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프레이야 > 조영래평전의 허와 실

<조영래 평전>에는 조영래가 없다 블로거 기자단 뉴스에 기사로 보낸 글
2006.03.20

안경환 교수의 근거없는 사실 왜곡을 비판한다

 

“허명(虛名)이 실명(實名)을 능가하는 사람은 단명(短命)한다.” 이른바 ‘잘나가는’ 사람에 이만큼 경종이 되는 경구는 드물다. 대학의 수석 입학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엄청나다.(86쪽)

 

안경환 교수가 쓴 〈조영래 평전〉의 ‘법대생 조영래’라는 장을 시작하는 글이다. 물론 안경환은 서울대 수석입학으로서 누린 명성의 허함을 말하고 싶었다고 변명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단명한 사람을 앞에 놓고 이런 말을 하면서 인생 전체에 대한 평과 관련이 없다고 부인할 수 있을까? 짧은 인생이었지만 깊은 성찰과 실천적 삶으로 사회변화를 이끌었던 조영래 변호사의 삶에 대한 있을 수 없는 모독적 평가이다. 허명(虛名) 또는 실명(實名)은 조영래 변호사의 삶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개념이다. 겉으로 알려진 명성보다 실제의 모습은 더 훌륭했기 때문이다. 탁월한 통찰력과 사람의 약점과 단점을 감싸안는 소박함과 관대함, 그리고 지도자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오히려 안경환 교수가 쓴 〈조영래 평전〉을 읽으면서 이 책 자체를 평가하기 위해 허명과 실명보다 더 적절한 개념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내내 했다.

 

유족과 추모사업회는 출간 자체를 반대했다


이 책의 허명적 요소는 출판되어서는 안 될 책이 출판되었다는 사실 자체에서 출발한다.  이 책의 초고를 읽어본 사람들은 저자와 가까웠던 사람이든 면식이 없던 사람이든 일치된 의견을 냈었다. 평전 집필을 위한 최소한의 취재도 하지 않은 채 쓰여졌기에 조영래에 대한 내용 자체가 별로 없고, 있다 하더라도 사실 왜곡과 조영래에 대한 왜곡이 심각하여 ‘조영래 평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부분적으로 수정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정도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도 일치된 의견이었다. 이러한 의견은 조영래추모사업회(대표 홍성우) 측의 정영일 변호사와 유가족 측의 이옥경 선생을 통해 분명하게 안경환 교수에게 전달된 것으로 알고 있다.


‘조영래 평전’이라는 이름으로 첫 번째 평전이 안경환에 의해서 나왔다는 소식은 그래서 내가 아는 사람들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소설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알려진 공인을 기념하는 의미가 큰 평전을, 그것도 첫 평전을, 사실 왜곡이 너무 심각하기에 출판되어서는 안 되는 책이라는 조영래추모사업회와 유족들의 강력한 의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왜곡된 사실을 수정하려는 어떠한 적극적 시도도 없이, 유족과 기념사업회에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발간한 이 행위가 벌써 이 책의 허명적 측면을 웅변하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이 책의 출판사에서 배포한 언론 보도자료는, 여러 신문 등 언론 매체가 왜 이 책을 조영래추모사업회 공식평전으로 보도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준다. 보도자료는 기념사업회 활동의 연속선상에 이 평전 출판이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고, 누가 보기에도 기념사업회의 사업으로 보기 쉽도록 쓰여져 있다.


최소한의 취재,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안경환의 〈조영래 평전〉은 ‘조영래 평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형식과 내용 면에서 평전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지 않고 있다. 저자는 조영래와 함께 일했고, 조영래를 잘 아는 주변 인물들은 거의 인터뷰하지 않았다. 조영래 변호사와 가깝게 지냈던 인물들에 대한 인터뷰 요청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평전의 한 장을 할애해서 쓴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경우 그 사건 변호를 담당했던 변호사들 누구와도 인터뷰하지 않았으며, 그 사건의 당사자인 나에게도 아무런 인터뷰 요청도 없었다. 다른 장(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가족 중에서 조영래 변호사 큰누님과 1시간, 사모님과 2시간 정도 인터뷰한 것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다. 평전 작가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취재도 하지 않은 채 책을 쓴 것이다. 책 후반부의 조영래 변호사가 담당했던 사건에 대한 기록은, 조영래추모사업회에서 발간한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에 포함된 각 사건에 대한 평가와 해설을 많은 부분 출처도 밝히지 않은 채 적어놓았다. 이 책의 저자가 인터뷰한 것 같이 그려진 부분은 상당부분 추모사업회에서 제작한 다큐 <진실의 불꽃>에서 인용없이 가져다 쓴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반적으로 평전에서 기대하는 (평전을 쓸 만한 가치가 있는) 공인의 사회적으로 드러난 행적 속에 숨겨진 인물과 사상에 대해 충실한 기록적 의미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조영래와 관련된 부분도 조영래의 이름을 내건 평론으로서 의아할 정도로 적다.  책 전체에 걸쳐 조영래와 관련된 사실은 분량이나 내용 면에서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어 ‘자유언론실천운동’ 부분에서 조영래에 대한 내용은 단 3줄이다. 인권변론의 부분도 총 11쪽 중 조영래 관련 내용은 총 10줄이고, 조영래 변호사가 세웠던 새로운 개념의 법률사무소였던 ‘시민공익법률사무소’라는 제목의 부분에서는 총 10쪽 중 조영래 관련 내용은 2쪽뿐이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안경환의 서울대 법대와 관련된 스케치를 산만하게 적어놓은 것으로 메워져 있다. 서울대 법대와 관련된 분량은 대략 훑어보아도 150쪽(책 전체의 1/3) 정도의 분량이다.


