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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0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황가한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어떤 사람의 인생이나, 어떤 남녀의 사랑을 누군가에게 들려줄 때, 설명이 길어질수록 그것은 불행할 가능성이 높다. 인간의 삶은 완벽히 독자적인 것은 없고 무수한 관계와 배경에 의해 수동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중에서도 더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도 있다. 불합리한 인습아래 더구나 식민지의 국민으로 살아가야함으로써 겪어야 할 일상은 혼란스럽다.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이러한 시대에 놓여있는 인간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준다.
『배반』은 1899년과 1950년대 초반, 동아프리카 잔지바르 술탄국에서의 두 ‘사랑’이 주축이 되는 내용이다. 그 사랑은 연결되어 있고 거기에 들어있는 이해관계는 당사자들을 제외하고는 다 다르다. 소설 챕터마다 붙여진 제목이 사람 이름이라서 각자의 정체성과 성격을 들여다 볼 수 있지만, 결국은 시대와 상황에 의해 개인의 삶이 매몰되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안타까웠다. 읽는 내내 먹먹하고도 슬픈 느낌을 받았다.
잔지바르섬은 인도양의 무심이라는 계절풍을 통해 인도인, 아랍인들이 들어와 그들이 경제력을 장악한 곳이었다. 원주민들은 노예로 수없이 팔려나가고 그곳에서 하층민으로 살아간다. 16세기 초에서 18세기 초까지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고, 그 후 오만의 지배를 받는다. 19세기 중반 독일이 들어와 그곳을 점령하지만 곧 영국이 침범한다. 독일과 영국은 아프리카에서 싸우고 (소설 ‘그 후의 삶’의 배경이다)영국이 승리한다.
이 소설의 시작인 1899년은 독일과 영국이 동아프리카를 양분한 상태이고 잔지바르 술탄국은 영국의 보호령이 된다. 영국인 관리(군수)가 그곳을 관리하고 내륙에서는 영국인이 관리인이 되어 플랜테이션 농장을 운영한다.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1948년 잔지바르섬에서 태어났고, 독립 직후 ‘잔지바르 혁명’이 일어났을 때 영국으로 망명한다. 영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학생들은 가르치며 글을 계속 써오고 있다. 구르나의 소설 배경이 거의 잔지바르나 아프리카이기에 어느 정도는 아프리카, 특히 동아프리카에 대해 알고 있으면 좋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경우도 많다.
매일을 그렇고 그렇게, 일상을 되풀이하며 살던 곳에 다 죽어가는 음중구(유럽인)가 쓰러져있고, 그를 구한 하사날리의 얘기로부터 이 소설은 시작된다. ‘운은 우연과는 달라서 가장 뜻밖의 사건도 어떤 의도를 충족한다(p.10)'는 소설속의 문장으로 이 운이 가져다줄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결과가 녹록치 않다는 것을 예상할 수는 있다. 동양 학자이자 학예연구원인 영국인 마틴 피어스는 그렇게 그 마을에 나타났고 하사날리의 누나인 레하나와 사랑에 빠진다. 그곳의 사람들은 인습에 갇혀있다. 카페에 앉아 수다 떠는 사람들에 의해 살이 덧붙여지고 숙성된 가십에 오르내리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부모가 죽었을 때 친척들이 나타나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면 그것을 뿌리치지 못한다. 특히 여자에게 주어진 조건은 더 가혹하고 어이없다. 그래서 레하나와 피어스의 사랑은 험난하고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부모가 죽고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아직 결혼하지 못한 레하나는 동생 하사날리가 돌봐야 할 의무이자 누군가에 의해 명예가 떨어질까 걱정하는 대상이 된다. 유부남이나 친척들도 언제든 레하나에게 청혼할 수 있고, 그것을 거절할 명분은 별로 없다. 쿠란을 배우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레하나는 생리가 시작되면서 학교를 갈 수 없고 오직 결혼을 통해서만 자신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예순 살의 압달라는 어쩌면 섹스할 여자를 원해서 청혼했는지도 몰랐다. 거리의 여자를 돈 주고 사는 치욕스러운 짓을 하기에는 그의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해했다. 나이 지긋한 아랍 남자들은 그런 결혼으로 자신의 독실함을 과시했다....이 모든 것이 육욕과 탐욕이 아니라 독실함과 인망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졌다.
