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최근 대중음악계 가장 큰 논란은 '인디밴드 컨셉'의 씨앤블루 와 '인디밴드' 와이낫 사이에서 벌어지는 표절 논란일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요즘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외톨이야'라는 곡을 쓴 김도훈 씨, 그리고 '씨앤블루' 소속사의 대응에 대한 인디씬의 분노(?)가 언론을 통해 소개되고 있는데요. 

'씨앤블루' 팬들은 제외하고라도, 대부분 누리꾼들은 '씨앤블루'측에 괘씸죄를 묻고 있는 분위기군요.  

그런 맥락에서, 딴지일보에서, 지난 2009년 영국 크리스마스 차트에서 네티즌들이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쉰의 <킬링 인 더 네임>을 1위로 만들었던 운동을 본 따, 한국에서 시도해볼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와이낫의 '파랑새' 음원을 사주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네요.

http://www.ddanzi.com/board/9564.html 

그래서, 현재 이 글이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고, 블로그스피어에서도, 이슈가 되어 실천에 들어갔네요. 

아마, 목표는 싸이월드 음원 차트 1위 만들기인 것 같은데, 현재 제가 확인해보니, 11위에 랭크되었네요. 

흥미로운 광경입니다. 

'와이낫' 리더분을 개인적으로 좀 아는데, 정말 자기 음악에 대한 애정과 확신이 강한 분이고, 또 와이낫 하면, 제가 홍대 씬은 잘 모르지만, 나름대로 꽤 그 바닥을 주름잡는, 성실하고 열정적인 밴드로 아는데, 표절 여부를 떠나, '인디'를 무시했던 그 발언이 벌집을 쑤셔놓은 게 아닌지, 전 그게 기분이 더 나쁘더군요.  

좀 더 지켜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뉴스 몇가지
    from 기우뚱하다 내 이럴줄 알았지 2010-02-10 13:26 
    김민선씨 손해배상 청구 기각됨. 미국산 쇠고기 수입업체들이 ‘광우병 쇠고기’ 관련 보도로 손해를 입었다며 낸 소송에서 법원이 문화방송 <피디(PD)수첩> 제작진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남부지법 민사합의15부(재판장 김성곤)는 9일 ‘에이미트’ 등 미국산 쇠고기 수입업체가 문화방송 조능희 피디 등 피디수첩 제작진 5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또 이 업체들이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비난하는 글을 개인 홈페이
 
 
 

잘 가는 커뮤니티에서, 일본의 재정 적자를 우려하는 글을 봤다. 내용인즉슨, 일본은 현재  나라 부채가 1초당 1561만원이 올라가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재정 내역에서, 복지 부분은 점점 기대할 수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사실 우리나라다. 경제에 대하여 문외한이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제구조가 타 국가의 경제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해왔음은 상식일 듯하다.  

'학습효과'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예전에 한 번 당해봤으니, 다음은 괜찮은 것이라는 낙관론을 펼칠 때, 이 논지를 끌어온다. 그리고 이것은 상황의 심각함을 무마시킨다. "에이, 그래도 이번은 괜찮을 거에요. 저번에 한 번 겪어본 적이 있으니." 그런데, '먹고사니즘'에서 오는 각박함이 피곤함과 무관심의 침묵으로 나타나는 것인지, 혹은 정말 '학습효과'가 쌓아놓은 둑의 견실함을 믿는 것인지. 내가 다 찾아가며 사람들의 심리를 물을 수는 없지만, 이 대책 없는 고요함이 조금 무섭다.  

어제 pd수첩에 방영된 '유령 도시'의 가능성이 다분히 보이는 송도를 비롯해, 4대강 사업, 세종시, 그리고 '오명박' 오세훈의 서울 리모델링, 그리고 경기도 모 지역에서 기획하고 있다는 고층 청사 및 이미 완공된 호화 청사 건립까지. 뭔가 예비된 불길함들이 하나, 하나 쌓이는 것 같다. 

국제적인 차원에서, 우리에게 경고를 주는 다른 나라의 모습들도 자주 뉴스를 통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오는 반응들은, "우리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식의 지식적 섭취의 과시만이 남은, 이상한 양비론 같다.  

이명박의 '통치 기술'은 너무나 뻔해서, 분석하기가 민망할 정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문화 현대문화론선 19
마이크 페더스톤 지음 / 현대미학사 / 1999년 2월
품절


요약하자면, 우리는 "포스트모던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지 않고, "왜 어떻게 우리가 특별히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라고 질문해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강력한 문화 이미지로서의 포스트모던 개념과 포스트모던의 출현에 긍정적인 가능성을 제시했던 조건을 탐구해야 한다.-10쪽

1장: 모던과 포스트모던: 정의와 해석 중 일부 / * 모더니티-포스트모더니티 이 용어의 의미쌍은 시대적인 용어임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포스트모던에 대한 언급은 시대적 변화나 명확하게 조직화된 원리를 지닌 새로운 사회의 출현과 연관된 '모던과의 단절'을 뜻한다. 이는 보드리야르,료타르,제임슨의 저서에서 확인가능한(18) 질서의 변화이다(19)(켈너,1988)9 / 제임슨(1984)은 좀더 제한적으로 포스트모던이라는 시기화개념을 사용하지만,포스트모던을 '시기적 전환'으로 인식하기를 꺼리고,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을 2차대전 이후에 기(19)반을 둔 자본주의의 세번째 단계인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 혹은 문화적 우세종이라고 설명한다.(20)-18쪽

