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 다시 고민을 전개해봅니다. 사회학적 설명/해부를 통한 역사적 신화의 해체가 아닌, 단순히 역사적 테두리를 기념하는 데 그친 것 같다는 제 문제 제기는, 김홍중 선생이 심보선 선생과 함께 쓴 <87년 체제 이후 스노비즘의 계보학>에서 그가 정의한 마음의 레짐이 제시한 구도 때문이었습니다. 요약하자면, 그는 지금 이 시대를 '포스트-진정성 체제'로 규정하면서, 지난 20여년의 시간을 '진정성 체제' / '문화적 스노비즘의 체제'/ '토탈 키치'가 지배하는 3대 스놉(합리적 스놉,비판적 스놉, 룸펜 스놉)의 시대로 구분합니다. 물론 저자는 '단정 어법'을 취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구분선은 일종의 '경향'이라고 부연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에도 결국 저자가 희미하게 붙들어매고 있는 '진정성'이라는 개념, 진정성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태도 속에는, 그 태도가 일종의 지배적인 '경향'이었던-그렇게 저자에 의해 해석되고 있는- 87년 체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자가 지향하는 정서적인 태도와 논리적인 기술이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결국 정서가 논리를 압도하는 것을 지적했던 것입니다. 정서가 논리를 압도했을 때, 정서는 논리를 가장하여, 과학적 체계로 자리잡힐 수 있습니다.
결국 87년 체제라는 정서적 참조점을 부인하든, 긍정하든 그 부인과 긍정에는 그 시대를 살았던 주체만이 가지는 ' 순수한 '진정성'이 있다는 의견이 도출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문화적 스노비즘'이라는 개념을 설정하여, 386세대의 한계를 반성하지만, 그 반성은 결국 '평등한 위치'에 있는 자로서의 반성이 아니라, 그 시대의 가치를 알 수 있었던 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반성의 위치에서 머뭅니다. 그 반성의 위치에서 도출된/기술된/규정된 진정성 체제 이후의 시대 정의를 보면, 그것은 그 시대의 마음을 심층적으로 해부하여, 그 시대의 마음을 헤아리려하기보다는, 진정성이라는 개념을 최상의 위치에 올려놓고 진정성의 경향이 강했던 시기 이후의 문화적 경향은 그 시대의 마음에서 불순한 존재만을 가려내는/ 부각시키는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지점에서 이 책은 가장 점잖은 문체를 지향하지만, 가장 뜨거운 책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김홍중 선생이 지금 이 시대를 바라보며 문제화하는 지점이 분명 필요하다고 봅니다. 진정성이 부재한 시대에, 이 진정성, 올바른 사유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올바른 긴장감을 형성하는 작업은 중요하겠지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결국 그가 '마음'이라는 이 추상적인, 고로 추상적일 수 있기에 객관적 실체와 연결지어 규명해볼 수 있다는 학자의 욕망이, 마음 자체를 수사적으로, 또 마음 자체를 사회학적으로 설명하는 차원에서, 사회학 자체도 '수사'로 동원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기서 더 길게 설명하기에는 제 머리가 많이 부족하지만, 결국 마음을 설명하는 '사회학'에서 김홍중 선생은 사회과학적 기술, 객관적 기술의 태도만을 빌려온 것에 그친 것은 아닐까요. 고로 사회학과 객관적인 과학적 태도가 서로 혼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물론 저는 분명한 학문적 구분선을 긋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암튼. 이러한 태도 속에서, 제가 이 책이 역사적 기념비를 깨부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기념비를 더 공고하게 세우는 것이라 한 점은, 저자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풍부한 지식으로, 지난 시간에 있어온 특별한 양상들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바라봄 속에서 문화와 관계맺는 주체의 방식에 '진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계몽의 개입을 시도하고 있는 듯 합니다. 김홍중 선생은 아도르노 / 포스트- 아도르노/ 리(re)-아도르노의 사유 속에서, '계몽의 변증법'을 다시 정독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계몽의 변증법'에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해체하려는 그 '신화'로써 오늘의 문화를 둘러싼 신화를 비교할 때, 그 신화의 층위는 선뜻 '경제논리에 포섭된 문화'의 측면으로 단선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물론 제가 말하려는 것은 문화를 수용하는 자들의 모든 점들을 긍정하며 본질적 가치를 부정하는 '문화주의'의 고수는 아니랍니다. )
-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이후..
