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의 글을 조금이라도 접해 본 사람이라면, 그 어렵고 긴 문장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다. 정말 고통스럽다. 순간순간 책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과, ‘내가 왜 사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나?’라는 회의감도 든다. 나의 친애하는 알라딘 서재 친구인 새파랑님은 무인도에 가져 갈 책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언급하셨는데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아직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나요?”
그래픽 노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본 책 보다 어마어마하게 쉽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간결한 문장과 그림을 통해 책의 흐름과 포인트를 잘 정리해 놓았다. 그래픽 노블은 책을 읽었을 때 받았던 느낌과 내용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 ‘콩브레’와 ‘스완의 사랑’을 읽으며 이전의 감정들도 되살아났다. 책에서 놓친 부분도 많지만 그래도 잘 읽었다는 확신도 들었다. 아직 ‘갇힌 여인 2’와 ‘사라진 알베르틴’을 남겨 두고 있지만,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건 ‘콩브레’이다. 그래픽 노블의 ‘콩브레’도 내가 느낀 좋은 부분을 잘 살려 놓았다. 다만 내가 상상하고 그려 온 인물의 이미지와 그림이 좀 맞지 않은 면도 있었다. ‘스완의 사랑’은 화자의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사람마다 정의하는 사랑의 의미가 다 다르겠지만, 프루스트가 묘사하는 사랑에 대해서는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는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사랑보다, 사랑을 할 때의 인간의 심리에 더 접근한 듯하다. 또한 그 시대의 관습을 비껴나지 못한 한계도 보인다.
쉽게 잘 정리된 그래픽 노블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되지만, 책이 주는 마력(魔力)에는 거의 미치지 못한다. 힘들지만 프루스트를 읽는 이유는, 책 속에 깊이 있는 성찰과 감동적인 문장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그 깊은 맛을 느끼려면 꼭 책을 읽어야만 한다.
[내가 책을 통해 겪었던 여러 행복과 불행 들을 만일 책이 아니라 실제로 겪었더라면, 그것이 제 아무리 강렬하다 할지라도 책에서처럼 그렇게 짜릿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면 이 인생의 면면들은 너무나도 더디게 진행되어 제대로 분간해내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책 속의 무대가 절반은 형태를 갖춘 채 내 앞에 펼쳐지는 때가 있었는데,...나는 콩브레 정원의 열기 속에서, 연이어 두 해 여름이나 깊은 산 계곡으로 급류가 흐르는 장관을 맛볼 수 있었다....
- '콩브레‘,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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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책을 사면서 굿즈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알라딘 적립금으로 굿즈 보다는, 책을 사는데 보태기를 더 좋아했다. 그렇지만 이번 ‘마르셀 프루스트 100주기’ 기념 굿즈는 포기할 수 없었다. 마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중이라 더 반가웠다. 두 번에 걸쳐 책 주문을 하고, 프루스트 찻잔 세트와 접시를 얻었다. 가장 먼저 여기에 홍차와 마들렌을 담아 먹고 싶었지만 우리 동네에는 마들렌을 파는 곳이 없다. 그런데 연극을 보러 간 대학로의 낙산공원으로 가는 긴 언덕길에서 우연히 마들렌을 파는 디저트 가게를 발견했다. 유레카를 외치듯 기쁘게 들어가, 여러 맛이 나는 마들렌을 사 왔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은 홍차의 향기와 함께 잘 어울렸다. 프루스트의 말마따나 책은 이렇게 우리의 일상을 짜릿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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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모태솔로인(이 말 절대 하지 말라고 했는데) 딸아이와 함께 대학로에 연극을 보러갔다. 딸아이는 혼자서 뭐든지 잘하는데 요즘은 외로움을 타는지 나를 자주 끌어들인다. 사실 아이가 연극을 예매했다고 했지만 제목조차 몰랐다. 그저 9월 8일 저녁에 시간이 되느냐고 해서 가능하다고만 대답했었다. 