*모더니제이션-포스트모더니제이션 : 이 용어쌍은 모더니티-포스트모더니티,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논의 사의에 불편하게 끼여 있다. 모더니제이션은 전통사회구조와 가치에 대한 경제적 발전효과를 지적하는 발전사회학에서 사용되었다. 이 이론은 산업화,과학과 기술의 성장,근대국민국가,자본주의적 세계시장, 도시화와 다른 인프라구조에 기반하는 사회발전 단계를 설명한다.(이러한 쓰임은 위에서 논의했던 첫번째 의미의 모더니티와 강한 유사점이 있다) 즉 일반적으로 특정한 문화변화는(세속화와 자아발전의 중심인 근대적 정체성의 출현) 근대화과정에서 야기된다는 느슨한 토대-상부구조 모델을 가정하였다. 만약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제이션에 관심을 갖는다면,특정 사회과정과 제도적 변화에 공존하는 세부적인 개요가 이론화되어야한다는 것은 분명하다.-22쪽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용어는 포괄적인 문화적 복잡성을 나타내고자, 모더니즘은 '모더니티의 문화'로,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티가 출현하는 문화'로 쓰였다. -25쪽

변화는 (1) 예술,지식,학문분야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특수한 분야에서 발생하는 특정한 경쟁적인 투쟁에서의 변화와 분리될 수 없는 이론화,재현,유포방식의 변화) (2) 내적,초-사회적 수준에서의 집단과 계급 분파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균형과 상호독립성의 광범위한 전환과 관련되는 상징상품의 생산,소비,유통방식의 변화이다(3) 위에서 검토한 일련의 변화과정의 결과 다른 방식으로 의미화지배체계를 사용하고 새로운 정체성구조와 발전을 지향하는 상이한 집단의 일상적 실천과 경험의 변화로 이해될 수 있다. 최근 몇년동안 문화에 관한 관심은 급속하게 증가해왔다.사회과학, 특히 사회학의 주변부에 속했던 문화는 오늘날 중심부로 부상했으며,사회과학과 인문과학간의 장벽은 없어지고 만다(페더스톤,1988)-30쪽

2장 소비문화 이론 -첫번째 관점은 소비문화는 자본주의 상품생산의 팽창에 따라 구매와 소비를 위한 소비상품과 소비장소의 형태로 막대한 물질문화의 축적을 야기하였다고 본다. 그 결과 현대 서구사회에서 여가와 소비활동의 두드러진 증가를 초래하였으며, 이러한 현상은 일부에게는 인류평등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확장하는 것으로 환영받지만,다른 사람에게는 이데올로기적 조정 능력이 증가해 사회구성원을 유혹함으로써 보다 나은 사회관계의 대안을 봉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두번째 관점은 보다 엄격한 사회학적인 견해로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상품에서 파생한 만족은 차이의 연출과 유지에 따라 지위와 만족이 달라지는 '제로섬 게임'이라는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접근과 연관된다. 여기서의 초점은 사회적 연대나 차이를 창출하기 위해 사람들이 상품을 사용하는 상이한 방식에 있다. 세번째 관점은 소비에 따른 정서적 즐거움의 문제, 즉 소비문화의 환상과 욕구, 직접적인 신체적 흥분과 심미적인 즐거움을 다양하게 일반화하는 특정한(31)소비국면과 관련 -31쪽

보드리야르 이론의 특징은 소비가 기호의 적극적인 조작을 수반함을 보이려고 기호학을 강조한 것이다. 기호는 상품과 결합하여 '상품-기호'로 생산되는데 이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 핵심적인 특징이다. 예를 들어 매체와 광고에서 기호의 조작을 통한 기표의 자율성은 기호가 대상물로부터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결합관계의 복수적 사용이 가능함을 암시한다. 보드리야르의 기호학적 상품논리의 발전은 마르크스이론의 관념주의적 왜곡과 유물론적 강조에서 문화에 대한 강조로 필연적으로 이동한다. (중략) 후기저작의 강조점은 생산에서 이미지와 실재와의 차이를 부식시키는 매체를 통한 기호, 이미지, 시뮬레이션의 끊임없는 반복재생산에 있다. 그리하여 소비사회는 사회생활이 비규제적이고,사회관계가 보다 가변적이며 안정된 규범으로 구조화되지 못함에 따라 본질적으로 문화적이 된다. 기호의 과잉생산과 이미지, 시뮬레이션의 재생산은 안정적인 의미의 소멸과 끊임없는 기묘한 병력의 흐름으로 대중을 현혹하고 보는 사람을 안정된 감각너머로 유도하는 실재의 미학화를 야기한다. 이것이 바로 제임슨이 주장하는 포스트모던적인 '깊이없는 문화'이다.-34쪽

예술대상,즉 어떤 특별한 상징적 의미가 부여되고, 의식을 위해서 생산된 대상은 교환에서 배제되거나 상품지위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반대로 전문적이고 신성한 지위나 세속시장 및 상품교환의 거부가 상품가치를 높일 수 있다. 이용 가능성의 결핍이나 '가격을 매길 수 없다'는 사실은 상품가격과 갖고자 하는 욕구를 높이기 때문이다. / 상품은 사회적 장벽을 없애고 개인과 사물 사이에 오랫동안 확립된 연계를 와해시키는 반면에, 상품교환을 제한,통제, 전환시키려는 탈상품화 경향도 있다. 특정 사회의 안정적 지위 체계는 상품교환이나 신 상품의 공급가능성을 제한함으로써 보호되고 재생산된다.-36쪽

현대 서구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품흐름 때문에 상품이 지니는 서열을 파악하는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이 맥락에서 특정 집단이나 범주의 사람들이 신상품을 적절하게 이해하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취향, 차별적인 판단이나, 지식 또는 문화자본은 중요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상품이 사회적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고 소통자로 기능하는 방식을 고찰한 부르디외(1984),와 더글라스와 이쉬우드(1980)의 저작을 들수있다.-37쪽

