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싱겁다는 말이 있다. 뭔가를 시도할 때마다 어설프고, 말이나 행동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고 엉뚱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혼종과 변종이 그득한 21세기 한국 만화계에서 고고(孤高)하게 왕도를 걷는 정통파 개그 만화이기를 주장하는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에게서 받은 느낌이 바로 싱겁다는 것이었다. 인물의 설정과 연결이 다소 과장되었고, 만화 특유의 개그적 속성마저 유치하다. 인용된 책들이 어려워 약간의 허세도 느껴졌다. 하지만 이 책은 독서 중독자들의 책에 대한 사랑과 원칙이 있어 흥미로웠다.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 반가웠다.

 

사람은 각자 살아가는 환경과 태도와 성격이 다르다. 그러나 책이라는 것을 매개로, 특히 같은 책을 읽은 후, 독서 모임에서 만나면 일체감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밑줄 그은 부분이 다 다르고, 감동과 비판적인 생각의 포인트가 틀리지만, 일단 한 권의 책을 읽어내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 자체가 한 배를 탄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 책 속에 있는 독서 중독자들과 나란 사람은 그런 면에서 닮았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알라딘 서재에서도 화수분처럼 쏟아지는 책의 목록과 글들은 똑같이 나를 좌절하게 한다.

 

독서 모임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노마드는 매번 쫓겨난다. 고품격 독서 모임에서 추방당하지 않을 방법은....

 

1, “자기개발서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p17)”라고 말하지 않기

 

2, 다시 돌아온 노마드는 자기개발서가 아닌 인문서를,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역사책을 읽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영국의 사학자 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말했죠.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p62

그는 또 쫓겨난다.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p63)”라고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3, 불굴의 의지로 다시 돌아온 노마드는 탁자위의 마들렌을 보며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보면....(p69)" 이라고 말하자 말자 밖으로 내동댕이를 당한다. 이유는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참조하시길.

 

4, 포기할 줄 모르는 노마드는 당당하게 돌아온다. 아날 학파, ‘경제사회사 연보‘, 랑케 역사학, 20세기 역사학, 페르냥 브로델, ’지중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등을 읽고 공부한 그는 다시 등장해 그간의 성과를 이야기한다. “다들 항문학파 아시죠?”(p155)

그리고 퇴장 당한다. 이제 막 역사책을 읽기로 작정했다면 윌리엄 맥날의 세계의 역사’, 또는 지오프리 파커의 아틀라스 세계사로 시작하는 것이 좋단다.(p158)

 

5, 여러 번 거부당했지만 노마드는 달라졌다. ‘역사를 위한 변명을 읽고 있고, 희망과 각오를 적는 아침 일기를 쓰고 언젠간 모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책상위에 있던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딸아이가 나에게 말했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엄마잖아....”

딸아,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아버지 제사가 설 열흘 전에 있다. 엄마와 언니가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왔고, 두 사람은 오빠 집에서 제사를 마치고 우리 집에 며칠 머물다 다시 설을 쇠러 오빠 네로 갔다. 치매를 앓고 계신 엄마는 나흘 동안 우리 집에 머물렀다는 기억을 금방 까마득히 잊어버리셨다. 엄마보다 연세가 많으신 시어머니는 거동이 불편한 점 빼고는 건강하시고 정신도 온전하시다. 하지만 당신이 가진 것보다 언제나 친정 엄마의 거동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하신다. 먼 훗날, 나에게 기억의 멀쩡함과 거동의 자유로움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내가 읽었던 무수한 책들의 기억이 모조리 없어진다면 어떡할까? 그저 익명의 독서 중독자였다는 사실만으로 나 자신을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아득하다. 독서가 나의 즐거움이자 보람이라면 혹시 내 인생에서 독서 때문에 놓친 부분은 없는지도 두렵다. 인생을 더 깊이 있고 따뜻하게 살 수 있었는데도 독서 때문에 그런 기회를 잃어버리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산다는 건 갈수록 어렵다.



그나저나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올림픽엔 별 관심이 없는데 요즘 나의 독서 방해자는 넷플릭스이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의 맨 마지막 두 페이지에는 이 책을 쓰는데 참조한 책 목록이 가득하다. 언제나 똑같이 내가 읽어 본 책이 거의 없다. 2월엔 정신 차리고 책을 읽고 글을 써야겠다


댓글(24)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2-02-03 15:1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그림만 봐도 웃겨요ㅎㅎㅎㅎ 노마드 가엽죠!ㅎ 포기를 모르는. 저에게도 유치찬란한 만화였지만 독서에 관한 이야기라 이곳저곳 공감하며 읽었네요. 딸의 인정을 받은 독서중독자 페넬로페님~^^♡

페넬로페 2022-02-03 20:02   좋아요 5 | URL
미미님 덕분에 재미있는 책 읽었어요. 좀 유치했지만 나름 진정성이 있어 좋았어요. 독서에 대한 것만으로도 공감이 되었는데 역시나 우리는 책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아요^^

잠자냥 2022-02-03 15:4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와, 베이징 동계올림픽 하루 앞으로 다가온 거 페넬로페 님 이 페이퍼 보고 처음 알았어요! 띠용....

페넬로페 2022-02-03 20:03   좋아요 5 | URL
저도 이제서야 알았어요 ㅎㅎ
중국의 텃세가 걱정이예요^^

2022-02-03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03 2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2-02-03 16: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독서는 온전히 나의 것이지 남과 비교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자괴감 밖엔 드는 것이 없는 것 같아요.
자신이 읽은 책에 만족해야지 읽지 않은 것에 괴로워하면
한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근데 이 책 재밌을 것 같긴하네요.^^

페넬로페 2022-02-03 20:23   좋아요 4 | URL
네, 저도 나만의 독서를 하려 매번 노력하지만 또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달리고 있음을 느껴요.
독서 자체의 기쁨과 여유로움을 가져보겠습니다~~

새파랑 2022-02-03 17:56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저도 싱거운 사람입니다~!! 저도 티비를 아예 안보는데 왠지모르게 공감이 되네요 ^^ 저도 익명의 독서 중독자에 들어갈수 있을거 같아요~!!

