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의 위기는 문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와 함께 늘 대두되던 문제였다. 이제 영화전문기자라든가, 영화평론가들은 알아서 기는 듯, 아니면 진짜 풀이 죽은 듯, 상당히 '타인지향형'적인 기사와 비평을 양산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의 위기가 우리에게 주는 최대한의 효과가 '혁신'이기보다는, 약간의 '각성'정도로만 다가올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늘 체험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위기담론의 위기를 내놓으며, 또 종언담론의 종언을 주장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엇인가는 남아있지 않겠냐라는 안타까운 옹알이를 해댄다.  <씨네21>의 최근 몇몇 글 중 나는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아바타>에 대한 평자들과 글쟁이들의 시각을 보면서, 감히 '이 정도 밖에 안되는 영화비평'의 어떤 수준에 대해 생각해봤다. 이 수준을 생각하면서, 나는 <아바타>를 통해 그들이 제시하는 영화의 미래를 상상하기보다는, 그런 영화의 미래를 제시하는 그들의 미래를 고심해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울하기 짝이 없다고 해야 하나.  이런 우울함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부족한 소견 몇 개를 끄적여보면 다음과 같다.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4009&article_id=59314  

-> 김중혁, 카메론의 시간은 거꾸로 가나 

엄밀히 말하자면, 김중혁은 전문적인 영화평론가는 아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한국 문단에서 나름 유익한 발견이라는 칭호를 부여할 수 있는 작가이다. 작가의 생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중의 지각을 인식하며 그 지각에 자극을 주는 스토리텔링을 고민하는 꾼이다. 그래, 이 측면에서 그가 <아바타>에 느끼고 있는 실망감의 타겟. 바로 이야기의 허술함을 꼬집는 건 이해해주겠다. 그런데,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이번 글은 이 좁디 좁아진 영화잡지에서 엄하게 큰 두 페이지를 책임질 수 있는 내용으로선 최하의 레벨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아바타>를 대하는 시선은 늘 이럴 때 나오는, 내가 '홍대주의'라 부르는 특유의 스노비즘이다. 그는 마치 모두가 다 환호하는 것에 나는 그 환호가 그리 대단하지 못하겠다라고 하는 90년대식 홍대형 스노비즘을 보여준다. 근데 그의 이런 시선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늘 이럴 때 나오는' 어떤 관행으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영화에 나타나는 어떤 측면, 그 측면이 갖고 있는 새로움이 사실상 별 새롭지 않다는 류의 지적은 내가 보기엔 어떤 '문화적 고집'으로서 갖는 비평의 지향이 아니라, 마치 7080담론의 과잉이나, 90년대 대중문화에 대한 향수 과잉에 머무른 지양되어야 할 평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지양되어야 할 시각은 <씨네21>에 <아바타>를 평한 이들이 모두다 한 걸치고 있는 그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모두 이 '호들갑스러움'의 스펙터클을 좀 차분히 보기 위해서 이런 비평의 수사를 활용한다. "사실 <아바타>가 보여준 면모들은 이미 예전에 나타난 것이지요". 결국 평자들은 영화적 교양주의를 다시 챙겨, <아바타>를 정리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우려하는 것은 그렇게 "이미 예전에 나타난 것"이어서, <아바타>를 "이미 예전에 나타난 것" 그 위치에서만 머무르게 한다면, 그것은 '창조력' 제로인 비평이라는 점이다. '창조력 제로'인 비평의 위치에 근접한 평자들이 쓰는 어설픈 '영화적 교양주의'로 결국 영화세계사 책을 다시 끄집어 내게 하여, <아바타>에 숨어 있는 다른 영화들의 기시감을 언급하는 수준으로만 끝나는 비평들은 폐기처분해야 마땅하다.  

그나마 허문영이 737호에서 <놀라운 현실감 갖춘 퇴행적인 동화>란 비평에서, <아바타>를 둘러싼 '수정주의 서부극'이란 형태의 시각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 수정주의 서부극이란 용어를 제대로 알고 써라라고 말하는 점은, 오히려 권장할만한 것이다. 어설픈 영화적 교양주의가 하나의 대단하다고 평가받는 작품의 특징을 해부하면서, 주는 쾌감은 기껏해야, "내가 이 영화를 예전에 알았나, 봤나"정도로 마무리되는 '정보 차원'의 언급이다. 그러한 언급은 영화를 성찰할 수 있는 '진정성'의 에토스를 확보할 수 없다. 단지 내가 <아바타>를 통해 얼마나 많은 옛 영화를 알고 있다는 '스노비즘'에 머무른 채, 아무런 발전 없는 시각에 머무르고, 그 머무름을 머무르지 않음으로 착각하는 위치까지 나아가는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가장 실망스러운 글은 736호 <아바타, 과연 혁명적인 대작인가>라는 제목의 4인 대담이다.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 제법 괜찮은 것 같은데, 이 선수들은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다가와, 영화를 자극했을 때, 우리가 고수하고 있는 영화적 본질이란 지켜보자라는 구태의연한 자장 안에 눌러 앉은 시선으로 영화를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혁명'이란 수사 앞에서, 평자의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아바타>의 '혁명'이, '혁명이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과정에서, 자신의 비평적 시선이 '혁명이지 않음'을 보여주고 만다.  