윌리암스의 지적처럼, 소비용어가 처음에 사용되었을 때, 그 의미는 파괴,소모,낭비,고갈이었다(윌리엄스,1976:68).소모, 과잉 지출로서의 소비는 자본주의 및 사회주의 국가가 어떻게 해서든지 통제된다는 생산주의적 강조속에 역설적인 실재를 규명한다. 희소성과 결합된 경제가치개념, 즉 생산과정내의 축적동기 때문에 불가피한 훈련과 희생은 소비자의 욕구와 즐거움이 충족되면 궁극적으로 희소성의 축복을 야기할 것이라는 전망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회 모두에게 강력한 모티브와 문화이미지 동기를 부여했다. 동시에 중간계급, 특히 전통 경제전문가 사이에서는 19세기의 자립적인 자아치료적 개인주의와 20세기 후반의 대처리즘에 의해 고양되었던 내세적으로 세속적인 금욕행위라는 규율의 고된 노동개념을 지향한다. 즉 소비는 규칙적이며, 숭배할 만하며, 보수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42쪽

바타이유의 일반경제 개념에 따르면, 경제적 생산은 희소성이 아니라 잉여와 연관된다(바따이유,1988) 요컨대, 생산의 목적은 파굉며, 핵심문제는 상품과 물건과잉으로 변형시키는 물자풍부,한계에 도달하는 성장과정과 관련된다. 효과적으로 잉여를 관리하고 성장을 통제하기 위한 유일한 해결은 게임,종교,예술,전쟁,죽음의 형태로 과잉을 파괴하거나 정리하는 것이다.이것은 선물,포트래취,소비,축제,과시적 소비를 통해 이루어진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는 증오할 만한 부분을 완전한 경제 성장으로 전환시키려고 끝없는 성장을 시도한다.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몇몇 수준에서 지속적인 손실과 한계가 존재하며,자본주의는 과잉쾌락을 부여하는 소비국면과 이미지를 생산한다. 소비국면과 이미지는 일상생활간의 경계를 와해시켰다. -43쪽

때문에 우리는 1)소비문화 내에 지속되는 전-산업적 카니발의 전통적 요소 2)축제의 전통요소들을 매개하는 이미지,디자인,광고,록 비디오,영화로의 변형과 대체 3)휴일 리조트,스포츠 경기장,테마공원, 백화점과 쇼핑센타와 같은 특정 소비국면에서 이루어지는 카니발적 요소의 지속과 변형 4)축제요소들이 광범위하게 공중에 대한 '위세'적 스펙타클 형태나 특권적인 상층지위 형태를 띠면서 국가나 기업에 의해 과시적 소비로 이동하고 통합함을 연구해야 한다.-43쪽

4장 문화변동과 사회관행 中 / 대다수 비평가들처럼 포스트모던을 거대서사의 종말로 보는 료타르가 직면한 문제는, 복합단절을 야기하는 사회와 사회를 발전이론으로 설명하고자 거대서사를 지나치게 주장한 것이다.(켈너,1988) 공인된 사실로 간주되었던 것과 사회과학내에서 인과관계 정도로 취급했던 철학,문학,인문학이론의 반실재주의,반증거논리라는 포스트모던의 이론화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방만하게 다루어졌다. 지나치게 표현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명증성 소멸을 주장하는 증거의 도상적 사용과 일상적인 역사와 진행되는 어떤 작업을 정당화한다. -86쪽

우리는 문화생산보다는 생산의 문화개념(the culture of production)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89쪽

지식인의 경우처럼 특정 분야의 변화는 두 단계에서 작동하였다.(1)현존하는 상징위계를 탈안정화하려는 도전집단에 의해 확립된 압력으로부터의 개방 (2)일반적으로 국가 관리자의 지식상품에 대한 수요상의 변화결과에 따라 상황을 보다 광범위한 문화소비시장으로 전달하는 민주화되는 효과로,지식인이 모험의 가치,목적,목표를 다시 고려하여 추구하는데 참여하게 한다.후자의 경우,바우만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보편적 기획을 하는 입법자의 위치에서 인간적 문화성취로 생활세계와 언어게임의 다양성을 확대된 일시적 대중을 위해 번역하고, 이들과 유희하는 해석가의 위치로 변화시키는 지식재화에 대한 수요감소의 결과, 지위와 정체성 위기에 직면한 지식인 경험의 직접적인 조율로 본다(1988).-99쪽

결론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자본주의 논리의 구성수준에서만 이해되서는 안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경제적 전문가와 상징생산을(102)하는 다양한 전문가 집단간의 상호독립성과 경쟁적인 투쟁,변화하는 권력균형의 역학관계라는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102,103쪽

5장 일상생활의 미학화 : 래쉬(1988)가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이라 고 본 의미화의 표상체계를 통한 일상생활의 미학화는 19세기 자본주의 사회 대도시의 소비문화 성장에 기원을 둔다. 자본주의 사회는 도취시키는 꿈의 세계,상품,이미지,배회자 등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장소이다.-11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디어 파워 - 2006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제임스 커런 지음, 김예란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5년 9월
장바구니담기


1부 미디어 역사 - 미디어사를 기술하는 상호 경합적 서사 구조 중 중요한 부분을 옮겨본다./
미디어의 자유와 권력 부여 : 자유주의적 서사 구조(4), 자유주의적 미디어사의 중핵을 이루는 테제는 이러한 민주화 과정이 근대적 대중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엄청나게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이 테제를 구성하는 두 가지 핵심 요소 중 첫 번째 명제는 미디어가 성공적인 투쟁을 거쳐 정부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5)/ 여성의 진출 : 여성주의적 서사구조(11), '두 개의 영역(two spheres) 이데올로기'(13) / 문화적 민주주의 : 대중주의적 서사구조(22), 미디어의 대중화는 대중적인 선호가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하나의 민주적 위업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또한 사회적 평등주의(egalitarianism)로 인해 위계제의 가치가 서서히 파괴된 '대중의 반란(revolt if masses)'의 일부로서도 간주된다. 무엇보다도 미디어의 대중화라는 것은 미디어가 대중적 즐거움의 주요한 원천으로 탈바꿈한 진정으로 비약적인 전진으로 표상된다.(23)-4~23쪽