페넬로페 2022-02-03 20:26   좋아요 6 | URL
저희집도 어느샌가 티비가 애물단지가 되었어요. 저는 책을 읽느라, 나머지 가족들은 노트북이나 패드로 영상을 더 즐겨봐요.
새파랑님은 익명이 아닌 이미 유명하신 독서가이십니다^^

mini74 2022-02-03 18:4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변태의사 지민 사실은 의사도 아니죠 ㅎㅎㅎ 제 최애는 예티 그 다음 사자입니다 ㅎㅎ

페넬로페 2022-02-03 20:27   좋아요 3 | URL
저는 노마드요. 꼭 저 같아서~~

레삭매냐 2022-02-03 18: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4번에서 그만 빵 터져 버렸습니다..
항문 학파라니~

자유로운 거동과 온전한 정신
너무 어려운 선택이네요.

올림픽이 먹는 건가요?
월드컵도 안본 사람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레알 책덕후들입니다.

페넬로페 2022-02-03 20:30   좋아요 2 | URL
저도 그 부분에서 많이 웃었어요.
은근히 이 책이 어려운 책을 많이 다루고 있어 사실 저도 노마드가 왜 쫓겨났는지 잘 모를때도 있었어요.
우리 모두는 진정 책덕후들입니다.

책읽는나무 2022-02-03 20: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책이 재밌네요?ㅋㅋㅋ
그나저나 아버지 제사 지내시랴~ 어머니와 언니 밥 챙기시고, 설 연휴까지..... 바쁘고 고단하셨겠습니다. 친정어머님과 시어머님 두 분을 봴때 많은 생각이 들겠군요?ㅜㅜ
모쪼록 모두 무탈하셔야 할텐데 마음이 무거우시겠어요.
그래도 늘 긍정적인 파워가 느껴지는 페넬로페님이시니 긍정적으로 잘 이끌어 나가시리라 생각합니다^^

페넬로페 2022-02-03 21:08   좋아요 5 | URL
이 책이 은근 재미 있었어요.
저는 친가와 시가, 둘 다 서열이 아래여서 두 노모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고 있어 매번 죄송해요. 그저 일년에 며칠 엄마를 모시면 돼요. 근데 이런 것에 또 젖어들어 은근 편하려고도 하는것 같아요.
올해는 좀 더 두 노모에게 잘하려고 합니다. 늙는다는 것은 참 서글프고도 먹먹해요 ㅠㅠ

그레이스 2022-02-03 22: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고생 많으셨어요~♡
이 책이 휴식이 되셨겠네요^^

페넬로페 2022-02-03 23:49   좋아요 3 | URL
1월의 후반부는 정신없이 지나갔던 것 같아요. 나름 엄마 모시고 드라이브도 많이 하고 추억을 만들어 드렸는데 마음속으론 다 간직하고 계시겠죠~~
그레이스님, 지금 이 순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삽시다요^^

scott 2022-02-04 00: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엄마가 익명의 독서 중독자 라면!
전 멋진 안경을 선물해 드립니다(실제로는 선글라스로!ㅎㅎ)
페넬로페님 기나긴 설 연휴 동안 흩어져 있는 가족과 행복한 시간!
부모님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저희 친할머니는 거동이 불편 하셨지만 기억과 사고는 큰아들보다 위!
외할머니는 거동은 자유 자재!(지하철 항상 애용 ㅎㅎ)
신간 베스트 위주로 열독했던 지성美
그러나,,, 자손들에게 두려웠던 존재 ㅎㅎㅎ(거동이 편하셔서 넘 많이 돌아댕기쉼 )

페넬로페님 2월 독서!
열독 응원합니다 ^ㅅ^


페넬로페 2022-02-04 01:18   좋아요 3 | URL
딸아이에게 꼭 안경 사달라고 말해야겠어요 ㅎㅎ
나이들어서 거동의 자유와 정신의 온전함, 이 두 마리 토끼를 꼭 잡고 싶어요~~
2월에 열심히 달릴께요^^

희선 2022-02-04 00: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곧 베이징 동계올림픽이군요 올림픽에 나가네 마네 그런 기사가 보이기도 했는데 동계올림픽이었네요 설 연휴 동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겠습니다 페넬로페 님 이월에도 즐겁게 책 만나시기 바랍니다


희선

페넬로페 2022-02-04 01:22   좋아요 4 | URL
이번 동계올림픽이 논란이 많았던 것 같아요. 설 연휴 전부터 바빠 이제야 한숨을 돌렸어요. 모든게 걱정되었는데 막상 닥치면 또 금방 지나가더라고요~~
희선님께서도 2월에 좋은 독서하시길 바래요^^

페크pek0501 2022-02-06 11: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번호 매겨 쓰신 것을 보고 나 웃겨 죽어요.ㅋㅋㅋ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는? - ˝예전에 읽어서 내용은 기억이 안 나.˝
처음 읽는 고전에 대해서는? - ˝이번에 두 번째로 읽는 거야.˝
ㅋㅋㅋ

페넬로페 2022-02-06 16:46   좋아요 2 | URL
노마드가 웃기기도 하고 안됐기도 했어요 ㅎㅎ
아!
그런 방법도 있군요..
잘 참조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