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것과 내 입을 통해 내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내가 알고 말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것 즉 삶으로 연결시키는 것 역시 다른 일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많이 듣고 많이 읽어서 아는 건 제법 모였다.

 

성인식에 대한 두차례 강연을 들으면서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성폭력이란 적극적인 동의 표시가 있지 않은 한 관계는 모두 폭력적이 된다는 것도 안다.

자발적 동의에 의한 합의가 있어야 하고 동의에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가능하며 그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 동의가 협박이나 공포 혹은 속임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온전한 판단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거부하지않았다는 것 머뭇거렸다는 것 그리고 제발로 모텔을 따라가고 방으로 들어갔다는 것이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다는 것과 스킨쉽을 허용했다는 것이 섹스를 해도 된다는 동의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왜 따라갔대? 왜 그렇게 마셨대? 왜 나오지 않았대?

제발로 들어갔고 제 카드로 지불했으면 이미 동의된 관계가 아니야?

리고 말하는 것 그것 역시 폭력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렇게 알고 있는 일을 누군가에게 주장하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무조건 우기는 사람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세상의 질서를 무기로 당위성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이건 미투고 저건 미투가 아니라고 침을 튀어가며 열변을 토하고 선을 긋고 꼬리표를 붙이는 사람들이 우습고 한심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지워버릴 수 없다. 그들이 맞다고 주장하고 그들 편에 서는 건 쉬운 일이니까

그래서 늘 배워야 하고 생각해야하고 의심해야 한다,

그게 쉽게 지치고 남의 옷을 걸친 것처럼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자꾸 생각하고 공부하는 게 필요한 모양이다.

 

두권의 책 내용이 사실 새로운 건 아니다.

<페미니스트 모먼트>는 페미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었나 어떤 과정을 거치며 변화하고 의심하고 회의하면서 단단해지고 있는지를 각각의 저자 입장에서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자꾸 의심하고 질문하고 대답을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고

가족사에서 여성의 문제가 민족적 문제와 부딪치는 갈등을 겪기도 하고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과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거나

고딕체 페미니즘의 단단하고 견고함을 거쳐 이제 말랑해지고 수용하는 페미니즘으로 가기도 하면서 모두 고민하고 질문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제 완성된 페미니스트라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이전 보다 덜 흔들리고 편안해졌을 뿐이라고... 그리고 지금도 역시과정이라고 말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 묻는다면 당당하게 대답을 하지 못할것이다.

다만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지혜는 한채윤이  것처럼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당당하게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아니라고는 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내 딸들은 나와 다른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고

지금은 고민하고 생각하고 저항해야 전달되는 상식들이 그저 당연하게 통용되고 모두가 젠더의식에 예민하고 고민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는 것..

 

<처음부터 그런 건 없습니다>는 우리가 쉽게 접하는, 당위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하고 있다.

여자로 태어난다면 누구나 접하는 보통의 경험 성적인 불쾌감(폭력 추행 희롱을 포함한)

그건 하나의 폭력으로 여겨져야 함에도 누구나 겪고 있어서 예민하고 까칠하게 굴지말아야 하고 무던하게 삭혀야 하는 일들 부터   퍽하면 들리는 "여자들도 군대를 가라"는 퉁박이나 가정사니까 연인관계니까 개인적인 문제라고 치부되는 친밀한 관계의 폭력문제 그리고 나아가 젠더문제들을 어쩌면 시시콜콜하지만 그래서 더 절실하게 와 닿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멍들고 부서지고 피흘리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고 누군가의 말과 존재에 주눅들고 불안하게 서성이며 그 모든 불안의 책임을 지려고 드는 강박조차 폭력의 증거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순수하고 완벽한 피해자만을 구제하려는 지독한 이중성에 대한 말들은 예전 내가 처음 여성학을 알았던 20년도 훨씬 전과 다를게 없다는게  허망하기도 했다.

 

두번의 강의의 마지막에 강사가 질문을 했다

"혹시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있나요?"

천만에... 너무 이해되고 공감되고 수긍한다.

다만.. 내가 이렇게 이해하고 알고 있는 것을 누구에게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될 뿐이다. 내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페미니스트 엄마가 되고 페미니스트 아줌마가 되고 페미니스트 할머니가 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지금 그렇게 살고 있나.. 자꾸 돌아본다

페미니스트가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긴 쉽지 않다.저마다 가지고 있는 정의가 조금씩은 다를 수 있고 그게 당연하다

누구나 답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의 답만이 정답은 아니다.

책의 말미에 쓰인 말처럼 누구나 자기의 속도로 그렇게 페미니즘으로 향하면 되는 일이다.

 

책을 통해 폭력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폭력은 직접 모욕을 주고  물리력을 행사하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장단을 맞춰주고

그저 바라보며 키득거리고

그리고 혀를 차면서 불쾌하다는 듯이 나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침묵하는 사람까지

모두가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 폭력이다. 폭력을 시작하는 사람은 하나겠지만

그 폭력을 완성하는 것은 모두이다.

침묵이 폭력을 완성하기도 한다.

생각하고 의심하고 그리고 용기내어 말하고 한걸음 나아가는 것

그건 어디서나 필요하다.

 

누군가 니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뭐냐고 한다면

 내가 너보다 더 대우받아야 겟다.

내가 너만큼은 대우받아야겠다. 가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 하고 서로 존중하자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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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3-21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년>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사람이라고 보는 급진적인 관점이다.” (323쪽)

저는 이 책을 쓴 저자가 말하는 페미니즘의 의미에 공감했습니다. 사람은 존중받을 수 있는 존재이니까요.
 
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프롤로그

 

지금까지 우리 사히는 공공의 역할까지 가족에게 떠넘기고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은 것은 ‘가족 총력전’이 되다시피했다. 가족 안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아이들의 자율성은 간단히 무시됐으며 가족주의의 극단이라 할 마음가짐 즉 아이를 소유물로 바라보고 토에하는 행동은 여전하다. 가족 바깥의 사람들에 대한 배척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화됐다. 그러는 동안 국가는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저만치 물러나 각 가족의 ‘각자도생’만 부추겼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 채택 10주년 기념 엘레노어 루즈벨트의 연설중에

“보편적 인권은 어디에서 시작할까요? 작은 곳 그리고 아주 rkRKdns 곳에서부터입니다. 아주 가깝고 아주 작아서 그 곳은 어떤 세계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은 각각의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중략) ... 작은 곳에서부터 인권을 지키려는 모두의 노력이 없다면 보다 큰 세계에서의 발전도 헛될 것입니다.