-p.111]
그런 결혼이 싫은 레하나는 무심을 통해 들어 온 장사꾼 아자드와 결혼하지만 그 역시 잠시 머물다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과 사랑을 스스로 결정하고 개척하고자 하는 레하나는 피어스와 사랑에 빠지고 그들은 동거하기 시작한다. 온갖 인습으로 옭아매어 여자를 통제하는 곳에서 유럽인, 그것도 자신들을 지배하러 들어온 사람과 동거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용납하지 못한다. 레하나는 피어스 사이에서 딸을 낳고, 그 딸은 자밀라를 낳는다. 아민은 이혼녀인 자밀라를 사랑하지만 그녀 집안의 이력 때문에 부모님의 반대로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영국인 관리인(군수)인 프레더릭과 플랜테이션 농장 관리인인 버턴의 대화는 식민 사관의 전형을 보여준다. 자신들이 아니었으면 아프리카는 스스로 소멸되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프레더릭은 ‘원주민을 감시하고 그들이 서서히 복종과 체계적 노동을 받아들이도록 인도해야 할 책임(p.121)이 있다고 한다. 반면 버턴은 공적인 집무를 반대하고 유럽인이 많이 들어와 정착해야 된다고 한다. 유럽인 정착민은 아프리카를 제 2의 아메리카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한다. 수많은 원주민들이 가혹하게 살해당하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비 문명화되어 있고 야만적이기에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들이 아프리카의 모든 것을 착취해서 가져간 것들에 대한 감사는 없다.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철도를 건설하고, 불합리한 인습을 타파해줌으로써 은혜를 베풀고 자신들이 아니면 이 대륙은 영원히 원시적으로만 살 것이라 생각한다.
[마틴은 유럽인과 깜둥이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가 지치지도 않고 반복되는 것을 말없이 듣고 있었다. 이제 깜둥이란 단어는 그들이 굴복시켜 지배하게 된 누구나를 의미하게 되었다. 영국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유럽인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프랑스인과 네덜란드인, 심지어는 지배하거나 즉각적인 멸망을 선언할 식민지가 없는 폴란드인이나 스웨덴인도 마찬가지였다.
-p.124]
만약 아프리카에 유럽인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있는 종족과 문명화되지 못한 그들에게 유럽은 정말 구세주였을까? 유럽인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들 스스로 발전해 내전과 독재, 기아가 없는 곳이 되었을까? 식민지의 삶을 경험한 우리에게도 이 문제들은 비슷한 의미로 와 닿는다. 그것은 망명자이며 이방인으로 아프리카 바깥에서 산 작가 구르나가 평생에 걸쳐 풀어낼 문제이기도 했을 것이다. 오만 방자하고 당당하게 아프리카에 들어와 수많은 원주민을 살해하고 나라의 국경을 임의적으로 바꾸어버리고 그들의 삶을 앗아간 유럽은 “종잇조각에 불과한 일련의 조약들과 계약들을 남긴 채(p.213) 갑자기 어이없게 아프리카에서 줄행랑쳐버린다. 아무도 독립을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유럽 정부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혼란만이 존재했다. 쿠데타, 살인, 추방, 난민, 독재, 경멸, 부당함 등을 느끼며 다시 견디며 체념하고 받아들이고 어쩔 수 없이 살아내야 하는 원주민의 삶이 남아있을 뿐이다.
아민의 동생 라시드는 영국으로 유학을 왔지만 잔지바르혁명(말이 혁명이지 사실은 쿠데타이다.)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부모와 형제들이 힘든 시기를 보내는 동안에도 자신은 영국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견딜만해지고 나름 잘 살게 된다. 고국과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죄의식에 시달리지만 자신이 돌아가서 할 일은 별로 없기에 오랫동안 이방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라시드는 아민이 보내준 ‘아민과 자밀라의 사랑’에 대한 글을 읽고 그들에게 돌아갈 결심을 한다. 정치와 사람과 사랑 사이에서 일어난 배반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다. 라시드가 돌아간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돌아가야만 한다.
20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소설 네 편이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2022년에 출간되었다. 그 전에는 전혀 이 작가에 대해 몰랐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이라는 이유로 ‘낙원’을 먼저 읽게 되었다. 그 뒤로 ‘바닷가에서’, ‘그 후의 삶’, ‘배반’을 연속해서 읽었다. 한 작가의 작품을 연달아 읽는 것이 쉽지 않은데도 구르나의 작품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소설은 정말 매력적이다. 읽기 쉽고 다큐멘터리처럼 소설 속에 캐릭터와 사건이 자세하게 담겨있음에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역사와 정치, 그것이 인간에게 미치는 것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생동감 있고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이 소설들은 또한 우리에게 생소했던 동아프리카에 대해 많은 것을 새롭게 알게 해주었다.
얼마 전 EBS 세계테마기행에서 탄자니아와 잔지바르 여행이 방영되었다. 언니와 함께 시청했는데 나레이터가 그곳에 대한 멘트를 하기도 전에 내가 탄자니아와 잔지바르에 대한 역사, 인종, 종교, 문화에 대한 얘기를 언니에게 술술 들려줄 수 있었다. 그리고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소설을 꼭 읽어보라고도 했다. 문학의 힘이 이런 게 아닌가 한다. 글을 읽음으로써 그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인식하고, 내 머리와 심장에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가슴 벅차게 새겨주는 것 말이다.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나에게 그런 감동과 행복을 주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 관한 이야기, 파리다와 아민과 우리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 자밀라에 관한 이야기다. 하나의 이야기 안에는 여러 개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는 것, 그 이야기들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무질서한 흐름의 일부라는 것, 그리고 이야기가 어떻게 우리를 사로잡고 영원히 얽매는 가에 관한 것이다. -p.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