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강물에 소용돌이가 생길 때
- 미치오 가쿠의《단 하나의 방정식》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집에서 전자석을 처음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대못을 커다란 펜치로 잡고 가스레인지의 불에 한참을 달군 다음 천천히 조심스럽게 식혔다. 지금의 부모들이 알면 불장난 한다고 경악을 했을 텐데, 그 때는 부모님이 모두 일하시는 동안 집에서 놀 거리를 이렇게 혼자 찾았던 모양이다. 이후 식은 못을 기름종이와 같은 얇은 종이로 한 번 싼 다음 구리선을 촘촘히 감는다. 못대가리를 기역자로 구부린 함석판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 나무판에 고정시킨 후 배터리를 연결하면 전자석이 완성 된다. 여기에 스위치를 하나 달면 일종의 모스 송신기처럼 전원을 연결할 때마다 전자석이 된 못대가리에 함석판이 들러붙었다. 선행학습이란 것을 해본 적 없는 나에게는 집에서 했던 이런 놀이가 사물의 이치를 경험으로 이해하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런데 내가 하던 이런 ‘과학 체험’ 활동은 일본계 미국 물리학자 미치오 가쿠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 동네 전파상과 고물상에서 중고 부품을 수집하여 소형 입자가속기 ‘베타트론’을 혼자서 만들었다고 한다. 베타트론은 전자를 가속시키는 장치다. 따라서 전자를 만들어 쏠 수 있는 전자총(electron gun)이 필요하다. 일상에서 ‘전자총’이 장착되어 있던 장치는 바로 ‘브라운관식 텔레비전’이었다. 여기에 전자총에서 방출 된 전자를 가속시키기 위해 전기장을 걸어둘 고전압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가쿠와 같은 과학자들의 어린 시절을 보면 거의 틀림없이 이렇게 과학 실험을 직접 하며 시행착오를 거쳤던 선체험이 있다. 요즘 아이들은 아쉽지만 이런 기회를 수많은 학원을 다니느라 박탈당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자연과 사물에 대한 감각이 상당히 둔화되어 있는 것이다. 어렵고 기나긴 수련을 거쳐야하는 과학의 길에는 미치오 가쿠와 같은 괴짜가 많이 필요한 분야다.
《단 하나의 방정식》의 저자 미치오 가쿠는 ‘아인슈타인 키드’이기도 하다. 그가 1947년생이므로 아인슈타인이 사망했을 때인 1955년에 8살이었을 것이다. 8살이면 당대의 아인슈타인이 과학계의 세계적인 거물이었다는 정도도 알았을 것이다. 어린 가쿠는 아인슈타인이 말년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완성하지 못했던 ‘통일장 이론’을 자신이 완성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만물의 이치를 설명할 수 있는 통일장 이론은 결국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힘(중력, 전자기력, 약한 핵력, 강한 핵력)을 하나로 통일하는 작업이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물리학에서 우주의 시작과 끝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방정식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려준다.
이처럼 큰 뜻을 세웠던 어린 과학자는 훗날 ‘끈이론’이라는 분야를 일구어낸 인물이 되었다. 국내에 소개된 과학자들 중에 (내가 현재까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끈이론의 선구자 혹은 지지자 계보에는 미치오 가쿠와 레너드 서스킨드(《블랙홀 전쟁》, 《우주의 풍경》, 《물리의 정석》 등 저술), 그리고 브라이언 그린(《엔드 오브 타임》, 《엘리건트 유니버스》,《우주의 구조》 등 저술)이 포함된다. 반면 끈이론의 지지자들의 대척점에는 고리양자중력이론의 선구자 카를로 로벨리(《모든 순간의 물리학》,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등 저술)가 있다. 이들은 모두 우주 혹은 존재의 근본 원리를 설명하고, 그 시작과 끝을 설명하고자 시도한다. 물론 지나친 일반화가 되겠지만, 이 구도만 보면 우주의 시작과 끝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에 미국 학계와 유럽 학계의 경쟁구도가 이루어져 있는 모양새다.
저자가 소개하는 바에 따르면, 인간의 먼 조상은 이미 우주의 시작과 끝에 대한 상상을 펼쳐보곤 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우주가 나일강에 떠 있는 ‘우주 알(cosmic egg)’에서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어쩌면 이런 믿음이 인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전파되어 세계 여러 민족의 시작을 알리는 ‘알’신화가 되었을 것 같다. 새끼를 낳는 사례보다, 알에서 생명이 나올 때 감각되는 탄생의 장면이 더욱 극적이고 생생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현대에 이르면 우주의 시작은 ‘빅뱅’으로 설명된다. 과학자들은 그 원인을 ‘무에서 일어난 양자요동’이라고 말한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빅뱅 직전의 우주는 불확정성원리에 따라 에너지가 0인 상태는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 우주는 마치 물이 끊기 직전에 공기방울이 표면에 올라오며 일으키는 표면의 요동과 같은 상태에 있다. 여기에 ‘우연’의 요소가 가미되어 방울 하나가 급격히 계속 팽창하고, 이것이 결국 우주로 자라난다는 것이다.
