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음에 대하여 - 사라지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이경인 옮김 / 페르아미카실렌티아루네 / 202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끝내 삶에 도달하는 프로이트의 글들



《덧없음에 대하여》

: 사라지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이경인 옮김 [페르아미카실렌티아루네] (2026)

 





프로이트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지만, 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탐구했던 시각이 인류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이를 테면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우리가 자연에서 자리 잡고 있던 인간의 지위에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그의 주장은 인간이 모든 동물의 공통 조상에서 나온 후손이라는 놀라운 선언이었다. 다윈의 진화론이 물질세계에서 인간의 위상을 다시 보게 하는 혁명적인 시각과 문제의식을 던져 주었던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자 할 때, 비물질 영역인 의식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탐구한 인물로 인류사에서 그의 자리를 찾아볼 수 있다. 동물적인 존재로서의 욕망과 사회적 자아가 만들어내는 복잡다단한 존재를 조명하며 인간을 이해하려 했다.


 

다윈의 진화론처럼, 프로이트의 심리이론들은 오늘날 비판받고 수정되는 지점들도 많다. 그렇다고 이들이 인간의 이해 과정에서 던진 문제에 역사적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예를들어 시각예술만 하더라도 프로이트의 이론은 시각예술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평론가들이 작품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하나의 틀로서 상당히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다. 학자로서의 체계와 논리를 정립하고자 했던 프로이트의 면모를 고려하면, <덧없음에 대하여>에 실린 글은 동료들의 냉정한 평가를 받던 학자의 입장 보다는, 대략 110여 년 전에 살았던 한 인간의 인생론에 가까워 보인다. 그의 심리이론에 익숙하다면 이 글의 의미가 좀 더 깊이 있게 다가올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글은 그의 이론을 잘 모르더라도 이해할 수 있다. 제한적이나마 우리는 삶이라는 경험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덧없음에 대하여>는 프로이트가 50대 후반에 쓴 네 편의 글을 담고 있다. 여기에 역자의 작품 해제와 보론이 함께 엮여 있어서 이해하기에 어렵지는 않고, 형식적으로도 사뭇 독특한 책이 되었다. 일반적인 번역서는 도서의 마지막에 작품 전체에 대한 분석과 해제가 몰아서 나오기 때문이다. 또 뒤에 옮긴이의 말을 싣는 대신 책에는 네 편의 글 바로 뒤에 프로이트의 글에 대한 역자의 상상력과 적극적인 읽기의 흔적이 보론의 형식으로, 후기를 대신하여 곁들여 있다.


 

첫 번째 글 ‘덧없음에 대하여’는 세상에 내던져진 삶들의 존재 이유, 나아가 살아갈 이유를 찾아가는 저자의 소명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꼈다. 저자는 젊은 시인 한 명과 말수가 적은 한 친구와 함께 꽃이 만개한 여름 풍경을 산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산책길에서 프로이트는 젊은 시인이 눈앞에 펼쳐진, 이토록 아름다운 것들이 결국은 사라질 것이기에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하는 시인을 안타까워한다. 반면 심리학자는 아름다운 대상들이 영원하지 않기에 그 가치의 귀함을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보기에 젊은 시인이 삶의 덧없음에 이르게 된 것은, 시인이 ‘죽음/혹은 상실로서의 부재’에만 머물며 애도하기 때문이라 여긴 듯하다.

 


프로이트는 젊은 시인이 삶의 덧없음에 집착하는 것이 곧 염세적인 태도로 이어짐에 주목한다. 그는 “아름다운 것이 덧없다고 해서 그 가치까지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16)을 줄곧 강조하는데, 애도의 과정에는 어느 정도의 심리적 시간이 필요하며 이 과정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라 본 듯하다. 물론 애도의 과정이 끝났다고 해서 그것이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게 됨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도의 끝은 단지 새로운 삶으로 나가가게 할 뿐이다. 애도를 마친 이는 다시 삶을 향하고야 만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 글을 더욱 인상 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역자가 보론에서 상상력을 더해 프로이트의 글에 새로운 맥락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보론 「그 여름 산책의 두 사람은 누구였을까」에서 역자는 1915년에 쓰인 프로이트의 글 「덧없음에 대하여」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두 대화자가 누구였을까 궁금해한다. 역자는 젊은 시인을 프로이트와 교류했던 릴케로, ‘말수가 적은 한 인물’은 루 살로메가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물론 적극적이고 활발한 대화 상대자였던 루 살로메의 이미지와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보론에서 역자의 상황 설정과 문제 제기는 논문이 아닌 문학적인 글을 쓴 프로이트를 새롭게 비추어 주었다. 이 여름날의 산책에 릴케와 루 살로메가 정말 프로이트와 함께 했을까. 불가능한 상상은 아니라고 본다. 역자의 상상력이 가미된 설정은 프로이트의 글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다.



