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논문이 거의 막바지 작업에 이르렀다. 오랜만에 짬을 내어 학회 세미나에 다녀왔다. 한국언론정보학회와 한국언론학회는 비슷한 이름을 가졌지만 조금 성향(?)이 다르다고 늘 들어왔다. '진보적'이라는 말이 조금 무겁기도 하고, 거칠게 표현하는 것 같지만, 한국언론정보학회의 분위기는 대학원생들을 독려하는 분위기가 좋아서 예전부터 좋은 인상을 받았다.
어제 작은 토론회에서, 내가 늘 학술적으로 존경해왔던 한 연구자의 소논문 발표를 듣고 왔다. 그는 석사 시절부터 늘 문화연구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으며, 인정받아왔다. 그리고 성장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래서 플로어 토론 시간 때 이런 내 마음을 전했고, 그 후, 그 분의 논문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나에게 그 분의 집념은 대단해 보였지만, 그 집념이 가진 유연성은 늘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그 분과 같은 학교에서 오신 한 분의 성토도 이해가 갔다. 화해의 지점? 소통의 지점? 뭐 그런 것을 마련하는 건 사실 이상적인 게 아닐까.
난 조금 더 급진적인 무엇을 꿈꾼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화연구자들끼리의 성찰게임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 바로 선언과 이론을 같이 가져 가려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론화를 통해 선언을 말하려는 자들은, 그 글을 통해 자신의 태도를 올곧게 만드는 지침서를 만들 수 있어도, 그들이 정작 아쉬워하는 어떤 부분을 개선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차라리 그들이 그렇게 바라는 '옳은' 문화연구를 지향한다면, 선언이 주는 파장에 기댄 이론보다는, 그것과 무관한 이론을 통해, 그 이론이 주는 파장을 기반으로 한 학술적 대화가 더 건설적일 것이다.
아니면, 차라리 자신이 추구하는 하나의 방식을 직접 실천해보고, 그 방식의 옳고 그름을 지적으로 적용하여, 이론화하는 작업을 하던지. 하지만, 그런 작업도 한국의 문화연구자 몇몇이 실행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론과 선언의 관계에서 주는 그 '태도'라는 측면이, '비판'이라는 좋은 용어를 갖고 있지만, 결국 자신을 이론적 순혈주의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자신은 게토화된 이론의 공간 안에 빠질지 모른다.
이것을 깨닫는 데, 2년이 걸렸다. 정치적 지향점을 드러내기 위해, 그 지향점을 향한 이론화의 밑받침은 엄청나게 어렵다. 차라리, 그 지향점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이 꿈꾸는 변화를 다른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면, 그러한 글은 굳이 논문이란 형식으로 만드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계속 든다. 그리고 난 이 생각을 당분간 철회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는 그 분의 그 화려한 문체, 그리고 열정적인 태도에 늘 존경을 표하면서도, 그 집념이 성장했다는 부분은 인정할 수 없었다.성찰과 비판이라는 좋은 개념이 다른 이에게 '죄의식 마케팅'으로 인식된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일단, 나는 계급을 사유한다고 해서, 다시 맑스로! 하는 구호는 반대다. 그리고 계급을 문제화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퇴색된 비판의식을 회복하는 것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래서 나는 하드한 정치경제학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일부 문화연구자들의 목소리에 공감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진보인들의 현실 정치에 대한 감각을 탓하는 지식인들도 결국 그 자신이 학술을 통해 꾀하는 현실 감각이 둔함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내게 그럼 답이 뭐요 물어본다면, 나는 맑스보다 피터 싱어를 공부하는 것이 그대들이 바라는 진보적 문화연구가 아니겠냐라는 답을 꺼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