시작이 있다면 모든 존재에 최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인간의 조상도 다르지 않았다. 고대 바이킹족은 세상의 최후를 ‘라그나로크(Ragnarok)’, 곧 ‘신들의 황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영원히 산다고 믿었던 신들에게도 마지막이 오고야 말 것이라고 인식했던 것일까. 이 ‘라그나로크’라는 표현은 나치 독일이 가져와 사용하기도 했다. 히틀러가 자신들의 마지막을 지칭할 때 썼던 표현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맞이할 수 있는 종말을 빅프리즈(Big Freeze), 빅크런치(Big Crunch), 빅립(Big Rip) 세 가지로 정리한다. 현대 물리학계는 우주가 점점 더 빠르게 팽창한다고 본다. 하지만 우주에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의 존재와 역할 정도에 따라 여러 가능성을 예측한다. 현재의 우주가 팽창을 멈추고 얼어붙듯 멈추게 되거나(빅프리즈), 다시 수축하여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며 으깨지거나(빅크런치), 아니면 계속 팽창하여 파열하듯 종말을 맞이할 것(빅립)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모든 가능성들은 현재 우주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암흑 물질(우주의 총 에너지 중 26% 차지)과 암흑 에너지(우주의 총 에너지 중 68% 차지)에 대한 이해의 정도에 달려 있다고 한다. 우리가 여태껏 살아오고 관측하며 이해한 일반 물질의 질량에너지는 우주에 존재하는 전체 양의 5%에 불과할 뿐이다.
과학의 중요한 특징 중에는 ‘검증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론 물리학자인 저자가 이야기하는 우주의 시작과 끝, 끈이론의 전제가 되는 우주의 10차원 혹은 11차원에 대한 이야기들을 증명할 길은 없다. 아마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학창시절에 아인슈타인이 이루지 못한 과업, 곧 만물의 이론을 정립하려는 포부를 갖고 평생 연구했다. 저자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태초의 우주를 기술하는 방정식은 하나뿐이라고 단언한다. 방정식이 낳는 해, 그러니까 우주의 존재 양식은 무수히 많을 수 있지만 말이다. 아인슈타인도 하나의 방정식이 주는 심미적인 집착이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만물의 이론은 아름다운 수학 이론을 넘어 최후의 순간에 인류의 유일한 생존수단이 될 것이다”(261)라고 언급한다. ‘최후의 순간’이 온다면, 인류가 손을 쓸 도리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저자는 물리학자로서 심미적인 이유 너머를 통찰한다.
물리학자들이 우주의 시작과 끝에 대해 말하고, 시간과 공간의 정체에 대해 탐구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언제나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다. 과연 시간 여행은 가능할까? 이를 테면 현재에서 과거로 갈 수 있을까하는 문제다. 역시 직접적인 검증은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이지만 20세기 후반에 일군의 물리학자들은 시간 여행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앞에서 우주의 시작인 빅뱅이 생겨난 원인이 ‘무에서 일어난 양자요동’이라고 한 것과 비슷한 논리다. ‘시간의 강물에 소용돌이가 생길 때’ 과거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달리 이야기하면 이 시간의 강물에 생기는 소용돌이는 순간순간 열리며 과거로 갈 수 있는 통로인 셈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모두 저자가 만물의 이론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정식’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물론 이 방정식을 찾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물리학 법칙에 근거하여 우주의 시작과 끝을 생각하는 연구자들은 결국 철학자가 되는 모양이다. 저자 역시 자신을 신의 존재에 관한한 ‘불가지론자’라고 밝힌다. 사변적인 이유만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과학자들이 우주의 비밀을 하나씩 알아내면 우주에 대한 예측이 어떻게 구체화될지 궁금해진다. 과거로 갈 수 있는 ‘시간의 소용돌이’의 존재 역시 궁금하기는 마찬가지다.
끈이론의 선구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현대물리학이 나아가는 방향을 대중 독자에게 친숙한 언어로 이야기해 주었다. 미치오 가쿠의 책은 이번에 처음 접해보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독자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국내에 잘 알려진 브라이언 그린의 책은 때론 설명이 너무 ‘자상하여’ 장황한 인상을 줄 때가 있다. 반면 가쿠의 책은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접근성이 좋은 것 같다. 또 설명이 간결하지만 때론 너무 함축적인 경우가 있어 설명의 비약이 느껴지기도 하는 카를로 로벨리의 책보다는 구체적이고 설명이 매끄럽다는 장점이 있다. 이 책은 끈이론의 선구자가 평생 추구해온 자신의 학문적인 길을 정리하고 독자에게 자상하게 안내하는 지도 같은 책이다.
[1]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면서 다른 어떤 것보다 흥미로운 문제는 자연에서 인간의 위치를 확립하고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다."(245) - 이 표현에 있는 사고방식(‘인간의 위치 확립‘)은 해석에 따라 문제가 될 여지가 있다. 당대의 서양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2] "우주의 최종 방정식은 하나밖에 없다. 방정식의 해는 무수히 많을 수도 있지만, 방정식 자체는 단 하나뿐이다."(255)
[3] "에너지가 0인 상태는 불확정성이 없는 상태여서 불확정성원리에 위배된다."(256)
[4]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그 원인은 무에서 일어난 양자요동일 가능성이 높다. 무의 상태에서 입자-반입자 쌍이 수시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 이것이 바로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비결이다. 호킹은 이를 시공간 거품 spacetime foam이라고 불렀다."(256)
[5] "우주에서 우리의 존재 의미는 우리가 부여하는 것이다."(258)
[6] "만물의 이론은 아름다운 수학 이론을 넘어 최후의 순간에 인류의 유일한 생존수단이 될 것이다."(261)
[7] "만물의 이론은 결국 우주의 대칭을 통일하는 문제로 귀결되었다."(2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