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선(삼천)은 백정의 딸이다. ‘백정이라는 표식 때문에 누구나 그녀를 무시하고 천대할 수 있다. 아버지는 일찍 죽고, 어머니마저 병들어 누워있는 딱한 처지의 열일곱 살 정선을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고 가려는 인간들도 접근한다. 그런 그녀를, 역전에서 옥수수를 팔고 있는 그녀를 한 남자가 바라본다. 첫 눈에 반한 것일 수도 있고, 약하고 가련한 것에 막연히 눈길이 갔을 수도 있다. 심한 박해에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집안에서 자란 박희수는 부모의 뜻을 저버리고 정선을 데려오는 것이야말로 신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순교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가진 모든 것을, 목숨까지도 버려 천주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 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감화를 받았다. 그는 증조모를 알게 되면서, 그녀가 사는 모습을 보고서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했다. 너를 구하기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하겠다는 마음이었다. -p60]

 

사실 그것은 허영심이었다. 그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신의 말씀을 실천할 정도의 신앙심이 강한 것도 아니었고, 부모를 떠날 만큼 용기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한 순간의 충동이었다, 그는 정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정선이 자신에게 평생 빚을 지고 있다고 여긴다. 정선은 자신에게 굽실거려야 하고, 고마워해야 하며, 남편을 떠받들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너를 구하기 위해 내 인생을 희생 하겠다...

박희수가 정선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면 분명 정선은 일본의 위안부로 끌려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선은 그 고마움으로 숨을 죽이고, 주인 노릇하는 남편을 받들고, 희수가 자신의 딸을 아내가 있는 사람에게 시집보내는 것도 감수해야 하는 것인가?

 

김사량의 소설 빛 속으로에서 야마다 하루오의 아버지인, 노름꾼에다 사람도 아닌 한베에(모자란 놈)역시 조선의 요릿집에서 하루오의 엄마를 데리고 나온다. 자신이 그녀를 그런 곳에서 데리고나와 주었다는 이유로, 그는 그녀에게 왕으로 군림하고, 결국 그녀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한다.

 

[“.....하지만 그 사람, 저를 자유로운 몸으로 만들어 준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조선 여자입니다.....”

 

지금도 이런 노예 같은 감사의 마음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다니! ...비겁하고 잔인한 한베에가 이 의지할 곳 없는 조선 여인에게 눈독을 들였다가 자기 여자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녀는 처음부터 그의 희생양으로 선택된 데 지나지 않는다. 폭력적인 반푼이 한베에에 비하면 이 사람은 얼마나 애처로운 여자인가....그녀는 매일 괴롭힘을 당했겠지. 무일푼으로 견디며 두 손 모아 그를 숭배했겠지....그녀 입장에서는 또 어쩌면, 자신이 일본인과 결혼했다는 것을 일종의 긍지로 여기고 이 역경을 살아내고 있거나 최소한의 위안을 얻고 있는지도 모른다. -p53]

 

4대에 걸친 여인들의 이야기인 최은영의 소설, 밝은 밤은 작위적으로 느껴질 만큼 여인들의 불행한 삶이 연속적으로 서술된다. 그 모든 이야기는 정선으로부터 시작된다. 공평하지 못한 제도와 관습, 가혹한 조선의 신분제도와 일제 강점기, 전쟁 등 지금의 우리 세대는 전혀 겪지 못한 고통스런 시기가 있었고, 그 한가운데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남녀차별이 있다. 슬프고 괴롭고 억울해도 그저 저항하지 말고, 포기하고 체념하고 살라고만 엄마가 딸에게 가르친다. 사위가 바람피워 딸이 이혼하는데도 엄마는 사위의 행복을 빌어준다.

 

밝은 밤과 김사량의 소설을 읽으며, 체한 것 같은 답답함과 슬픔이 느껴졌다. 항상 왜 그렇게 사람은, 특히 여자들은 힘들고 척박하게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주어진 환경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누군가의 욕망과 이기심에 희생당한다.

 

작가 최은영은 삼천이라는 인물의 힘에 끌려 작품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삼천을 지탱해준 것은 새비라는 친구이다. 다정하고 따뜻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단호해질 수 있는 사람인 새비가 없었다면 삼천의 삶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희령에서 지연은 영옥 할머니를 만나며, 하루오는 미나미 선생님의 따뜻한 공감으로 변화되고 치유된다. 소설이 사람에게, 사람이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말은 결국 이런 단순하고 간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머나먼 곳에서부터 시작된 이 말들이 돌고 돌아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서럽다는 기 무슨 말이간. 슬프믄 슬프구 화가 나믄 화가 나지. 서럽다는 기 뭐야. 나 기말 싫구만. 너레 화가 난다구 말을 하라요. 나한테 기런 말두 못하믄 내가 너이 동문가. 그래서 마당에 앉아 내 가만히 생각해보니 서럽다는 말이 거짓 같았어. 서럽긴 뭐가 서럽나. 화가 나지.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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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2-24 03: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밝은 밤 보면서는 정말 울화가 치밀었어요. 말씀하신대로 새비와 삼천의 여성으로서의 연대의식, 우정이 소설을 끌어가는 힘이었던거 같은데 그들의 후손이 주인공의 어머니는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거 치고는 너무 또 봉건적 의식에 갇혀있다는게 저는 좀 작위적으로 느껴졋어요.
김사량의 저 소설도 조만간 찾아봐야겠네요.

