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9년에 태어나 1850년에 사망한 발자크 인생 전반에는 격변하는 프랑스 역사가 들어있다. 발자크는 19세기 전반의 프랑스 사회를 그대로 담아 <인간극>이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다. 그런 이유로 발자크의 소설을 읽을 땐 처음에 힘이 든다. 발자크는 매번 소설 첫 부분에서 세부적이고도 자세히 배경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기 때문이다. 지루하기도 하고, 어떨 땐 내가 굳이 19세기 프랑스에 대해 이렇게까지 알아야 되는가에 대한 회의마저 든다. 하지만 조금만 참고 읽어나가면 촘촘하게 짜여 진 발자크 소설의 매력에 점점 빠지게 된다.
『사라진』은 비슷하게 전개되는 인간극의 시작과는 다르다. 엘리제 부르봉궁의 화려한 연회에 참석한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저녁나절 창밖 나무의 모습에서 ‘죽은 자들의 춤(죽음의 무도)’의 이미지를 본다. 죽음을 망각한 채 온갖 화려함으로 치장한 사람들이 출신이 의심스러운 랑티 씨의 저택에서 벌이는 바쿠스 축제와는 대조적인 느낌을 갖는다. 화자는 이질적인 두 그림의 경계에서 삶과 죽음, 예술과 사랑에 대한 허무를 본다.
50페이지 정도의 짧은 소설인 ‘사라진’에서 발자크는 압축적이고도 깊이 있게 ‘인간’에 대해 말한다. 권력, 탐욕, 화려함을 추구하는 인간들은 예술에게도 칼을 댄다. 아름다운 음악을 듣기 위해 어린이에게 물리적 거세를 가해 남성 성악가인 카스트라토를 만들어낸다. 조각가 사라진과 카스트라토인 잠비넬라의 스토리는 예술과 사랑조차도 인간 내면의 순수성이 아닌 조작되고 왜곡된 이미지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롤랑 바르트는 비평서 『S/Z』에서 ‘사라진‘을 분석한다. 바르트의 해석이 어려워 그 책을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지만 만약 읽더라도 그의 비평에 모두 공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소설 『사라진』은 짧지만 여러 번 읽어도 발자크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알아내기 쉽지 않다. 어떤 결론을 내기 모호하게 뭉뚱그려져 있지만 결국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 소설에 담겨있다. 현실에 묻혀 버둥거린 발자크 스스로 소설가로 사는 자신에 대한 무수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샤베르 대령』은 전형적인 인간극 소설이다. 인간극의 주요 소재는 돈과 법이다. 작가가 되기 전 발자크는 3년간 법학 공부를 했고 소송대리인과 공증인 사무실에서 2년 동안 서기생활을 했다. 이때의 경험이 이후 발자크 소설을 거의 형성한다.
‘샤베르 대령’은 나폴레옹제국의 전쟁 영웅이다. 1807년 아일라우 전투에서 공을 세웠지만 우여곡절 끝에 10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그동안 샤베르 대령은 실종자로 처리되어 법적으로 부재자가 된다. 부재자는 그의 배우자가 재산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돌아온 샤베르는 신원을 회복하려 하지만 이미 재혼해 새 남편과 아이까지 낳고 페로 백작부인이 된 그의 부인은 샤베르 대령을 부정한다.
여기에는 복잡한 법적인 문제들이 얽혀있다. 발자크의 인간극에 자주 등장하는 소송대리인 데르빌은 샤베르 대령 편에서 도와주려 했지만 결국 인내심에 한계를 드러낸 샤베르의 분노로 합의에 실패하고 샤베르는 비참하게 노년을 보낸다.
발자크의 인간극이 현실을 대변해 읽는 내내 뒷목이 뻣뻣할 정도로 추잡하고 이기적인 인간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글들이 건조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잔인하고 경쟁적 세상에서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어디엔가 꼭 있기 때문이다. 샤베르 대령도 자신의 하마르티아로 다 쌓은 공든 탑을 무너뜨리지만, 그의 이면에는 전 부인을 지켜주려는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샤베르가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좋은 심성을 가진 사람에 대한 경의와 측은지심도 느껴진다.


