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미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조용하고 말이 없지만 느닷없이 내편을 들어주는 사람.

무조건 내편이어서 마구 상대에게 쎈소리를 해가며 역성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틀렸음을 옳지 않음을 조곤조곰 말햐면서 내가 당신 편을 들려고 하는게 아니라 틀린 걸 틀리다고 말하려는 것 뿐이라는 태도로 내 편을 들어 줄 사람.

그럼에도 그의 편이 되기는 쉽지 않은 사람

아픔을 드러내지 않고 늘 괜찮은 얼굴로 괜찮은 이야기만 하고 정말 괜찮아 보여서 참 잘 살고 있구나 편안한 삶이구나 싶어 어느 정도 이상 관심을 끌지 않는 사람

사실 아무렇지 않은게 아니라 자기 상처를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

이걸 드러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드러낸다는 걸 배우지도 못했고 그래도 된다는 걸 알지 못하는 사람. 다들 힘들테니까 굳이 나까지 무게를 얹지 않겠다고 늘 괜찮은 얼굴로 말갛게 있는 사람 어쩌면 자기 상황이 폭력속에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면서 타인의 폭력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편을 들어주는 사람.

그래서 쉽게 잊히기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아보여 팔자편해보이기도 하고 무심해 보이기도 하고 그런 사람. 그래서 그가 무언가를 말하는 순간 목청을 높이는 순간이 참 많이 어색하고 낯설기도 한 사람

그런 사람이 떠올랐다.

시미는 자기 아픔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화인의 아픔을 쉽게 알아차린다. 무심학 다가가지 않음을 예의로 삼은 시미는 병실에서 자기 옷자락을 잡은 화인의 아픔을 알아차린다.

그리워했던 아이를 대면하는 순간 아이가 내뱉는 차가운 한마디에 그리고 남긴 커피잔에서 아이의 기호릉 알아내고 아이가 그동안 혼자 얼마나 외로움과 버려짐을 견뎌냈는지를 알아차린다.

너무 잘 알아차려서 자기 통각을 잊었다.

 

폭력에 오래 노출된 사람들은 폭력에 대한 민감성이 높기도 하지만 굉장히 둔감하다.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모든 잘못을 자기에게 묻는다.

아니 상대의 잘못일거라고 생각해도 그 생각을 언어로 꺼집어 내거나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분명 상대의 문제지만 드러내는 순간 말하는 순간 그건 내가 감당해야하는 일이라는 걸 너무 선명하게 안다.

그리고 눈앞의 폭력이 사라지는 순간 자기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순간 순간 불쑥 올라오는 불안과 공포를 내가 감당해야할 것이라고 여길 뿐이다.

 

그러고 보면 그런 사람은 시미만 아니고 화인도 그렇다.그리고 나도 그렇다.

내 심장에 새겨진 폭력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다시 심장에 수를 놓는다.

절대 잊힐 수 없는 고통을 잊기 위해 다른 고통을  내 몸에 새긴다. 그리고 나를 지켜줄 무언가를 내 몸에 새긴다.

내 고통은 무엇이 지켜줄까

시미를 닮은 화인을 닮은 그들은 무엇이 지켜줄까

 

책을 읽으며 속에 뭔가 얹혀서 내려가지도 올라오지도 않는  그것이 생겨버렸다.

심장에 수 놓는 일이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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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구병모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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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아픔에 무뎌졌다 믿을때도 자꾸 따끔거린다. 심장이 피부가.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손을 내밀고 말을 걸어주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시미. 그가 묻는다. 당신의 심장에 어떤 이야기가 새겨져 있나요? 내 고통을 지켜줄 작은 악어 한마리를 어깨에 키우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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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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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으로 올바른 페미니즘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어떤 관점에서 순응주의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다른 관점에서는 전복적인 가능성을 지닌 존재가 될 수도 있다. 페미니즘에는 모범답안이 없다.

겉으로 보기에 강한 페미니스트지만 자기 확신보다 초조함과 위기의식 불안으로 흔들리는 불완전한 존재일 수 있고 보기에 삶에 대해 소박하고 평균적인 의식수준을 지닌 그렇고 그런 아줌마지만 바보가 아니고 타인의 단호함과 편협함마저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인물들은 대부분 자기혐오와 불안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어떤 점에서는 여전히 성숙하지 못한 의식상태에 머물러 있다.