무엇보다도 이 계열의 서사구조는 각각의 미디어-영화,라디오,전축,텔레비전-가 어떻게 광범위한 경이와 흥분의 대상이 되었고, 가족 생활 및 사회생활의 의례 속에 흡수되었으며, 일상 대화의 재료로서 기능하였는가에 대한 상당히 설득력있는 설명을 제공한다.수용자의 상상적인 생활과 맥이 닿고, 능동적인 반응을 끌어내는 풍부하게 교직된(richly textured)의미 또한 대중 미디어가 전달하였다는 점도 강조된다. 미디어가 의미 있는 대중적 즐거움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이다. -38쪽

문화전쟁 : 자유 의지론적 서사 구조(39),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 당시 수상이었던 마가렛 대처(1979~1990)의 노골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그전 시기의 관대한 흐름을 거꾸로 돌리려는 조직적인 시도가 취해졌다. 비디오에 대한 더욱 강력한 검열이 1984년에 도입되었으며, 도덕적 금지명령(moral injunctions)을 통해 프로그램을 '정화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깔고, 1988년에는 방송표준심의회[Broadcasting Standards Council, 나중에 위원회(Commission)로 바뀜]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재도덕화(remoralize)를 위한 이러한 시도는, 핵심적으로는 당시 행해졌던 탈규제 조치로 인해 텔레비전이 더욱 상업적인 압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1990년대에 들어 그전의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섹스물과 폭력물이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다. 전통적인 도덕 가치를 권장코자 했던 움직임이 시장 자유를 육성하려는 욕망에 의해 부지중에 약화된 것이다. 자유 의지론적 서사구조는 이렇게 전통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미디어 그리고 그것에 대한 통제 방식 양자를 통해 어떻게 싸움을 벌였는가를 기술한다. -39쪽

대중주의적 서사구조가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자유 의지론적 서사구조는 1960년대의 주제가였다.(39), 나라 건설하기 :인류학적 서술 방식(46), 미디어사에 대한 이런 설명 방식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가면을 벗긴다. 이는 민족국가의-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사물의 질서(order of things)의 한 부분으로서- '주어진' 본성이, 지구화가 진척된 결과로 의문에 직면하게 된 시점에 등장하여 새로운 탐구방법과 뉴미디어사 서사구조를 활짝 열어젖혔다.(58)-39쪽

자유주의적 미디어사 : 미디어가 자유를 얻었다는 것, 그리고 그럼으로써 민중의 권력을 강화시켜주었다는 것이 미디어에 대한 자유주의적 역사학의 핵심 주제이다. 이런 해석에 대한 도전은 급진주의적 역사학과 사회학으로부터 나온다. 요컨대 미디어가 사회의 권력구조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진 적은 한 번도 없으며, 대중들의 권력을 강화시켜주는 기구로서 충분히 기능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증거까지 갖춘 충분히 강력한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미디어사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을 다시 평가해볼 필요성을 정당화시켜준다.-71쪽

대중주의적 역사의 중심 주제는 엘리트의 문화적 통제를 깨고 미디어가 자유로워졌으며, 그로써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제공되었다는 것에 있다. 이는 온정주의(paternalism)대 존중, 그리고 도덕적 고양(uplift)대 즐거움이라는 이항 구분(binary distinctions)을 동원하여 전개되어왔다.이렇게 틀지어 보면 마치 이 서술이 그전에 있던 모든 것을 다 포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를 지닌 고상함(condescending worthiness)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또한 그것이 패배하고 마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시장에 대한 판단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 이 접근법의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73쪽

4장 미디어 문화연구의 신수정주의 중 일부를 정리해본다 /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관한 수정주의 모델 - 급진주의 연구 결과의 주요 기틀이 되는 계급 갈등적 사회 모델에 대한 회의가 증폭됨에 따라, 급진주의 진영에 대한 지지가 점차 약화되었다. 이러한 각성을 촉진시킨 중요한 요인 중에 미셸 푸코의 연구가 있다. 그는 상이한 상황마다 다양한 권력 관계가 작동한다고 주장하였다. 푸코에게 있어 이렇듯 다양한 권력 관계들은 이분법적이고 보편적인 계급적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단순화될 수 없으며, 생산양식 및 사회구성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중략) 푸코식 접근 방법은 마르크스주의 접근법과 다른 축 위에서 미디어연구를 구축하려는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수용되었지만, 이것 역시 자명하게 급진적인 형태를 띤 것이었다. 미디어의 역할은 여전히 보다 폭넓은 사회적 갈등이라는 맥락 안에서 검토되었지만, 그 갈등이란 우선적으로 계급 권위보다는 가부장적 권위에 대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푸코의 유산은 양면적이었다. 이 복잡한 권력의 이론은 모든 '근본적인 이론들'과 '지배 내러티즈'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던 연구 시각과 연계되었다.-190쪽

