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음에 대하여 - 사라지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이경인 옮김 / 페르아미카실렌티아루네 / 202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끝내 삶에 도달하는 프로이트의 글들



《덧없음에 대하여》

: 사라지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이경인 옮김 [페르아미카실렌티아루네] (2026)

 





프로이트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지만, 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탐구했던 시각이 인류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이를 테면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우리가 자연에서 자리 잡고 있던 인간의 지위에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그의 주장은 인간이 모든 동물의 공통 조상에서 나온 후손이라는 놀라운 선언이었다. 다윈의 진화론이 물질세계에서 인간의 위상을 다시 보게 하는 혁명적인 시각과 문제의식을 던져 주었던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자 할 때, 비물질 영역인 의식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탐구한 인물로 인류사에서 그의 자리를 찾아볼 수 있다. 동물적인 존재로서의 욕망과 사회적 자아가 만들어내는 복잡다단한 존재를 조명하며 인간을 이해하려 했다.


 

다윈의 진화론처럼, 프로이트의 심리이론들은 오늘날 비판받고 수정되는 지점들도 많다. 그렇다고 이들이 인간의 이해 과정에서 던진 문제에 역사적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예를들어 시각예술만 하더라도 프로이트의 이론은 시각예술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평론가들이 작품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하나의 틀로서 상당히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다. 학자로서의 체계와 논리를 정립하고자 했던 프로이트의 면모를 고려하면, <덧없음에 대하여>에 실린 글은 동료들의 냉정한 평가를 받던 학자의 입장 보다는, 대략 110여 년 전에 살았던 한 인간의 인생론에 가까워 보인다. 그의 심리이론에 익숙하다면 이 글의 의미가 좀 더 깊이 있게 다가올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글은 그의 이론을 잘 모르더라도 이해할 수 있다. 제한적이나마 우리는 삶이라는 경험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덧없음에 대하여>는 프로이트가 50대 후반에 쓴 네 편의 글을 담고 있다. 여기에 역자의 작품 해제와 보론이 함께 엮여 있어서 이해하기에 어렵지는 않고, 형식적으로도 사뭇 독특한 책이 되었다. 일반적인 번역서는 도서의 마지막에 작품 전체에 대한 분석과 해제가 몰아서 나오기 때문이다. 또 뒤에 옮긴이의 말을 싣는 대신 책에는 네 편의 글 바로 뒤에 프로이트의 글에 대한 역자의 상상력과 적극적인 읽기의 흔적이 보론의 형식으로, 후기를 대신하여 곁들여 있다.


 

첫 번째 글 ‘덧없음에 대하여’는 세상에 내던져진 삶들의 존재 이유, 나아가 살아갈 이유를 찾아가는 저자의 소명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꼈다. 저자는 젊은 시인 한 명과 말수가 적은 한 친구와 함께 꽃이 만개한 여름 풍경을 산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산책길에서 프로이트는 젊은 시인이 눈앞에 펼쳐진, 이토록 아름다운 것들이 결국은 사라질 것이기에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하는 시인을 안타까워한다. 반면 심리학자는 아름다운 대상들이 영원하지 않기에 그 가치의 귀함을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보기에 젊은 시인이 삶의 덧없음에 이르게 된 것은, 시인이 ‘죽음/혹은 상실로서의 부재’에만 머물며 애도하기 때문이라 여긴 듯하다.

 


프로이트는 젊은 시인이 삶의 덧없음에 집착하는 것이 곧 염세적인 태도로 이어짐에 주목한다. 그는 “아름다운 것이 덧없다고 해서 그 가치까지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16)을 줄곧 강조하는데, 애도의 과정에는 어느 정도의 심리적 시간이 필요하며 이 과정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라 본 듯하다. 물론 애도의 과정이 끝났다고 해서 그것이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게 됨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도의 끝은 단지 새로운 삶으로 나가가게 할 뿐이다. 애도를 마친 이는 다시 삶을 향하고야 만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 글을 더욱 인상 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역자가 보론에서 상상력을 더해 프로이트의 글에 새로운 맥락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보론 「그 여름 산책의 두 사람은 누구였을까」에서 역자는 1915년에 쓰인 프로이트의 글 「덧없음에 대하여」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두 대화자가 누구였을까 궁금해한다. 역자는 젊은 시인을 프로이트와 교류했던 릴케로, ‘말수가 적은 한 인물’은 루 살로메가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물론 적극적이고 활발한 대화 상대자였던 루 살로메의 이미지와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보론에서 역자의 상황 설정과 문제 제기는 논문이 아닌 문학적인 글을 쓴 프로이트를 새롭게 비추어 주었다. 이 여름날의 산책에 릴케와 루 살로메가 정말 프로이트와 함께 했을까. 불가능한 상상은 아니라고 본다. 역자의 상상력이 가미된 설정은 프로이트의 글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다.