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 상처받기를 두려워해서 관계맺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

내 불안과 의심을 인정하고 바라보는 것. 타인 역시 그러할 것이므로

확신에 찬 무엇이 아니어도 괜찮다. 자꾸 흔들리고 불안해도 괜찮다.

상처받아도 괜찮다..

그럼에도 기대를 버리지 않고 누군가 곁에 있을 거라는 믿음 곁에 있어줄거라는 의지만 있다면 조금씩 달라고 변해도 미워도 함께 할 수 있다,

그렇게 믿는다.

 

진경과 세연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들이 아는 주변 다른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과 연결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이어진다.

진경의 아이 율아의 유치원 친구 엄마 은정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진경과 세연을 거치고 그리고  주변인물들을 거쳐 다시 진경과 세연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모두가 여자들이다.

모두가 다른 환경에 있고 다른 상황에 있고 다른 생각을 가진다.

그들 중 누구를 옳다고 할 수도 없고 그러다고 할 수 없다.

들여다보면 알 수 있고 알게 되면 이해하게 된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와 다른 입장을 나는 모른다.

그래서 갈등하고 흔들리면서 서로를 미워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선을 긋고 나와 다르다고 단정짓는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만날 수도 있다.

사실 진경과 세연의 이야기보다 주변의 이야기가 더 끌리고 궁금하고 더 듣고 싶었다

경혜와 채이의 관계 그들이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친구가 될 수는 없더라도 다시 신뢰하는 그래서 경계를 허물고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편안한 사이가 될 수 있을까 궁금하다. (아마 그렇게 되지는 못할 거 같다. 그리고 어쩌면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채이와 후배의 이야기도 그렇다

은정의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헤어디자이너 지현은 여전히 경계에서 서성이며 생각이 많을까

모두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오해하고 미워하면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

함께 연대한다고 모두가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달라서 싸우고 미워하고 미움받을 각오를 하고 그럼에도 다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고 싸울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이야기는 투박하고 밋밋하지만 인물들은 모두가 궁금하고 개성적이다.

작가가 다시 글을 써서 다른 인물의 이야기도 더 구체적으로 들려준다면 좋겠다

그게 안되면 내가 뒷 이야기를 생각해봐야 하나?

 

 

걷고 있으면 숨이 쉬어졌고 땀이 흘렀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흘리 수 없던 눈물도 편하게 흘러나왔다. 아무에게도 할 수 없던 말들이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나요

하나님 하나님아 나는 너한테 안진다 안져

다시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하나님 저를 대신 아프게 해주세요. 서균이를 살려주세요

혜성엄마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어떻게 지내세요 미안해요

왜 나만 쉬어야 해? 왜 나만 병원에 있어야해? 야 네 애가 저렇게 누워있는데 너는 병원에 오는 게 그렇게 귀찮니?”

하루종일 억누르고 있던 말들이었다.

원색 크레파스로 아무렇게나 북북 그어놓은 듯한 날것의 감정들 지하철에서 흔히 보이든 광인들의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초점 없는 혼잣말과 욕설이 은정의 입에서 방언처럼 줄줄 새어나왔다.

 

-너무 윳긴 일들 때문에 사람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그래. 말을 못 해서 그런거야. 말이라도 하면 좀 나아.

-그래서 부끄러웠니? 소속되지 못해서?

-어딘가 속하기 위해 일부러 악의를 품으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

-착한 사람이어서 아무것도 못했거든요. 제 친구가 그렇게 힘들어하는데 저는 그냥 손 놓고 있었다구요. 제가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짖 빌어먹게 얌전하고 착한 인간이기만 해서요. 유포한 새끼를 찾아서 대신 지랄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지현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다물었다.

-아니야 그건 니 잘못이 아니야. 너랑 아무 관계가 없어. 뻔하고 착한 말들이었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말들 그러나 그 말들에 효용이 없다면 그런 말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면 나는 지금 왜 울고 있을까

-도덕적이어서 부끄러운거니 더 도덕적이지 못해서 부끄러운거니?

 

갑작스레 건네는 다정한 인사같은 것으로 괜찮아지지 않은 일들이 세상에 아주 많다는 것을 아이는 아직 모른다.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일이 점점 더 겁나는 모험처럼 느껴진다. 결과가 안 좋을 때가 더 많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고 그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굳이 물어보았다. 나 역시 누군가가 그렇게 물어주기를 종종 장미가 비를 기다리듯이 기다리게 되므로.

