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단성이 있고 늘 빨리 말하는 봉림과, 늘 두 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고 남보다 느리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자 사이의 간격은 그러나 말에만 있지는 않았다. 말의 간격은 시간이고, 시간의 간격은 세계의 간격이었다. 어제는 살아 있었던 황제가 오늘은 죽어 있는 것처럼...... 세계가 그렇게 어지러워 세자는 자주 몸이 아팠다.-23~24쪽
임금을 생각했다. 어떤 일이 닥치거나, 세자는 임금을 생각했다. 임금은 무엇을 원하시는가. 자식이 어찌하기를 원하실 것인가. 임금의 영광은 어디에 있는가.-25쪽
나라를 빼앗기고 자존을 빼앗기고 자식을 빼앗기는, 빼앗길 수 있는 모든 것을 빼앗기는 임금의 눈이 젖어 있었다. -25쪽
힘쓰도록 하라. 지나치게 화를 내지도 말고 가볍게 보이지도 말라.-26쪽
세자가 적의 땅에서 무엇을 하느냐. 그가 누구를 만나느냐.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일일이 말로 되어 나오지 않는 임금의 불안이 오히려 대신들을 두렵게 만든다고 했다.-27쪽
세자는 말을 아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항상 남보다 느리게 말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27쪽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은 조선의 이름 없는 백성들만이 아니었다. 그중에는 반상의 딸은 룰론이거니와 종친의 여식도 있었다. 신분이 낮은 여인들은 신분이 낮은 자들에게 내려졌고 신분이 높은 여인들은 신분이 높은 자들에게 바쳐졌다. 그중에서도 더 높고 더 아름다운 여인은 황제에게 바쳐졌으며. 황제는 다시 그 여인들을 신하들에게 내려 주었다.-29쪽
노루는 세자였다. 구왕이 그걸 알았고, 세자가 그걸 모르지 않았다. 청의 살을 맞고 지금 볼모로 끌려가고 있으나, 세자는 이미 죽은 노루가 아니라 앞으로 죽어가야 할 노루였다. -37쪽
때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다.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은 욕망뿐이다.-48~49쪽
적의 나라에서는 여인이 결속의 표시였다. 그 여인이 자주 세자 관소를 서찰을 보내왔지만, 봉림의 관저로는 보낸 적이 없었다.-52쪽
열이 많아 참는 것이 어려운 성품인 봉림은, 그러나 적의 땅에서 어른이 되었다. 참지 못할 것을 참다 보니, 소망하는 것이 더 뜨거워졌다. 봉림의 그 뜨거운 소망이 세자에게 때때로 위로가 되었다. -58쪽
저를 조선의 여인으로 보지 마소서. 조선의 여인은 세자 저하를 배알하지 못하옵니다. 제가 적의 몸을 받았으니 조선의 이름을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하옵니다.-60쪽
그 여인이 잡혀온 곳이 하필이면 강화성이서, 그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성이어서 더욱 글했을 것이다. 여인은 그때 죽어 절개를 보여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마땅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인은 살아남아 적의 여인이 되었다. 그것은 여인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조선의 능멸이었다. 그리고 봉림의 치욕이었다.-60쪽
속환되어 가던 반상의 따임들은 조선 땅에 이르러 난데없이 목을 매달기도 한다고 했다. 제 땅에 이르니 비로소 자신이 당한 능욕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91쪽
신령이 별것이겠는가. 살고자 하는 욕망이 신령의 뜻보다 높았다.-96쪽
미천한 말과 비루한 정보였으나, 미천하지 않고 비루하지 않은 것은 소용에 닿지 않고 만상의 말은 소용에 닿았다.-97쪽
전쟁 때마다 그들이 조선의 출병을 요구하는 것은 조선의 군대가 힘이 되어서가 아닐 그들의 후방을 비워두기 위해서였다.-97쪽