나는 역자의 보론을 읽고 다시 프로이트의 글을 읽으며 그와 산책길에서 대화하는 상상속의 릴케로 들어가본다. 인간이 죽음과 상실을 애도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50세를 넘기 힘들었던 인류 대부분의 역사에서, 유한한 생명체인 인간의 곁에는 늘 존재의 슬픔이 함께 해왔다. 이는 인간의 기본 조건, 디폴트였다. 다만 사람들 중에는 이 유한성의 진실을 좀 더 예민하게 감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조금은 무던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혹은 애초에 인간의 삶이 지니는 진실을 회피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같은 현상을 두고 다르게 반응하는 것은 인간의 다양성이라는 조건을 고려하면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진다. 젊은 시인의 입장에서 상상해본다면, 이 상상의 릴케는 ‘삶의 덧없음’이란 감정에 좀 더 예민하게 감각했던 사람으로 볼 수는 없을까 싶다.

 


달리 보면 젊은 시인이 보였던 염세적 감정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시기가 되면 느낄 수 있는 감정일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상상해본다. 1915년의 산책에서 59세의 프로이트가 대화를 나누었던 시인이 릴케라면, 40살의 이 시인이 당시에 인생의 중대한 전환기나 심리적으로 힘들었던 시기를 보냈던 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내 경우에는, 작년 하반기에 집안 어른 두 분을 몇 개월 간격으로 떠나보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상실의 경험 이후 나의 우울감은 제법 오래 지속되었다. 이 우울감은 한동안 무기력을 동반했는데, 이 감정은 나의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당시에 나 역시 느꼈던 ‘덧없음의 감정’은 나를 보이지 않는 강력한 자기장 속에 단단히 붙들어 놓아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사라짐과 상실에 대한 감정의 반작용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부모의 상실에 대한 감정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나이듦, 곧 내 존재의 상실에 대한 전망까지 더한 감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진흙탕에서 나오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젊은 시인의 염세적인 태도와도 많이 닮아 있었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이 상상의 릴케, 젊은 시인 역시 그런 상황은 아니었을까. 이 시인이 릴케라는 상상을 더 밀고 나가자면, 릴케는 이 산책으로부터 4년 전인 1911년에 나일강을 따라 아내와 함께 이집트를 여행했다. 그가 여행에서 보았던 것의 목록에는 역사적 유물뿐만 아니라, 인간과 문명의 죽음이 어떻게 오래전에 사라진 문명 속에 박제화 되었는가도 있었으리라. 또 역자의 작품 해제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개인의 애도에서 당시의 전쟁 등과 같은 체험을 통해 문명의 애도로 나아감을 이야기한다. 그럼 시인과 프로이트는 각기 다른 계기로 각자 개인의 애도에서 문명의 애도로 나아가는 공통점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지에서 수많은 죽음의 흔적을 목격한 시인으로서 릴케가 프로이트의 눈에 염세적으로 보였다면, 그건 릴케가 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더 흔들리며 바람을 자각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프로이트와 산책했던 이 젊은 시인을 붙들고 흔들었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다만 ‘죽음’의 문제는 모든 인간의 두려움과 슬픔의 근원임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나의 읽기는 세 사람의 산책길로 다시 돌아온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젊은 시인은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미래의 상실을 애도한다. 반면 프로이트는 모든 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현존재를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나는 이 차이가 결국 삶을 향해 수렴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프로이트가 삶을 단단히 붙들고 현재의 아름다움에 머물며 차갑게 나아가던 사람이라면, 시인은 끊임없이 흔들리며 슬픔을 뜨겁게 감각했던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 사람은 차가움으로 삶을 말하고, 다른 사람은 뜨거움으로 삶을 말했다. 결국 두 사람은 모두 삶을 붙들고 사랑했던 이들이라 말할 수 있을 법하다. 열역학에서 차가움과 뜨거움은 동일한 현상의 다른 이름이며, 단지 열평형에 이르는 길이 다를 뿐인 것처럼 말이다. 