내가 삶으로 꽉 차서 폭발해버리지 않게 하려면 나는 나의 어떤 부분을 헐어서 공간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러게 얻어낸 공간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부정적 감정을 채울 수는 없다는 것.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전혀 모르고 내 삶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 사람들으 ㄹ존중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한 미움을 집어 넣을 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 그게 내가 해낼 수 있는 최선의 생각이야.

사랑하는 딸 너는 네가 되렴. 너눈 분명히 아주 강하고 당당하고 용감한 사람이 될거고 엄만ㄴ 온 힘을 다해 그 걸 응원해줄 거란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약한 여자를 , 너만큼 당당하지 못한 여자를,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여자를, 겁이 많고 감정이 풍부해서 자기 우는 여자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결점이 많고 가끔씩 잘못된 선택을 하는 여자를 그저 평범한 여자를 그런 이유들로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네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나도 나는 너를 변함없이 사랑할 거란다.

 

세연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을 좋아했다. 하지만 친구관계를 유지하는데는 서툴렀다. 먼저 연락을 해서 안부를 묻거나 약속을 잡거나 친구에게 힘든 일이 있을 때 분위기를 보고 타이밍을 맞춰 긴 통화를 하거나 시시콜콜 속사정을 묻고 위로하는 일은 잘 하질 못했다. 뭔가 위기감이 든다 싶으면 선물을 주문해 보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런 세연을 성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꼭 직접 만나서 시간을 함께 보내야만 의미가 있나?

(꼭 그가 나에게 내가 그에게 일순위일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순위를 정한다는게 의미가 있을까 일순위면 어떻고 이순위 삼순위 저 뒤의 n순위면 어떤가. 그 거리에 따라 대하는게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지는 거라면.. 그냥 불쑥 만나 뭔가를 물어보고 다시 연락이 끊어져도 그 순간 예의가 있고 진심이라면 괜찮을텐데.. 그런데 그 예의와 진심이 내게 닿을까? 보일까?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미워하고 관계를 정리하게 되지 않을까. 관계는 뭐든 참 어렵다.

내 구질구질한 속내를 보이기 싫은 마음이 거리를 둔다거나 냉정하게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그건 정말 가까운 사이. 나랑 가까워지는 누군가의 진심을 모른 척 하는 일이 되어버려서 차라리 그가 생각하는 그대로 내가 되어버리는게 편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사실 아까부터 윤슬이 하고 싶었던 말은 자기는 그 친구를 왜 그렇게 좋아해? 였다. 그 친구는 자기한테 관심도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일방적인 관계는 친구가 아니야

하지만 그건 윤슬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왜 나는 진경을 이렇게 좋아할까? 진경은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아기 엄마였지만 뼛속까지 도시사람이었고 개와 개 냄새를 싫어했다.

누구를 좋아해서 그 사람에게 맞춰주고 싶은 마음

사실 나랑 안맞는 게 더 많고 은근 불편하지만 좋아한다는 마음이 강해서 혹은 이렇게 좋아하지 않으면 내가 혼자가 될까봐 계속 맞춰가는 일 왜 그럴까?

난 왜 그렇게 누군가를 계속 질기게 좋아하고 있는 걸까

좋아하는 마음이 클수록 그 사람과 연결되고 싶다는 마음이 클수록 나는 점점 더 외롭지만 멈출 수 없다. 이렇게라도 관계를 열어놓고 사회속에 한발을 걸치고 있어야 하는 것

일단 이유를 알아야겠다는 마음. 내가 왜 좋아하고 이렇게 집착하고 있는지 끊어내면 이유조차 모르고 넘어갈까봐 일단은 끈을 놓을 수 없다.

 

경혜가 친구였다면 채이는 가지 말라고 함께 있어달라고 내일도 와달라고 무섭다고 견디기 힘들다고 말을 했을 것같다. 커피를 사다 달라고 하나도 괜찮지 않다고 빨리 나가고 싶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애써 웃어 보이고 거리 두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혜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다가 무언가를 하니까 또다시 당신은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는 건 연대가 아니야. 그건 그냥 미움이야. 가진 것이 다르고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고 해서 계속 밀어내고 비난하기만 하면 어떻게 다른 사람과 이어질 수 있어? 그리고 사람은 신이 아니야. 누구도 일주일에 724시간 내내 타인의 고통만 생각할 수 없어. 너는 그렇게 할 수 잇니? 너도 그럴 수 없는 걸 왜 남한테 요구해?

