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다는 건 내 속에 무언가가 넘쳐나고 있다는 뜻이다.

넘쳐나지만 그걸 드러내선 안된다는 걸 너무 잘 안다.

한때 흔들리는 시간을 지나왔다. 그 시간을 건너는 동안 나는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닐까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내가 죽어야 이 모든 것들이 끝나는 것이 아닐까 내내 생각했다.

그 생각들의 끝은 언제나 나였다. 문제도 나였고 불행도 나였고 고통도 나였다. 나만 없다면 모든 것이 평화롭고 아무렇지도 않을 거 같았다.

그래서 나는 침묵하기로 했다 드러나지 않기로 했고 남들과 닮아보이기로 했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삶의 과정들을 밟아갔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았고 안 아픈 것도 아니었고 자꾸 겉돌고 외롭고 거추장스러웠다.

나는 타인의 삶과 닮아보이기 위해 누군가를 이용했고 나를 속였고 가족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살았지만 내 속에서 나는 나를 죽이고 가까운 이들을 저주하면서 조용히 나이 먹어가고 있었다.

이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한 사랑은 이미 시간 속으로 사라졌고 그건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을 것이고 한때의 호르몬 작용이었거나 미친 감정이었거나 되바라진 욕정이었을거라고 꾹꾹 눌러 담았다.

윤희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었다.

죽은 듯이 아무 말도 없이 누구와의 관계도 힘겨워서 그냥 고요하고 외롭게 나이먹는 것만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딸 새봄은 책임져야 하는 관계였고 이혼한 남편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관계라고 믿었다.

그리고 윤희에게 편지가 왔다.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너는 나를 잊을 수도 있겠지. 벌써 이십 년이 지났으니까. 갑자기 너한테 내 소식을 전하고 싶었나봐.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뭐든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질 때가...............

망설이다 보니 시간이 흘렀네, 나는 비겁했어. 너한테 도망쳤고 여전히 도망치고 있는 거야. 머지않아 나는 또 처음 인것처럼 이 편지를 다시 쓰겠지 바보같은 걸까? 나는 아직도 미숙한 사람인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래도 좋아. 나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내가 부끄럽지 않아

 

윤희는 참을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미 한계치를 넘긴 모양이었다. 자꾸 옆에서 옆구리를 찌르는 딸 새봄에게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모녀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어쩌면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모든 것이 내 탓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쥰이 사는 집 앞을 서성이고 그가 집에서 나올 때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피하고 혼자 운다.

혼자 담배를 피우고 혼자 서성이던 날들을 생각하고 혼자 운다.

윤희는 한 번도 누군가의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딸의 집요한 질문에도 그냥 무덤하고 냉담하게 대꾸했고 더 이상 일자리를 맡아줄 수 없다는 영양사에게도 남의 말하듯 그럼 그러지 말라고 하며 공장을 나왔다. 어린애처럼 감정을 치덕치덕 드러내는 전 남편 앞에서 유일하게 목청이 높아지지만 그건 감정을 드러냈다기 보다 그 순간 너무 지쳐 잠시 목청이 커진 것 뿐이었다. 그렇게 윤희는 고요하고 잠잠하고 서늘했다.

그건 쥰도 마찬가지다 일년의 절반이 눈이 내리는 조용하고 서늘한 오타루가 너무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어쩌면 쥰은 사람과 말하고 사람과 관계하는 것이 더 이상 힘들어서 수의사를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조용히 자기를 지켜보는 고모와 함께 눈이 쌓여서 불편하지만 그래서 고립되어도 하등 이상할 거 없는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둘은 다시 만났다. 새봄의 발칙하고 귀여운 계획으로

영화는 내내 두 사람의 감정을 한톨도 흘리지 않으면서 그냥 내쉬는 한숨 서성이는 발걸음 아무도 몰래 피워올리는 담배연기를 통해 그들을 보여준다.

참 많이 견디고 있구나

참 많이 감싸고 있구나.

누구든 다가오지 말라는 접근금지뒤에서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었구나 ..

그들은 마침내 만났지만 그 순간에도 서로 고요하다.

쌓였던 감정이 모두 다 터지기만 하는 건 아니다. 그냥 그렇게 서로에게 조용히 스며들었다.

소리없이 내리는 눈이 어느새 마당에 쌓이고 지붕에 쌓여서 길이 끊어지고 기울어지듯이 그렇게 쌓이고 쌓였던 마음이 조용히 스며든다.

 

어쩌면 윤희도 쥰도 편견 혹은 정상이라는 프레임에서 폭력에 휘둘려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윤희의 편지 갈피에서 느껴지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의 폭력과 억압, 차별이 있고 쥰도 절반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어디에도 내 고향같지 않은 이방인으로서의 서성임이 있었다. 이혼한 뒤 아빠를 따라 일본으로 왔지만 그곳도 고향은 아니다. 엄마와의 연락은 이미 끊어졌고 내가 누구인지 증명할 것들은 없다. 윤희도 가족의 폭력앞에서 자기를 부정하고 살아왔다.

영화는 그런 폭력을 직접 보여주진 않는다. 폭력을 드러냄으로 충격과 흥미를 돋우기보다 짐작하게 하고 그런 시간이 지난 뒤 그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폭력으로 흔들렸던 시간이 지나고 아직 여진이 남은 상황에서 오롯하게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자기에 집중하지만 아직도 자기를 다 마주할 수 없는 시간들을 보면서 한 사람을 흔든다는 건 참 쉬운 일이지만 그 사람이 그 진동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자기가 되는 일은 오래 오래 걸린다는 걸 보여준다.

자기를 감싸고 자기를 견디는 시간들이 필요했다.

 

영화는 참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한다.

지나간 연인과 사랑에 대한 말랑한 이야기를 보여주기도 하고 새봄과 윤희의 관계 쥰과 미사코의 관계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연대를 보여주기도 한다. 오랜 폭력 뒤에 그것이 폭력이었음을 깨닫고 스스로를 더 강하게 단련시켜 세상을 한 발을 내딛는 출발도 보여주고 사람은 언제든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내가 어디서 어떻게 이 영화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여러 결을 만날 수 있다.

 

이 편지에 불행했던 과거를 핑계대고 싶진 않아. 모두 그땐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해. 나도 너처럼 도망쳐던거야. 그 사람과 내가 결혼식을 올리던 날 우습게도 가장 먼저 떠올렸던 사람이 너였어. 모르는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이곳을 떠난 네가 행복할 수 잇기를 간절히 빌었어.

나는 나에게 주어진 여분의 삶이 벌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동안 스스로에게 벌을 주면서 살았던거 같아. 너는 네가 부끄럽지 않다고 했지. 나도 더 이상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었으니까....

나도 네 꿈을 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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