본 책의 구성, 정확히 다는 아니지만, 진정성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기술하는 시각에서, 저자가 지향하는 스타일은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과 유사해봅니다. 리스먼은 대중사회론의 대표적 저서인 이 책에서, 에리히 프롬이 말했던 '사회적 성격'이라는 것을 규명해보기로 합니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전통지향형/내부지향형/타인지향형 인간입니다. 김홍중 선생은 스놉을 설명할 때, 리스먼이 '타인지향형'을 설명할 때 제시한 부정적 인간형태의 측면으로 스놉의 부정적 측면을 드러냅니다.즉, 스놉에게 중요한 것은 타인과의 인정 투쟁이며, 자신을 과시하는 욕망의 농축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스놉을 속물로 번역한다는 것은, 스놉 자체의 개념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자신이 취하고 있는 문화적 적대의 시각을 살짝 가리는데요. 결국 속물을 스놉으로 번역한다고 해서, 진정성 체제 이후 그가 바라보는 문화적 형상에서 그 부정적 시각으로 점철된 적대감은 중화되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70년대는 청년 문화의 시대였다, 90년대는 신세대 문화의 시대였다라는 어떤 해석을 아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소위 이런 공동체의 문제를 문화적으로 해석해왔던 일련의 문화연구자들에게 '문화구성체'라는 개념은, 그 시대의 지배적 감정 구조를 문화적 실천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자들을 설명하는 데 보탬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화구성체라는 이름으로 객관화되어 있는 역사적 산물로서, 그 역사 속 주체와 그 주체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재구성과 해체의 작업을 해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지점에서 김홍중 선생이 지난 시간을 마음의 레짐이라는 개념을 통해 시대를 살아간 개인과 공동체의 마음을 독해하려는 시도는 이런 시도를 젊은 연구자들이 갈수록 기피한다는 점에서 본받고 싶음을 밝혀둡니다. 다만, 마음이라는 이 주관적이며, 해석의 차원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지점에서, 사회학이 개입하는 지성의 실천이 보여준 <마음의 사회학>이라는 산물이 주위의 반응과 달리 그렇게 성공적이라고 저는 보지는 않습니다.
# '문학결정론'의 위험성
결국 문화와 인간, 예술과 인간이라는 관계에서, 김홍중 선생은 우석훈 선생이 진정성에 대해 설명한 것처럼, 하나의 정서적 개념이 인간에게 전유되었을 때, 인간은 그 정서적 개념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질문하고 있더군요. 그러나, 자칫 이런 시각은 마치 기술결정론,사회결정론, 기술의 사회구성론 등등의 논의에서 나오는 충돌점처럼, 하나의 문화적 형식이 지닌 고유의 가치를 진공상태의 무엇으로 올려놓아, 인간이 그 문화적 형식을 통해 보여주는 가능성들을 수동적이며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예로 들어 그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비판하면서, 문학은 이미 그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는데, 고진은 문학의 진정성을 너무 안이하게 보고, '과잉진술'을 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주장합니다. 해석과 해석이 맞부딪혀야 하는 시점이 왔네요. 저는 김홍중 선생이 인용하는 예술적 가치에 대한 이론과 언급들을 보면서, '매체'로서의 문학이 갖는 아직 우리가 더 고민해봐야 할 가능성에 대해, 문학이 지탱해야 할 본질적 가치라는 것을 선험적으로 규정한 지식인들의 의견으로, 문학 스스로의 존재와 소통 범위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결국 이 안에서 문학은 신이 되고, 인간은 그 신의 도움으로 진정성이라는 태도를 유념하게 되는 '신앙적 이성'을 선취하게 되는 것으로 우리는 되돌아와야 하는 것일까요. 소위 '문학결정론'이라는 위험성이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요.
여기서 고진과 김홍중은 만납니다. 문학은 정치적인 것을 담보해왔다, 그러나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문학을 통해 정치를 상상한다는 것은 오늘날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문학을 포기하려 한다. 그것이 고진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김홍중은 문학은 살아있다, 너는 문학을 통해 정치를 사유하고,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주체들이 죽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냐고 자신의 의견을 정리하지요. 하지만, 결국 이 안에서 저는 '문학결정론'의 위험성을 봅니다. 묵독이라는 수용의 방식과 이를 통해 만들어진 개인의 진정성이 만들어진 공간, 그 공간을 만들어주는 데 문학은 그 무엇보다 우위에 서 있다라는 견지는 서로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문학결정론이 먹히지 않는 시대에 실망한 고진은 다른 운동을 하러 갔고, 김홍중은 아니야 고진아, 문학결정론은 충분히 살아 있어. 내가 진정성이라는 개념으로 네가 버리려고 한 문학적 주체들을 다시 끌어모아 볼 께 한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마음의 사회학>안에서 문학적/비문학적 구도가 나뉘어지는 것 같고, 이상하게도 정치적/비정치적 구도가 나뉘어지는 것 같습니다. (가령, 문학적 : 비문학적 = 정치적 : 비정치적 이렇게 말이죠..)
그러나, 저자가 그토록 강조한 '포스트-진정성'체제에, 우리가 진정성을 재정립할 수 있는 방식/형식까지 건드릴 수 없는 게 아닌가, 그 자율권만은 개인에게 맡겨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1장 진정성의 운명과 이와 연관된 87년 체제 이후의 스노비즘의 계보학에서 저는 386적 주체가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계몽의 힘을 보게 됩니다. 386적 주체는 이미 진정성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 개인으로서, 진정성이 아닌 것을 경험도 해 본 개인으로서, 문화적 적대로서의 스놉이라는 문화적 주체의 윤리에 진정성이라는 훈계를 내릴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나는(386으로서) 저항한다 , 나는 타락도 해봤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완벽한 주체로)'
.....(스놉인 아이들아)따라올테면 따라와 봐..
- 끝-
* 이 논의는 본 책의 1장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고로 나머지 장은 또 다른 차원에서 시간이 날 때 고민해보고 싶네요. 양해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