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냥, 컬링 (양장) - 2011 제5회 블루픽션상 수상작
최상희 지음 / 비룡소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서 사무실에서 몰래 책을 펼쳐놓고 읽었다. 히죽히죽 웃는 내 모습이 이상했는지 같이 일하는 직원이 날 쳐다본다. 으레 청소년 소설이 그렇듯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이들의 아픔이나 상처를 보듬어주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 특별히 기대감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읽는 순간부터 훅 빨려드는 것이, 곳곳에 유머 넘치는 대사와 장면의 묘사가 압권이다.
대부분의 청소년 소설에서 그렇듯, 이 책에서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이들에게 희망을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그 무엇도 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소년들에게 보내는 작은 메시지'를 위트 넘치는 이야기 속에 담아냈다.
괜히 기분이 안 좋거나 괜히 기분이 좋은 날이 있다. 어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야말로 '그냥' 그런 날이 있다. 꼭 어떤 특별한 이유를 부여하지 않고 말그대로 '그냥', 그런 날은 '그냥'이라는 단어 외에는 표현할 수 없다.
하물며, 내 기분을 표현하는 것 조차에도 '그냥'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날이 있기 마련인데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꼭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그냥' 그 일이 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누군가는 꼭 그 이유를 묻고,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그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른들이다. 어른들은 그 일이 성공으로 가는 열쇠가 되어야 하고, 돈을 잘 벌 수 있는 일이어야만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꼭 그런 의미가 아니라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도 삶의 의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컬링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몇 번 본 적은 있다. 박진감이 넘치거나 스릴이 넘치는 스포츠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 나 역시도 비인기 종목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주인공 차을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흘 연속 지각한 벌로 혼자 남아 격하게 복도 바닥을 비질하고 있는 을하에게 산적 같은 강산 '산적'과 멸치대가리 같은 서인용 '며루치'가 다가온다. 비질하고 있는 팔의 힘과 브러시 동작이 우아하며 스피드도 훌륭하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 이들이 원하는 것은 을하에게 함께 컬링을 하자는 것이었다. 네 명의 구성원이 필요한 이들에게 차을하는 컬링 꿈나무란다. 규율이 싫고, 학교하고 아무 상관없는 컬링을 할 필요가 없어 싫다고 말하는 을하에게 산적은 말한다.
"할 필요 없는 걸 뭐 하러 하냐?"
"넌......필요 있는 것만 하고 살았냐?" (본문 16p)
결국 산적의 딱딱한 표정과 기세에 눌린 을하는 예능 프로그램들이 텔레비전 황금 시간대를 달구기 시작하는 때에 컬링장에 서 있다.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재미도 느끼지 못하던 을하는 결국 테이블 위의 단무지와 김치 사이를 뚫고 떢볶이 접시에 인 하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피어나더니, 둥그스름한 것은 뭐든지 굴려 보고 싶은 열망이 용트림하고, 방바닥 위 머리카락은 단 한 올도 허용할 수 없는 결벽증까지 분출(본문 151p)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는사이, 을하는 산적과 며루치와 친구가 되었다.
이제 그들은 대회에 나가기 위해 '그냥 컬링팀'으로 참가 신청을 하게 되는데, 산적에게 뜻밖의 사고가 생긴다.
힘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승패가 무의미한 싸움에 걸려든 산적을 통해 아이들의 눈에 비추어지는 어른들의 추잡함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말이다. 자기가 힘이 없다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야. 절대 인정 안 하지. 대신 자기보다 힘이 약한 사람을 찾아내. 어떻게든 찾아내지.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야 안심이 되거든. 옳고 그른 건 상관없어. 자기만 아니면 돼. 강 군은 지금 그 희생양이 된 거야." (본문 245p)
그렇다. 누군가에게 산적은 힘 없는 약자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엄마의 가출, 빚, 가난 등이 산적을 힘없는 약자로 결정해 놓았다. 하지만 산적은 그렇게 힘이 약한 존재가 아니다. 비겁한 그들과 다르게 사는 법을 깨달았고, 혼자 힘으로 나아가는 법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진 빚도 아니야. 내가 갚아야 할 빚도 아니고. 그런데도 우리 가족은 이렇게 됐어. 빚만 다 갚으면 엄마랑 모여 살 수 있겠지. 우리도 남들처럼 살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말이야.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남들과 똑같은 방법으로는 말이야. 내가 아무리 기를 쓰고 달려도 벌써 남들은 그만큼 앞서 나가 있어. 그리고 더 나쁜 건, 앞선 놈들을 내가 추격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는 거야. 그래서 나, 이제 뒤쫓는 건 그만두려고. 이제 다른 방법으로 빚을 갚아 보려고 해. 그래서 학교, 이참에 그만둘까 한다." (본문 272,273p)
마음대로 되는 게 별로 없는 산적에게 컬링은 야구를 하지 못하게 된 상처를 씻어주었고, 숨통을 툭 트이게 해주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 않고, 전혀 중요치 않은 일이다. 그래도 우리는 하고 있다, 컬링. 이 어둠 속, 혼자서 아니라서 좋다. 달려간다. 함께하기 위해서. 아마도 그래서 하는 것이다. 컬링, 우리는 하고 있다. (본문 279p)
어떤 일에 꼭 의미를 부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어떤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라해도, '그냥' 하고싶은 순수한 에너지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진짜 살기싫은 표정'을 하고 있는 을하에게 컬링과 친구는 삶의 의미가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돈도 없고 빽도 없으면 당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죽어라고 공부해서 돈도 벌어야하고, 사회적 지위도 얻어야만 한다. 그래야 좀 살만해지니까. 그런데 정말 행복할까? 그 목표와 목적을 죽어라고 쫓아가는 것이 행복한 일인가 말이다.
대전에서 '제2의 김연아'로 불리던 을하 동생 연화는 어떠한가? 말을 잃어버린 연화에게 '그냥'이라는 탈출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왜 하는 거냐, 컬링?"
'"그게....중요하냐?"
"듣고 싶다. 왜냐?"
"그냥."
"그. 냥."
"숨통이 툭 트이더라. 왠지 모르지만. 그냥." (본문 275,276p)
위트넘치는 대사와 장면들이 배시시 웃음이 나게 하는 이야기지만, 그 속에는 무거운 주제들이 내포되어 있다. 자식 때문에 살아가는 엄마, 자식을 버리고 가출한 엄마, 빽을 믿고 멋대로 행동하는 야구부, 그 빽으로 인해 당해야하는 약자들, 아이들의 진실에 귀기울이지 않는 교사, 진실을 밝혀내지 않는 경찰 등등등 곳곳에 담겨진 이야기들은 충분이 이 책을 암울하게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저자는 무거운 이야기를 위트로 넘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가볍지 않게.
이제 을하는 삶의 의미를 찾게 되었다. 뚜렷한 목적, 목표가 없이도, 삶의 의미는 충분히 부여된다. 그 속에서 새로운 목표와 열정은 충분히 찾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냥'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성의없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대답하기 싫은 말도 어물쩡 넘겨버리는 가벼운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컬링>>을 읽고 난 뒤에는 이 단어가 굉장히 큰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삶의 의미와 행복을 전부 담아내고 있으므로. 난 이 책이 마음에 든다. 그냥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