세자는 아프고 싶지 않았고 아파도 아프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그 아픔을 호소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프다 말하지 않고, 호소하는 상소도 올리지 않고 선뜻 따라나서면 조선의 임금은 그런 세자를 가상하다 하실 것인가. 그래서 세자는 가고 싶지 않은 길을 떠나는 애통한 마음을, 신하들이 임금에게 올리는 장계에 간곡하게 쓰게 했다.-101쪽
붓이 아무리 빠르다 하나 말보다 빠를 것이오? 게다가 나는 저놈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소이다. 쥐새끼 같은 놈들이 제멋대로 말을 옮기고 없는 말도 지어서 옮겨 붙이니, 저 교활한 작자들로 인해 쌓인 오해가 한둘이 아닐 것이오.-106쪽
나는 조선의 국왕을 모릅니다. 그가 병이 들었는지 아닌지. 그가 어디에다 대고 절을 하고 사대를 하는지,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세자가 그러하다고 하면 세자의 말을 믿을 뿐입니다.-110쪽
봉림은 어려서부터 많이 움직이고 많이 먹었다. 장자의 성품이 얌전하니 차남의 개구진 짓과 몸을 아끼지 않는 장난질은 흠이 되지 않았다. 한 어미의 뱅[서 태어났으나 서로 다른 아들들을 바라보는 아비에게는 즐거움이 있었다. 두 진중한 아들 사이에 결기 있는 둘째 아들이 끼어 낮아 있는 걸 보며 아비는, 내 얼굴을 빼닮지 않았으면 남의 새끼라 생각했을 터이야, 웃음을 터뜨리곤 했었다. 생김새로는 가장 많이 아비를 빼닯은 봉림이었다.-113쪽
봉림은 세자 대신 저들의 전쟁에 종군했고, 세자 대신 홀로 저들의 사냥에 쫒아 나서기도 했다. 세자 대신 죽어야 할 일이 있었다면 봉림은 마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봉림은 세자의 적이 아니었다.-114쪽
부모의 얼굴이라고는 한번도 보지 못하셨던 아기씨는 환국하는 저하 대신 볼모가 되기 위해 저하와는 반대되는 길을 오고 계시는 중이었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아비와 청나라로 떠나는 아기가 평양세서 만났을 때, 아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그 울음소리가 너무 연약하여, 저하께서는 짐짓 엄한 얼굴을 짓지 않으실 수 없었다. 그때 원손 마마의 나이 겨우 네 살이셨다.-134쪽
보이는 것만을 보지 마옵소서. 경계하고 또 경계하시옵소서. 저들은 의로은 뜻이 없고 간악한 힘만 있는 자들이나, 저들의 날이 오래가리라고 생각지 마옵소서. -135쪽
임금은 황제가 보낸 요리법을 믿지 못해, 그 큰 몸통의 살점 하나를 뜯을 때마다 은젓가락을 잡은 손이 떨렸다고 했다. 네가 나를 죽이려 하는냐, 네가 죽으려 하느냐...-148쪽
상께서는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으셨습니다. 조선이 상의 나라라 하나, 적에게 잡힌 세자 저하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사옵니까? 저하는 적에게 가까이 있고 상은 멀리 계십니다. 허나, 잡힌 것이 누구인지, 저하이신지 상이신지...... 망극한 세월이옵니다.-149쪽
세자는 임금의 아들이었다. 임금이 그들에 의해 임금이 되었으니, 세자도 그들에 의해 세자가 되었다. 세자가 그들의 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 기원의 말처럼 세자의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세자가 그들의 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세자는 적의 땅에서 결코 돌아오지 못할 것이었다. 적의 땅에 머물려 만과 밤마다 홀로 삭였던 고독이 조선의 땅에 돌아와서는 고독을 넘어 슬픔이 되었다.-161쪽
내가 백성을 생각한다. 사저를 떠나던 그 순간부터 내가 그러했다. 백성들이 전란에 다치고, 주렸다. 그 피맺힌 울음소리가 한시도 내 귀를 떠나지 않은 내 살이 아팠다. 내 살을 베어 백성들을 먹일 수 있으면 그리했으리라. 내 목을 내주어 백성들을 살릴 수 있다면 내가 그리했으리라.-176쪽
멀리 떠나 있는 아들을 생각할 때도 내가 몸이 아팠다. 베어내지 못하는 살이 붙어 있는 자리에서 아팠다. 내가 너를 생각하면 몸이 더욱 아팠다. 불로 지진 침을 맞아도 그 아픔이 가시지 않았다.