 

가족안에서 가장 약한 사람의 아주 작은 권리조차 보장되지 않는다면 더 큰 세계에서 발전하려는 노력도 헛된 일이 될 것이다. 아동 인권의 관점에서 가족과 공공성을 생각해보려는 이 책의 시도가 우리 주변의 작은 곳에서부터 변화를 만들려는 흐름에 함께 할 수 있다면 더 바랄것이 없겠다

 

1. 가족은 정말 울타리인가

내것인 너를 위한 친밀한 폭력. 체벌

 

인류학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환대>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체벌은 갖가지 이유로 행해질 수 있고 거기에 따라 붙는 훈계도 그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표면상의 다양성을 넘어서 체벌은 언제나 단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바로 체벌이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너의 몸은 온전한 너의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너에게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체벌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 가르침을 t n용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러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모욕당하는 자가 모요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가 된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나는 언제든 너의 몸에 손댈수 있다는 가르침, 과거 여성에 대한 폭력도 같은 메시지를 깔고 있었다. 체벌을 비롯한 친밀한 관계에 있는 타인에 대한 반복적 폭력은 모두 같은 메시지를 보낸다. 나느 sdjs제든 당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권위주의적 메시지 당신의 존재할 권리를 결정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때리는 사람인 나라는 주장.그렇게 힘으로 상대를 침묵시키고 상대의 목소리를 부정하고 때리는 사람의 목소리르 상대안에 심으려는 시도다.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사랑을 연관짓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사랑하면 신체적으로 우월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힘으로 억눌러도 괜찮다고 가르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랑하고 돌보는 관계에서도 더 힘이 세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은 문제해결방법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체벌은 아이들에게 ‘네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사람을 때려도 괜찮다’ '공격적이어도 괜찮다‘고 가르친다.

데이트 폭력 체벌 등 친밀한 관계에서 사랑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은 맞는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내가 맞을 짓을 했다’고 믿도록 강요한다. 맞는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맞았다고 스스로를 낮추고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그 사회를 말해준다.

 

성인간의 관계에서 상대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행위는 이유가 무엇이든 형사적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보호와 교양 목적의 징계’라는 말로 상대에게 이도적인 해를 끼쳐도 돈다고 법이 허용하는 유일한 대상이 아이들이다. 아이도 한 개인으로서 자율적인 존재이고 어른처럼 생명과 신체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이를 법의 언어로 반영하지 모할 이유가 없다.

 

 

과보호 방임.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할 때 생기는 일

 

‘일가족 동반자살’이라는 불가능성에 대하여

동반자살이라는 용어를 쓰지 말아야 할 이유

#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은 명백한 살인과 아동 인권침해를 온정의 대상으로 만들고 부모가 자기 뜻대로 자녀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퍼뜨립니다

# 동반자삭이라는 표현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라는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비극으로 잘못 인식하도록 만듭니다 부모에 의한 자녀 살해가 지속되는 이유는 부모가 자녀를 소유물로 생각 할 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에 대한 불신이 뿌리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사회가 고민해야할 일은 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지고 작동하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일입니다.

 

우리 사회엔 가족을 운명공동체로 보고 부모는 자녀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는 강박이 지나치게 뿌리 깊다. 부모는 항상 모든 것을 바쳐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뒷바라지 해야하고 만약 그렇지 못하면 부모 자격도 없다는 식의 강박관념 말이다. 자신과 자녀의자아를 분리하지 못하고 내 아이들의인생이 따로 있다고 바라보는 인식이 희박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을 끝낼 때 자식의 생명을 거두는 것이 끝까지 책임을 지는 부모의 태도라고 생각해버리기 십상이다. 이를 ‘가족동반자살’이라는 온정적 표현으로 부르고 ‘오주하면...’이라고 관용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한국의 가족은 압축적 근대화가 낳은 온갖 부작용의 해결사 역할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오랜기간동안 복지를 가족이 해결해왔다. 정부가 압축적 근대화 과정 내내 유지한 기본 기조는‘ 선 성장 후 분배’ 정책이었고 그 결과 복지와 교육 의료 부양등 거의 모든 사회문제를 가족에게 떠념겼다.

사회는 급격히 변화하는데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가족이 똘똘 뭉쳐야 한다. 집단주의의 약화를 불러오기 마련인 근대화 과정에서 거꾸로 직곅족 중심의 배타적인 가족주의는 더 강력해졌다.

 

친권은 권리가 아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에는 더 이상 집이 안전한 곳에 되지 못할 경우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이는 원래 태어난 가정에서 친부모와 함RP 자랄 수 있는 권리를 치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친부모가 되레 아이에게 해로울 때 붐와 아이를 분리하는 것이 아이의 안전과 삶의 질을 위해 더 낫다고 판단한할 경우 국가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제도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국가의 아동보호제도이다. 하지만 한국의 아동보호 제도는 지나치게 강력한 친권에 부딪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컨대 부모에게 학대를 당해 긴급보호조치로 집을 떠나 시설에서 살게 된 아이의 경우 구각에서 수급자로 지정 받아 의복비 식비등 필요한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다. 문제는 수급비를 받기 위한 통장을 개설해야 하는데 미성년자인 아이의 명의로 통장을 만들려면 친권자인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아이를 학대해 결국 격리를 당하기까지 이른 부모가 통장 개설에 순순히 동의할 리가 없다. 동의하지 않거나 동의를 전제로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계좌를 만든뒤 아이명의 계좌에서 마음대로 돈을 인출해가기도 하는데 친권자이므로 그를 막을 방법이 없다

친권은 자녀를 보호하고 교양할 권리이자 의무이다.

 

2. 한국에서 ‘비정상’가족으로 산다는 것

왜 미혼모만 있고 미혼부는 없을까

 

임신단계에서 미혼 임산부에게 미혼모가 받을 수 있는 지원 관련 정책등으ㅢ 정보를 제공하고 비밀을 보장해주며 상담하는 콜센타같은 지원이 절실한데 아직까지는 그런 제도가 없다.

일자리를 얻지 못한 저소득 미혼모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어떨까? 정부는 아이(만 13세 미만)를 홀로 키우는 저소득 미혼모에게 월 12만원(엄마가 청소년일 경우 17만원)의 양육비를 준다. 만약 미혼보가 직접 키우기를 포기하고 아이를 다른 양육시스템으로 보낸다고 해보자 입양을 보낼 경우 입양가정은 입양 수수로 270만원을 지원받고 매달 15만원(14세 미만 )의 양육수당과 20만원의 심리치료비 100%의료지원을 받는다. 또는 위탁가정이나 시설에 보낸다고 해보자. 2015년 보건복지부의 <대한 양육제도 양육비실태조사연구>에 따르면 위탁 가정은 월 66만7000원 공동 생활가정은 128만원 양육 시설은 166만원의 지원금을 정부로부터 받는다.

