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고, 그 소설이 너무 좋아 그런 글을 쓴 작가를 좋아하게 된다. 그(그녀)가 세상과 인간을 들여다보고 치열하게, 필사적으로 써낸 글들은 벌건 불꽃처럼 살아 있다. 생명이 있다.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네이버 국어사전)이 ‘일기’이지만, 막상 우리들이 쓴 일기엔 ‘개인적’인 것이 별로 없다. 편안함과 솔직함이 있어야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에서도 우리는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고, 자신을 믿지 못하며 끝까지 나를 내려놓지 않는다.
“소설이 아닌 일상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고(p76), 자신의 글이 어디까지 개인적일 수 있을까, 어디까지 쓰고 싶은가, 쓰고 싶은 그것은 사실 어느 정도로 개인적인가(p161~162)”라는 고민과 우려가 있는 황정은의 ‘공적인’ <일기>는 오히려 담백하고 솔직하다, 가슴 밑바닥에서 끌어낸 자신의 아픔이 있고, 타인의 고통에도 깊숙이 들어간다. ‘누군가의 애쓰는 삶’이 국경을 넘어 내 일상과도 연결된다는 그녀의 말은 지금 이 순간, 가볍게, 아무 생각 없이 내 의지와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을 생각으로 이어지게 하며 책임을 느끼게 한다.
[어떤 날들의 기록이고
어떤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이기도 해서,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 독자들이 잘 피해갈 수 있도록 ‘일기(日記)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p197, 작가의 말에서]
황정은 작가를 좋아하는 내가 그 기록이 궁금하지 않아 피해갈 수는 없다. 이 책은 ‘일기’라는 제목답게 작가의 일상이 많이 나와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파주, 산보, 운동, 건강, 동거인과 가족들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겪는 상황(코로나 시국)과 똑같아 작가와 나의 일상이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느낌은 다르다. 그녀가 보는 책과 이웃에 대한 따뜻한 관심, 혐오와 폭력의 결과와 그 우려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세상을 놓지 않겠다는 투혼이다. 그리고 그 세상이 좋게 변화되기를 원하는 바램이다.
[산보하시나요.
산보할 시간이 있나요.
산보할 장소가 있나요.
어디 사세요.
거기선 산보, 가능합니까
이런 질문은 함부로 하면 안 될 것 같다고 동거인은 말한다. 내가 모르는 남의 조건을 기웃거리는 질문일 수 있다고.-p122]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행동인 걷기조차도 어려운 조건과 환경이 있다. 기본적인 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인간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환경에 순응해버리고 만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우리는 너무 쉽게 많은 것을 질문하고 판단한다. 작가가 표현한 ‘축약’이라는 단어에 많이 머물렀다. 내가 얼마나 축약된 상태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판단했는지, 누군가를 미워하고 이해하지 않았는지, 이 한 단어가 송곳처럼 나를 파고들었다.
독자들이 있는 ‘공적인’ 장소인 이 곳에 어떤 글들은 내보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부모님의 폭력적인 행동과 말들, ‘흔(痕)’이라고 표현된 어릴 때의 상처와 그 아픔들에 벗어나고자 얼마나 애쓰며 살았을지 차마 안다고 말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타인의 고통을 알고자 하고 평안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들에 감동받는다. 글 쓰는 노동자의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지만, 그 글쓰기를 통해 작가는 어른이 되고, 상처와 고통을 치유 받을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러니 그녀에게 계속 좋은 글을 써달라는 주문을 할 수 밖에 없다. 부담스럽겠지만 어쩔 수 없다.
[가장 하고 싶은 말은 고맙다는 인사였다. 그 이야기를 쓰는 동안 나는 내가 겪은 일이 나를 먹어치우지 않도록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게 실은 내게 필요한 일이었다는 걸 그 원고를 쓰며 알았다. p187]
'백의 그림자‘는 거의 40년이 된 도심 속의 전자상가에 삶의 터전을 두고 있는 은교, 무재, 유곤, 여씨 아저씨의 그림자와 그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불행한 경험을 함으로써 힘들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그림자는 밤길의 동무처럼 따뜻하거나 낭만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림자는 일어서서 그들을 집요하게 따라오게 하고, 어쩌면 그림자에 이끌려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한다. 등에 달라붙어 밀면 미는 만큼 강하게 반발하며 어차피, 어차피하고 말하며 소름 돋게 한다.
그림자는 검디검게 휘어져서 몸을 빈틈없이 덮고서 그들을 무기력하게 만들며 압도한다. 슬픈 무재는 콩밭, 에서부터 목이 메서 칠갑산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 외로운 산길에 구두 발자국을 목이 메서 부르지 못한다.
이때껏 신기하게만, 예쁘게만 보아온 마뜨로슈까 인형을 무재는 마뜨로슈까속에 계속 마뜨로슈까만 있기에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고, 그처럼 공허하기 때문에 사람 사는 것하고 어딘가 닮았다고 늘 생각한다.
몇 년 전에 읽은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는 나에게 소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가보지 못한 세계로 데려다주는 무지개빛 자유의 여정이기보다 섬뜩하리만치 처절한 세상의 그림자를 이해시키는 도구가 되게 하였다. 여전히 세상일을 회피하고 싶은 나에게 더 인식하라고, 더 느끼라고 가르쳐주는 채찍이었다.
은교, 무재, 유곤, 여씨 아저씨는 서로에게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그림자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라고 말해준다. 힘들고 가난해 궁상맞게 살고 있지만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며 따뜻하게 대해준다. 황정은 작가는 식상하지만 그래도 세상살이가 사람으로 인해 위로받는다고 말해주고 있다.
‘일기’에도 작가의 그 따스함과 위로가 똑같이 들어 있다. 아픈 사람들을 바라보고 걱정하며, 연결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건강하시라고, 평안하시라고 말해준다. 나에게 ‘그림자’를 좀 더 많이 이해시켜 준다.
오래간만에 이 책을 도서관 열람실에서 읽었다. 내가 가는 도서관 앞에는 트럭에 뻥튀기 과자를 가득 싣고 장사를 하는 아저씨가 늘 있다. 하루 종일 손님을 기다리는 그는 차에 앉아 노래를 듣거나 의자를 내놓고 해바라기를 하며 책을 읽고 있다. 그에게 황정은 작가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작가에게도 평안하고 건강하기를 바란다.
[그래도 나는 자주 바란다고 말하고 믿는다고 말한다. 예컨대 당신의 건강을 바라고 사람의 선의를 믿고 굳이 희망하는 마음을 나는 믿는다. 믿어 의심치 않겠다는 믿음 말고, 희구하며 그쪽으로 움직이려는 믿음이 아직 내게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내게 있으니, 사는 동안엔 내가 그것을 잃지 않기를. -p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