영화 평론가들의 게으름을 탓하고 싶다. 영화가 새롭다, 혁명적이다 라는 것을 평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것에 기반한 자세가, 퇴행적이어야 하나. 그리하여, 혁명적임을 조금 누그러뜨려, 그 퇴행이 아바타를 둘러 싼 광풍 어린 혁명이란 수사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만약 과감하게 외치는대로, 아바타가 그리 혁명적이지 않은 영화라면, 그들마저 혁명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맞불을 놓을 필요는 없었다. 즉, 그들은 아바타의 혁명이란 수사를 영화가 갖고 있는 어떤 역사적 본질이란 견고한 덩어리로 무너뜨리려 했는데, 그 역사적 본질의 틀이 과연 영화를 둘러싼 불변의 진리인지는 의문에 붙여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의문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퇴행적 비평으로 혁명이란 수사를 깨뜨리려는 우를 범한다.  

흑백 영화에서 칼라 영화로,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의 전이, 그 전이의 공포가 준 역사적 체험이 있었다. 그리고 영화평론가들은 그 역사적 체험의 교훈에 찰싹 붙어, 그 교훈이 주는 사례들은 지나치게 모범적으로 따르는 듯하다. 물론 <아바타>가 가진 테크놀로지의 혁신이, 영화판의 엄청난 변혁을 도모하진 않으리라 본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제3의 지점을 찾아보려 하지 않은 영화평자들의 자세가 안타깝다. 기술의 다가옴, 영화와의 접촉, 그리고 이어지는 기술에 대한 부정과 영화가 갖고 있는 본질의 고수. 이 안에서 호불호가 갈리고, 그 호불호를 깨는 새로운 틀의 시각은 시도조차 않는다. 

그러면서, 오히려 늘어나는 것은 영화의 내부가 아닌, 영화의 외부다. 어떤 '경제주의'에 침윤된 일련의 현대 영화비평이 갖는 위험성을 여기서 바라본다. <디 워>의 난분분한 비평 장이 그랬듯이, 결국 <아바타>를 수놓는 돈다발, 그것을 촉발한 테크놀로지와 영화의 커넥션. 그러면서 늘어나는 것은 영화가 아닌, 영화를 둘러싼 숫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 숫자 안에서 멀티 플렉스와 아이맥스, 입체안경 등의 수용 환경과 문화 산업은 영화 내부에 대한 심층적 해석의 자리를 강탈한다.  

우리가 여기서 봐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아바타>를 통해 보는 우리 사회의 과학에 대한 게으른 그리고 정체된 그 무엇의 시선을 느낀다. 과학과 사회, 그리고 과학과 문화이 접촉하는 그 지점 안에서, 나오는 반응들, 그리고 그 반응들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자들이 내놓는 시선의 정체와 퇴행은 비평의 시간이 갈수록 거꾸로 가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다시 새겨 넣게 만든다.  

그들은 비평 속에서 실컷 과학과 영화를 매개하는 새 시대의 영화철학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결국 그들이 고수하는 것은 영화에 내재된 '인문주의'를 어설프게 옹호하면서, 각자가 어설프게 공유하려는 듯한 영화적 교양주의를 설파하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한다. '영화는 영화다'라는 명제 안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두려움을 고작 지금의 수준에서 활용한다면, 나는 영화의 미래보다 비평의 미래가 더 불확실함을 과감히 말하고 싶다.  

지금 그들이 보여주는 '영화적 고집'이 오히려 평자로서의 강인한 고집이라기보다, 대중들이 자신들의 시선을 더 이상 보지 않으려한다는 기죽음에서 발생한 '타인지향적 고집'이기때문에, 그들이 보여준 고집의 시선은 더 퇴행적으로 느껴진다. 깔려면 더 새롭게 까고, 옹호하려면 더 진득하게 옹호해라. 죽도 밥도 아닌 눈치 보는 비평을 하지 말고, 제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빵가게재습격 2010-01-15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시는 부분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창조적 비평'이란 정말 가능할까요. 어떤 비평이 창조적일때, 왕왕 텍스트는 그 비평을 위한 재료로서만 제약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형태가 될 때, 비평은 비평에서 벗어나 새로운 담론으로 들어서고, 그럼 면에서는 작품분석을 넘어서 철학적 텍스트로 비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요컨데 비평이라고 부르기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은 글 읽고 몇 자 적고 싶어서 빈약한 댓글 남겼습니다. 건필하세요.^^

김샥샥 2010-01-15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시절부터, '꿈'보다 '해몽'을 좋아한 터라, 비평이 가져야 할 야망의 파이에 대해서 나름 희망을 갖고 있나봅니다.^^' 부족한 글에..덧글 고맙습니다.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는 비평의 지점은 텍스트 안에서 적확하게 놀아야겠지만, 비평의 자장은 그 텍스트를 넘어서는 무엇이라 생각해서요. 거기서,,창조적이라는 수사에 대해 고민을 해봅니다. '해몽'이 꿈보다..다만..그 꿈을 허황되지 않게..꿈을 존중하는 해몽이..환호받는 세상이 되길 고대해봅니다. 그런 점에서..작품을 넘어설 수 없는 현실과의 거리에서..작품을 가끔 넘어설 수 있는 이상을 체감할 수 있는 가능성의 비평이..바로 창조적 비평과 가장 근접한 무엇이 아닐까..지금으로선 그 정도 소신을 갖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아직 머나먼 무엇이지만요..덧글덕분에..신중하게 되네요. 지적 고맙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