 

어른들은 어디에서 울까?

언제나 자신과 똑같은 사람들만 만나고 살면 어떻게 발전하지?

 

우리가 반드시 같아질 필요는 없지 억지로 그러려고 했다간 계속 싸우게 될거야.

같아지려고 애쓰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을 준비를 하는거지

나와 다른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지 나 역시 나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테고

서로 먀냥 좋기만 한 관계는 없어. 내 자신이 미워죽겠다 싶은 적도 있으니까

단단해져서 상처를 받더라도 받아들이고 쉽게 잘 아물기를 연습하는게 더 중요한거야

같은 생각 같은 방향이 중요한게 아니라..

 

 

이 아이는 왜 이렇게 서투를까? 오버를 하든지 아예 안하든지 둘 중 하나인 이아이 무언가를 하기로 마음먹으면 한 번에 너무 완벽하게 해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무리를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둘이부어버리는 아이. 그러다 헐떡거리고 숨을 몰아쉬고 패닉에 빠져버리는 아이. 그게 세연이었다.

 

차이가 적대감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로 갈등하면서 공존하는 힘은 무엇인지 서로의 차이를 견디며 여성들간의 우정은 어떻게 가능할까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가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잇는 것. 각각 개별적인 존재로서 상황과 맥락속에서 구성된 주체적인 개인으로 호명되고 인식되는 것.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바라보는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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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무라가 돌아왔다.

전작 <희망장>에서 이미 탐정이 되었고 몇몇의 사건을 해결했지만 이번엔 제법 탐정티가 난다.

백업해주는 오피스와의 관계에서도 제법 대등하고 원할하게 잘 넘어가고 있고 이젠 의뢰인을 제법 밀고 당길 줄도 알게 되었다

성장과정도 무난했고 운이 좋아 신데렐라 남편이 되는 바람에 행복한 탐정이라는 별칭까지 있었지만 그때의 스기무라는 늘 불안하기도 했었다.

지금 내가 누리는 이 행복이 완전한 내것 같지 않고 남의 옷 남의 집에 있는 것같은 붕 뜬 느낌

내 가족이지만 함부로 할 수 없고 꺠어질라 부러질라 조심 또 조심하면 대해야 한다는 건 다정한 스기무라에게도 많이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사건을 겪고 주체적이랄 수 없지만 어쨌뜬 탐정역할을 하며 실패도 하고 성공도 했고 또 우여곡절끝에 이혼하고 이제 진짜 세상에 홀로 맞섰다.

전작에서는 좌충우돌하며 아직은 샐러리맨의 티가 많이 남아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제법 탐정같다.

그래서일까 이전의 말끔하고 어딘가 어리숙하게 진지하고 고지식하게 보이는 면이 많이 옅어지고 이젠 밀땅도 할 줄 알고 사건의 전체를 보는 눈도 가졌다.

이걸 축해해줘야 하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아마추어냄새가 나는 스기무라가 그립기도 하다.

하긴 이제 독립한 자영업자인데 월급쟁이 모드를 계속 가지고 있을 순 없겠다.

 

스기무라의 특기가 소소하지만 사회성을 가진 사건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번 사건들은 소소하다고 하기엔 좀 쎄다.

가장 추잡스럽고 가장 악랄한 인간이라기보다 악마라고 하는게 차라리 나을 거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자기들의 이기심과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해 상대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그저 욕망의 대상 쓰고 버려도 하등 미안할 것 없는 존재로 보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쩌면 살인이나 무엇보다 더 마주하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고....

이제 자영업자로 살아남기 위해 스기무라가 독해졌구나. 이제 이런 정도는 쉽게 마주할 만큼 배짱이 두둑해졌나보다   싶다가도 소심하고 눈치보며 풀어가는 작은 사건이 그립다.

 

다행일까 두번째 사건은 일상적이다

누군가 죽지도 않았고 다치거나 크게 손해를 본 것은 아니다.

다만 어쩌면 너무 사소해서 드러내기가 민망하거나 옹졸해보일까 두렵지만 그렇다고 품어두기엔 내가 너무 미칠것같고 억울한 관계와 사건이 전개된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을 질투하고  내가 어떤 인과응보를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는 그런 존재다. 그렇게 작고 하찮아서 오히려 더 살만한 세상을 이루기도 한다.