시설의 경우 종사자 인건비 일부가 포함되므로 단순 동등비교는 할 수 없지만 어떤 경우든 미혼모가 아이를 버리는 것 보다 직접 키울 때 정부의 지원이 가장 적은 것은 사실이다. 만약 미혼모가 기초수급자가 된다면 이 혜택도 사라진다. 생계 급여와 아동양육비는 중복해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혼모를 위한 제도적 지원을 강조하는 이유는 핏줄때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친엄마의 양육이 더 좋고 입양이 더 좋고를 떠나서 여성이 출산과 양육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회구성원들처럼 미혼모에게도 자신과 아이에게 가장 좋은 방법을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마룬인 다양한 가족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차별없이 다양한 가족이 공존할 수 있도록 결혼을 둘러싼 법재도 개선 여성의 양육권과 이의 인권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

 

입양.. 정상가족으로 수출되는 아가들

 

국내입양을 활성화하고 해외 입양을 그만두겠다고 했다가 뒤집는 상황이 거듭되던 무한루프이면의 일관된 흐름은 미혼모가 아이의 양육을 포기하게끔 만드는 상황이 고착되어버렸다는 것이다 1070년대에 미혼모의 자녀가 입양의 주류를 차지하기 시작하고 1980년대 입양이 산업화하면서 미혼모가 아이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정착되었다. 미혼모는 부도덕한 여성으로 이미지화 되면서 평범한 어머니일 수 있는 기회에서 배제되었다

이 바탕에는 ‘결혼한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결합만이 가족이며 이 틀을 벗어나면 해외든 국내든 입양을 통해서 아이에게‘제대로 된 가족을 찾아주는 게 더 좋다느 sdlstlr 즉 강력한 정상가족이데올로기가 깔려있다. 사회규범을 일탈한 미혼모의 아이를 입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녀의 부재를 채우고 보내는 입장에서는 부모의 부재를 채움으로써 정상가족의 원칙을 완성하려는 의도에서 한치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 피부색이 다른 가족이 산다는 것의 의미 ... 이주가정의 아이들의 차별문제

 

3. 누가 정상가족과 비정상가족을 규정하나

 

한국에서 가족은 왜 이렇게 중요해졌을까

사실 핵가족은 근대의발명품이 아니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한국의 전근대 사회에서도 확대가족 대가족은 드문 현상이었고 부부 중심의 핵가족이 보편적이었다고 한다. 수명이 짧아 3대 이상이 공존하는게 드문일이었고 확대가족 유지에 필요한 경제력을 갖추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줄곧 핵가족 제제였는데도 핵가족을 이상화했다가 10년도 지나지 않아 비판하는 담론이 출몰했던 이유는 뭘까

이는 구각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경제발전 과정에서 노동력 특히 값싼 저임금 노동력이 필요했던 국가는 핵가족을 찬양하면서 농촌 자녀의 도시 이주를 장려하고 여성의 노동시장 유입 산아제한등을 골라로 한 가족계획을 장려했다. 그러다가 산업화의 진전으로 농촌의 공동화 및 노령화가 문제가 되고 노인 부양의 필요가 제기되자 이번에는 핵가족을 비판하고 전통적 가족 부양의 윤리를 찬양했던 것이다. 상반된 두 사례의 공통점은 국가가 아무런 사회적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노인 부양의 문제를 비롯한 사회무네 원일을 핵가족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바람직한 가족상을 내세우며 국가가 가족을 이용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회정책이 가족단위로 설계되는 방식이 지속되면 가족을 형성치 못한 개인, 가족에게 충실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개인에게는 사회가 또다시 불이익을 가하는 셈이 된다.

또한 소득보장 교육 돌봄의 양과 질등이 가족에게 의존적일 경우 계층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질이 달라지므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양질의 교육과 돌봄 서비스가 충분치 않은 상황ㅇ서 가족에게 주어진 자유선택이란 곧 개별 경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양극화된 가족 삶의 최대 피해자는 아이들이다. 사교육 과잉 현상이 보여주듯 중산층은 계층의 하락을 하지않으려는 몸부림으로 나서고 저소득층은 방임상태로 인한 돌봄 공백상태에 빠지고 이 스트레스 해소 대상은 아이들이 된다.

 

개인 아닌 가족단위로 사다리에 오르는 사회

 

왜 가족주의는 회사 학교 사회로까지 퍼졌나

가게등에서의 호칭 어머님 이모님

가족같은 분위기 가족같은 회사

우리는 00 가족입니다.

가족을 강조하는 것과 동시에 내 가족 내 부류와 다른 타인은 배척하고 금을 그어버린다.

임대주택단지의 울타리 혐오시설의 거부

 

4. 가족이 그렇게 문제라면

부모체벌 금지법은 사회를 어떻게 바꿀까

 

한국은 왜 가족안에서의 개별성 가족 밖에서의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하는가?

-가족의 생활을 지원하는 공공의 역할부재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망 없이 사적인 안전망이 가족에게 모든 보호를 떠넘기고 당장의 생존이 목표인 가족이 구성원의 개별성을 고려할 여유가 없다.

-치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가족단위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자기 집단만 중요시 하는 가족주의가 사회로 확대되면서 배타적인 태도가 굳어졌고 타인과 사회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다.

 

스웨덴의 부모체벌 금지법이 있다

 

가족내에서 양육을 할 때 폭력을 사용하는 행위를 국가가 금지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가족의 탈 사생활화를 요구하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가족내에서 이러지느 sgoddnl들이 전부 사행활은 아니게 된 것이다,

가족이 사생활영역으로 닫힌 공간 관계가 되어버리면 가족은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공간과 관계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공간과 관계가 될 수도 있다. 폭력은 일상안아세 가정안에서 이루어진다.

부모 체벌금지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체벌을 금지하는 법의 목적은 단순하다. 병백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선명한 메시지를 내보내는 것 폭력과 비폭력 사이에서 아주 단순하고 선명한 줄을 긋는 것이다. 어른의 책무는 아이에게 폭력이나 협박 위협에 기대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며 정부의 책무는 비폭력적으로 아이를 키우는 게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려면 체벌을 금지하는 법과 함께 부모가 필요로 하는 지원을 저우가 제공하고 정부와 사회가 합심하여 부모가 아이들에게 좋은 역할 모델이 될만한 시간과 에너지를 갖기 위해 필요한 환경을 체게적으로 조성해야한다.