울거라. 네 몸에 울음이 가득할 것이다-176쪽
몸에 가득한 울음은 임금의 것이었다. 누구도 누구를 위해 대신 울어줄 수 없었다. 세자가 임금의 곁에 있었으나, 임금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177쪽
소년의 나이에 적국에 끌려온 석경에겐 세자가 세상의 전부였다. 세자는 그의 하늘이었고, 그가 목숨을 바쳐도 좋을 유일한 영광이었다.-187쪽
어쩌면 잠든 원손의 머리를 쓸어주며, 한 번쯤은 미안하다고 말해주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의 아비여서 미안하다......너를 나의 자식으로 낳아 미안하다.-206~207쪽
반드시 돌아가리라. 저들과 함께. 그리고 반드시 돌아오리라. 저들과 함께..... 모든 것을 갚아주리라.-209쪽
목을 매달다니 목 부러지는 것이 두려웠고, 칼로 찌르자니 피 흘리는 게 두려웠고, 혀를 깨물자 하면 입 밖으로 비어져 나올 제 혓바닥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똥구덩이에 파묻힌 것보다도 더 더러운 삶이었으나,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두려웠으니 살지 않을 수가 없었다.-222쪽
역모가 역심을 가진 자들에게서 일어나지 않고 역모를 필요로 하는 시절에 의해 일어났던 것이다. 필요치 않은 모가지들이 역모에 의해 남김없이 잘려나갔다.-222쪽
어느 임금에게 적이 아닌 자식이 있을 수 있를 것인가.-224쪽
세자는 믿을 만한 자였다. 청에 굴복하는 마음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기다림을 아는 자였기 때문이었다. 믿을 만하나 그래서 두려운 자였다.-224쪽
그들이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 오직 세자가 일어서는 날이었다. 적의 땅에서 살았던 그들의 세월을 이해해줄 사람이 조선에 있는 임금이 아니라 적국에 잡혀 있는 세자일 것이므로 더욱 그러했다.-232쪽
권세의 자리가 더러웠다. 적국에서 새자의 신세가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를 누구보다 흔이 잘 알았다. 조선에서 세자가 받는 대접이 어떤 것인지를 또한 흔이 알고 있었다. 세자의 그 곤궁한 처지가 흔의 마음을 움직였었다. 세자를 위해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흔에게 비로소 살아갈 힘이 생기기도 했었다.-251쪽
누르하치부터 시작하여 도르곤에 이르기까지 저들이 이곳에 이르기 위해 수십 년 동안의 전투를 멈추지 않았다. 죽어나가는 자들이 들판의 거름이 되고, 산 자들이 다시 전쟁의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여자의 배를 부르게 했다. 아들은 다시 전쟁에 나가고, 딸은 전쟁에 나갈 아들을 낳기 위해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는 법을 일찌감치 배웠다.-274쪽
세자가 역모에 올랐어도, 오르지 않았어도 이미 임금의 적인 것이다.-280쪽
누구나 영원히 적입니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걸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년 전, 조선은 그걸 몰랐습니다. 조선의 적이 청뿐만 아니라 명이기도 하다는 것을 아셨어야 했습니다-312쪽
내가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이 전쟁을 같이했던 사람들입니다. 장수는 모든 것을 다 잊어도 전장의 동지만은 잊지 못합니다. 세자 역시 내게 그러한 사람입니다.-312쪽
전쟁은 오직 죽음을 위해 있지만 정치는 죽음까지 농락합니다.-312쪽
나는 적이 될 수 있는 자만을 벗으로 여깁니다. 위대하지 않은 자는 적도 벗도 될 수 없습니다. 나는 벗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합니다. 언젠가는 적이 될 것이나, 그것을 기다려야 하는 것 또한 운명인 것입니다. 나와 세자가 그런 자리에 있습니다.-313쪽
이긴 자와 진 자의 자리가 다르다는 것을, 완전히 굴복해보지 않은 자는 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진 자의 자리는 바닥이 아니라 바닥 아래보다 더 낮은 곳이었다. 더는 내려갈 곳이 없으므로 그 자리가 바로 죽음이었다.-314쪽
부국하고 강병하리라. 조선이 그리하리라. 그리되기를 위하여 내가 기다리고 또 기다리리라. 절대로 그 기다림을 멈추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나의 모든 죄가 백성의 이름으로 사하여지리라. 아무것도,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리라.-316쪽
네가 죽음으로도 너의 이름을 남기지 못할 것이나 내가 이름을 남길 수 없는 자들의 죽음을 기억할 것이4다.-323쪽
오시 정각에 왕세자가 창경국 환경당에서 세상을 떠났다.-331쪽
세자가 세상을 뜨고 한 해 후에는 세자빈 강빈이 임금을 저주했다는 혐의를 입어 사약을 받았다. 이때에 세자의 세 아들도 모두 유배형에 처해졌다. 한때는 원손이었고, 아비가 살아 있기만 했다면 세손이 되었을 것이며 임금의 자리에도 올랐을 석철은 그의 동생 석견과 함께 제주에서 굶어 죽었다. 그때 석철의 나이 겨우 열두 살이었다.-332쪽
세자와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던 기억들...... 그때 고요히 흘러넘치던 세자의 고독을....... 드러낼 수 없어 더욱 깊은 외로움이 자신의 몸으로 전해지던 것을 그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333~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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