낙산공원으로 가는 긴 언덕길 초입에 있는 공연장 앞에서야 연극 제목이 ‘12인의 성난 사람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제목만으로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딸아이의 안목을 믿기로 했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시드니 루멧 감독의 1957년 법정 영화를 연극으로 각색한 것이다. 아버지를 살해한 18세 소년에 대해 12인의 배심원들이 최종 판결을 위한 토론을 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일급살인죄에 해당되는 혐의를 받고 있는 소년에게 유죄가 결정된다면 소년은 전기의자에 앉아 사형을 당하게 된다. 그동안 진행된 재판의 정황으로 볼 때 소년의 유죄는 거의 확실해 보였다. 이제 모든 배심원들이 만장일치로 유죄라고만 확정하면 된다. 그런데 8번 배심원이 무죄를 선언한다. 그는 자신도 정확하지 않고 잘 모르지만 한사람을, 그것도 어린 소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을 얘기해보지도 않고 결정하는 것은 안 된다고 한다. 재판 과정이 소년에게 불리하게 작용했고, 뭔가 미흡한 점도 많이 보였다고 했다. 법적으로 피고인은 변호사를 통해서만 말을 할 수 있는데, 소년을 맡은 국선 변호사는 소년을 변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반대심문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증인들의 증언 역시 무조건 믿을 수는 없다. 8번 배심원은 천천히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사람들을 설득해 나간다. 유죄라고도 생각되지만, 완전히 무죄라는 확신도 없지만 그래도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얘기하고 따져보자고 한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처음부터 소년이 유죄라고 확신한 나머지 배심원들은 화를 내며, 소리를 치고 무죄를 부정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것에는 편견과 자신의 생각과 살아 온 환경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내 것이 된 믿음과 인식을 깨기가 쉽지 않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맞아 오고, 빈민촌에서 살아 온 소년에게 당연히 살인 감정이 있을 것이라 단정한다. 그곳에서 자라난 사람들을 순진하게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악으로부터의 폭력은, 이 사회의 안전을 위해 누군가를 전기의자에 앉히는 한이 있어도 처음부터 싹을 잘라야 한다고 성토한다. 정말 그 소년이 아버지를 죽였느냐, 죽이지 않았느냐의 사실보다, 자신의 감정과 오랫동안 굳어진 생각이 우선한다.
고성이 오가고 서로에게 나쁜 말까지 해가며 분위기가 격렬해지지만, 점점 배심원들은 한 사람씩 소년이 무죄라고 생각을 돌린다. 결국 12인의 배심원들은 소년의 무죄를 만장일치로 합의한다. 사실 소년은 아버지를 죽였을 수도 있다. 무죄가 아니라 유죄일 수도 있다. 무엇이 정확한지도 옳은지도 모를 만큼 나중에는 혼란스럽다. 그래도 이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건 ‘유죄이다, 무죄이다’를 결정하기 전에 우리는 오랫동안 고민하며 얘기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싸워서 지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2시간 동안 상연된 연극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이 연극은 현재 우리 시대를 반영하고 있었다. 12인의 배심원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며 무엇이 옳고 나쁜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만 할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지금 우리는 논리적으로, 마음을 다해 격렬하게 얘기 나누고 있지 않다. 사회는 양분되었고, 그저 내 편만을 옹호한다. 쉽게 단정해버리고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내일은 추석, 오래간만에 시댁과 친정에서 가족들이 많이 모이는 날이다. 언젠가부터 시댁과 친정에서 우리의 정치색은 양분되어 있다. 처음에는 약간의 언성이 높아지며 서로의 색깔을 위한 변론과 상대방을 비방하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감정싸움으로 커지는 것을 우려해 요즘은 아예 말도 꺼내지 않는다. 서로 툭 터놓고 얘기하며, 상대의 말을 진지하게 들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만 어려울 것 같다. 그저 만나서 밥 먹고 서로의 근황을 묻고 다음을 기약한다. 연극의 내용이 너무 좋았지만 그만큼 생각과 마음은 복잡해졌다. 책이나 연극, 영화를 통한 인식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는 항상 나에게 주어진 숙제다. 어쩌면 프루스트도 거기에 골머리를 앓아 오히려 책으로 더 짜릿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