1891년 프랑스문인협회는 로댕에게 발자크 조각상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한다. 7년 동안 고심한 끝에 만들어낸 로댕의 발자크는 사람들이 기대한 모습이 아니었다. 발자크의 위대함이 돋보이는 섬세한 표현이 없는, 그저 망토 자락으로 둘러싸인 3m 정도 높이의 거대한 덩어리 같은 모습에 사람들은 실망했고 문인단체는 인수를 거부했다. 로댕은 석고 모형을 집에 보관했고 그가 죽고 22년이 지나서야 청동상으로 다시 주조했다. “로댕의 조각은 근대와 현대의 경계를 형성한다. 로댕은 발자크의 내면성을 조형적으로 표현하고 싶어 했다” 모란미술관의 발자크 상은 몰드로 뜬 석회상 10점 가운데 하나이다. 루브르미술관 아틀리에에서 제작한 마지막 에디션이다.
작년 한 해 동안 클래식 독서동아리에서 발자크 소설을 읽던 중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에 있는 모란미술관에 로댕의 발자크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막연히 그곳이 멀다고 생각해 언젠가 가봐야지 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가까워 초록이 싱싱하고 여러 색의 철쭉과 연산홍이 만발한 봄날에 그레이스 님, 카리나 님과 함께 모란미술관에 다녀왔다.
잠실역 환승센터 6번 게이트에서 8002번을 타고 모란공원에 하차하면 바로 모란미술관이 있다. 2층 버스가 있어 버스 2층에 탑승했는데 색다른 재미가 있어 좋았다. 올림픽 대로를 지나 모란미술관까지는 40분 정도 소요되었다.
2010년 반청자 여사가 기증한 발자크 조각상이 모란미술관의 모란탑 내부에 전시되어 있었다. 모란탑은 자연 채광이 되는 아주 높은 탑인데 그곳에 발자크가 우뚝 서 있었다. 두근두근 기대하며 직접 본 발자크 상은 그야말로 위엄이 넘쳤다. 100년도 전에 살았던 프랑스 작가가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자신의 소설을 읽고 찾아 온 이 세 여자에게 어떤 감정이 드는지 궁금했다. 우리는 왜 그리 발자크의 소설을 열심히 읽었던가?
발자크의 소설을 읽고, 발자크의 삶을 안다면 로댕이 만들어낸 발자크 조각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라진>과 <샤베르 대령>처럼 정반대의 소설을 만들어 낸 작가, 평생 돈을 좇으며 살았지만 돈의 감옥에서 헤어날 수 없었던 인간,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청소년 시기를 보낸 사람,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던 남자, 뒤늦게 결혼했지만 곧 병으로 죽어버린 발자크....
어떻게 그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겠는가?
로댕은 그의 삶 전체를 한 덩어리 속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내 오른편으로는 어둡고 소리 없는 죽음의 이미지가, 내 왼편으로는 삶의 격조 높은 바쿠스 축제가 펼쳐졌다. 이편에는 차갑고 음침하고 애도에 잠긴 자연이, 저편에는 흥에 취한 사람들이 있었다. 별의별 방식으로 수없이 되풀이되며 파리를 세상에서 가장 유쾌하고도 가장 철학적인 도시로 만드는 두 이질적인 그림의 경계에서 나는 반은 경쾌하고 반은 을씨년스러운 정신의 혼합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왼발은 장단을 맞추는데 다른 한 발은 관 속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몸의 절반을 얼어붙게 만드는 외풍에 내 한쪽 다리는 얼음장 같고 반대쪽 다리는 무도회가 열릴 때면 흔히 그렇듯 살롱의 끈적끈적한 열기를 맛보았다.
-p.12~13]
발자크가 쓴 ‘사라진’의 이 문장이 발자크 조각상을 바라볼 때의 내 느낌과 똑같았다.





날씨가 화창한 봄날의 모란미술관 야외조각장은 너무 좋았다. 대부분 1990년대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약간 시대에 뒤쳐졌지만 레트로한 분위기가 정감 있었다. 정원의 수목 관리가 잘 되어 있어 그곳의 조각들은 나무와 싸워야 할 정도였다. 가을에 가도 좋을 것 같았다. 미술관 내부에는 《사물로부터》라는 제목의 기획전이 열렸다. 관람객이 별로 없어 도슨트 님이 자세하고 친절하게 전시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작품 하나마다 작가가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의미를 두는지에 대해 새삼스레 느낄 정도로 도슨트 님의 설명이 도움이 되었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