나는 역자의 보론을 읽고 다시 프로이트의 글을 읽으며 그와 산책길에서 대화하는 상상속의 릴케로 들어가본다. 인간이 죽음과 상실을 애도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50세를 넘기 힘들었던 인류 대부분의 역사에서, 유한한 생명체인 인간의 곁에는 늘 존재의 슬픔이 함께 해왔다. 이는 인간의 기본 조건, 디폴트였다. 다만 사람들 중에는 이 유한성의 진실을 좀 더 예민하게 감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조금은 무던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혹은 애초에 인간의 삶이 지니는 진실을 회피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같은 현상을 두고 다르게 반응하는 것은 인간의 다양성이라는 조건을 고려하면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진다. 젊은 시인의 입장에서 상상해본다면, 이 상상의 릴케는 ‘삶의 덧없음’이란 감정에 좀 더 예민하게 감각했던 사람으로 볼 수는 없을까 싶다.

 


달리 보면 젊은 시인이 보였던 염세적 감정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시기가 되면 느낄 수 있는 감정일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상상해본다. 1915년의 산책에서 59세의 프로이트가 대화를 나누었던 시인이 릴케라면, 40살의 이 시인이 당시에 인생의 중대한 전환기나 심리적으로 힘들었던 시기를 보냈던 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내 경우에는, 작년 하반기에 집안 어른 두 분을 몇 개월 간격으로 떠나보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상실의 경험 이후 나의 우울감은 제법 오래 지속되었다. 이 우울감은 한동안 무기력을 동반했는데, 이 감정은 나의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당시에 나 역시 느꼈던 ‘덧없음의 감정’은 나를 보이지 않는 강력한 자기장 속에 단단히 붙들어 놓아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사라짐과 상실에 대한 감정의 반작용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부모의 상실에 대한 감정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나이듦, 곧 내 존재의 상실에 대한 전망까지 더한 감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진흙탕에서 나오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젊은 시인의 염세적인 태도와도 많이 닮아 있었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이 상상의 릴케, 젊은 시인 역시 그런 상황은 아니었을까. 이 시인이 릴케라는 상상을 더 밀고 나가자면, 릴케는 이 산책으로부터 4년 전인 1911년에 나일강을 따라 아내와 함께 이집트를 여행했다. 그가 여행에서 보았던 것의 목록에는 역사적 유물뿐만 아니라, 인간과 문명의 죽음이 어떻게 오래전에 사라진 문명 속에 박제화 되었는가도 있었으리라. 또 역자의 작품 해제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개인의 애도에서 당시의 전쟁 등과 같은 체험을 통해 문명의 애도로 나아감을 이야기한다. 그럼 시인과 프로이트는 각기 다른 계기로 각자 개인의 애도에서 문명의 애도로 나아가는 공통점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지에서 수많은 죽음의 흔적을 목격한 시인으로서 릴케가 프로이트의 눈에 염세적으로 보였다면, 그건 릴케가 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더 흔들리며 바람을 자각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프로이트와 산책했던 이 젊은 시인을 붙들고 흔들었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다만 ‘죽음’의 문제는 모든 인간의 두려움과 슬픔의 근원임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나의 읽기는 세 사람의 산책길로 다시 돌아온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젊은 시인은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미래의 상실을 애도한다. 반면 프로이트는 모든 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현존재를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나는 이 차이가 결국 삶을 향해 수렴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프로이트가 삶을 단단히 붙들고 현재의 아름다움에 머물며 차갑게 나아가던 사람이라면, 시인은 끊임없이 흔들리며 슬픔을 뜨겁게 감각했던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 사람은 차가움으로 삶을 말하고, 다른 사람은 뜨거움으로 삶을 말했다. 결국 두 사람은 모두 삶을 붙들고 사랑했던 이들이라 말할 수 있을 법하다. 열역학에서 차가움과 뜨거움은 동일한 현상의 다른 이름이며, 단지 열평형에 이르는 길이 다를 뿐인 것처럼 말이다. 

 


릴케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 드라마와 같은 죽음을 맞이했다. 한 여인에게 장미꽃을 꺾어주다 가시에 찔린 것이 원인이 되어 결국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그가 프로이트의 판단대로 염세적이었다고 하더라도, 프로이트 뿐만 아니라 릴케와 같은 모든 이들은 ‘죽음에 대한 강박’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릴케와 같은 예술가들에게 죽음에의 강박은 가족력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릴케의 삶과 글쓰기, 그리고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그가 염세적이라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고 본다. 심지어 우리는 릴케가 일찍 생을 마감했다고 그가 불행했을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삶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해 장미꽃을 꺾을 수는 없었으리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시인과 덧없음에 대해 숙고했던 프로이트 두 사람은 모두 삶을 붙들고, 결국 삶에 대한 사랑에 이르고 마는 이들이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