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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 핀의 모험 ㅣ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21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8년 7월
평점 :
마크 트웨인이라는 이름은 톰 소여와 함께 내 뇌리에 깊숙히 박힌 이름이다. 중학교 때 영어 교과서에 톰 소여가 울타리를 칠하면서 동네 아이들을 곯려주는 장면이 실렸었는데,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톰 소여에 열광했던 나는 영어 책의 해당 챕터를 몽땅 외워버리는 기염을 토했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이후에 읽은 <왕자와 거지>도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처럼 드라마틱하고 유머러스한지!
그런데 정작 헤밍웨이가 미국 현대문학이 이 책에서 비롯됐다고 극찬한 <허클베리핀의 모험>은 읽어보지 못한 채로 세월이 흘러갔다. 어린이용으로 다이제스트된 책은 내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고, 미처 하지 못한 숙제처럼 남아 있던 책이 마침내 손에 들어왔다. 청소년 용이기는 해도, 매우 알찬 책.
<톰 소여>를 읽으면 톰은 골목대장이고, 헉(허크가 익숙하지만 이 책에서 나오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함)은 졸병 쯤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톰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받쳐주는 행동대원. 그러나 예민한 독자는 톰이 기존의 틀 안에서 움직이는 캐릭터라면 헉이야말로 진정한 자유, 미래지향적인 열린 생각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눈치챈다. 그 아이는 백인이면서 부랑자의 아들로 사회의 최하층에 속해 있고, 제 몸 하나 밖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서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의 재산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노예와는 또 다르다.
그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 중 사회의 틀 밖에서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렇다. 헉은 돈이 가져다주는 구속을 어린 나이에도 간파하며, 노예제도의 어이없음을 몸으로 깨달으며, 종교의 위선도 꿰뚫어본다. 헉은 참으로 자유롭다. 그리고 매우 '인간적'이다. 헉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결정적 대목은 이렇다. (이 책의 뒤쪽 해설편에 실린 예문을 나도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나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짐을 다시 노예로 만드느냐, 아니면 펠프스의 집에서 구출해 자유를 맛보게 하느냐, 이 둘 중 한쪽을 결정해야 했다. 나는 내가 어느 쪽을 택할지 알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잠시 망설인 끝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좋아, 난 지옥게 가겠어."
나는 편지를 북북 찢어 버렸다.
헉은 도망친 노예를 도와주는 일은 지옥에 가는 일이라고 배웠던 아이다. 그러나 그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짐을 자유롭게 해주는 일이 옳다는 걸 스스로 알았다. 마치 칸트가 옳고 그른 것은 이미 우리 몸에 들어 있으며, 그걸 끄집어내기만 하면 된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양심의 소리를 들었다고 해도 헉처럼 행동하기 쉬울까? 노예제도라는 것이 마치 자연법처럼 존재했던 시대에?
늘 이렇다. 옳은 일을 하든 그른 일을 하든 마찬가지다. 인간의 양심이란 사물의 이치를 깨달으려 하기보다는 무조건 남을 탓할 뿐이다. 인간의 양심만큼이나 사물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똥개가 있다면, 나는 그놈을 당장 잡아 죽일 테다. 양심은 인간의 내장 모두를 함한 것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크기에 비해 그다지 쓸모가 없는 듯하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한참 웃었다. 헉이 너무 예리해서, 그리고 너무 착해서. 다른 모든 기준보다도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아이. 차마 인간을 어쩌지는 못하고, 똥개가 그렇다면 죽여 버리겠다는 아이. <허클베리핀>은 <톰소여>보다 두 배쯤 진지한 책이다. 그러나 못지 않게 유머러스하고, 통쾌하다.
헉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두 가지였다. 폭력과 욕심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는 아버지, 그리고 늘 헉을 교양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친절한 이웃들이다. 그들은 이른바 '사회'의 구성원들이다. 그러나 헉은 늘 한발 떨어져 그들을 바라본다. 미시시피 강을 따라 떠내려가는 뗏목 위가 헉에게 사회로부터 이따금 자신을 떼어놓을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주는 공간이다. 자유의 땅을 찾아가는 부랑자의 아들 헉과 도망친 노예 짐. 이 책 내내 헉은 자유가 뭔지를 알고 있는 아이로서, 그걸 몸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들의 모습이 진정으로 아름답다. 아직도 헉을 만나보지 않은 분들, 얼른 서두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