 


릴케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 드라마와 같은 죽음을 맞이했다. 한 여인에게 장미꽃을 꺾어주다 가시에 찔린 것이 원인이 되어 결국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그가 프로이트의 판단대로 염세적이었다고 하더라도, 프로이트 뿐만 아니라 릴케와 같은 모든 이들은 ‘죽음에 대한 강박’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릴케와 같은 예술가들에게 죽음에의 강박은 가족력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릴케의 삶과 글쓰기, 그리고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그가 염세적이라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고 본다. 심지어 우리는 릴케가 일찍 생을 마감했다고 그가 불행했을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삶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해 장미꽃을 꺾을 수는 없었으리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시인과 덧없음에 대해 숙고했던 프로이트 두 사람은 모두 삶을 붙들고, 결국 삶에 대한 사랑에 이르고 마는 이들이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첫 아트북 출간 소식 -《안녕 종이 사람》

: 종이수집가의 여행법

 

구슬 지음

[그래서] (2026)




물론 저의 책은 아니고요, 아내 ‘구슬’의 첫 아트북 작업

《안녕 종이 사람》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서양화를 전공하고 아이들의 그림과 만들기 작업을 10년 간 가르쳐왔던 작가 구슬(@kooseul23)은 을지로 방산 시장에서 종이 제품이나 포장지를 만들고 남은 종이와 일상에서 수집한 종이로 인형(‘종이 사람’)을 만들고 있습니다.

 

《안녕 종이 사람》은 올 초에 다녀 온 여행지에서 저자가 수집한 종이를 더해 낯선 곳에서 마주친 사람들을 ‘종이 사람’으로 만들어낸 작업입니다. 작가가 종이 사람을 만들고 여행지에서 기록해둔 메모와 드로잉, 작업에 사용한 종이에 대한 이력이 ‘종이 사람 레시피’와 ‘종이 수집 리스트’ 코너에 담겨 있어요.

 

여행을 하는 방법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습니다. 정답이란 애초에 없기도 하고요. 게다가 요긴한 여행 정보가 갖추어진 안내서들은 이미 더 손댈 여지없이 훌륭한 것들도 많습니다. 《안녕 종이 사람》은 여행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만 여행 자체와 장소성, 그리고 지역의 역사가 전면에 드러나기 보다는 여행지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본 저자의 시선이 소소한 에피소드와 함께 구현되어 있습니다.

 

낯선 여행지에서 주변을 바라보는 여행자의 시선에는 그가 속한 공동체의 경험과 또다른 차이점이 먼저 들어오곤 합니다. 반면 《안녕 종이 사람》은 여행자의 관점에서 나아가 지구라는 행성에서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나와 닮은 존재들의 일상에 보내는 공감어린 시선을 보여줍니다. 저는 작가의 종이 사람 작업이 나와 다름없는 존재들에 내미는 손길처럼 느껴졌어요. 저자의 시선과 손길은 이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버려지는 종이에까지 닿아 종이수집가의 여행법을 완성합니다.

 


책을 만드는 모든 과정에는 많은 사람들의 정성어린 손길이 닿아 있음을 실감합니다. 저는 옆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는데요, 특히

 

•을지로 방산 시장에서 종이 제품을 만들고 남은 종이 조각들을 버리지 않고 서점에 갖다 주시는 사장님과 바쁜 제책 일정을 감내하여 작업해주신 인쇄소 사장님,

 

•책에 실릴 수많은 색과 형태를 지닌 작업물과 메모들이 돋보이도록 지난 무더운 여름과 추석 연휴동안에도 쉬지 않고 편집 및 디자인을 하느라 고민하셨던 ‘초인’ 편집자님,

 

•이미지가 대부분인 아트북의 특성을 잘 보여줄 본문의 종이를 고르는 일부터 책의 표지와 형태와 본문 구성 등 모든 과정에서 애정과 인내심으로 시간과 노하우를 아낌없이 나누어주셨던 출판사의 두 대표님,

 

•그리고 꾸준히 작업은 해 왔지만 무명에 가까운 작가가 만든 그림과 종이 작업들에 늘 꾸준히 진심어린 응원과 ‘좋아요’을 날려주셨던 책방과 인스타의 안목 있는 이웃과 모든 인연들께도 반가운 소식과 고마움을 전합니다.

 


저자의 첫 책인 만큼 ‘과도한’ 축하와 관심은 환영합니다!

《안녕 종이 사람》에 많은 관심과 응원 보내주시길!


 

아, 그리고 책에는 종이 사람으로 만든 것이긴 합니다만 저도 까메오로 등장합니다.


 

참고로 이번 작업은 서울 중구 을지로의 방산시장 한 가운데에 둥지를 틀고 독립서점과 출판사를 겸하는 ‘그래서’ 책방(@glaeso_book)에서 제작했습니다. 이곳은 오밀조밀하게 다양한 업종의 구성원들이 모인 풍경 속에서 늘 창작자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서점/출판사가 있는 공간 주변에는 작은 전시 공간과 문구 판매가 이루어지고, 여러 창작자들의 작업물을 전시 및 판매도하는 ‘그래서’쇼룸(@glaeso_show)이 있고요. 또 제본 작업을 할 수 있는 작업실 ‘그래서’ 워크룸(@glaeso_works)도 있습니다. 같은 건물에는 여러 출판사와 창작자들의 공간도 있어요. 방문해보시면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많으니 한번 방문해보시기를.

