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54호 - 2008.봄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 / 문학동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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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최근 본 국내 문화이론 중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되는 김홍중, 심보선 선생의 '87년 이후 스노비즘의 계보학' 중 일부를 옮겨 본다. / 지난 이십여 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발생한 문화변동의 지배적 경향을 우리는 '탈진정성 체제(post-authencity regime)'의 부상이라 명명한다. 그것이 체제인 한, 시기적 구분에 있어 연대기적 절단은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삶의 일반적인 감각, 문화적 실천의 주된 패턴들의 변화, 새로운 감수성의 부상과 낡은 감수성의 퇴조, 징후들의 발생, 그들에 대한 해석들의 발생, 주체 형성과정의 새로운 경향 등의 무수한 차원들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문화적 지층에 새겨진 일종의 단절의 감각이다. -367쪽

진정성이란 인간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삶의 준거를 찾고자 하는, 매우 근대적인 삶의 태도이다. 진정성의 에토스 속에서 주체는 자신의 정체성과 자기 삶의 궁극적 의미를 외재적 도덕률과 권위, 기계적 척도로부터 구하지 않는다. 그는 외부의 지침을 의심하면서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인다. -367쪽

진정성 에토스는 이처럼 내면성-문화-공동체의 세 가지 상보적이고 갈등적인 요소의 개념적 성좌로 정의할 수 있다. 내면은 문화를 매개로 공동체를 품고 있으며, 공동체는 다시 문화를 매개로 내면성 속에서 구현된다. 중요한 것은 이 매개의 고리를 구성하는 문화의 역할과 내용이다. -368쪽

원래 진정성의 기획은 무엇보다도 '자아의 기획'이다. 공동체는 성찰적 주체가 선택하고 개입하고 풀어내야 하는 하나의 수수께끼로서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민족주의적 문화의 프로젝트에서 이같은 자아의 기투(engagement)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자아의 외부에 실체로서, 물신으로서 선험적으로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유신정권과 이를 계승한 80년대 전두환 정권의 민족주의적 진정성 프로젝트는 비록 그것이 민족의 웅비나 민족문화의 창달에 대한 진정한 지향을 연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기만에 불과했다.더구나 이들의 기획은 진정성의 또다른 주요한 원리/를 위반하고 있었다. 즉, 거기에는 민족 구성원의 내부의 '평등한 존엄'이라는 윤리적 원칙이 결여되어 있었다. 경제적 부와 사회적 위신의 불균등한 분배는 평등한 존엄의 원칙을 허상으로 만든다. -371~372쪽

스놉의 에토스, 즉 스노비즘(snobbism)은 진정성의 참된 안티테제이다. 타자를 짓밟으면서 영예롭고자 하는 자, 인정받기를 갈구하지만 자신은 결코 타자를 인정하지 않은 스놉은, 진정성의 인간의 변증법적 대당으로서, 진정성의 구조를 '형식적으로' 공유한다. 환언하면 스놉에게도 내면성-문화-공동체의 삼각형이 존재하며, 스놉 역시 세계와 불화한다. 그는 세계 속의 자신의 위치에 대해 강력한 불만을 갖고 있으며, 자신이 진정으로 속할 곳은 다른 자리, 다른 공동체라고 믿는다. 스놉은 개성을 가꾼다는 명분하에 자신의 내면성에 집착한다. 강박적으로 문화적 기호들을 축적하고, 이 과정에 지나친, 엄밀하게 말하자면 과시적인 엄숙함과 의미를 부여한다. 스놉은 교양인보다 더 교양인처럼 보인다.그러나 그의 교양은 그를 성숙시키는 대신 그의 과시적 차원으로 활용될 뿐이다. -372쪽

스노비즘을 구성하는 삼각형은 서로가 서로에게 닫혀 있다. 내면에 공동체의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공동체는 오직 무자비한 인정투쟁의 공간일 뿐, 주체의 윤리적 지평과 융합되어 있지 못하다. 스놉의 세계는 가능성과 타자성으로 충만한, 그리고 그곳을 주파하면서 스스로의 참된 자아를 모색하는 여행의 공간이 아니라, 그 자신이 계산하여 하나씩 쓰러뜨려 점령해야 하는 일종의 작전공간이다. 더 나아가 세속적 지위상승에 대한 맹목적 열망은 초월적 가치에 대한 윤리적 고려의 가능성을 경색시킨다. 진정성의 기획이 결코 현실화될 수 없는 이상의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스놉의 기획은 그와 반대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천박한 낙관주의에 기초한다. 그에게 불가능은 없다. 다만 비교와 질시와 질투의 고된 노동이 있을 뿐이다. -372쪽