이러한 포(190)스트모더니즘으로의 전환은 문화 및 미디어 연구의 탈중심화를 촉진하였다. 일부 연구는 미디어의 역할을 분별적 계기들로 해체된 사회적 맥락이나 또는 담론 외부의 권력 작용이 대체로 배제된 사회적 맥락에서 독자-텍스트 간 만남의 연속적인 과정인 것으로 축소하였다. 교류의 연속인 것으로 축소하였다. 이것은 미디어가 권력 관계와 분리적인 것으로 이해하거나, 권력이 분열되고 광범위하게 분산된 사회 모델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하였던 미국 자유주의적 전통과 그리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존 피크스의 중요하고도 풍부한 저술에서 이러한 공통점은 대체적으로 분명히 드러난다. 그가 찬양하는 기호학적 민주주의에서는 광범위하고 가변적인 하위문화 및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율적인 문화적 경제 안에서 그들 나름대로 의미를 구성해내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이것은 소비자 주권주의적 다원주의의 핵심 주제를 열정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191쪽

수정주의 연구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야는 의미의 생산 및 수용자의 해독에 관련한 문제 영역이었다. 매스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급진주의 진영은 대체로 의미 분석을 상대적으로 중요시하지 않는 견해를 지녔다. 이러한 상황에서 텍스트 내 불일치, 모순, 간극, 심지어 내재적 대립을 강조하는 새로운 연구 경향이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196쪽

중요한 변화는 수용자를 능동적인 의미 생산자로서 재개념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널리 신화화된 미디어 연구 분야이다. (중략)여기에서는 우선 일부 형식주의자들의 분석에서 발견되는 바, 수용자가 텍스트 내 고정되고 이미 구성된 의미에 대해 정해진 방식대로 반응한다는 전제가 의미는 텍스트,사회적인 것, 그리고 수용자의 담론적 위치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된다는 주장에 의해 도전받게 되었다는 점 / 이러한 논지는 가장 탁월하고 저명한 수정주의 논자 중의 하나인 데이비드 몰리가 수행한 <네이션와이드>> 수용자 반응을 분석을 통해 두 차례에 걸쳐 훌륭히 제시되었다. / 미디어가 단지 제한적인 영향을 가진다는 암묵적인 결론은 일부 연구자들의 관심의 초점을 이동시키는 자극제 역할을 하였다. 정치적 미학이 대중적 미학에 의해 대체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디어의(197)재현이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투쟁을 전진시키거나 지연시키는가라는 문제로부터, 왜 매스미디어가 대중적인 선호를 획득하는가라는 문제로 연구의 관심사가 이동하였다.이러한 변화에 자극받아 사람들의 즐거움의 본질을 유추하기 위한 미디어 내용의 해독 연구 및 수용자의 즐거움의 -197쪽

근원을 탐색하기 위한 수용자 대상의 민속지학 연구가 이루어졌다.(197)단언적으로 말하자면 앞에서 살펴 본 수정주의는 지금까지 오류로 인해 혼동에 빠져있었던 사항들이 해명될 수 있었던 지적 발전의 한 사례로서 흔히 제시되곤 한다. 이런 시각에서 몰리는 이용과 충족 연구가 능동적 수동자의 개념을 발전시키기 이전까지 미디어 효과이론 전통 전체가 피하주사식 효과 모델에 의해 주도도던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다./ 몰리의 주장은 전 세대에 걸쳐 진행된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역사를 숨막힐 정도로 압축시켜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실제로 재발견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을 마치 새로운 창안인 것처럼 제시하고 있다. 또 이러한 신비화는 자유주(198)의 전통에서 발전한 과거 미디어 연구와 급진주의적 전통으로부터 발전한 신수정주의 간에 다수 진행된 상호작용의 연결선들을 모호하게 흐려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즉 효과이론이 어떠한 유의미한 관점에서 보아도 피하주사식모델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효과이론의 핵심적인 진의는 1940년대 이래 미디어 수용자의 독립과 자율성을 주장하고, 사람들이 미디어의 영향을 쉽사리 받아들인다는-198쪽

식의 당시 확산되어 있었던 사고방식을 제거하는 것에 있었다. 이러한 작업은 비록 지금과 다른 기술적 언어를 사용하고 의미에 대해 보다 단순한 설명을 제시했지만, 기본적으로 1980년대 수용연구영역에서 새로이 주장되는 바와 일치하는 생각들을 다수 발전시키면서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효과연구자들은 사람들이 지니는 선유 경향들이 그들의 텍스트 해독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과 상이한 선유 경향들은 다른 해석을 낳는다는 주장을 이미 오래 전에 해왔던 것이다. -199쪽

수용자의 상대적 자율성을 증명하는 경험주의적 연구는 미디어의 자유주의적 관점을 정립하기 위한 핵심분아였다. 경험주의적 연구의 발견은 미디어를 계급이나 엘리트 집단의 통제 기구로서 이해하는 미디어모델을 공격하는 데에 상당 정도 기여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사회를 소규모의 집단들로 이루어진 벌집으로 개념화는 시각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사회 내에 권력이 광범하게 확산되어 있고 여론은 개인적 영향 및 일상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일견 이와 유사한 주장이 상이한 개념틀 안에서 일부 수정주의 연구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는 포스트모던 다원주의에 자리를 내어 주었던 것이다. 미디어가 사회적 질서에 대한 동의가 구성되는 주요 도구라는 미디어관에 도전하기 위해 수용자들의 선별성을 입증하는 성격의 수용자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러한 신수정주의는 때때로 사회를 이동적인 정체성과 독창적인 하위문화를 지닌 사회집단들로 이루어진 유동적 복합체로 보는 관점과 연결되곤 했다. 지배적 담론이란 존재하지 않고, 단지 다성의 기호학적 민주주의가 존재할 따름이라는 것이다.-205쪽