 

고맙습니다.

M 드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누가 자기 뼈의 운명을 알겠는가 - 하이드리오타피아, 유골 항아리 매장에 관하여
토머스 브라운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7세기 한 인간의 메멘토 모리

《누가 자기 뼈의 운명을 알겠는가》


: 하이드리오타피아, 유골 항아리 매장에 관하여

 

토머스 브라운 지음

공진호 옮김 [아티초크] (2026)

 




17세기 영국의 대문장가이자 지성인으로 인정받았던 토머스 브라운의 글 《누가 자기 뼈의 운명을 알겠는가》(이하 《뼈의 운명》)을 읽는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저자가 50세 즈음 되었을 당시에 노퍽주의 올드 월싱엄 들판에서 발견된 40여 개의 유골 항아리에 관한 소식을 듣고 이 주제에 대해 쓴 것이다. 17세기에 50세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보았다. 유교 중심의 우리 문화에서 50세는 ‘지천명’의 나이라고 한다. 대략 자신의 운명, 자신의 수명은 하늘에 달린 것이라 해석할 수 있는 이 관념에는, 인간의 평균 수명이 50 이하가 대부분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실제로 평균 수명이 50이 넘은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에 도달한 숫자일 뿐이다. 예수는 33살에 죽었다. 이 나이의 의미는 이미 성인으로서의 정점, 혹은 인간으로서 완성의 나이에 도달한 나이임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17세기에 50세를 넘은 시기의 토머스 브라운에게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했을 것이 틀림없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보다도 더 말이다. 그렇기에 17세기에 50대가 된 대문장가가 유골 항아리에 대해 논하는 이 글은 21세기를 살아가는 50대의 나에게 상당히 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이 책의 소개글에 인용된 작가 가운데 <모비 딕>의 작가 허먼 멜빌의 언급이 보인다. 토머스 브라운을 ‘반쯤 정신 나간 대천사’라는 표현을 편지에 쓸 정도로 멜빌은 브라운의 글을 탐독했던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토머스 브라운은 <경뇌유와 향유고래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글까지 썼던 모양인데, 멜빌은 이 글을 읽고 자신의 작품 <모비 딕>의 ‘발췌록’에 인용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32장의 ‘고래학’이라는 제목의 장에서는 고래에 관해 글을 쓴 인물들을 주욱 나열하고 있는데, 본문에도 토머스 브라운의 이름을 잊지 않고 수록해 놓았다.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토머스 브라운은 후대의 작가 멜빌의 창작 과정에 영향을 주었으며, 작품 속에서도 되살아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연결고리였다.

 


하지만 이렇게 흥미로운 점도 처음에는 책에 보이는 토머스 브라운의 놀라울 정도로 박식하고 유려한 문장과 어떤 연결고리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당시에 발견된 유골 항아리에 관한 소식으로부터, 저자는 매장 문화와 화장 문화를 비교하고, 장례 문화의 역사까지도 정리하고 있어 마치 야심만만한 조사 보고서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이를 테면,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 그리고 게르만인들은 화장 문화에 더 익숙한 사람들이었던 모양이다. 반면 이집트인들은 화장에 대한 거부감으로 육신을 매장하되 이를 보존하는 법을 고안했다. 나아가 이 관념은 지중해를 건너 시칠리아 지역의 피타고라스에 영향을 준 모양이다. 이들은 화장 대신 매장을 선택한 셈이다. 피타고라스를 방문하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플라톤 역시 이 점을 놓치지 않았을 법하다. 왜냐하면 후대에 그리스도교인들이 화장을 거부하고 매장을 선택한 배경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리 체계를 세웠던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문화의 양상을 뚜렷한 한 가지 기준으로 매끈하게 분리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으나, 어쩌면 우리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대략적으로 구분하는 방식에 익숙하다면, 우리는 이를 장례 문화로 이렇게 구분할 수도 있겠다 싶다. 말하자면 헬레니즘은 화장 문화와 연결되고, 헤브라이즘은 매장 문화에 보다 가깝다고 보는 것도 그리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아서다.