현실의 야만성은 대학생들에게 헤겔이 말하는 '비천한 의식'을 불러일으켰으며, 그것은 운동으로의 투신, 위악, 주관주의, 소시민적 삶으로의 자발적 투항 등 다양한 양태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대학사회 그 어디에도 스노비즘의 천박성은 발붙일 수 없었다. 부르주아적 취향, 성공담, 소영웅주의, 과시소비 등은 터부시되었다. 그러나 진정성이 있는 곳에는 스노비즘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면, 이 시기 스노비즘은 진정성의 문화가 발휘하는 압도적 헤게모니 속에서 소멸한 것이 아니라 단지 억압되었으리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 그리고 이 억압된 것과의 대화가 부재한 도덕적 엄격성의 문화는 억압된 것의 회기 윞에서 너무나 허무하게 붕괴한다. -374쪽

스노비즘은 거대서사의 체계, 즉 대타자의 소멸이 남긴 의미론적 폐허를 재구성함으로써 아직 매장하지 못한 그 대타자를 문화적 작위를 통해 추모하는 일종의 상징적 애도의 한 형식이다. 이 점에서 탈진정성 체제의 스놉은 진정성 체제의 정치적 스놉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진정성 체제의 스놉은 살아 있는 실제적인 권력과 힘의 원천에 귀속되거나 그것들을 표상하는 상징의 점유를 통해 '확실한' 인정을 받고자 했다. 반면 탈진정성 체제의 스놉은, 그런 실제적 힘으로부터 절연된 가상의 형식화된 문화의 파편들을 수집하고, 배열하고, 파괴하고, 재배치하는 유희적 활동을 통해, 사라진 대타자로부터 '허무한' 인정을 받고자 노력한다.-376쪽

이념의 시대, 운동의 시대, 민주화의 시대가 끝난 후 우리에게 열린 것은 이러한 문화적 스노비즘의 시대, 즉 애도의 시대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부상한 것이 바로 '취향'이라는 감각적 실체였다. 역사의 썰물이 빠져나간 거대한 무의미한 공간 속에서 포스트 386세대는 취향의 형성과 조련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을 구성하려 하였다. 이 세대에게 '자기답게 산다'는 것은 취향을 가진다는 것이었고 취향은 또한 영예로운 것으로 여겨졌다. 이때 그들이 고민하는 그 취향이란, 사회가 요구하는 표준적인 인간상과 자신의 개성 사이에 얼마나 큰 괴리가 존재하는지를 타인들에게 호소하기 위한 상징들을 획득하는 도구로 기능하였다. 이렇게 자기애적으로 확장되고 부유해진 자아의 존재론적 빈곤을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 바로 문화적 스노비즘과 이를 물질적으로 지원했던 소비문화산업이었던 것이다. -376쪽

기호의 소비를 통해 세계와의 불화를 상상적으로 전유하는 문화적 스노비즘은 90년대 이후 전개된 학생운동, 여성운동, 성적소수자운동에도 그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운동들은 주변화되었던 정체성의 존엄과 그에 대한 인정을 요구함으로써 사회적 소통과 연대의 확장이라는 진정성 기획의 지향을 계승했다. 그러나 이들은 80년대의 운동과는 달리 정당성의 위광을 쉽게 확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자신에게 부과되는 스노비즘의 혐의와 싸워야 했다. 환언하면, 이들은 '차이'라는 기표를 특권화하여 사회와의 불화를 조장한다는 분리주의의 혐의를 받았던 것이다. 이 문제는 정체성 서사가 누구나 권리주장을 할 수 있는 공공재가 되어버리면 정체성운동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377쪽