문화적 가치에 대한 수정주의적 평가 : 수정주의 이론의 또 하나의 기여점은 프랑크푸르트학파로 대표되는 바, 급진주의 전통 내 중요한 흐름을 구성하고 있던 대량문화에 대한 엘리트주의적 비관론을 거부했다는 점에 있다.이러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핵심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피에르 부르디외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사회적-경제적 위치와 예술 및 음악에 대한 취향의 유형 간에 밀접한
상응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 미디어 소비의 맥락에서 의미가 생성된다는 인식이 점증함에 따라 상대주의적 경향이 보다 강세를 띠게 되었다. 이는 논리적으로 수용자가 대중문화로부터 질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210)-209쪽

5장 미디어 사회학의 논쟁사 中 /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미국식 커뮤니케이션연구의 지배적인 전통에 반대하며 미디어에 관한 진보적인 관점이 발전하였다. 이는 단시간 내에 유럽 일부 지역에서 미국식 커뮤니케이션 연구 전통을 잠식하며 한동안 거의 새로운 전통이론으로 확립되었다. 이 용감한 해석은 세 개의 핵심적인 주장을 근거로 성립되었다. 그것은 미디어는 시장 검열, 국가의 영향력,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통제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미디어는 사회적 질서를 옹호하는 선별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재현한다는 것이다. 또한 미디어가 사회 시스템에 대한 동의를 획득하며 그 유지를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강력한 설득의 기제인 것으로 주장되었다.-217쪽

1970년대와 80년대의 전통은 이용과 충족 연구의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 입장에서는 사회보다는 개인 차원에서 기능주의적 질문(및 대답)이 제시되었다. 이는 대체로 미디어가 사람들의 사고를 통제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시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암묵적인 전제 위에서 촉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미디어로부터 무엇을 얻는가를 잘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게 된다. 포커스 그룹과 서베이를 이용하여 연구자들은 엄청나게 다양한 미디어 기능(즉 사용방식)을 발견하였으며, 여기에는 수용자 구성원의 목표, 심리적 필요와 사회적 경험이 반영되었다. 미디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충족의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소속감의 획득, 동반의식 확충, 인간적인/->251상호작용의 활성화, 자신 및 타인에 대한 이해, 바람직한 자기 정체성 강화, 원하지 않는 현실로부터 탈피, 휴식을 위한 도구 등이다. 이러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정보전달, 교육, 오락이라는 표준적인 범주는 미디어로부터 획득하는 즐거움의 다양한 형태들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즐거움은 사람들의 다양한 필요와 욕망을 반영한다.-250쪽

1980년대와 90년대에 뒤르케임 사회학 및 사회학적 인류학이 부활하자 그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적 기능주의의 새로운 형태가 등장하고 대신 이용과 충족 연구 전통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새로 등장한 자유주의적 기능주의의 핵심 주제는 미디어가 사회적 통합의 행위자라는 것이다. 제임스 캐리는 품위 있게 씌어진 저서에서 매스미디어 대부분이 사람들을 함께 모으고 사상의 저변에 흐르는 계속성을 확인하는 의례적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251쪽

미디어 이벤트에 대한 문헌이 왕성하게 증가한 현상은 자유주의적 기능주의 부활의 한 가지 양태에 불과할 뿐이다.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사례는 일상생활에서 텔레비전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연구이다.(실버스톤,1994). 이 연구는 과거에 비해 사람들이 친지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지원이 감소하는 대신 추상적인 상징과 비인간적인 기술에 의존해야 하는 불안한 시대적 상황에서 텔레비전은 편안함(전이적대상)의 원천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텔레비전은 그 신화적인 스토리텔링을 통해 보상적인 확신성을 안겨준다. 또한 텔레비전은 질서와 안정에 대한 감각을 전달해줌으로써 일상생활의 숨겨진 흐름 및 반복적인 리듬에 통합될 수 있도록 정서적인 정박지로서 기능한다. 텔레비전은 사람들의 자기 정체성 및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계속성을 부여한다.(이는 기든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존재론적 안정성이다.) 텔레비전은 분산과 혼란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시청자들을 구조화되고 안정된 세계와 연결시켜 준다. -253쪽

외형적으로 덜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실버스(253)톤은 텔레비전이 가정생활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텔레비전은 가족들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중심적인 공간으로서, 과거의 거실 벽난로에 상응하는 현대적 등가물인 것이다. 보다 심층적인 심리의 수준에서 본다면 텔레비전은 주택을 안전과 소속의 장소,그리고 자아의 표현 장소로 만들면서 주택을 가정으로 변화시키는요소의 일부가 된다. -254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낮 2010-02-09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조리있게 풀어내지 못하는 내용.
기본이 중요합니다 ^_^
 

 

 

 

 

 

 

 

 

어제에 이어 다시 고민을 전개해봅니다. 사회학적 설명/해부를 통한 역사적 신화의 해체가 아닌, 단순히 역사적 테두리를 기념하는 데 그친 것 같다는 제 문제 제기는, 김홍중 선생이 심보선 선생과 함께 쓴 <87년 체제 이후 스노비즘의 계보학>에서 그가 정의한 마음의 레짐이 제시한 구도 때문이었습니다. 요약하자면, 그는 지금 이 시대를 '포스트-진정성 체제'로 규정하면서, 지난 20여년의 시간을 '진정성 체제' / '문화적 스노비즘의 체제'/ '토탈 키치'가 지배하는 3대 스놉(합리적 스놉,비판적 스놉, 룸펜 스놉)의 시대로 구분합니다. 물론 저자는 '단정 어법'을 취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구분선은 일종의 '경향'이라고 부연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에도 결국 저자가 희미하게 붙들어매고 있는 '진정성'이라는 개념, 진정성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태도 속에는, 그 태도가 일종의 지배적인 '경향'이었던-그렇게 저자에 의해 해석되고 있는- 87년 체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자가 지향하는 정서적인 태도와 논리적인 기술이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결국 정서가 논리를 압도하는 것을 지적했던 것입니다. 정서가 논리를 압도했을 때, 정서는 논리를 가장하여, 과학적 체계로 자리잡힐 수 있습니다.  