 

삶은 개인적으로 해결은 집단적으로

스웨덴식 사랑 이론

이 이론은 진정한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이지 않은 개인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율적익 평등한 개개인 사이에서만 사랑과 우정같은 인간적 교류가 이루어진다. 심지어 부모와 자녀관계에서도 서로 의존적이고 귤욕을 강요하는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한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바라본다. 국가는 이런 굴욕감에서 개인을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함께 살기 가족의 짐을 사회로

아이의 권리인정과 부모의 보호가 평화롭게 공존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아이의 권리와 부모의 권리가 상충하고 부모가 아이의 안녕을 심각하게 침해할 때 선을 긋는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다. <유엔 아동권리협약>은 이 책임이 국가 공적 권력에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적 권력이 개입할 때의 기준은 아동 최선의 이익의 원칙이다. 즉 지금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고려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아이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닌 사람이 아이에게 필요한 보호와 배려의 의무를 지킬 숭 lT도록 국가는 모든 입법적 행정적 조치를 취하라고 주문한다.

즉 아이 개인과 부몬 국가의 관계에서 국가는 가족의 외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는 아이의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받는 상항이 되었을 때는 그 관계에 아주 사적인 부모 자녀 관게에 개입할 당사자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해서는 안될 짓을 정하는 게 먼저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해보는 공감의 감수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물론 필요하지만 이를 개인의 도덕적 과제 감성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폭을 넓히려는 교육이 공교육에 제도적으로 포함되어야 하고 ,<차별금지법> <이주아동 권리보장 기본법>등 이 제정되어야 한다. 그게 우리를 같이 살아가게 해주는 공감의 제도화이다. 역지사지하고 공감하는 능력보다 사적 관계에서는 예의 공적관계에선 정책과 제도가 우리의 공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더 인간적인 장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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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슬퍼지는 게 싫어서 보지 않으려다 중간부터 보게된 드라마가 <마더> 였다.

아픈 아이를 보듬는 건 결국 모성이라고 진부하고 일방적인 타령을 보게 될까봐 기겁했었다 그러나 중간부터 본 드라마는 드라마의 완성도 때문인지 개인적이지만 보편적인 관심때문인지 계속 보게 만든다.

결국 가정폭력은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고 또다른 폭력으로 대물림 된다.

기억에서 봉인해버린 폭력과 버림받았다근 상처 그래서 어떤 사랑앞에서도 외롭고 불안했을 수진은 자기와 비슷한 혜나에게 감정 이입이 되는 건 당연하다.

혜나는 또다른 존재이면서 동시에 수진의 내면아이였으니까

폭력의 피해자이고 버림받은 아이를 이젠 수진이 손을 잡아준다.

그건 혜나에 대한 공감이며 동시에 아직도 8살에 머물러 자라지 못한 수진에 대한 돌봄이다. 스스로 직면하지 않으면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동안 피하기만 하고 상처에 허우적거리기만 했던 수진은 이제 혜나를 통해 혜나를 윤복으로 키우면서 스스로와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아직 어려서 스스로를 바라볼 용기가 남은 윤복은 그 용기를 수진에게 나눠준다.

수진의 마음을 공감하고 자기 때문에 수진이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는 걸 보지 못해 스스로 물러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둘은 서로의 내면 아이가 되고 미래의 어른이 되어준다.

그리고 또다른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는 설악이 있다.

아마 보여지지 않았지만 가족 불화가 있었고 불안한 엄마가 있었고 아직 생존을 위해 어른에게 기대야 하는 어린 설악은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

울지 않고 떠들지 않고 깨끗한 아이가 되는 것

그래야 엄마가 떠나지 않고 나에게 착한 엄마로 남아줄거라는 막연하고 가느다란 희망을 붙들려고 하지만 그건 처참하게 깨져버렸다. 자살 중에 가장 지독한 모습을 보인다는 목 매다는 방법으로 죽은 엄마를 설악이 가장 먼저 발견한다.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아이들은 작은 다툼과 불화에서 스스로 책망하고 자기에게서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내가 착한 아이였다면 내가 조금만 똑똑했다면 내가 없었더라면...

모든 폭력의 피해자가 폭력을 쓰는괴물이 되는 건 아니다.

설악의 상황은 공감가능하고 이해가능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린건 설악의 책임이 크다.

세상의 모든 엄마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다 죽일 수는 없으니까

어쩌면 죽은 설악의 엄마도 순간순간 설악 때문에 웃고 설악 때문에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찰라도 있었을 텐데... 설악은 그 찰라의 순간을 경험하지 못했다. 아니 더 큰 고통으로 지워버렸을 것이다.

여기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은 두 여자가 있다.

너무 어려서 아이를 낳아 예뻐하지만 키울수 없던 엄마는 잘대해주는 남자를 만나지만 결국 폭력앞에 굴복하고 아이를 버리고 살인자가 되고

또 다른 어린 엄마는 아이가 이쁘지 않아서 울기만 해서 남자가 떠났다고 믿으며 모든 원망을 아이에게 투사한다. 예쁠때도 물론 있고 의지도 되지만 어린 엄마의 삶은 쉽지 않다

누구든 손을 내밀고 웃어만 준다면 그대로 기대버리고 싶을만큼 아슬아슬하고 아프다.

그래서 엉뚱한 선택을 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품는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결국 사회적 문제의 근원은 가족이다.

어떤 가족을 경험하는가는 살아가는 나머지를 모두 좌우한다.

경험과 기억은 누가 가져갈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오롯한 내것이다.

그것이 나를 만들고 나를 살게 하고 내가 선택하게 한다.

그렇다면 가족은 무조건 절대 선이어야 하고 모든 윤리의 기준이되어야 하나?

오로지 가족만...

그건 가족에게 너무 가혹하다.

l그런 안전망 하나 없이 사회에 던져지면 결국 자영이 되고 수진의 엄마가 되고 설악이 된다.

모든 게 가족 탓이고 가족 때문일 수는 없다

엄마의 양육이 아이를 결정하고 아이의 삶을 바꾸지 못한다.

엄마는 때로 강한 용기를 내기도 하지만 그 역시 어딘가 기대고 싶은 아이이가도 하다.