 

세번째 사건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는.... 정말 집안의 검은양처럼 모두를 파괴하는 인물이 혼자의 이기심에 어리저리 날뛰다가 결국 주변사람을 다치게 하고 삶을 망가뜨리는 이야기다.

사실 그런 인물이 얼마나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하는지 잘 알지만 너무 표피적으로 원래 저런 사람 이라고 단정짓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불만이다. 미키가 그렇게 된 이유가 있을텐데 그냥 이상하고 악의적인 존재는 없을텐데 그냥 그런 사람으로만 묘사하고 그런 사람이 저지르는 악행이라고만 드러나는게 아쉽다.

 

이제 스기무라도 나이를 먹나보다.

딸아이 또래 아이들만 보면 괜히 마음이 뭉클해지고

조금은 꼰대처럼 끼어들고 싶어도 하고 아이들앞에서 어른으로서 뭔가를 지적하고 가르치고 싶어하는 모습도 보인다.

다만 그럼에도 아직도 사건앞에서 다양한 의문을 품으며 예의있게 왜? 라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 그건 여전하다. 그래서 아마 다음  스기무라의 이야기도 기다리고 있을 거고...

이제 더 이상 처가에 눈치보며 몸을 작게 움츠리고 있는 스기무라가 아니다.

자영업자 탐정으로 스스로를 책임지고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본업에도 충실한 생활인의 모습이 강한 스기무라의 다음 이야기도 기대한다.

다음 사건은 조금 더 작고 소소하지만 꼭 필요한 사건(뭐래니?)이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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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5-13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어제부터 일단 읽기 시작하긴 했는데.. 평이 엇갈려서 좀 불안하네요 ^^;;
곧 다음 소설도 나온다는 소문이 있긴 합니다 (속닥속닥)

푸른희망 2020-05-13 13:31   좋아요 0 | URL
스기무라씨도 성장해야죠~^^ 점점 독립된 탐정다워지고 그에 걸맞은 사건을 맡는거지요 전 다음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다는 건 내 속에 무언가가 넘쳐나고 있다는 뜻이다.

넘쳐나지만 그걸 드러내선 안된다는 걸 너무 잘 안다.

한때 흔들리는 시간을 지나왔다. 그 시간을 건너는 동안 나는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닐까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내가 죽어야 이 모든 것들이 끝나는 것이 아닐까 내내 생각했다.

그 생각들의 끝은 언제나 나였다. 문제도 나였고 불행도 나였고 고통도 나였다. 나만 없다면 모든 것이 평화롭고 아무렇지도 않을 거 같았다.

그래서 나는 침묵하기로 했다 드러나지 않기로 했고 남들과 닮아보이기로 했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삶의 과정들을 밟아갔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았고 안 아픈 것도 아니었고 자꾸 겉돌고 외롭고 거추장스러웠다.

나는 타인의 삶과 닮아보이기 위해 누군가를 이용했고 나를 속였고 가족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살았지만 내 속에서 나는 나를 죽이고 가까운 이들을 저주하면서 조용히 나이 먹어가고 있었다.

이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한 사랑은 이미 시간 속으로 사라졌고 그건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을 것이고 한때의 호르몬 작용이었거나 미친 감정이었거나 되바라진 욕정이었을거라고 꾹꾹 눌러 담았다.

윤희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었다.

죽은 듯이 아무 말도 없이 누구와의 관계도 힘겨워서 그냥 고요하고 외롭게 나이먹는 것만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딸 새봄은 책임져야 하는 관계였고 이혼한 남편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관계라고 믿었다.

그리고 윤희에게 편지가 왔다.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너는 나를 잊을 수도 있겠지. 벌써 이십 년이 지났으니까. 갑자기 너한테 내 소식을 전하고 싶었나봐.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뭐든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질 때가...............

망설이다 보니 시간이 흘렀네, 나는 비겁했어. 너한테 도망쳤고 여전히 도망치고 있는 거야. 머지않아 나는 또 처음 인것처럼 이 편지를 다시 쓰겠지 바보같은 걸까? 나는 아직도 미숙한 사람인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래도 좋아. 나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내가 부끄럽지 않아

 

윤희는 참을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미 한계치를 넘긴 모양이었다. 자꾸 옆에서 옆구리를 찌르는 딸 새봄에게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모녀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어쩌면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모든 것이 내 탓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쥰이 사는 집 앞을 서성이고 그가 집에서 나올 때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피하고 혼자 운다.