결국 87년 체제라는 정서적 참조점을 부인하든, 긍정하든 그 부인과 긍정에는 그 시대를 살았던 주체만이 가지는 '  순수한 '진정성'이 있다는 의견이 도출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문화적 스노비즘'이라는 개념을 설정하여, 386세대의 한계를 반성하지만, 그 반성은 결국 '평등한 위치'에 있는 자로서의 반성이 아니라, 그 시대의 가치를 알 수 있었던 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반성의 위치에서 머뭅니다. 그 반성의 위치에서 도출된/기술된/규정된 진정성 체제 이후의 시대 정의를 보면, 그것은 그 시대의 마음을 심층적으로 해부하여, 그 시대의 마음을 헤아리려하기보다는, 진정성이라는 개념을 최상의 위치에 올려놓고 진정성의 경향이 강했던 시기 이후의 문화적 경향은 그 시대의 마음에서 불순한 존재만을 가려내는/ 부각시키는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지점에서 이 책은 가장 점잖은 문체를 지향하지만, 가장 뜨거운 책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김홍중 선생이 지금 이 시대를 바라보며 문제화하는 지점이 분명 필요하다고 봅니다. 진정성이 부재한 시대에, 이 진정성, 올바른 사유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올바른 긴장감을 형성하는 작업은 중요하겠지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결국 그가 '마음'이라는 이 추상적인, 고로 추상적일 수 있기에 객관적 실체와 연결지어 규명해볼 수 있다는 학자의 욕망이, 마음 자체를 수사적으로, 또 마음 자체를 사회학적으로 설명하는 차원에서, 사회학 자체도 '수사'로 동원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기서 더 길게 설명하기에는 제 머리가 많이 부족하지만, 결국  마음을 설명하는 '사회학'에서 김홍중 선생은 사회과학적 기술, 객관적 기술의 태도만을 빌려온 것에 그친 것은 아닐까요. 고로 사회학과 객관적인 과학적 태도가 서로 혼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물론 저는 분명한 학문적 구분선을 긋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암튼. 이러한 태도 속에서, 제가 이 책이 역사적 기념비를 깨부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기념비를 더 공고하게 세우는 것이라 한 점은, 저자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풍부한 지식으로, 지난 시간에 있어온 특별한 양상들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바라봄 속에서 문화와 관계맺는 주체의 방식에 '진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계몽의 개입을 시도하고 있는 듯 합니다. 김홍중 선생은 아도르노 / 포스트- 아도르노/ 리(re)-아도르노의 사유 속에서, '계몽의 변증법'을 다시 정독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계몽의 변증법'에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해체하려는 그 '신화'로써 오늘의 문화를 둘러싼 신화를 비교할 때, 그 신화의 층위는 선뜻 '경제논리에 포섭된 문화'의 측면으로 단선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물론 제가 말하려는 것은 문화를 수용하는 자들의 모든 점들을 긍정하며 본질적 가치를 부정하는 '문화주의'의 고수는 아니랍니다. ) 

-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이후.. 

본 책의 구성, 정확히 다는 아니지만, 진정성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기술하는 시각에서, 저자가 지향하는 스타일은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과 유사해봅니다. 리스먼은 대중사회론의 대표적 저서인 이 책에서, 에리히 프롬이 말했던 '사회적 성격'이라는 것을 규명해보기로 합니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전통지향형/내부지향형/타인지향형 인간입니다. 김홍중 선생은 스놉을 설명할 때, 리스먼이 '타인지향형'을 설명할 때 제시한 부정적 인간형태의 측면으로 스놉의 부정적 측면을 드러냅니다.즉, 스놉에게 중요한 것은 타인과의 인정 투쟁이며, 자신을 과시하는 욕망의 농축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스놉을 속물로 번역한다는 것은, 스놉 자체의 개념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자신이 취하고 있는 문화적 적대의 시각을 살짝 가리는데요. 결국 속물을 스놉으로 번역한다고 해서, 진정성 체제 이후 그가 바라보는 문화적 형상에서 그 부정적 시각으로 점철된 적대감은 중화되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70년대는 청년 문화의 시대였다, 90년대는 신세대 문화의 시대였다라는 어떤 해석을 아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소위 이런 공동체의 문제를 문화적으로 해석해왔던 일련의 문화연구자들에게 '문화구성체'라는 개념은, 그 시대의 지배적 감정 구조를 문화적 실천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자들을 설명하는 데 보탬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화구성체라는 이름으로 객관화되어 있는 역사적 산물로서, 그 역사 속 주체와 그 주체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재구성과 해체의 작업을 해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지점에서 김홍중 선생이 지난 시간을 마음의 레짐이라는 개념을 통해 시대를 살아간 개인과 공동체의 마음을 독해하려는 시도는 이런 시도를 젊은 연구자들이 갈수록 기피한다는 점에서 본받고 싶음을 밝혀둡니다. 다만, 마음이라는 이 주관적이며, 해석의 차원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지점에서, 사회학이 개입하는 지성의 실천이 보여준 <마음의 사회학>이라는 산물이 주위의 반응과 달리 그렇게 성공적이라고 저는 보지는 않습니다.  

