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의 분노를 유발시키는 절대적인 것이 하나 있다.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타인의 핸드폰을 통해 나오는 영상이나 음악, 유튜버의 소리를 강제로 듣는 것이다. 산책길에서 그런 경우는 너무 많아 으레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사용하지 않고 영상통화를 하거나 유튜브를 보는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매번 적응되지 않는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식당의 옆 테이블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트로트 음악을 큰 소리로 틀어놓는 것이었다. 여자 직원에게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해달라고 간접적으로 부탁했다. 그녀는 직접 그 테이블로 가지 않고, 주방의 덩치가 큰 남자에게 부탁했다. 곧 남자 직원이 옆 테이블로 가 조용히 말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그 할아버지는 음악을 껐다. 어느 곳에서나 무자비하게 들리는 트로트와, 큰소리로 통화하는 소리, 극우 유튜버가 선동하는 악에 받힌 소리들이 정말 듣기 싫다.
예소연의 짧은 소설, 『소란한 속삭임』은 퇴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동영상을 이어폰도 없이 큰 소리로 틀어놓고 듣는 어떤 아저씨에게 시내가 ‘시끄럽다고’ 용기 있게 말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렇게 말하고 싶어도 그저 참고 마는 ‘내’가 완전 끌리는 장면이었다. 그런 경우에, 즉 한 사람만 용기를 내면 가해자는 오히려 큰소리를 칠 가능성이 많지만, 다른 동조자가 있을 경우 금방 꼬리를 내린다.
시내는 모아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모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너무 시끄러워 미치겠다(p.10)’고 말해준다. 잠시 후 여러 사람이 비난하자 결국 그 아저씨는 다음 역에서 내려버린다. 물론 그냥 내리면 그 아저씨의 입장에서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가 되기에 ‘에이 씨발’이라고 말하며 어느 정도 자신의 입장을 옹호한다. 안 그러면 내내 자신도 억울할 테니까. 그 아저씨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사람들이 지나치게 예민하게 굴며 착한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내몬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저 재수 없는 날이었다고 자신을 위로할 것이다. 기분 나쁘지만 참자고 자신을 다독일 것이다. 어쩌면 4분후 도착한 다음 지하철을 타고 임산부 자리에 앉아 역시 이어폰을 사용하지 않고 영상을 볼지도 모른다.
한 번씩 지하철 명동역에 내려 6번 출구를 통해 명동의 메인 거리를 지나 ‘명동예술극장’에 공연을 보러 간다. 그 길은 양쪽에 상가 건물로 둘러싸여 있고, 길 가운데로는 여러 가지 종류의 길거리 음식을 파는 가판대가 죽 늘어서 있다. 코로나 시국을 지나 점점 명동은 다시 번잡해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지하철 출구 앞이나, 명동예술극장 앞에는 보통 확성기를 통해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는 큰소리가 들리는 경우가 많다. 어떨 땐 태극기도 등장한다. 살짝 얼굴이 찡그려진다. 버스킹을 할 때도 있는데, 사실 노래 실력이 별로다.
이 소설엔 명동역 4번 출구에서 명동 성당까지의 길이 나온다. 역시나 반가웠다. ‘속삭이는 모임, 말 그대로 서로에게 서로의 이야기를 속삭이며 말하는 모임(p.15)’을 만들자는 시내의 제안을 수락한 모아와 시내는 명동역으로 나와 다른 회원을 찾는다. 왜 하필 명동이냐는 모아의 질문에 시내는 이곳에 시끄러운 사람이 많다고 대답한다. 맞는 말이다.
[“자기주장을 어떻게든 큰 소리로 전파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고요.”
“그 사람들 중 한 명을 속삭이는 사람으로 만드는 게 오늘의 미션이에요” -p.21]
다음 회원은 명동 거리에서 큰 소리로 ‘예수천국 불신지옥 심판의 날’을 외치는 수자와 집 안을 온통 쓰레기장으로 만들며 칩거하고 있는 두리가 된다. 서로에게 비밀이 아닌 것들을 ‘마치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속삭이기 시작한 그들은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각자의 한스러운 삶을 말하며 속이 조금씩 뚫리는 경험을 한다. 누구에게라도 ‘이 사람 많이 안 좋구나(p.72)’라고 비쳐질 그들의 연대가 시작된다.

최근에 넷플릭스 드라마 <트리거(trigger>를 재미있게 시청했다. 이런 종류의 드라마에 ‘재미있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 회를 제외하고는 매회 몰입해 볼 수 있었다. 한국 드라마에 총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문데, 여기에는 많은 총격신이 있었고, 방아쇠를 당겨야만 하는 나름의 이유가 존재했다. 다만 그것을 역이용하는 나쁜 세력 때문에 사람들은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 법을 찾아야 하지만 그것이 확실하게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런 딜레마를 <트리거>는 던져주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피해자가 총을 발사할 때 마음속의 묵은 체증이 사라지는 기분도 들었다. 카타르시스였다. 엄청 시원했다.
살면서 억울한 일을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 누구나 지켜야 할 규칙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당해 피해를 보고, 자식이 산업재해를 당하거나, 군대나 수학여행, 길거리에서 말도 안 되게 죽어도 진상파악과 사과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도 있고, 억울하게 폭력을 당하기 일쑤다. 여러 가지 해결되지 못한, 진행 중인 억울함은 쉽게 치료될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벼랑에 내몰린, 곪아터진 상처는 사람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표출된다.
예소연의 ‘소란한 속삭임’과 ‘트리거’는 조용함과 총성이라는 정반대의 소재로 자신의 얘기를 하려고 한다. 드러내는 방식이 다르지만,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결국 같다. 조용히, 남을 배려하며, 암묵적으로 모두가 원하는 선을 지키자는 것이다. 그것이 별로 어려운 것들이 아니다. 거창한 것도 아니다. 또한 사람과의 소통과 연대의 힘을 말해주고 있다.
작가의 말대로 이 세상은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삶을 살고 있다. 모든 사람이 다 다르다. 그 다양함 속에서 ‘나’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좋은 사회다. 각자의 개성이 유지되고 자유로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지켜야 할 것이 확실히 지켜져야 한다. 개성과 방종은 다른 것이다. 자유는 불편함 속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트리거’가 주로 방아쇠를 뜻하지만, 특정 상황이나 행동을 유발하는 계기나 촉매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트리거의 상태에서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야만 한다.
소설과 드라마는 끝에서 조금 힘을 잃는다. 좋게 끝맺으려는 작가들의 의도가 고스란히 보여 그것이 불편하기도 했다. 그들의 결말이 현실적이지도 않다. 아무리 속삭이고 총을 쏴대도 사람들의 상처와 허무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결말이 아니라면 다른 해결책이 별로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이해한다.
[속삭임에는 어떠한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든 진실이라고 믿어버리게 되는 마음가짐과 나른한 두려움, 미약한 고마움 같은 것들, 그래서 속삭이는 몸짓을 자꾸 긍정하게 됩니다. 물론 나쁜 말이나 남에 대한 험담 또한 전파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요. 우리는 모두 슬픈 삶을 살고 있습니다. 슬픈 삶 속 때때로 느껴지는 행복감에 젖어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서 서로의 내밀한 것들을 속삭이고 조금 마음이 편해지면 좋겠습니다.
-p. 96,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