페넬로페 2022-02-24 13:14   좋아요 3 | URL
네, 이 소설을 읽으며 4대째 내려오면서 이 여자들이 꼭 그렇게 살아야만 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근데 시대적인 것이 컸기에 나중에는 이해가 되더라고요. 여성끼리의 연대가 없었으면 버텨내기 힘들었을것 같아요. 김사량의 소설로 그 시대를 좀 더 들여다볼 수 있었어요^^

새파랑 2022-02-24 07:1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그 시대의 이방인의 삶은 지금보다 더 힘들었을거 같아요. 그래도 새비나 미나미 선생님 같이 한 사람이라도 진정한 친구가 있다면 위로가 될거 같아요~! 저도 위의 두 책 다 너무 좋았어요 ^^

페넬로페 2022-02-24 13:17   좋아요 4 | URL
두 편의 소설로 일제 강점기와 전쟁의 시기를 볼 수 있었고 그 시대를 통해야만 인물들의 힘든 삶을 더 이해할 수 있겠더라고요. 정말 나를 위로하고 품어줄 수 있는 친구가 중요해요^^
새파랑님과 같은 책 읽어 좋아요**

coolcat329 2022-02-24 09: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지금 밝은 밤 4장까지 읽고 잠시 중단 상태인데 부지런히 읽어야겠네요. 저 시대 약자들의 삶은 참...현대를 사는 저희로선 알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이 가득했을거 같아요.

페넬로페 2022-02-24 13:20   좋아요 5 | URL
지금도 힘들다고 하지만 저 시대에 비해 여성의 삶은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근데 한편으로 전 밝은 밤에서 지연의 엄마, 미선이 잘 이해가 안되더라고요. 쿨캣님의 감상 기대합니다^^

coolcat329 2022-02-24 14:24   좋아요 2 | URL
네 그 엄마 이상하더라구요. 아니 그 상황에서 어떻게 사위를 두둔하는지...위에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저도 좀 작위적인게 아닌가 싶었네요.

미미 2022-02-24 12: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의 글을 읽으니 울컥하네요. 공감이란것은 상대를 나와같은 입장에서 생각하기에 따뜻한 울림과 치유가 있고, 차별과 타자화는 그런 공감이 없기에 비인간적이고 아파서 고통을 만들어 내는듯 합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페넬로페 2022-02-24 13:25   좋아요 3 | URL
울컥하고 속상하고 화도 났어요.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는 것이 어렵지만 또 한다면 해볼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 시도와 노력조차 하지 않는것이 안타까워요.
아마 그것도 저절로는 안되고 배워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미미님, 공감해 주셔서 감사해요^^

책읽는나무 2022-02-24 13:0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 책을 냈던 시점의 인터뷰를 들었었는데, 페넬로페님의 밝은 밤 리뷰를 읽으니 또 반갑네요^^
최은영 작가는 좀 천재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었네요.
잘 읽었습니다^^

페넬로페 2022-02-24 13:28   좋아요 4 | URL
저도 최은영 작가님 인터뷰를 들어봐야겠어요. 작가가 이 소설을 쓰면서 무척 힘들었다고 하는데 소설 속 내용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작가의 소설에 있는 그 따뜻함을 좋아해요^^

희선 2022-02-25 02:2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지금이라고 아주 좋아졌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예전에는 더 여성이 살기 힘들었네요 김사량 소설에서는 일본 사람이 조선 여자를 구해줬다고 생각하다니... 사람과 사람 사이는 대등한 게 좋겠습니다 누가 누굴 구해줬다가 아니고 조금 도와줬다 생각하고 그런 건 잊어야 할 텐데... 글을 보고는 이렇게 생각해도 막상 그런 일이 있으면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러지 않으려고 해야겠습니다


희선

페넬로페 2022-02-25 10:54   좋아요 4 | URL
사람과 사람이 대등하면 좋은데 모든 관계에서 그것이 쉽지 않으니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그 어떤것이라도 이해와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고요. 시대를 뛰어넘기가 힘든 것 같아요^^

2022-02-25 0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25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i74 2022-03-08 18: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2관왕 ! 당선 축하드려요 ~

페넬로페 2022-03-08 20:2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미니님**

thkang1001 2022-03-08 18: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2관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페넬로페 2022-03-08 20:26   좋아요 1 | URL
thkang님
이렇게 축하해주셔서 항상 감사드립니다**

새파랑 2022-03-08 18: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책 페이퍼로 당선되셨네요 ^^ 페넬로페님 축하드려요~😄

페넬로페 2022-03-08 20:27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감사합니다.
밝은 밤과 빛 속으로, 두 작품 다 넘 좋았어요**

2022-03-08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08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2-03-08 18: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페넬로페 2022-03-08 20:28   좋아요 3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2-03-08 19: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

페넬로페 2022-03-08 20:28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 감사드려용**

책읽는나무 2022-03-08 19: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제가 좋아하는 책, 작가로~~^^
또 부럽습니다ㅋㅋㅋ

페넬로페 2022-03-08 20:30   좋아요 3 | URL
책읽는나무님, 감사합니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들, 넘 좋죠!
같이 읽어 나가며 공감할 수 있어 이 곳이 정말 좋아요**

미미 2022-03-08 19: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2관왕 축하드려요 페넬로페님~😍👍👍

페넬로페 2022-03-08 20:30   좋아요 3 | URL
미미님,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2관왕 하는 것 같습니다. ㅎㅎ

bookholic 2022-03-08 23: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 님, 2관왕 두배로 축하합니다~~^^

페넬로페 2022-03-09 01:18   좋아요 1 | URL
북홀릭님, 2배로 감사드려요**
딸아이가 불홀릭님 닉네임을 보고 직관적이면서 잘 어울린다고 하네요**
찐사랑 아빠라고 전했습니다^^

희선 2022-03-09 00: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 님 또 축하합니다 두 권을 함께 이야기해서 더 좋았네요


희선

페넬로페 2022-03-09 01:19   좋아요 2 | URL
희선님, 또 감사드립니다.
읽으면서 이 두 권이 연결되어 글을 써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