혼자 담배를 피우고 혼자 서성이던 날들을 생각하고 혼자 운다.

윤희는 한 번도 누군가의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딸의 집요한 질문에도 그냥 무덤하고 냉담하게 대꾸했고 더 이상 일자리를 맡아줄 수 없다는 영양사에게도 남의 말하듯 그럼 그러지 말라고 하며 공장을 나왔다. 어린애처럼 감정을 치덕치덕 드러내는 전 남편 앞에서 유일하게 목청이 높아지지만 그건 감정을 드러냈다기 보다 그 순간 너무 지쳐 잠시 목청이 커진 것 뿐이었다. 그렇게 윤희는 고요하고 잠잠하고 서늘했다.

그건 쥰도 마찬가지다 일년의 절반이 눈이 내리는 조용하고 서늘한 오타루가 너무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어쩌면 쥰은 사람과 말하고 사람과 관계하는 것이 더 이상 힘들어서 수의사를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조용히 자기를 지켜보는 고모와 함께 눈이 쌓여서 불편하지만 그래서 고립되어도 하등 이상할 거 없는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둘은 다시 만났다. 새봄의 발칙하고 귀여운 계획으로

영화는 내내 두 사람의 감정을 한톨도 흘리지 않으면서 그냥 내쉬는 한숨 서성이는 발걸음 아무도 몰래 피워올리는 담배연기를 통해 그들을 보여준다.

참 많이 견디고 있구나

참 많이 감싸고 있구나.

누구든 다가오지 말라는 접근금지뒤에서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었구나 ..

그들은 마침내 만났지만 그 순간에도 서로 고요하다.

쌓였던 감정이 모두 다 터지기만 하는 건 아니다. 그냥 그렇게 서로에게 조용히 스며들었다.

소리없이 내리는 눈이 어느새 마당에 쌓이고 지붕에 쌓여서 길이 끊어지고 기울어지듯이 그렇게 쌓이고 쌓였던 마음이 조용히 스며든다.

 

어쩌면 윤희도 쥰도 편견 혹은 정상이라는 프레임에서 폭력에 휘둘려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윤희의 편지 갈피에서 느껴지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의 폭력과 억압, 차별이 있고 쥰도 절반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어디에도 내 고향같지 않은 이방인으로서의 서성임이 있었다. 이혼한 뒤 아빠를 따라 일본으로 왔지만 그곳도 고향은 아니다. 엄마와의 연락은 이미 끊어졌고 내가 누구인지 증명할 것들은 없다. 윤희도 가족의 폭력앞에서 자기를 부정하고 살아왔다.

영화는 그런 폭력을 직접 보여주진 않는다. 폭력을 드러냄으로 충격과 흥미를 돋우기보다 짐작하게 하고 그런 시간이 지난 뒤 그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폭력으로 흔들렸던 시간이 지나고 아직 여진이 남은 상황에서 오롯하게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자기에 집중하지만 아직도 자기를 다 마주할 수 없는 시간들을 보면서 한 사람을 흔든다는 건 참 쉬운 일이지만 그 사람이 그 진동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자기가 되는 일은 오래 오래 걸린다는 걸 보여준다.

자기를 감싸고 자기를 견디는 시간들이 필요했다.

 

영화는 참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한다.

지나간 연인과 사랑에 대한 말랑한 이야기를 보여주기도 하고 새봄과 윤희의 관계 쥰과 미사코의 관계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연대를 보여주기도 한다. 오랜 폭력 뒤에 그것이 폭력이었음을 깨닫고 스스로를 더 강하게 단련시켜 세상을 한 발을 내딛는 출발도 보여주고 사람은 언제든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내가 어디서 어떻게 이 영화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여러 결을 만날 수 있다.

 

이 편지에 불행했던 과거를 핑계대고 싶진 않아. 모두 그땐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해. 나도 너처럼 도망쳐던거야. 그 사람과 내가 결혼식을 올리던 날 우습게도 가장 먼저 떠올렸던 사람이 너였어. 모르는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이곳을 떠난 네가 행복할 수 잇기를 간절히 빌었어.

나는 나에게 주어진 여분의 삶이 벌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동안 스스로에게 벌을 주면서 살았던거 같아. 너는 네가 부끄럽지 않다고 했지. 나도 더 이상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었으니까....

나도 네 꿈을 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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