 


다만 매장 대 화장에 관한 브라운의 논지가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매끈하게 끝나지는 않는 듯하다. 장례 문화에서 이 두 가지 유형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토머스 브라운에 따르면 고대 인도인 중 사제 계급인 브라만은 산채로 불에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을 ‘고귀한 길’로서 여겼다는 것은 이 두 가지 장례 문화와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또한 인도에서 비교적 멀지 않은 고대 페르시아의 마기(Magi, 사제 계급)는 화장을 거부하고 육신을 새나 개의 먹이로 내주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사례는 발레아레스인의 사례다. 저자에 따르면, 발레아레스 제도의 사람들은 망자를 화장하지 않고 시신을 항아리에 꾹꾹 눌러 담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 다양한 장례 문화를 일별하면서, 줄곧 저자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다가가기는 쉽지 않았다. 다 읽고 책을 여러 번 들춰 보고서야 ‘아!’하는 순간을 맞은 것은, 결국 토머스 브라운의 어느 한두 문장을 다시 만나면서부터다. 이 책의 마지막은 로마의 시인 루카누스의 말로 다음과 같이 끝난다. “육신을 부패가 녹여 없애든 화장으로 태워 없애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130) 저자가 독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이 문장에 담겨 있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 인류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다양한 문화만큼이나 다양했던 장례 문화를 일별하다보니 저자는 숱한 차이점을 보다가도 결국은 필멸자 인간의 삶으로 수렴해 들어가지 않았을까. 인간이 삶 속에서 부여되고 타고난 조건은 사람마다 무수한 차이를 낳는다. 모든 인간은 결국 각자의 짐을 숙제처럼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반면 모든 인간에게 예외 없이 공평하게 부여되는 과제, 혹은 숙명은 모든 인간의 ‘죽음’ 그 자체였던 것이다.

 


루카누스의 말을 음미하다보니 결국 죽음을 통해 이미 ‘타자’가 되어버린 존재에게 매장이든 화장이든 무슨 상관이랴 싶었다. 장례의 방식을 고민하게 되는 것은 결국 살아 있는 이들의 몫일뿐이었다. 이렇게 생각이 나아가다보니 비로소 토머스 브라운이 곳곳에 씨를 뿌리듯 남겨 놓은 문장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죽음이야말로 참된 생명을 낳아 주는 산파”(120)라는 표현. 그리고 “참으로 산다는 것은 다시 우리 자신이 되는 것”(129)과 같은 표현들에 말이다. 결국 토머스 브라운은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에게 ‘죽음의 교훈’,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설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저자는 독자들에게 ‘진정으로 살아 있으라’를 말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공교롭게도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44년 전 오늘(1682년 10월 19일)에 사망했지만, 그가 설파한 죽음의 교리는 책이라는 ‘텍스트의 항아리’ 속에 담겨 한국의 독자에게 ‘지금 참으로 살아 있을 것’을 당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정리하며 후기를 남기는 오늘은 아버지의 27주기이기도 하여 감회가 남다르기도 하다. 토머스 브라운이 말한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란 어떤 의미인지 그에게 되묻고 싶어지는 밤이다.

 





[책속으로]

[1] "하나는 시신을 그대로 흙에 묻는 매장이고, 다른 하나는 화장이다. 이 두 방식 중에서 매장이 더 오래되었음은 아브라함이 여러 족장의 옛 사례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 P35

[2] "화장 또한 까마득히 오래되었고, 널리 퍼져 있었다. 왜냐하면 (화장의 기원을 굳이 헤라클레스에게서 찾지 않더라도) 호메로스가 묘사한 그리스인들의 장례식, 곧 파트로클로스와 아킬레우스의 격식을 갖춘 장례 의식 속에 화장에 관한 숭고한 묘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P35

[3] "페르시아의 마기(Magi) 또한 그와 유사한 종교적 결벽 때문에 화장을 거부했으며, 오로지 유골을 보존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육신은 새나 개의 먹이가 되도록 내버려두었다. 인도에서 지금도 시신을 독수리에게 내주는 파르시인은 불의 연료인 나무로 만든 상여나 들것조차 쓰지 않을 만큼 까다로운 금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 P39

[4] "불과 몇 달 전, 올드 월싱엄의 한 들판에서 마흔 내지 쉰 개에 달하는 유골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이 항아리들은 1야드도 안 되는 깊이의 건조한 모래 땅속에 서로 멀지 않은 간격으로 묻혀 있었다."
- P47

[5] "길가에 세워진 로마의 묘비는 망자 자신을 기리는 추모의 기록인 동시에, 길을 지나는 산 자에게 죽음이라는 운명을 일깨우는 경고였다. 그리하여 이의 묘비문은 행인들에게 ‘멈추어라 행자여(siste viator)’라고 간곡히 청하곤 했다."
- P82

[6] "호메로스는 영혼과 결합한 몸인 데마스(demas)와 영혼이 떠난 몸인 소마(soma)를 정교하게 구분했다."
- P92

[7] "장례식 참석자들이 세 번씩 외치던 마지막 작별 인사 또한 매우 장엄했는데, 이는 매장된 시신 위에 흙을 세 번 뿌리지 않으면 예의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그리스도교도의 관습과도 결을 같이 한다."
- P93

[8] "모태 속에 있는 두 태아가 장차 마주할 이 세상이 어떠할지를 두고 대화를 나눈다면, 그 대화는 내세를 향한 우리의 무지를 아주 적절하게 보여 주는 비유가 되리라. 우리는 여전히 플라톤의 동굴 속에서 그림자를 보며 대화를 나누는 ‘배아 상태의 철학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P101