조영래 변호사의 삶에서 서울대 법대라는 틀이 차지한 비중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의 그를 알고, 그와 함께 일했던 주변 사람들을 조금만 인터뷰했더라도 이러한 식의 내용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조영래에게 법대는 형식이고 틀일 뿐 그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하게 고려할 공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트주의 또는 특권의식 등에 경계심을 많이 가졌던 조영래의 삶의 방식과 지향성에 얼마나 어긋나는 방향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었던 부분이다.


저자의 사상적 틀에 짜 맞춰진 평전

 

이 책의 초고를 보기 이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안경환의 이미지는 일정 정도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학자였다. 적어도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의 민주화운동 정신에 공감하고, 노동자·여성 등 사회적 약자의 인권에 관심을 가지는 ‘진보적’ 지식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조영래 평전〉을 읽으면서 겉으로 드러난 안경환의 이미지가 허구라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조영래 평전〉에 나타난 안경환의 관점과 입장은 신보수 내지 뉴라이트에 가까웠다. 박정희에 대한 우호적인 관점, 1970~1980년대 노동운동에 대한 근거 없는 비판과 부정적 시각, 심지어는 조영래 변호사가 평생을 바친 민주화운동을 폄하하고자 하는 시도, 그리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여성 비하적 관점은 책의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 책이 평전으로서 최소한의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안경환은 조영래의 인물됨과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성장기부터 시작해서 학생운동을 거치고 수배생활 이후 인권운동가로서 활동하면서 조영래가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삶을 구성하려 노력했는지 갈등요소는 무엇인지 안경환은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삶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사회변화의 방향에 대해서 남달리 깊은 고민을 늘 하던 조영래의 모습은 단 한 차례도 그려져 있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안경환이 조영래의 인물됨을 이해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도 없었다는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안경환 자신의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에 근거도 없이 조영래를 뜯어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 안경환 교수 자신의 사상적 틀에 조영래를 끼워 맞추고자 하는 작업은 여러 군데에서 반복된다.

 

실인즉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면서도 조영래는 노동자를 사회 변혁의 주체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익명으로 노동자의 투쟁을 촉구하는 시를 쓰고 전태일 정신의 확대 계승에 깊은 정성을 쏟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못 배우고 힘없는 노동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누려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법적 상식과 인간으로서의 양심의 명령에 따랐던 것뿐이다. 대학생 출신으로는 장기표만이 비교적 일찌감치 노학연대를 통한 사회 변혁을 꿈꾸면서 노동자의 친구인 대학생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일생의 승부를 걸었다.(219쪽)

 

이런 부분은 평전에서는 핵심적으로 논의가 되어야 할 부분이다. 평전의 저자가, 평전의 주인공 인물의 삶에서 중요한 활동영역을 차지했던 부분의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신중해야 하고 객관성, 타당성을 실으려 노력해야 한다. 조영래 자신이 어떤 글에서 이런 사상적 측면을 비추고 있는지, 주변 사람들은 뭐라고 증언하는지 등 다양하게 접근을 해서 내려야 하는 결론이다. 이런 조심스러움 대신 안경환은 다른 장에서 주장했던 조영래가 노동자라는 특수계급(무엇이 특수계급인지? 안경환이 ‘계급’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의아하게 만드는 대목이다)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확인시키려 한다. 아마도 조영래도 안경환 자신과 다르지 않았다며 그의 노동자에 대한 인식에 타당성과 정당성을 키우고 싶었던 것도 같다.


“불행한 최후를 맞았던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조의를 표하자고 말하여 주변의 빈축과 경탄을 샀던 조영래”(448쪽)라는 대목도 그렇다. 박정희 시해 당시 수배 중이던 조 변호사가 누구를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도 불분명하고 누구에게 빈축과 경탄을 샀는지에 대해 아무런 근거도 밝히지 않고 있다. 안경환이 원하는 조영래의 모습이 박정희에게 조의를 표하는 조영래였던 게 아닌가 싶다.

