면에서는 작품분석을 넘어서 철학적 텍스트로 비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요컨데 비평이라고 부르기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은 글 읽고 몇 자 적고 싶어서 빈약한 댓글 남겼습니다. 건필하세요.^^

얼그레이효과 2010-01-15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시절부터, '꿈'보다 '해몽'을 좋아한 터라, 비평이 가져야 할 야망의 파이에 대해서 나름 희망을 갖고 있나봅니다.^^' 부족한 글에..덧글 고맙습니다.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는 비평의 지점은 텍스트 안에서 적확하게 놀아야겠지만, 비평의 자장은 그 텍스트를 넘어서는 무엇이라 생각해서요. 거기서,,창조적이라는 수사에 대해 고민을 해봅니다. '해몽'이 꿈보다..다만..그 꿈을 허황되지 않게..꿈을 존중하는 해몽이..환호받는 세상이 되길 고대해봅니다. 그런 점에서..작품을 넘어설 수 없는 현실과의 거리에서..작품을 가끔 넘어설 수 있는 이상을 체감할 수 있는 가능성의 비평이..바로 창조적 비평과 가장 근접한 무엇이 아닐까..지금으로선 그 정도 소신을 갖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아직 머나먼 무엇이지만요..덧글덕분에..신중하게 되네요. 지적 고맙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문학동네 54호 - 2008.봄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 / 문학동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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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최근 본 국내 문화이론 중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되는 김홍중, 심보선 선생의 '87년 이후 스노비즘의 계보학' 중 일부를 옮겨 본다. / 지난 이십여 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발생한 문화변동의 지배적 경향을 우리는 '탈진정성 체제(post-authencity regime)'의 부상이라 명명한다. 그것이 체제인 한, 시기적 구분에 있어 연대기적 절단은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삶의 일반적인 감각, 문화적 실천의 주된 패턴들의 변화, 새로운 감수성의 부상과 낡은 감수성의 퇴조, 징후들의 발생, 그들에 대한 해석들의 발생, 주체 형성과정의 새로운 경향 등의 무수한 차원들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문화적 지층에 새겨진 일종의 단절의 감각이다. -367쪽

진정성이란 인간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삶의 준거를 찾고자 하는, 매우 근대적인 삶의 태도이다. 진정성의 에토스 속에서 주체는 자신의 정체성과 자기 삶의 궁극적 의미를 외재적 도덕률과 권위, 기계적 척도로부터 구하지 않는다. 그는 외부의 지침을 의심하면서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인다. -367쪽

진정성 에토스는 이처럼 내면성-문화-공동체의 세 가지 상보적이고 갈등적인 요소의 개념적 성좌로 정의할 수 있다. 내면은 문화를 매개로 공동체를 품고 있으며, 공동체는 다시 문화를 매개로 내면성 속에서 구현된다. 중요한 것은 이 매개의 고리를 구성하는 문화의 역할과 내용이다. -368쪽

원래 진정성의 기획은 무엇보다도 '자아의 기획'이다. 공동체는 성찰적 주체가 선택하고 개입하고 풀어내야 하는 하나의 수수께끼로서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민족주의적 문화의 프로젝트에서 이같은 자아의 기투(engagement)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자아의 외부에 실체로서, 물신으로서 선험적으로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유신정권과 이를 계승한 80년대 전두환 정권의 민족주의적 진정성 프로젝트는 비록 그것이 민족의 웅비나 민족문화의 창달에 대한 진정한 지향을 연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기만에 불과했다.더구나 이들의 기획은 진정성의 또다른 주요한 원리/를 위반하고 있었다. 즉, 거기에는 민족 구성원의 내부의 '평등한 존엄'이라는 윤리적 원칙이 결여되어 있었다. 경제적 부와 사회적 위신의 불균등한 분배는 평등한 존엄의 원칙을 허상으로 만든다. -371~372쪽

스놉의 에토스, 즉 스노비즘(snobbism)은 진정성의 참된 안티테제이다. 타자를 짓밟으면서 영예롭고자 하는 자, 인정받기를 갈구하지만 자신은 결코 타자를 인정하지 않은 스놉은, 진정성의 인간의 변증법적 대당으로서, 진정성의 구조를 '형식적으로' 공유한다. 환언하면 스놉에게도 내면성-문화-공동체의 삼각형이 존재하며, 스놉 역시 세계와 불화한다. 그는 세계 속의 자신의 위치에 대해 강력한 불만을 갖고 있으며, 자신이 진정으로 속할 곳은 다른 자리, 다른 공동체라고 믿는다. 스놉은 개성을 가꾼다는 명분하에 자신의 내면성에 집착한다. 강박적으로 문화적 기호들을 축적하고, 이 과정에 지나친, 엄밀하게 말하자면 과시적인 엄숙함과 의미를 부여한다. 스놉은 교양인보다 더 교양인처럼 보인다.그러나 그의 교양은 그를 성숙시키는 대신 그의 과시적 차원으로 활용될 뿐이다. -372쪽