[9] "그런가 하면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죽는다는 것이 죽음보다 더 두려운 일이다. 죽음이 곧 ‘무(無)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102

[10] "만약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기 시작하는 존재이며, 장수한다는 것이 결국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길게 늘인 것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삶은 실로 서글픈 혼합물이다. 우리는 매 순간 죽음과 동행하며 살아갈 뿐, 어느 한 찰나에 갑자기 죽음을 맞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P111

[11] 죽음이야말로 참된 생명을 낳아 주는 산파, 곧 루키나여야 하며, 이교도들조차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이 실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곤 했다."
- P120

[12] "오래가는 기념물 속에 남고, 제가 이룬 것들 속에 살아남고, 제 이름 속에 또 허깨비 같은 환상의 범주 속에 존재하는 것, 이것이 옛사람들에게 기대감과 같은 환상의 범주 속에 존재하는 것, 이것이 옛사람들에게 기대감과 큰 만족을 주었고, 그들이 꿈꾼 엘리시온의 한 부분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의 형이상학 안에서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참으로 산다는 것은 다시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129

[13] "루카누스는 이렇게 노래했다. ‘육신을 부패가 녹여 없애든 화장으로 태워 없애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 P1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연명치료는 사양하겠습니다 - 오래 사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떠날 것인가
양성관 지음 / 히포크라테스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에 대한 논의, 충만한 삶의 완성을 위해 필요하다

《연명치료는 사양하겠습니다》

: 오래 사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떠날 것인가


 

양성관 지음 [히포크라테스] (2026)




 

매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을 타면서 생각하곤 한다.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아 있거나 문에 기대어 있는 사람들, 모바일 스크린을 뚫어져라 보며 화면에 몰입하고 있는 사람들로 열차 안이 가득하다. 긴 지하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나는 이 열차에 탄 모든 이들이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흔들리며 함께 가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그로테스크한 장면이긴 하지만, 이 열차에 탄 사람들은 단지 이 순간 병원에 있지 않은 것뿐이지 않은가. 집안에 오랫동안 아픈 환자가 있었던 이들은 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세상이 이렇게나 아픈 사람이 많다는 말인가, 하고 말이다. 그러니 조심성 없이 밀치면서 지나가던 이들이나 내가 막 앉으려던 자리에 잽싸게 끼어들어 앉고야 마는 이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결국엔 연민을 느끼는 것이다.


 

죽음은 태어난 모든 생명체에게 최종 목적지와 같다. 생의 완성인 것이다.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가 말했듯이 ‘죽음이란 늘 타인의 죽음’이기에, 죽음 이후의 두려움 따위란 무의미하다. 죽음은 누구나 한 번 겪게 되는 운명이지만, 살아 있을 때 경험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갖는 두려움이란 사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두려움일 터다. 여기에는 무엇보다‘고통’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나의 아버지는 딱 지금의 내 나이, 지천명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인류의 평균 수명이 40을 넘기기 시작한 때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음을 고려한다면, ‘지천명’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이 나이가 되어서야 실감하게 되었다. 교통사고나 전쟁과 같은 문명이 가져온 부작용을 제외한다면 지금껏 인류의 대부분은 ‘자연사’했다. 이제는 각종 의료 기술과 도구의 발달로 수명이 극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태어나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죽음에 이르는 길이 쉽지 않은 절차가 되었다.


 