엄마에게 아빠에게 그리고 아이에게 힘을 줄 안전망이 필요하다

감성적인 공감 이해 이입이 아니라 예의있게 신중하고 정중하게 그 순간 순간 필요한 것을 내밀 수 있는 제도와 관심이 필요하다.

가족은 깨질 수 있다. 깨져도 된다.

가정폭력 특례법이 결국은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특수목적이라는게 참 유감이다.

누군가 모르는 낯선이에게 가한 폭행은 형사처벌이 가능하지만

친밀한 가족관계의 폭행은 상담과 조언과 충고로 다시 억지로 봉합된다.

가족끼리 그러면 안된다. 가정을 지켜야지..

이미 깨지고 상처만 남은 가정을 지키라니 그런 개뼈다귀같은 소리가 있나

가해자가 다리뻣고 익숙한 공간에서 쳐 자는 동안

피해자는 혼자 모든 악조건을 감수하고 몸을 뉘일 안전처를 찾아 해맨다.

늘 친밀한 관계에서는 그리고 대부분의 관계에서 가장 약한 존재가 가장 고통 받는다.

     

결혼제도에 속하지 않고 아이를 낳읗 수도 있다

그것이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을 일일 수도 있겠지만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면 그럴 수 있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일이 힘들 수 있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고 독박육아라는 말도 과장이 아니다.

엄마의 모성의 위대함이 스스로 아이를 양육할 수는 없다.

돈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제도적 뒷바침이 필요하다.

가정내 갈등이 생길 수 있다.

사람이 악해서일 수도 있고 상황에 몰리다 보면 살기위해서 일 수도 있고 잘못된 양육으로 잘못된 도식이 성립되어 생길 수도 있다

가족일은 사적인 일이니 알아새 처리하라는 말은 너무 무책임하다.

누군가 죽거나 만신창이가 되어야 관심을 가진다는 건 너무 잔인하다.

남편이 아내를 때릴 수도 있지 부모가 자식을 때릴 수도 있지

가족끼리 그럴 수도 있지

다른 사람은 다 안그런데 참 유별나게 굴기는...

그런 말이 주는 2차 피해는 지금 말하지 않기로 한다.'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고  혹은 아이에게 최선이 내가 키우는 것보다 입양이나 시설에 보내는 것이 옳다고 선택할 수도 있고 가족간에 갈등이나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받쳐줄 시스템은 너무나 없다.

자연스럽게 태어나면 위대한 모성이 키우고 아비가 되면 처자식 책임지고 먹여살리는 건 당연한거고 도덕적으로 일탈까지 사회가 다 받아줄 수는 없고 가족의 문제에 간섭하는 건 아니라고 접잖은 척 뒤로 빠져야 하고... 이건 그저 사회 안전망을 가지지못한 변명에 지나지 않더라

어떤 체게적인 뒷받침이 있었다면

자영은 조금더 긍정적으로 혜나를 돌봤을 수 있고

잘못된 선택으로 매를 맏던 수진의 생모는 사회의 도움으로 전과대신 다른 자립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어린 설악도 괴물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이진이 자기 가족만 아은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사회 안전망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결국 가장 기초적인 교육과 양육은 가정에서 책임질 수 밖에 없고 가족이 그만큼 중요한 사회적 단위이지만 세상이 달라지고 다양해지는 만큼 문제도 제각각 벌어지는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뒤를 버텨주는 울타리가 될 사회적 제도는 무엇보다 절실하다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일은 필요하다. 아니 중요하다. 그러나 그게 그저 그렇게 끝맺음이 된다면 그렇게 반복될뿐이다

그건 결국 문제를 개개인에게 맡겨버리는 무책임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바뀌지않는다

그래서 이 책 말미에 저자가 말한 개개인이 가져야할 예의와 사회적인 정책과 제도가 더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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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말 잘 읽힌다. 잡은지 반나절이면 끝이다.

 

2. 게이고의 유일한 시리즈 인물인 가가 형사는 은근 매력적이다

   무심하고 냉정하지만 치밀하고 집요하게 사건을 물고 늘어지는 점이 좋다.

   실제 이런 형사가 얼마나 될까 싶어  아쉽다.

 

3. 게이고는 추리소설을 쓰지만 늘 사회문제를 말하고 싶어한다.

   사람이야기. 관계망속에서 큰 권력앞에서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가 주된 관심처럼 보인다.

   어쩌면 추리물이 인간의 본 모습을 가장 충실하게 보여주는 장르가 아닐까 싶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보이는 것만 믿을 수 없다는 걸 잘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 정의롭고 도덕적인 결론이 나온다.

  용기를 내라. 진실에서 도망치지 마라. 스스로를 믿어라. 등등등

 

4. 피해자가 죽고 경찰이 가족에게 탐문을 할 때 의외로 가족들이 죽은 가장에 대해  아버지에 대해 잘 모른다는 묘사가 인상적이다.

사실 내가 늘 보고 매일 만나는 사람을 잘 안다고 믿지만 얼마만큼 알까

사실 가족이지만 서로의 개인적인 면을 존종해주고 싶어서 일정부분은 공유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고 있고 그것이 존중이라고 믿는데 막상 죽고 나서 그가 어떠했느냐고 묻는다면 살아있을때의 존중이 죽어서는 무심함 무관심이 되고 말았다. 사실 우스개 말로 가족이니까 그러는거 아니라는 말처럼 가족이니까 말하지 않고 가족이니까 폐끼치지 않고 가족이니까 그냥 모른 척 넘어가주는 면도 많아서 과연 내가 죽는다면 혹은 가족중 누군가가 죽는다면 뭉뚱그려서 할 말은 많을지 몰라도 형사들이 세세하게 캐묻는 탐문에는 대답할 수 있을까 나부터 의심스럽다.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다.

어떤 큰 조직에 이용될 수도, 어쩔 수 없이 연류되어 원치 않은 선택이나 행동을 하거나  그것만이 살길이어서 하는 수 없이 행해지는 것들이 있다.

큰 흐름을 봐야하고 구조적인 문제를 고쳐나가야 하고 바꾸어야 하지만

그 속에서 그것이 잘못인 줄 알지만 어쩔 수 없이 행동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내가 한 행동과 말과 태도는 가장 작은 범주에서는 내가 선택한 것이다.

누군가가 등을 떠밀고 억지로 밀고 가더라도 나에게는 작지만 중요한 거부할 수 있는  힘은 있을거라 믿는다.

안타깝지만 행동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은 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그릇된 것이라면 반성도 함꼐

 

일본의 신사들 일본의 다리 지명등을 보면서 여행에 대한 욕구가 불쑥 느닷없이 올라온다.