스노비즘을 구성하는 삼각형은 서로가 서로에게 닫혀 있다. 내면에 공동체의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공동체는 오직 무자비한 인정투쟁의 공간일 뿐, 주체의 윤리적 지평과 융합되어 있지 못하다. 스놉의 세계는 가능성과 타자성으로 충만한, 그리고 그곳을 주파하면서 스스로의 참된 자아를 모색하는 여행의 공간이 아니라, 그 자신이 계산하여 하나씩 쓰러뜨려 점령해야 하는 일종의 작전공간이다. 더 나아가 세속적 지위상승에 대한 맹목적 열망은 초월적 가치에 대한 윤리적 고려의 가능성을 경색시킨다. 진정성의 기획이 결코 현실화될 수 없는 이상의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스놉의 기획은 그와 반대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천박한 낙관주의에 기초한다. 그에게 불가능은 없다. 다만 비교와 질시와 질투의 고된 노동이 있을 뿐이다. -372쪽

현실의 야만성은 대학생들에게 헤겔이 말하는 '비천한 의식'을 불러일으켰으며, 그것은 운동으로의 투신, 위악, 주관주의, 소시민적 삶으로의 자발적 투항 등 다양한 양태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대학사회 그 어디에도 스노비즘의 천박성은 발붙일 수 없었다. 부르주아적 취향, 성공담, 소영웅주의, 과시소비 등은 터부시되었다. 그러나 진정성이 있는 곳에는 스노비즘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면, 이 시기 스노비즘은 진정성의 문화가 발휘하는 압도적 헤게모니 속에서 소멸한 것이 아니라 단지 억압되었으리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 그리고 이 억압된 것과의 대화가 부재한 도덕적 엄격성의 문화는 억압된 것의 회기 윞에서 너무나 허무하게 붕괴한다. -374쪽

스노비즘은 거대서사의 체계, 즉 대타자의 소멸이 남긴 의미론적 폐허를 재구성함으로써 아직 매장하지 못한 그 대타자를 문화적 작위를 통해 추모하는 일종의 상징적 애도의 한 형식이다. 이 점에서 탈진정성 체제의 스놉은 진정성 체제의 정치적 스놉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진정성 체제의 스놉은 살아 있는 실제적인 권력과 힘의 원천에 귀속되거나 그것들을 표상하는 상징의 점유를 통해 '확실한' 인정을 받고자 했다. 반면 탈진정성 체제의 스놉은, 그런 실제적 힘으로부터 절연된 가상의 형식화된 문화의 파편들을 수집하고, 배열하고, 파괴하고, 재배치하는 유희적 활동을 통해, 사라진 대타자로부터 '허무한' 인정을 받고자 노력한다.-376쪽

이념의 시대, 운동의 시대, 민주화의 시대가 끝난 후 우리에게 열린 것은 이러한 문화적 스노비즘의 시대, 즉 애도의 시대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부상한 것이 바로 '취향'이라는 감각적 실체였다. 역사의 썰물이 빠져나간 거대한 무의미한 공간 속에서 포스트 386세대는 취향의 형성과 조련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을 구성하려 하였다. 이 세대에게 '자기답게 산다'는 것은 취향을 가진다는 것이었고 취향은 또한 영예로운 것으로 여겨졌다. 이때 그들이 고민하는 그 취향이란, 사회가 요구하는 표준적인 인간상과 자신의 개성 사이에 얼마나 큰 괴리가 존재하는지를 타인들에게 호소하기 위한 상징들을 획득하는 도구로 기능하였다. 이렇게 자기애적으로 확장되고 부유해진 자아의 존재론적 빈곤을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 바로 문화적 스노비즘과 이를 물질적으로 지원했던 소비문화산업이었던 것이다. -376쪽

기호의 소비를 통해 세계와의 불화를 상상적으로 전유하는 문화적 스노비즘은 90년대 이후 전개된 학생운동, 여성운동, 성적소수자운동에도 그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운동들은 주변화되었던 정체성의 존엄과 그에 대한 인정을 요구함으로써 사회적 소통과 연대의 확장이라는 진정성 기획의 지향을 계승했다. 그러나 이들은 80년대의 운동과는 달리 정당성의 위광을 쉽게 확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자신에게 부과되는 스노비즘의 혐의와 싸워야 했다. 환언하면, 이들은 '차이'라는 기표를 특권화하여 사회와의 불화를 조장한다는 분리주의의 혐의를 받았던 것이다. 이 문제는 정체성 서사가 누구나 권리주장을 할 수 있는 공공재가 되어버리면 정체성운동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377쪽