《연명치료는 사양하겠습니다》(이하 《연명치료》)는 가정의학과 전문의 양성관이 20년에 이르도록 수많은 환자를 진찰하고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 경험을 바탕으로 쓴 저작이다.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작년에 집안 어르신 두 분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경험하고부터다. 한동안 우리 집안에서 가까운 이의 죽음이 없었으나, 저자가 강조하듯 우리 모두는 결국 죽음에 이른다. 한 분은 암으로, 또 한 분은 치매를 비롯한 만성 질환을 앓고 사망하셨다. 죽음에 특별한 예외는 없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 《연명치료》에서 우리 사회가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임종에 이르는 환자와 그를 돌보는 가족의 입장에서 생각해봐야 할 지점들을 제시해주고 있다. 누구인들 고통이 가득한 반면, 무기력하게 수명을 연장하다 죽음을 맞고 싶겠는가? 저자는 바로 이 문제를 조심스럽지만 진지하게 이 책에서 독자와 우리 사회에 질문하고 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가 초등학교 당시만 해도 가족의 죽음이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나 어느 새 죽음은 그에게 익숙한 자신의 방이 아닌 병실이 되어 버렸다. 저자가 언급하듯, 우리 사회는 1997년의 ‘보라매병원 사건’과 같은 일이 있고부터 본격적으로 ‘죽음의 외주화’를 겪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죽음’은 늘 우리 곁에 존재해왔지만 우리에게는 더 이상 투명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죽음은 기피의 대상으로 치부되고, 일상적인 대화에서 회피해야할 소재로 변질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생명 존중’의 가치와‘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해 본격적으로 묻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문득 작년에 돌아가신 어르신도 생전에 늘 연명치료는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셨다는 게 생각났다. 가족은 모두 공감하고 그러겠노라 했음에도, 막상 돌보는 입장에서 ‘치료 중단’을 요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책의 저자가 언급한바와 같이, 환자를 돌보는 가족은 담당 의료진에게‘뭐라도 해주세요’라는 절박한 입장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기로에 서서 절망한다. 남은 선택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새로운 약으로 항암 치료를 한 번 해보면 어떨까?’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 독서에서 한 가지 더 도움이 되었던 것은 의료진의 입장과 이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특히 우리 사회의 경우, 연명의료결정법이 “영양분 공급, 물 공급, 산소의 단순 공급은 중단하거나 시행하지 않아서는 아니 된다.”라고 명시해 놓고 있기에 임종에 이르는 환자를 돌보는 일이 보다 복잡해지는 모양이다. 여기에 종교계, 법조계, 윤리학계, 시민단체 등이 이 과정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보면, 이제 우리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얼마나 복잡해졌는지 감지할 수 있다. 이제 현대인의 죽음은 사회가 정한 법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도 노령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가 넘는 초고령 사회에 들어섰다고 한다. 특히 가족의 모습이 급격하게 변화되어 온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생각해본다면, 나의 장래 역시 이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걱정거리들을 던져 주기도 한다. 나이가 더 들면 몸에 이상이 생기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될 터인데, 여러 가지 사안이 바로 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핵가족화 되어버린 우리 사회에서 나이듦이란 새로운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누가 나를 돌보아줄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나의 경제력으로 치료 및 돌봄을 여유 있게 받을 수 있는 기대를 하지 못하는 두려움도 있다. 저자가 일본의 간병 살인 사례를 든 것처럼, 혹시 내 병이 오랜 간병의 절차를 의도하지 않게 필요로 하게 된다면 내 삶의 질은 급격히 떨어지게 될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존엄하게 죽음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전한다. 종교계나 법조계 등의 관점도, 환자 당사자의 입장에서 이제는 좀 더 유연하게 고려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나의 마지막이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는지 생각해보다 문득 떠오른 영화가 있었다. 일본의 다큐멘터리 영화 <인생 후르츠>다. 90세 건축가 할아버지는 텃밭이 있는 아담한 집에서 87세의 아내와 함께 살아왔다. 어느 날 아침에 할아버지는 텃밭에 앉아 쉬엄쉬엄 일을 하고는 집에 들어와 아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곧 낮잠을 자다가 아내 곁에서 조용한 죽음을 맞았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였기에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실화였고, 영상도 실제 인물이 나오는 작품이기에 내게는 더 의미가 있었다. 내가 정말 바라는 마지막 모습의 롤모델이 이 영화에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대부분 이처럼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의 죽음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개는 질병을 앓고 고통을 받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이 보통이다. 지난 주말에 오랜만에 본가를 다녀온 후 어머니와 통화할 때, 어머니는 이제 막 산책을 나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아프지 않으려면 (그래서 너희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지’라고 하셨다. 수화기로 넘어온 이 말이 가슴에 쿵 하고 박히고야 만다. 태어난 이상 아프지 않을 수 없으나, 생의 마지막을 상상하고 마지막에 이르는 길이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책에 소개된 스위스의 안락사나 화려한 요양병원 시설을 이용할 여력이 되지 않는 나에게 우리 나라가 OECD국가들 가운데 자살률이 가장 높고, 70-80대의 자살률이 10대의 자살률보다 7개 높다는 통계는 충격적이고도 실감나게 다가왔다. 이것은 바로 ‘나의 미래’일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이처럼 저자가 책에서 제기하는 다양한 이슈들, 이를 테면 연명 치료 중단이나 완화 치료, 의료조력사망, 그리고 간병과 돌봄의 문제는 막막하게 느껴지던 현실을 좀 더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실마리를 주었다. 저자가 “죽음은 단지 의료나 법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하고 책임져야 할 문제다. 우리는 묻고 답해야 한다.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120)라고 던진 메시지를 이제는 꼭 붙들고,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관해 가족과, 사회 구성원들과 진지하고 열린 자세로 이야기를 시작해야할 때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남아 있는 각자의 삶을 더욱 충만하게 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연명치료는사양하겠습니다 #양성관 #히포크라테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종의 기원을 읽은 척할 수 있는 책》