신사를 찾아 참배하는 거나 차를 타고 다니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탐문을 하고 돌아다니는 행동들 메밀국수. 정식같은 음식들 작은 노포들에 대한 묘사

드닷없이 일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을 그냥 덮는다는 것 없던 일로 하자는 것은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가장 나쁜 방법이다.

세상엔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없다.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다.

덮어주는 건 가장 나쁜 가르침이라고 가가 형사가 말한다. 그러게 배운 아이는 모든 걸 덮는 것으로 무마하려는 그릇된 도식을 갖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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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8-02-22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가와 시리즈도 있습니다.
대표작은 용의자x의 헌신이죠☺
 
새로 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 세상에서 가장 쉬운 임승수의 마르크스 자본론 강의 원숭이도 이해하는 시리즈
임승수 지음 / 시대의창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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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싶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원숭이도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글을 읽고 기본적인 해독이 가능하다면 누구나 이해하기 쉽다. 다만 수식이 조금 헷갈리거나 이해했지만 다음장에서 다시 새롭게 보일 가능성은 있지만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자본론>이란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또 다른 의미이다.

어떤 체제든 자본의 움직임이 방해받아서는 안되며 자본이 모든 것의 중심이고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 값이라는 속성은 어떤 체제에서도 바뀌지 않는다.  체제 위에 자본이 있다

신 자유주의라는 이름 세계화라는 이름은 자본이 자기 증식을 위해 좀 더 넓은 무대를 원하는 욕망 과 다르지 않다.

인간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자 하는 욕구를 무시하고

각자 도생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경쟁으로 몰고 가는 것은 결국 자본의 논리였다.

성적대로 힘을 가진대로 돈을 가진 만큼을 기준으로 줄을 세우는 사회 그래서 무한경쟁으로 사람들을 몰아가면서 모든 패배와 절망은 모조리 개인의 몫이 된다.

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은

가지지 못한 자는 게으른 자이고 이루지 못한 자는 미련한 자이며 얻어내지 못한 자는 무능한 자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자본의 힘은 정치에도 교육에서  사회전반적인 질서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마지막 보루라고 믿는 법에도 존재한다. 힘이 기준이 된다.

 

지금 다시 옛 원시 공동체로 돌아가자고 할 수는 없다.

지금 여기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왜 제국주의의 형태로 나타나는지

세계가 함께 머리를 모아 세계를 위해 만들었다는 대부분의 기구들이  결국은 강자의 논리가 되고 마는지..그 모든 뒤에는 실제는 없으면서 모두를 지배하고 추앙받는 자본이 있다.

둥구권이 무너지고 자유주의가 성장하면서 이제는 지나간 논리라고 치부했던 자본론이 다시 신자유주의 시대의 우리에게 묻고 있다

지금 당신은 행복하고 만족하는지???

 

이런 책이 왜 교과서로 쓰이지 않을까?

뭐 완벽한 책은 아니지만 한번쯤은 읽어봐야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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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경험이 각기 다르다는 것은 우리의 요구가 각기 다르다는 뜨시며 정치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도 단 한가지가 아니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연대를 위해 노력하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전략들을 세밀하게 세움으로써 다양성을 추구했다. 정치적 연대를 발전시키려 한다면 여성은 다양한 문화를 지닌 이들이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탐색해야 한다. 유색인 여성들이 서로를 배우려고 함께 노력할 때 자매애를 구축해야하는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다. 연대를 위해 백인 여성에게 의지할 필요는 없다. 백인 여성들은 기회주의적인 관심때문에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반인종차별주의자 여성들과 단결할 수 있다. 우리는 정치적 연대와 페미니즘 운동으로 하나되어 단결할 수 있고 자매애라는 개념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회목시킬 수 있다.

 

1. 흑인여성 .페미니즘 이론 형체 만들기

 

 프리단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페미니즘 담론을 지배하는 백인 여성들도 여성들의 현실에 대한 자신들의 시각이 모든 집단의 여성들이 실제로 겪는 경험에 비추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의문을 거의 품지 않는다. 또한 최근 몇년 동안 비록 편견에 대한 지각이 상당히 늘어나긴 했지만 그들의 시각에 인종적 계급적 편견이 어느 정도까지 반영되었는지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지배 체제로서 성차별주의는 제도화 되었지만 이 사회에서 여성의 운명이 한가지 절대적인 방식으로만 정해지지 않았다. 억압바든다는 것은 '선택할 수 없다는 뜻이다.

진정으로 억압받은 사람들은 비록 조직화된 저항에 참여하지 않고 저술을 토해 억압의 본질을 분명히 설명하지 못할지라도 자신이 억압받은 사실을 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거칠고 가차없는 비판은 페미니즘 투쟁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며 해방 이데올록를 함께 만들고 해방 운동을 함께 하자는 의도였다.

 

2. 페미니즘 . 성차별적 억압을 종식하기 위한 운동

페미니즘은 성차별적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투쟁이다. 페미니즘의 목적은 특정한 여성 집단이나 특정한 인종이나 계급의 여성에게만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변혁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페미니즘이 생활방식도 아니며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기성의 정체성이나 역할도 아니라는 점이다.

남성과의 사회적 평등에 촛점을 맞추어 페미니즘을 정의하면 결과적으로 차별대우 남성의 태도 법적 형태등을 강조하게 되다. 반면 성차별적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으로 페미니즘을 정의하면 지배체제에 그리고 성 인종 계급의 억압의 상호연관성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앞으로 페미니즘의 투쟁의 토대는 성차별주의및 여타 형태의 지반 억압의 문화적 기반과 원인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지하는 것으로 탄탄하게 기반을 다져야 한다. 억압 철학의 구조에 도전하여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페미니즘적 개혁은 영햐력을 오래 발휘할 수 없다.이 운동은 남성과 평등해지자는 운동이 아니라 사회에서 성차별적 억압적 상황을 종식시는 것 을 의미하는 것이다.

 

3. 페미니즘 운동의 중요성

 

성차별적 지배는 다른 형태의 억압과 다르게 사람들 대부분이 가정에서 실제로 목격하거나 체험했다. 우리는 대체로 가정을 떠나 넒은 사회에서 인종차별이나 계급 차별을 목격하거나 체험한다. 남자가 없는 가정에서 조차 어머니나 다른 어른들의 관계를 통해 아이들은 성차별적인 역할형태를 엄격하게 준수하고 권위적 지배를 중시 여기도록 학습한다.