문화적 스노비즘과 정체성-정치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기획이다. 전자는 문화를 소비하고 후자는 문화를 생산한다. 이들은 둘 다 문화를 통해 '자기다움'을 추구하지만, 전자는 배타적인 명예를 인정받고자 하고 후자는 평등한 존엄을 인정받고자 한다. 그런데 문제는 공동체와의 관계맺음이 이들 모두에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전자는 취향의 소비를 통해 명예를 독점함으로써 공동체를 소외시키고, 후자는 평등한 주체로서의 존엄을 인정받지 못해 공동체로부터 소외당한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숙명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특별한 존재로서 부각시킬 수밖에 없다. 과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들은 "표시를 낸다. 고로 존재한다." 이러한 존재양식은 2000년대 들어 아주 일반적인 것으로 자리잡는다.-378쪽

추와의 변증법적 대립이 없는, 자신의 부정성을 상실한 역겨운 아름다움, 이것이 바로 키치이다. 병따개의 기능을 유지한 채 그 위에 기도하는 마리아를 새겨넣는 것이 전형적인 키치의 수법이다. 키치적 태도의 배후에는 모든 상징적 활동의 위계와 구별을 쓸모없는 것으로 소거해버리고 그들을 무차별적으로 혼합하는 산업주의의 에토스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문화에 대한 산업주의의 관심은 기껏해야 낭비적인 아니무스를 생산적 에너지로 용도변경시키는 데 있을 뿐, 아니마 즉 내면성의 표현으로서의 미 따위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380쪽

토털 키치란, 만인이 소비하는 취향의 일람표 속에 문화 전체를 몰아넣음으로써 결국 만인을 스놉으로 만드는 사회 경제적 상황의 미학적 스펙터클이다. (중략)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분명한 것은 소멸한 대타자를 애도하던 '문화적 스놉'은 점차로 퇴거하고, IMF 이후의 변모된 사회현실을 배경으로 하여 몇 가지의 새로운 범주로 스놉이 분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380쪽

첫째, 신자유주의적 경제논리의 절대적 우위 속에서 90년대의 문화적스/노비즘에 내재해 있던 상징적 사치와 과시소비의 경향을 생산성과 합리성의 요구에 복종시키는 '합리적 스놉'들이 등장하였다. 합리적 스놉은 대중화된 소비문화의 산물이다. 문화적 스노비즘의 과잉욕망은 이제 합리성에 의해 다스려지고 생산적인 것처럼 보이는 채널로 흘러간다. 우리 시대의 문화적 생활이 이러한 합리적 스노비즘에 얼마나 깊숙이 침윤되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라이프스타일'이라 불리는 새로운 명예의 표식이다. -380~381쪽

둘째, 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삶의 스노비즘을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단순한 태도를 버리고 스노비즘을 공인함으로써 오히려 스노비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비판적 스놉'이 형성된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현대의 반항적인 예술가들, 환멸을 신앙하는 미학주의자들, 유토피아를 믿지/ 않는 인문주의자들이다. 비판적 스놉은 탈진정성 체제의 핵심을 간파하며, "모두가 스놉"이라고 일갈한다. 그에 의하면 스놉은 스놉이 아닌 척하는 역-스놉인 것이다. 비판적 스놉은 자신을 스놉이라 말함으로써, 자의식과 자기 성찰의 시점을 확보한다. 이 시점은 역-스놉과 같은 도덕적 엄격주의의 의식으로는 결코 획득할 수 없는 해체적 파괴력을 갖는다. 이들의 미학적 전략은 그리하여 고급예술이나 아방가르드가 아닌 '비판적 키치'이다. 이는, 키치를 진정하지 못한 예술이라 폄하하지 않는다. 비판적 키치는 키치를 과장되게 활용하거나 의도적으로 나쁜 취향을 전경화함으로써 키치 고유의 비성찰성을 성찰성으로 전화시킨다. 이를 통해 비판적 키치는 키치의 천박성과 즉물성뿐 아니라 소위 아방가르드 예술의 고답적인 오만함까지 해체한다. -381~382쪽

셋째, 신자유주의가 가져오는 경제적 궁핍화와 삶의 질의 피폐화로부터 '룸펜 스놉'이 형성된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효과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경제적으로는 승자독식의 무한경쟁 속에서 모든 이를 속박시키는 동시에 포스트포디즘의 유연한 산업체계를 동반함으로써 문화적으로는 '자기답게 사는' 다양한 탈주의 길을 열어준다. 이 무한경쟁체제에서 패배자인 대다수 다중은 사회적 안전망으로부터 배제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정보사회, 혹은 비물질노동사회로부터 제공되는 상징적 재료를 통해 새로운 감각과 감성을 창출하고 소통시킨다.-3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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