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는 『발자크 평전』 초반부에서 발자크의 어린 시절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19세의 나이에 자신보다 32살이나 많은 51세의 ‘베르나르 프랑수아 발자크’와 결혼한 발자크의 어머니, ‘안 샤를로트 살랑비에’는 장남인 발자크에게 그 어떤 사랑도 주지 않았다. 발자크는 태어나자마자 유모의 집에 맡겨져 만 네 살이 될 때까지 살았다. 그 뒤에 다른 집에 하숙을 했고 일주일에 한 번만 부모가 있는 집에 올 수 있었다. 일곱 살이 되어 방돔의 오라트리오 수도회가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들어가 7년 동안 있었다. 그곳은 학교였지만 발자크에겐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돈’이 대세가 되고, 부르주아 계급이 모든 것을 장악해 나갈 때, 발자크의 부모에게도 돈은 중요했다. 그들은 소르본 대학 법률학부에 입학한 발자크를 공부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변호사와 공증인의 사무소에서 서기로 일해야 했다. 설움과 불만을 가득 안은 채 청소년기를 보낸 발자크는 20세가 되어 작가가 되겠다는 선언을 함으로써 부모의 뒤통수를 친다. 당연히 반대한 부모에게서의 경제적 지원은 끊어지고, 파리 레디기예르 거리 9번지의 다락방에서 발자크는 공장 식 글쓰기를 시작한다.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작가로서의 성공과 생활비를 벌기 위한 이중적인 것이었다. 발자크는 희곡 『크롬웰』을 집필해 프랑스 국립극장(Comédie-Française)에서 상연할 계획을 세웠지만 그 작품은 실패했다. 발자크는 돈을 벌기 위해 공장에서 똑같은 제품을 찍어내듯, 비슷한 내용의 작품을 엄청난 속도로 써대기 시작한다. 작품의 의미와 예술은 생각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소설공장’이었다.
[그가 그 속에 몸을 감추고 수상쩍은 사업을 했던 익명이라는 외투를 잘 알게 된 오늘날 우리는, 이 수치의 세월에 그가 문학적인 온갖 더러운 짓을 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기 소설에서 찢어낸 넝마조각으로 남의 소설을 깁고, 다시 남의 소설에서 플롯과 상황을 훔쳐내서 자신의 졸작에 이용하곤 하였다. 온갖 종류의 짜깁기를 뻔뻔스럽게 맡았고, 남의 작품을 다림질하고 늘리고 고치고 물들이고 유행에 맞게 뜯어고쳤다. 그는 온갖 것에 다 손을 댔다. -p.95, ‘발자크 평전’]
『발자크 평전』의 번역자 ‘안인희 선생’은 역자 서문에서 ‘그의 소설이 가지는 결함의 목록은 상당히 길게 이어진다. 몇 가지만 꼽아보아도 질낮은 감상주의, 신문 연재소설 투의, 때로 터무니없는 줄거리 전개, 극단적인 과장법, 치명적인 문체의 결함등을 들 수 있다.’고 썼다.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초반부를 읽고 난 다음 완독한 발자크의 소설 『골짜기의 백합』은 츠바이크의 해설로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한편으로 방해가 되기도 했다. (앞으로 발자크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럴 것 같다. 아는 것이 병이다.) 주인공 펠릭스의 어린 시절이 발자크의 어린 시절과 거의 비슷했고, 이 책 전반에 걸쳐있는 과도한 표현과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무리한 에피소드가 혹시 발자크의 공장 식 글쓰기 때 묻어있는, 아무리 서울에 살아도 끝까지 고쳐지지 않는 사투리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다. 특히 인용한 안인희 번역자의 글에 계속 발목이 잡혀 발자크 소설의 본질이나 위대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사랑하는 연인이 한 번씩 보이는 우울한 표정이나 딴 생각, 침묵에 여자는 그 이유가 궁금하고 그의 사랑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펠릭스’가 ‘나탈리 드 마네르빌 공작부인’에게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나타나는 상념이나 성격의 기복에 대한 이유를 설명한 긴 편지글이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살아 온 이야기와 지금 어떤 유령의 지배를 받고 있고, ‘격심한 고통을 안겨주는 옛 감정(p10)’이 나타나는 사연을 설명하며 나탈리의 이해와 더 깊은 사랑을 바란다.
이 구절은 발자크가 1828년 다브란테스 공작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과 비슷하다.
