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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 어느 포로수용소에서의 프루스트 강의
유제프 차프스키 지음, 류재화 옮김 / 밤의책 / 2021년 1월
평점 :
1939년,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된다. 이때 소련군은 폴란드 장교 및 지식인을 대거 수용소에 가둔다. NKVD(내무인민위원회-스탈린의 통치 기간동안 행해진 정치적 숙청의 직접적인 실행 기관)는 포로들의 성향을 철저히 파악하여 소련 체제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모두 제거하자고 스탈린에게 제안했고, 스탈린도 이를 수용한다. 1940년 봄, 카틴 숲에서 수천 명이 학살된다(카틴 숲 대학살). 카틴 외에도 하리코프, 칼리닌 부근 수용소의 포로까지 합치면 당시 목숨을 잃은 폴란드인은 총 2만여명에 이른다. 결국 그 지역에 살아 남은 포로는 그랴조베츠 수용소에 있던 400여 명의 장교와 군인들 뿐이었다.(서문과 옮긴이 미주에서)
우리는 지적 노동을 해서라도 무너지지 않아야 했다. 우리를 잠식하는 쇠약과 불안을 극복하고 뇌에 녹이 스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리하여 우리 중 몇 사람이 군사학과 역사학, 문학 강의를 시작했다. -p10
영하 45도까지 떨어지는 추위 속 노역으로 완전히 녹초가 된 채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의 초상화 밑에 다닥다닥 붙어 않아, 당시 우리는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제에 대한 강의를 열중해 듣던 동료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이 같은 각고의 지성적 노력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우리의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던 ‘정신’의 세계를 생각하고 그것에 반응할 수 있었다. -p12~13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동료들을 보며, 항상 죽음의 문턱에 서 있던 그들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정신’의 세계만이라도 붙들고 있어야 하는 상황은 위태롭다. 인간의 육신은 그들의 지성과 정신을 위해 희생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오히려 집요하게 유기적인 작동을 하고, 그 결과를 인식시키려 한다. 그러한 현실에서 안간힘을 쓰며 ‘정신’을 지키려하는 그들의 모습은 숭고하다. 필요한 책을 구할 수 없고, 가진 것이라곤 프루스트 작품에 대한 기억만으로 강의를 하며, 육신의 피곤함 속에서도 모여 앉아 강의를 듣는다. ‘교외수업’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순간들의 시간은 그들에게 기쁨이었고,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로 남아 있다고 한다. 왜 아니겠는가.
폴란드 출신의 화가이자 작가인 ‘유제프 차프스키’의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는 그랴조베츠 포로 수용소에서 동료들을 위해 ‘마르셀 프루스트’를 주제로 강의한 그의 노트 일부를 옮긴 것이다. 이 책의 서문을 통해 알게 된 그들의 숭고한 이야기에 내가 더 기대한 것은, 수용소의 현실과 강의를 듣는 그들의 느낌과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배경에 불과하고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차프스키의 프루스트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강의의 내용이다. 그것에 대해 살짝 실망했지만, 곧 그의 강의에 빠져들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세 번 정도 도전하고, 곧 포기해버린 책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내가 꼭 읽어야 할 책이기에 차프스키의 강의는 나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좋은 입문서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프랑스의 문화적인 배경을 시작으로 프루스트에 대한 개인적인 소개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내용에 대해. 비록 조각조각, 자신의 기억만으로의 강의이지만 무척 훌륭했다. 이 책을 전혀 읽지 않은 미래의 독자인 나에게 흥미를 주었으며,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에 대한 구절에서는 재미있기까지 했다. 10권이 넘는 대하소설의 내용을 기억하며, 생각을 꺼낼 수 있다는 것은 저자의 프루스트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열정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만약 내가 그러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난 우리의 정신을 위해 무엇을 얘기할 수 있고, 읽은 책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매일 매 순간, 책을 읽지만, 읽은 내용에 대해 정리하고, 깊이 생각하는 것이 부족한 나이기에, 자신있게 기억으로만 얘기해줄 수 있는 책이 별로 없음을 실감한다. 이 책은 나의 책읽기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하게 만든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프로스트의 작품에 대한 기억뿐이어서 어떻게든 그것을 정확하게 떠올려 보려고 정말로 애를 많이 썼다. 사실 이것은 문학 에세이가 아니다. 내 인생에 언제 다시 만나볼 수 있을까 싶은 책, 내가 정말 많은 빚을 진 어느 작품에 대한 추억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서문에서)
책을 읽다 보면, 어떤 책은 내가 기대하지 않던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나의 고민을 해결해주기도 한다. 출판사를 바꿔가며 두 번이나 꼬박 읽은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는 ‘좋은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아니 ‘나에게’ 좋은 소설이란 무엇인가가 맞는 표현일 것이다. 이때까지 내가 생각한 좋은 소설이나 고전은 시대적인 상황과 작가의 이력을 배제하고(물론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냥 글을 읽음(글 속에서)으로써 특별하고도 보편적인 느낌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울프의 소설은 그러한 느낌에서 살짝 빗나갔다. 서사를 거의 배제하고, 자신의 경험에서 온 것들을 ‘의식의 흐름’속에서 계속 내뱉는 그 말들은, 작가의 배경을 잘 모르고서는 이해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등대로’는 나에게 좋은 소설인지, 아닌지가 잘 판단되지 않았다. 차프스키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처음 읽었던 시기는 프랑스어에 대한 실력이 그렇게 대단한 편이 아니었을 때이다. 문학적 소양도 많지 않아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책에서 주는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때 나를 사로잡은 것은 프루스트가 다루는 이야기와 그것에 담긴 의미였지 문학적 질료나 형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들의 조합으로써 심리를 해석하는 예지가 곧장 내 가슴을 밀고 들어왔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내가 생각한 울프의 글에 대한 나의 느낌이 굉장히 편협적이고, 결국 나의 독서는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학과 예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형식을 파괴하고, 내 안의 굳은 덩어리같이 뭉쳐있는 아집과 벽을 파괴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가 얘기하는 것들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이면의 것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궁극적으로 그렇게 해야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차프스키의 문장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들을 뒤늦게 깨닫는다.
프루스트는 나이가 들면서 어떤 냄새나 어떤 향기도 참을 수 없게 되어, 생애 마지막 몇 해 동안 전체를 코르크로 덮은 방에서 생활했다. 영하 45도까지 내려가는 곳에서, 노역에 시달리며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수용소의 삶 역시 사방이 코르크로 막힌 것처럼 단절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극단적인 곳에서, 프루스트와 살아남은 자들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글을 쓰고, ‘정신’을 위한 강의를 듣는다. 그들은 그렇게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