사라시나 이사오 지음

이진원 옮김 [까치] (2026)

 




언제인가 세상의 고전으로 꼽히는 《종의 기원》을 읽어보려 시도한 적이 있다. 성공했다면 번번이 아는 척을 했겠지만 나는 그때마다 중간에서 책을 덮었다. 책의 내용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일상이 그만큼 번잡하고 산만했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깜빡이는 배너 광고와 SNS에서 날아오는 알림을 확인하는 일이 밤에는 진정이 되지만, 이번에는 스포츠와 가수의 영상이 넘쳐나는 온라인 플랫폼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는다. 나이가 들면서 노안 문제를 제외하곤 그나마 꾸준히 책을 읽어온 내가 책을 읽는 일이 점점 쉬워지는 것이 아니라 책읽기 활동으로부터 점점 소원해지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 가운데 《종의 기원》은 여전히 내가 읽고 싶은 책 리스트 가운데 상위권에 올라 있지만, 그 날이 언제가 될지 나도 모르겠다. 책읽기 과정에서 파악한 나는 머뭇거리고 미루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종의 기원을 읽은 척할 수 있는 책》는(이하 《읽은 척》) 나의 게으름과 미루기 신공을 보완해 줄 비결이 숨어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하는 책이다. 세상에는 나처럼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고민부터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단 먼저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부지런한 독자들에게 이 《읽은 척》은 다윈의 저서를 읽기 위한 워밍업 내지는 가이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책 《읽은 척》이 단순히 《종의 기원》을 자세히 요약해주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 과학이 오류로 판명된 다윈의 설명들을 하나하나 짚어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윈의 오류를 알고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 된 진화의 지식을 갖추고 다윈의 저서를 읽는 일은 그 반대로 시도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나처럼 ‘미루기 신공’의 마스터들에게 이 《읽은 척》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내가 다윈의 삶과 진화론을 전공하는 연구자가 아닌 다음에야, 《읽은 척》을 읽는다면 정말 《종의 기원》을 읽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보상이 있다. 제목대로 《종의 기원》을 ‘읽은 척’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와 같은 ‘미루기 신공’족들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포인트다. 단 이 《읽은 척》을 유용하게 써먹기 위해서 ‘미루기 신공’족들이 결코 미루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내가 ‘읽은 척’을 시연할 대상을 명석하게 가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소개팅에서 《종의 기원》을 ‘읽은 척’을 하려 한다면 우선 상대방의 전공이 적어도 생물학 전공은 아닌지 부터 확인 하고 시도할 일이다. 지피지기면 백전일승은 할 수 있을 게다. 여기에 더하여, 소개팅 상대방이 얼마나 폭넓은 교양을 지니고 있는지 다방면으로 질문하고 파악할 것. 상대가 음대생이라고 해도, 매우 희박한 확률로 내셔널 지오그래피나 동물의 왕국과 같은 자연 다큐멘터리 덕후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혹은 부모님이 생물학 분야의 전문가이거나 말이다.


 

한편 소개팅 자리에서 이 모든 ‘읽은 척’의 시도가 성공적이지 않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에게 남는 것은 있다. 상대방에게 시도하는 ‘읽은 척’이 효과가 있을지 알아내는 동안 상대방에게 던진 다양한 질문을 통해 상대방을 좀 더 잘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또 알겠는가. 상대방에게 호감을 갖게 되거나 상대방의 호감을 얻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읽은 척》은 우선 다윈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종의 기원》을 읽어 내기 위한 워밍업을 보장하는 안내서가 될 수 있겠다. 혹은 읽지 않아도 좋을 만큼 최신의 과학 지식으로 업데이트 된 지식을 접할 수 있는 훌륭한 참고 문헌을 얻게 되는 셈이다. 여기에도 해당이 안 된다고 해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 것. 당신이 나간 소개팅 자리에서 《종의 기원》을 ‘읽은 척’하여 내가 지적으로 보이도록 도와주고 자존감을 높여주는 와일드카드로 기능할 수 있고, 동시에 ‘읽은 척’하는 과정에서 상대를 파악하기 위한 질문 공세로 상대방을 보다 잘 알게 되고 더불어 상대의 호감을 살 수 있는 필살기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읽은 척》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장점들을 장착하고 있다. 비용대비 얻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읽은 척》을 다 읽지 않아도 ‘읽은 척’함으로써 한 번 더 책을 열어보고 고민하게 되니 얼마나 건전한 ‘읽은 척’인가. 게다가 이 책을 구입함으로써 출판계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는 건 굿즈와 함께 따라오는 예기치 못한 덤이 아닌가.

 



#종의기원을읽은척할수있는책 #사라시나이사오 #이진원번역가 #까치 #종의기원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