 

# '문학결정론'의 위험성

결국 문화와 인간, 예술과 인간이라는 관계에서, 김홍중 선생은 우석훈 선생이 진정성에 대해 설명한 것처럼, 하나의 정서적 개념이 인간에게 전유되었을 때, 인간은 그 정서적 개념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질문하고 있더군요. 그러나, 자칫 이런 시각은 마치 기술결정론,사회결정론, 기술의 사회구성론 등등의 논의에서 나오는 충돌점처럼, 하나의 문화적 형식이 지닌 고유의 가치를 진공상태의 무엇으로 올려놓아, 인간이 그 문화적 형식을 통해 보여주는 가능성들을 수동적이며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예로 들어 그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비판하면서, 문학은 이미 그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는데, 고진은 문학의 진정성을 너무 안이하게 보고, '과잉진술'을 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주장합니다. 해석과 해석이 맞부딪혀야 하는 시점이 왔네요. 저는 김홍중 선생이 인용하는 예술적 가치에 대한 이론과 언급들을 보면서, '매체'로서의 문학이 갖는 아직 우리가 더 고민해봐야 할 가능성에 대해, 문학이 지탱해야 할 본질적 가치라는 것을 선험적으로 규정한 지식인들의 의견으로, 문학 스스로의 존재와 소통 범위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결국 이 안에서 문학은 신이 되고, 인간은 그 신의 도움으로 진정성이라는 태도를 유념하게 되는 '신앙적 이성'을 선취하게 되는 것으로 우리는 되돌아와야 하는 것일까요.  소위 '문학결정론'이라는 위험성이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요. 

여기서 고진과 김홍중은 만납니다. 문학은 정치적인 것을 담보해왔다, 그러나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문학을 통해 정치를 상상한다는 것은 오늘날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문학을 포기하려 한다. 그것이 고진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김홍중은 문학은 살아있다, 너는 문학을 통해 정치를 사유하고,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주체들이 죽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냐고 자신의 의견을 정리하지요. 하지만, 결국 이 안에서 저는 '문학결정론'의 위험성을 봅니다. 묵독이라는 수용의 방식과 이를 통해 만들어진 개인의 진정성이 만들어진 공간, 그 공간을 만들어주는 데 문학은 그 무엇보다 우위에 서 있다라는 견지는 서로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문학결정론이 먹히지 않는 시대에 실망한 고진은 다른 운동을 하러 갔고, 김홍중은 아니야 고진아, 문학결정론은 충분히 살아 있어. 내가 진정성이라는 개념으로 네가 버리려고 한 문학적 주체들을 다시 끌어모아 볼 께 한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마음의 사회학>안에서 문학적/비문학적 구도가 나뉘어지는 것 같고, 이상하게도 정치적/비정치적 구도가 나뉘어지는 것 같습니다.  (가령, 문학적 : 비문학적 = 정치적 : 비정치적 이렇게 말이죠..)

그러나, 저자가 그토록 강조한 '포스트-진정성'체제에, 우리가 진정성을 재정립할 수 있는 방식/형식까지 건드릴 수 없는 게 아닌가, 그 자율권만은 개인에게 맡겨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1장 진정성의 운명과 이와 연관된 87년 체제 이후의 스노비즘의 계보학에서 저는 386적 주체가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계몽의 힘을 보게 됩니다. 386적 주체는 이미 진정성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 개인으로서, 진정성이 아닌 것을 경험도 해 본 개인으로서, 문화적 적대로서의 스놉이라는 문화적 주체의 윤리에 진정성이라는 훈계를 내릴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나는(386으로서) 저항한다 , 나는 타락도 해봤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완벽한 주체로)'  

 

 

.....(스놉인 아이들아)따라올테면 따라와 봐.. 

- 끝-    

* 이 논의는 본 책의 1장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고로 나머지 장은 또 다른 차원에서 시간이 날 때 고민해보고 싶네요. 양해를 구합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빵가게재습격 2010-02-06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습니다. 글 잘 읽었고요. 386이 가진 헤게모니(문화적 우선권의 의미로)를 온당히 해체(?)해야 한다로 읽히네요.(독법이 부족합니다. 제가 글을 왜곡시켰다면 양해를 부탁...^^) 반론이 있는 것은 아닌데요. '포스트 - 진정성' 시대에 '진정성을 재정립할 수 있는 방식/형식'을 개인이 담당하기엔 너무 버겁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드네요. 이론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일 성 싶기도 하고요. 역으로는 그래서 실천적인 문제라는 생각도 듭니다. 글 잘 읽고 가고요. 제가 잘못 읽었다면 지적해주세요. 과감히 삭제(!)하겠습니다. 건필하세요.^^

얼그레이효과 2010-02-07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제가 보기에 글 말미에 갈수록 힘이 딸려, 종지부를 좀 제대로 찍지 못한 것 같네요. 개인에게 주어진 조건과 그 조건에 의해 나타나는 방식들을 조직화하는 건, 우리 사회에 늘 꾸준히 요구되었던 전술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론과 실천의 구분이 아닌, 빵가게님의 말씀처럼 이론과 실천의 역동성 속에서,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지적 고맙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2-07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점에서 개인 차원으로 등 떠밀자고 한 것은 아니었구요.^^ 개인의 능동성과 자율성 너머에 함께 할 수 있는 격론과 연대의 시장이 열리길 고대합니다.

빵가게재습격 2010-02-07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잘못 읽었네요.^^ 신경쓰지 마시고요. 건필하세요.^^(좋은 글도 계속 부탁드리고요.^^)

얼그레이효과 2010-02-08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좋은 지적이셨어요. 고맙습니다.!

라살레 2013-05-06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론 아주 좋은데요. 제가 김홍중을 읽은 독법과 같은 해석이시네요. 엘리트주의적인 계몽주의. 결국 진정성이란 일자적 대자를 상정한 이분법 구도에서 나온 하나의 일자일 뿐이지요. 따라서 그의 진정성 개념 자체가 과잉해석되어 왜곡되어있다고 보여집니다. 인정투쟁을 벗어나 있고, 자기반성의 개념이 진정성이란 것에 동의하기 쉽지 않거든요. (이른바 진정성세대인 386세대들이 운동권에게)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인정투쟁의 구도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