 

조영래가 가부장적?


자신이 그리는 인물을 안경환 자신의 수준에 맞추고 싶었던 그의 의도는 조영래 변호사가 담당했던 변론 활동을 그리면서도 나타난다. 변론 선집에서 대부분의 내용을 가져다 쓴 ‘여성 조기정년제’를 다룬 장을 보자. 여성의 평생노동권을 거부하는 당시 현실에 큰 변화를 유도했던 1985년의 여성 조기정년제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안경환은 그 장의 시작단계에서 다음과 같이 조영래를 그린다.

 

같은 시대의 여느 남성이나 마찬가지로 조영래에게 여성은 남성과 다른 존재일 뿐이었다. 한국 사회 전체가 공고한 가부장제의 틀 속에 갇혀 있었으니 아무리 생각이 깊은 조영래라고 하더라도 시대적 상식과 여건의 제약을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 옥경을 만나서 여성에 대해 크게 개안했고, 〈전태일 평전〉을 쓰면서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목도했지만 여전히 여성은 여성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보통사내였다.(352쪽)

 

조영래가 어떤 인물이었는가에 대한 평가는, 그의 삶의 행적을 통해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내가 아는 조 변호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가부장적 틀에 매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내가 알았던 그는 사회활동을 하는 부인을 고려해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아들을 평일이나 주말의 각종 행사나 모임에 자주 데리고 다니면서 종일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그런 남자를 나는 조영래 변호사말고는 경험한 적이 없다. 그리고 내가 아는 주변의 누구도 그를 가부장적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당시 기준에서는 놀랄 만큼 여성문제에 진보적이었던 사례만이 무궁무진하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여성 조기정년제 같은 선구적 사건을 기꺼이 맡고 한국 사회 가부장제의 균열을 시도한 인물을 평가할 때, 무엇이 그를 가부장적 편견에서 벗어나게 했는지를 살펴보는 게 더 합당하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 인물의 실제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그리는 것은 안경환이 조영래를 자기 기준이나 수준으로 맞추기 위한 것이거나, 조영래라는 인물을 폄하하고자 하는 시도로 밖에는 읽히지 않는다. 


조영래의 삶을 근본적으로 훼손했다

 

근거 없이 허한 주장이 너무 많은 이 책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어떤 대목에서는 조영래 변호사의 삶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것이다.


조영래와 불교라는 장에서 김동리의 등신불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뒤 그는 이런 주장을 한다. “후일 영래는 기회가 닿는 대로 불교의 역사를 더듬으며 분신의 미학을 탐구하곤 했다.”(143쪽) 이 위험한 발언을 하면서 그는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조 변호사가 쓴 글이나 행적 또는 주변사람들의 인터뷰 내용은 없고, 본인의 무리한 추측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단정적으로 적어놓았을 뿐이다. 물론 조영래 변호사는 분신의 미학을 연구한 적이 없다. 안경환의 이러한 주장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형태의 투쟁방법에 대한 책임을 묻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조영래 변호사는 그러한 죽음에 대해 그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고 그러한 투쟁방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어떠한 의도로 안경환은 이러한 ‘사실 조작’을 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하는 대목이다.


‘분신의 미학’ 외에도 그가 무엇을 조영래에게서 보려 했고 그리고 싶었는지가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의심스러워지는 대목은 여럿 있다.


〈조영래 평전〉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실제 내용에 비해서 명성이 헛되게 화려하게 쌓여진 이들이 단명하듯 쉽게 사라지는 데 있지는 않다. 적어도 사필귀정의 정의는 이루어진 것이니까. 오히려 실제 내용은 없으면서 겉으로 쌓여진 명성이 과한 이들이나 작품이 오래 생명을 유지하고 내용에 맞지 않는 평가에 의지하여 이득을 취하고 힘을 휘두른 데 있지 않았는가?


우리 사회가 허(虛)가 실(實)을 누르는 일이 빈번해서 이번 일도 새삼스러울 게 없다고 어떤 이는 체념적으로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허명과 실명의 간극이 극도로 큰 책이 바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조영래 변호사의 첫 번째 평전이라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다. 무엇보다도 서울대 법대교수라는 무게의 저자가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에 대해 쓴 글이라는 이유로 쉽게 ‘좋은 책’이라 인정받고, 대접받게 되는 현실이 두렵다.


실(實)이 허(虛)를 눌러, 안경환이 쓴 〈조영래 평전〉이 그 내용에 걸맞은 평가를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요즈음 가장 절실한 나의 소망이다. (이 글은 월간 〈인물과 사상〉 4월호에도 송고했습니다.)

-명지대 권인숙 교수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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