[내 고통이 나를 나이들게 만들었습니다.… 스물세 살이 될 때까지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당신은 아마 상상할 수 없을 겁니다. -p.52, ‘발자크 평전’]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냉대로 시골의 보모에 맡겨진 펠릭스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며 자란다. 그런 이유로 항상 우울하고 체념이 몸에 배여 있으며, 명상에 빠지는 습관을 가지게 된다. 다섯 살에는 기숙학교의 통학생으로 보내지고, 그 뒤에 오라토리오회 수도사들이 운영하는 학교로 갔는데 그곳에서 8년 동안 지낸다. 부모의 후원이 없어 가난하고 비굴하게 천민처럼 살아야 했다. 열다섯에 파리에 있는 기숙학교로 전학을 갔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스무 살이 되었지만 오랫동안 방치되고 위축되어 산 탓에 펠릭스의 몸은 그 나이의 남성에 비해 왜소했다. 긴 전쟁으로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의 귀환을 축하하는 축제에서 그는 한 여인(그녀는 펠릭스를 아이로 착각했다.)을 보고 사랑에 빠졌으며, 그녀의 어깨에 입맞춤을 한다.(이 소설 속 장면에 많이 놀랐다.) 침울한 펠릭스의 성격을 치유하기 위해 그의 어머니는 펠릭스를 앵드르 강변의 프라펠 성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맡긴다. 펠릭스는 단지 느낌만으로 사랑에 빠진 그녀가 그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오랫동안 걸어서 골짜기(클로슈구르드)의 백합인, 모르소프 백작의 아내 ‘앙리에트 드 모르소프’를 찾아가 만난다.
펠릭스와 앙리에트의 플라토닉 사랑이 시작되고 그들은 서로를 의지한다. 왕정주의자인 모르소프 백작은 나폴레옹이 집권하자 10년 동안 망명생활을 했다. 나라 밖에서의 오랜 생활로 정신적으로 약해지고 병을 얻는다. 그는 망명생활 중 체념에만 빠져 있어 루이 18세가 집권해도 요직을 차지할 능력이 없었다. 두 아이인 마들렌과 자크도 병약했다. 모르소프 백작의 결함에서 오는 뒤틀림과 광증은 정신병적인 발작으로 이어졌고 앙리에트가 그 모든 것을 참으며 받아내고 있었다.
그 뒤로 클로슈구르드에서의 여러 에피소드, 펠릭스의 파리 진출, 출세 등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그것은 그 시대를 잘 반영하고 있다. 사람의 활동과 출세는 자신이 지지하는 권력이 집권했을 때 가능하고 남들보다 엄청난 혜택을 본다. 펠릭스가 갑자기 루이 18세의 인정을 받고 큰 활약을 하는 것이 잘 납득되지 않았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을 밀어주는 것은 똑같다. 이러한 것이 시대를 초월해 보편적 세상과 인간상, 인간의 심리를 잘 서술해낸 발자크 인간극의 가장 큰 역할과 위대함일 것이다. 펠릭스가 파리로 떠날 때, 모르소프 부인은 그에게 파리의 사교계와 궁정에서의 행동지침을 상세하게 알려준다. 그 구절은 딸아이에게 권해주고 싶을 만큼 상세하고도 의미가 깊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길을 떠나는 레어티즈에게 아버지인 플로니어스가 해 준 말처럼 유익했다.
펠릭스는 앙리에트가 흘리는 눈물을 ‘사랑의 영성체, 성혈(聖血)(p.103)’처럼 생각하며 받아 마시며 순수한 사랑을 약속하지만, 파리에서 그는 육체적 사랑에 눈떠 영국 여자인 ‘레이디 더들리’와 사귄다. 그 소식을 듣고 앙리에트는 상심하며 삶의 끈을 놓아 버린다. 사랑은 어느 한쪽으로만 존재할 수 없고, 육체적인 사랑을 욕망하지만 그것을 희생시켜야만 하는 것엔 한계가 있고, 그 끝은 당연히 불행할 수밖에 없는가?
이 소설은 펠릭스의 긴 편지를 받은 ‘나탈리 드 마네르빌’의 짧은 답장으로 끝난다. 어떤 독자는 나탈리의 편지 때문에 이 소설이 납득되고 좋다고 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이 주된 내용인 소설은 그것이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사랑’으로 끝나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나탈리의 편지는 이 소설을 잘 마무리하고 싶은 발자크의 개입 또는 장식으로 보인다. 이 편지가 없었다면 어릴 때부터 불행을 겪어 오고 앙리에트와 사랑에 빠지고, 또 그녀를 배신하며 전형적인 사회적 인간으로 변신하는 펠릭스의 마음, 회한, 우울을 훨씬 더 잘 살려주었을 것이다.
발자크의 인간극 중, ‘시골 생활 전경’에 속한 이 소설의 표현들과 에피소드가 약간 과했지만 역자의 ‘그 속에서 현실의 인간 유형을 찾기보다 어느덧 역으로 현실세계에서 그의 인물들을 발견하게 된다(p.402)’는 말처럼 현실에서 비슷한 인물과 인간이 엮어가는 행동,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발자크 소설을 읽는 재미다.
[“그래요, 살고 싶어요!” 그녀는 내게 기대기 위해 나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거짓이 아닌 실제의 삶을 살고 싶어요. 여태껏 내 삶에서 모든 것이 거짓이었어요. 며칠 전부터 얼마나 많은 기만이 있었는지 세어 봤답니다. 아직 살아보지도 못한 내가 죽다니, 말이 되나요?”
-p.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