문화적 스노비즘과 정체성-정치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기획이다. 전자는 문화를 소비하고 후자는 문화를 생산한다. 이들은 둘 다 문화를 통해 '자기다움'을 추구하지만, 전자는 배타적인 명예를 인정받고자 하고 후자는 평등한 존엄을 인정받고자 한다. 그런데 문제는 공동체와의 관계맺음이 이들 모두에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전자는 취향의 소비를 통해 명예를 독점함으로써 공동체를 소외시키고, 후자는 평등한 주체로서의 존엄을 인정받지 못해 공동체로부터 소외당한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숙명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특별한 존재로서 부각시킬 수밖에 없다. 과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들은 "표시를 낸다. 고로 존재한다." 이러한 존재양식은 2000년대 들어 아주 일반적인 것으로 자리잡는다.-378쪽

추와의 변증법적 대립이 없는, 자신의 부정성을 상실한 역겨운 아름다움, 이것이 바로 키치이다. 병따개의 기능을 유지한 채 그 위에 기도하는 마리아를 새겨넣는 것이 전형적인 키치의 수법이다. 키치적 태도의 배후에는 모든 상징적 활동의 위계와 구별을 쓸모없는 것으로 소거해버리고 그들을 무차별적으로 혼합하는 산업주의의 에토스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문화에 대한 산업주의의 관심은 기껏해야 낭비적인 아니무스를 생산적 에너지로 용도변경시키는 데 있을 뿐, 아니마 즉 내면성의 표현으로서의 미 따위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380쪽

토털 키치란, 만인이 소비하는 취향의 일람표 속에 문화 전체를 몰아넣음으로써 결국 만인을 스놉으로 만드는 사회 경제적 상황의 미학적 스펙터클이다. (중략)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분명한 것은 소멸한 대타자를 애도하던 '문화적 스놉'은 점차로 퇴거하고, IMF 이후의 변모된 사회현실을 배경으로 하여 몇 가지의 새로운 범주로 스놉이 분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380쪽

첫째, 신자유주의적 경제논리의 절대적 우위 속에서 90년대의 문화적스/노비즘에 내재해 있던 상징적 사치와 과시소비의 경향을 생산성과 합리성의 요구에 복종시키는 '합리적 스놉'들이 등장하였다. 합리적 스놉은 대중화된 소비문화의 산물이다. 문화적 스노비즘의 과잉욕망은 이제 합리성에 의해 다스려지고 생산적인 것처럼 보이는 채널로 흘러간다. 우리 시대의 문화적 생활이 이러한 합리적 스노비즘에 얼마나 깊숙이 침윤되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라이프스타일'이라 불리는 새로운 명예의 표식이다. -380~381쪽

둘째, 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삶의 스노비즘을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단순한 태도를 버리고 스노비즘을 공인함으로써 오히려 스노비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비판적 스놉'이 형성된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현대의 반항적인 예술가들, 환멸을 신앙하는 미학주의자들, 유토피아를 믿지/ 않는 인문주의자들이다. 비판적 스놉은 탈진정성 체제의 핵심을 간파하며, "모두가 스놉"이라고 일갈한다. 그에 의하면 스놉은 스놉이 아닌 척하는 역-스놉인 것이다. 비판적 스놉은 자신을 스놉이라 말함으로써, 자의식과 자기 성찰의 시점을 확보한다. 이 시점은 역-스놉과 같은 도덕적 엄격주의의 의식으로는 결코 획득할 수 없는 해체적 파괴력을 갖는다. 이들의 미학적 전략은 그리하여 고급예술이나 아방가르드가 아닌 '비판적 키치'이다. 이는, 키치를 진정하지 못한 예술이라 폄하하지 않는다. 비판적 키치는 키치를 과장되게 활용하거나 의도적으로 나쁜 취향을 전경화함으로써 키치 고유의 비성찰성을 성찰성으로 전화시킨다. 이를 통해 비판적 키치는 키치의 천박성과 즉물성뿐 아니라 소위 아방가르드 예술의 고답적인 오만함까지 해체한다. -381~382쪽

셋째, 신자유주의가 가져오는 경제적 궁핍화와 삶의 질의 피폐화로부터 '룸펜 스놉'이 형성된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효과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경제적으로는 승자독식의 무한경쟁 속에서 모든 이를 속박시키는 동시에 포스트포디즘의 유연한 산업체계를 동반함으로써 문화적으로는 '자기답게 사는' 다양한 탈주의 길을 열어준다. 이 무한경쟁체제에서 패배자인 대다수 다중은 사회적 안전망으로부터 배제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정보사회, 혹은 비물질노동사회로부터 제공되는 상징적 재료를 통해 새로운 감각과 감성을 창출하고 소통시킨다.-3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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