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3일, 알라딘의 그녀들이 빛고을에 나타났다.
이름하여 늘푸른 작은도서관 탐방이다.^^
우린 벌써 여러차례 서울, 부산, 청주, 대전에서 만났기에
친정 언니와 동생처럼 편안하게 퍼질러 앉아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따끈한 방바닥에 엉덩이를 데우며 김치깁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집에서 찍은 사진은 없넹.ㅜㅜ
위 사진은 오늘 어머니독서회 모이면서 싼 김밥, 지난주엔 월.수.목.금 김밥을 쌌는데 이번주에도 월.수는 김밥이다.
사실 난 게을러서 바쁘면 김밥을 준비한다. 재료만 준비해 놓으면 우리식구들은 알아서 김밥을 싼다.^^
그녀들은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며 알라딘 머그컵에 카누 커피 리필로 행복한 수다는 서너 시간이 흘렀다.
새벽에 집을 나서 먼길을 달려오면서 무거운 책짐을 들고 온 ㅅ님~
그날 우리들이 나눈 책은 이런 것들~~~~
터미널 영풍문고에서 산 책은 뭐였는지 생각 안 나...
그녀들은 늘푸른 작은도서관 방명록에 흔적을 남기고...
<편지로 읽는 슬픔과 기쁨>에 수록된, 겨울방학에 내려와 둘이 사진을 박을까 하니 될 수 있으면 검정 옷을 준비하라며 동생 봉자에게 편지를 보낸 오빠 박용철은 '떠나가는 배'의 시인이다.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거냐
나두야 가련다
.
.
로 시작되는 '떠나가는 배' 박용철 시인 생가를 잠시 둘러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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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시인 용아 박용철
박용철은 1904년 6월 21일 이 고장 송정읍 솔머리 마을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재라는 칭찬을 듣고 자란 그는 3·4 세때 벌써 셈법(산수)의 가감승제를 하였고 한문의 사자소학(네 글자로 된 아동용 교훈 책, 일상생활의 범절을 비롯하여 격언 충신효자의 행적을 모은 것)을 외우는 등 일찍이 천재의 바탕을 드러냈다.
용아의 어릴 적을 아는 한 집안 노장(늙은 어른)은 이렇게 말한다. “고놈(용아를 이름) 생긴 것은 약질이었지만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지-. 한시를 써놓은 걸 제 삼촌이 고쳐주면 끝내 저 고집대로 다시 고쳐버린 그런 놈이었어-”하고 혀를 널름거렸다. 그는 마을에 있는 서당(글방)엘 다니다가 이 지방의 명문인 광주고등보통학교(지금의 서중학교)에 들어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서울 배재고등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청산학원을 나왔다.
용아가 배재고교를 다닐 때의 일이었다. 시험 때도 밤늦게까지 삼국지(중국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나 시, 소설책만 읽고 있었는데... 성적은 늘 우등을 차지했고 그 중에도 수리학(수학의 이론에 관한 학문)에 뛰어나 그의 질문에는 담임교사도 항상 당황했다고 한다. 용아는 항시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는 학생이었으니, 고교시절에 지하신문(당국의 허가나 승인 없이 숨어서 발행하는 신문)을 발간하여 항일독립정신을 고취(북돋아 일으킴)시킨 사실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18년 배재고교 3학년때 동급생들과 목탁이라는 비밀신문을 찍어 일본관헌(일본관리)들의 눈을 피해 일반 가정에까지 돌렸다가 두달 후에 발각되어 몇몇 급우들은 붙들려서 고초를 겪었으나 용아만은 그들의 감싸줌으로 이것을 모면하여 배일운동(일본을 배척하는 운동)을 계속하다가 3.1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비분(슬프고 분한 마음)한 나머지 졸업을 얼마 안두고 학교를 자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2년 동경 청산학원 4학년에 편입, 그 학교에 재학중인 김영랑과 사귀게 되었다.
그때(일본 유학시절) 용아는 형편이 어려운 우리 동포 유학생들을 돌보았고 학우들의 학비를 대주었으며 자비로 신문학, 월간문예, 문학 등 문학잡지를 간행했고 김영랑, 정지용 두 학우의 시집을 발간해주는 온정도 베풀었다. 용아는 청산학원을 졸업한 후 천재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동경 외국어학교에 합격 이때부터 본격적인 문학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1923년 9월에 귀국하여 서울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적을 두었다가 수개월 후에 뜻한바 있어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래서 강진에 묻혀 사는 옛 학우 김영랑과 왕래하면서 문학과 시작에만 전념하던 그는 1930년에 다시 서울로 옮겨 옥천동에 살면서 시인이며 옛 학우인 정지용과 함께 시문학이란 잡지를 만들어내어 우리나라 초창기 문학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는 시작에도 드물게 보는 천재였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잔을 들 때 곧 잘 노래를 부르고 가야금을 뜯는 멋과 재조(문장에 관한 재주)를 어울려 갖춘 애국시인이었다.
1937년에는 청색지라는 순수 문학잡지를 내는 한편 문학 활동과 민중계몽운동에 온 정력을 쏟던 그는 부친이 병으로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그 자신도 병을 얻어 건강을 잃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문학 활동을 계속하다가 1938년 5월 12일 34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떴다. 저서로는 박용철 전집 두 권과 시집이 있으며 대표작으로 “떠나가는 배”가 있고 “빛나는 자취” 등의 명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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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리 광산구청 뒷골목에서 떡갈비에 복분자를 곁들인 새싹비빔밥으로 저녁을 먹었고...
그 다음 찻집으로 가던 발길을 붙잡은 노래방~~~~ ㅋㅋㅋ
최신곡 하나 부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우리들의 신나는 오락시간은 여러분 상상에 맡겨요~~~~ ^^
터미널까지 택시로 10분이면 간다고 부산행 고속버스 시간 30분 남겨두고 나왔는데
택시 잡느라 10분이 훌쩍 흘러가고, 터미널까지 25분은 걸린다는 택시기사님의 엄포에 쫄았지만...
100 놓고 달려준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부산행 고속버스에 그녀를 태워보냈다.
대전에서 차를 몰고 온 ㄴ님은 광주에서 청주까지 ㅅ 님을 태워다 주고 대전 집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 한 시였다니
무려 6시간을 심야 운전한... 베스트 드라이버로 임명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알라딘은 책만 사는 곳이 아니고, 알라디너 역시 책으로만 소통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 끈끈한 정과 따스한 온기를 나누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공간이다.
그녀들은 29. 30. 31번째 늘푸른 작은도서관 평생회원으로 등록하고, 29번 회원은 장거리 대출도 불사했으며,
늘푸른 작은도서관의 발전을 기원하며 후원금도 살짝 묻어두고 갔다. 그에 더하여 식사비도 그녀들이 냈으니
나는 김치김밥만 먹인 친정언니가 되고 말았다는....
2월 한달은 실업자였지만
그녀들이 몰고 온 행운으로
2004년 10월부터 2011년 2월까지
6년 4개월 일했던 00초등학교
방과후학교 강사로 다시 채용되었다.
그래서 3월부터는 실업자가 아닌
소득세를 납부하는 근로자가 된다.
올해 신록이 푸르를 때, 광주 초청이벤트에 참가하면 근사한 한정식으로 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