각각의 사람들이 모든 형태의 억압에 저항하도록 투쟁이 필요하다고 인식해야만 정치의식은 중요한 발달 단계로 도달한단. 성차별적 억압에 저항하는 투쟁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여성들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4. 자매애 .  여성들간의 정치적 연대

 

우리는 우리들만의 언어를 정의해 사용해야한다. 함꼐 피해자가 되어 이를 바탕으로 유대를 맺거나 공통된 적에 대응하려고 유대를 맺는것이 아니라 성차별적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페미니즘 운동에 정치적으로 참여한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유대를 맺어야 한다 서아별적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페미니즘 우동에 정치적으로 참여한다면 남성과의 평등이라는 이슈 혹은 남성 지배에 대한 투쟁에 만 우리의 에너지를 집중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은 착하고 남성은 나쁘다는 성차별ㅈㄹ적 억압구조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설명은 더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남성 지배에 저항할 수 있으려면 우선 성차별주의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야 하며 여성의 의식을 변화 시키는 노력을 해야한다. 여성들은 서로간에 성차별적 사회화가 된 것을 노출시키고 살펴보고 제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면서 서로의 힘을 키워주고 지지하며 정치적 연대를 발전시키기 위해 견고한 기반을 세워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다르며 그 다른 점은 타인의 우리에 대한 인식에 얼마나 결정적인 요인이 될지를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차이를 존중하도록 끊임없이 일꺠워주어야 한다.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고통을 받지만 모두가 억압을 받는 것은 아니며 억압의 정도가 균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경험이 각기 다르다는 것은 우리의 요구가 각기 다르다는 것이며 정치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도 단 한가지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연대를 위해 노력하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전략을 세밀하게 세움으로써 다양성을 추구한다. 저이적 연대를 발전시키려면 여성들은 다양한 문화를 지닌 이들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탐색해야 한다.

연대는 지지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연대를 경험하려면 공통된 관심사와 신념을 가진 공동체여야 한다. 즉 자매에를 구축하고 하나로 뭉치겠다는 공통된 목표를 가져야 한다. 이런 일치됨을 중심으로 통합하고 자매애를 구축해야한다. 지지는 부차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지지는 쉽게 얻고 쉽게 철회된다. 그러나 여대는 지속적인 참여가 요구된다. 페미니즘 운동에서 우리가 성장하려면 다양성과 의견 불일치와 차이가 필요하다. 연대감을 느끼려고 굳이 차이를 없앨 필요는 없다. 억압을 종식하려는 투쟁에 동등하게 임하기 위해 동일한 억압을 겪을 필요는 없다. 여자끼리 결속을 위해 반 남성적 정서를 가지기 보다는 풍부한 경험과 문화와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5. 남자 .. 투쟁을 함께 하는 전우

 

분리주의 이데올로기는 여성 홀로 페미니즘 혁명을 할 수 있다고 미도록 부추겼지만 실상 여성 홀로는 불가능하다 성차별적 억압을 유지하고 지지하느 ㄴ주된 행위자는 남성이기 때문에 남성들이 자신의 의식과 사회 전체의 의식을 변혁시킬 책임을 맡아야만 성차별적 억압은 사라질 수 있다. 남성들은 주된 역할을 맡아야 한다. 이는 남성들도 저항 투쟁에서 똑같은 몫을 해야한다는 뜻이다. 남성들은 동성 동료들의 성차별주의를 폭로하고 대항하고 반대하고 변혁하는 식으로 공헌할 수 있다.

 

6.권력을 보는 시각 바꾸기

권력이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지배및 통제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여성이 사회 정치적 영역에서 남성과 동일한 위치에 있다면 남성과 동일한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할 것을 안다. 그리고 남성집단은 권력세계로 진입한 여성들이 기존 상태를 고수하고 유지하려 할 때만 남녀의 평등한권리를 보장해주었다. (남성형 권력을 동일하게 준수하고 따르기를 바란다) 권력에 들어간 여성들은 가부장주의를 지속적으로 지원하면서  권력의 개념이란 지배와통제라고 인정하고 그런 권력을 행사한다.

여성이 성차별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으려면 권력을 지녀야 한다는 주장은 여성이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잘못된 가정에 근거한다. 가장 억압받는 여성조차 분명 나름의 권력을 행사한다. 가장 약하고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집단이 쥐고 있는 권력은 자신에 관한 정의를 권력자가 강요하는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권력에 의해 정의된 자신의 현실을 거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이처럼 근본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저항행위이며 강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자신들이 권력이 없다고 믿도록 조장해서는 안된다. 여성들이 매일 행사하는 권력들을 명확하게 설명해야 하며 그 권력들이 성차별적 지배와 착취에 저항하는 데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7. 일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기

 

페미니즘이 일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보는데 초점을 맞춘다면 여성 노동자의 경제 상황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심리적 착취에 저항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임금을 받든 무임금이든 여성이 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여성에게 새로운 자아개념과 자기 정의를 제공한다. 페미니즘 운동 내부에서 전문직과 출세에만 집중했기때문에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은 마치 다른 모든 노동 특히 저임금 노동은 가치가 없는 듯 행동했다 페미니즘은 민중여성들이 하는 일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태도는 남성들의 태도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8. 여성 교육. 페미니즘 어젠다.

 

읽기 쓰기에 기본을 두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기본이다

 

9. 폭력을 종식하기 위한 페미니즘 운동

 

폭력은 권력의 문제이며 사회 가정에서 권력이 남성에게 몰린 구조에서 권력이 있는 남성이 물리적 정서적 억압을 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력을 가진 지배력이 폭력을 만들어내는 구조에서는 성차 인종차 계급 차 모든 경우 폭력이 유발될 수 있다.

폭력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권력을 많이 가진 쪽에서 적을 쪽으로

사회에서 권력을 가지지 못한 남성들은 그곳에서 억눌려 있던 폭력성을  통제상황이 필요 없는 경우 즉 보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처벌의 위험이 없는 상황에 행사한다. 가정은 대게 통제가능한 상황이며 대상은 여성이나 어린 아이다 남성은 자기가 가진 감정적 고통을 여성에게 배출하고 투사한다.

남녀간의 사랑과 폭력을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우리가 바꾸어야 하는 것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의 성별이 아니라 물리적 관계이다. 누군가는 선천적으로 공격적 성향을 가졌고 누군가는 선천적으로 수동적 성향을 타고 난 것이 아니다

어떤 형태의 폭력이든 폭력에 관대해지거나 익숙해져서는 안된다.

