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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권일의 <'공부의 신'도 못 따라 갈 현실>을 읽고, 몇몇 단상을 정리해 본다.  

  <공부의 신>에서 김수로와 함께 말썽꾸러기들을 천하대로 보내는 것을 돕게 된 배두나는, 오래 전 드라마 <학교>에서 제도권에 저항하던 아이콘이었다. 감히 격세지감이라는 말을 붙여도 될까. 김수로는 1화에서 과감하게 말한다. 천하대에 가서, 너희들이 그렇게 비뚤게 바라보는 사회의 룰을 바꾸라고. 그 룰을 바꾸는 건, 결국 사회가 인정하는 최정상에 올라가야 하는 게 우선되어야 한다고.   

갑자기 그 장면을 곱씹어보다가, 매년 수능 때만 되면, 1인 시위를 하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피켓엔 학벌로 인한 차별을 반대하며, 수능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것을 비판하는 그들의 소망이 달려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제 사람들은 이런 소망, 이런 희망이 담긴 시도를 환영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하라고 외친다. 작년에도 어김없이 수능을 비판하던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덧글에는 그들을 비난하는 어투로 넘쳐났고, 그나마 정성스럽게 반응을 보여준 사람들중엔 너희들이 바꾸고 싶은 게 있으면, 서울대 들어가서, 바꾸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 개무시 당한다는 공통된 반응이 제법 있었다. <공부의 신>에서 김수로가 학생들에게 외친 그 몇 마디는 드라마에만 적용되는 대사는 아니다. 그렇다. 이 대사는 현실을 깊숙 찌르면서, 이제 사람들에게 제도를 바꾼다는 것, 제도에 일탈하여, 그 제도의 틀 자체를 바꾼다는 건 별 소득이 없다는 걸 공인한다. 그리고 사람들 속에 그 대사는 공명의 기운을 뻗친다. 

<공부의 신>의 압권은 드라마가 끝나고 나오는 '내신 잘받는 방법'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귀여운 공포'를 체감했다. 설마 이 장면을 보면서, 배우들이 제시하는 방법론을 수첩에 깨알처럼 적는 부모와 학생은 없겠지? 그런 상상을 했다. 이 상상의 곁에서 점점 커져가는 건 이제 '교육 혁명'이라는 건 기대하기 어렵나, 하는 것이었다. 아니, 우리 사회는 이제 혁명을 문화 속에서만 체험한 채, 그것에 안주하는 것으로 삶을 잘 살고 있다고 할 지 모르지, 그 오래된 우려가 자연스러운 문화적 코드로, 진부하게, 그것도 매우 친숙하게 유머라는 코드와 섞어 나왔을 때, 나는 이 드라마를너무 우울해서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보여준 자살의 절규는, 우리 사회에 어떤 공명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그 절규는 그 누군가에게는 한심한 자의 어리석음으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의 친구들은 죽음으로까지 우리 시대의 교육이 보여주는 모순을 상징화하는 것에 그 어떤 애도를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애도의 가능성을 대신하는 것은 이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다. 그러나 이 생존의 의지 가운데서, 우리는 '편안하게 스며드는 사회적 불안'이란 가스에 몽롱해지고 있음을 꾹 참은 채, '일단 살아간다'. 천하대에 가기 전에, 우리 아이들은 이미 힘이 다 빠졌다. 영리해져라, 정신차려라, 일단 잘해보고 봐라. 이 3계명을 부여잡은 채. 부들부들. 더 안타까운 건 이런 소리 자체를 '헛소리'로 잠식해버린, 이 사회의 현실이다. '공부의 신'이 다시 알려준 어떤 현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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