가족내의 폭력 에서 군국주의적 전쟁  아동에 대한 통제와 교육이라는 이름하게 행해지는 폭력등 약자에 대한 자연스러운 통제등 모든 폭력을 낯설게 바라보며 재 정의해야한다.

 

10 혁명적 양육

 

 여성의 양육은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며 페미니즘 운동가를 비롯한 사회 모든 구성원들은 이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모성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가하고 모성이 여성에게 강요된 경험이나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경험이 되지 않도록 하며 여성 혼자서든 남성과 함께든 상관없이 여성의 양육이 훌륭하고 효과적인 것이 되도록 페미니즘의 맥락안에서 여성의 양육은 세롭게 인정받고 칭찬 받아야 한다.

어머니다운 돌봄과 아버지 다운 돌봄의 구분없는 효과적인 양육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11. 여성의 성적 억압종식시키기

여성은 자기 성에 대한 결정권이 있다.

 

페미니즘은 하나가 아니다.

하나의 공통된 가치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해야할 행동들은 하나일 필요는 없다. 여성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일 수 있는 지구의 절반 인구들도 저마다 인종 종교 계급 학력 지역에 따라 다른 특성을 가진다. 각자가 가진 고유한 특성과 경험  생각 감정을 하나의 틀로 묶을 수는 없다. 성차별이 성 평등으로 가는 길에서 원하는 것이 남성과 똑같은 대우를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어떤 기본값을 가진 여성들을 모델로 모두가 그렇게 하나로 묶여야 할 필요는 없다.

백인 여성들이 시작한 페미니즘이 유색인종 여성들에게는 맞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처럼

모두가 만족할 만한 가치라고 고집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내가 경험하고 내가 생각하고 느꼈던 것을 토대로 행동할 수 밖에 없다.

그 토대에서 한계를 느끼고 욕망을 가지고 변화를 추구한다.

하나의 가치만 내세우며 그 기준에 모두가 따르라고 한다면  그건  또하나의 차별이 된다.

개인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이라고 여성주의는 말한다.

내가 아니라 다른 타인이 겪은 차별 역시 차별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우리가 바꾸어야 할 과제가 된다. 여성이어서 차별받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로서 차별받고 싶지 않다는 것 그것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성들간의 정치적 연대 그리고 남성들은 적이 아니라 함꼐 가야 할 동지라고 생각하는 것

폭력에 대한 생각들 바뀌기 위해 선행되어야할 교육의 문제 육아의 문제 그리고 일에 대한 생각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  어쩌면 페미니즘의 흐름이 긴 만큼 이제는 당연하게 이해할 내용들도 있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드라마 <미스티>를 보며 누구나 부러워하고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는, 주인공 고혜란의 남편 강태욱을 보며 참 많이 답답했다.

참 좋은 남자라는 건 알겠는데  상대가 바뀌지 않는다고 징징거리는 건 아니지 싶었다.

고혜란이란 여자는 최고에 대한 욕망이 있고 무엇보다 일이 우선이었고 그렇게 도전할만큼 충분한 능력과 배짱과 용기도 인물이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사귀었을때 고혜란은 충분히 그런 면을 드러냈다. 내숭떨지 않고 아닌척 하지 않으면서 나는 욕심이 많고 그걸 이룰거라고 그래서 결혼은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멋지게 강태욱은 그런 그녀에게 명함이 되어주고 배경이 되어주겠다고 했다. 사랑하지 않아도 내가 사랑하니까 괜찮다고 까지 했다.기꺼이...

뭐 연애할때 무슨말을 못하랴... 하고 말한다면 할말이 없다만

고혜란이 충분히 욕망덩어리고 이기적이고 속물적이라는 것도 알겠지만 그녀는 그 본능에 늘 충실하고 정직하다. 모든 패를 드러내고 앞으로 달려가는 사람인데

결혼후  변하지 않는다고 달라지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치열하게 싸우며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방에 쳐박혀서 꽁하고 삐진 그 남자 강태욱이 이해되질 않는다.

자기랑 달라서 좋아해놓고 자기와 너무 안맞다고 토라진다(말그대로 토라진다. 화를 내는게 아니라)

7년전 혼자 유산했다는 이유로 현재 이 모든 갈등의 원인이 고혜란인것처럼 꽁하다.

내 뜻대로 달라지지 않는다고 내 뜻대로 고분고분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정서적으로 냉대하는 것도 결국 폭력이 아닐까... 주인공이라서 멋지게 나오니까 모든 것이 덮이는 거지만 결국은 그도 폭력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 책은 저자가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그래픽 노블이다.

오사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멋지게 자유롭게 살 수 있겠다고 기대하며 그렇게 살아간다.

멋진 누구나 좋아하는 남자 닐을 만나고 둘은 사랑에 빠지고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커플이 되었다.누구나 닐을 칭찬했다 멋지다고 젠틀하고 젊은 시절 내모습같다고 모두가 좋아했다.

그런 닐을 사귀게 된 오사는 뿌듯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닐이 이상하다.

아니 어느 순간 바뀐 건 아닐 것이다.

사소한 일에 화를 내고 내게 관심이없다고 하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을 싫어한다.

옷차림을 타박하고 화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며 니가 그래서 잘못이라고 모든 것이 니 잘못이라고 윽박지르고 따지고 소리지른다.

사랑하니까 그런거라고 믿었지만 자꾸자꾸 주눅들 수밖에 없다.

잘못을 지적당하기 시작하면 무엇이든 내잘못인것만 같다.

내가 화장을 이상하게해서 내가 그의 마음을 몰라주고 친구들과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내가 칙칙한 옷을 입어서 옛날 남자친구에게 받은 엽서들을 정리하지 않아서

내가 무엇무엇을 하지 않아서  혹은 내가 무엇무엇을 했기때문에 그가 화를 내고 소리지른다.

이젠 그의 표정과 말투에 예민해지고 무엇이 옳고 그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나올지가 중요하다. 내가 잘못한게 무엇인지 그의 심기를 건드린게 무엇인지 그것을 빨리 알아채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이다.

이것이 옳으냐 그러냐는 중요하지 않다

짙은 화장에 개성있는 옷차림에 활발하고 개방적이고 자유롭던 오사는 사라지고 칙칙하고 비슷비슷하고 평범한 오사가 닐 곁에서 전전긍긍한다.

어느 순간 이렇게 7층에서 뛰어내려 내가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지만 이렇게 죽을 수도 없다. 그건 너무 억울한 일이니까

잔소리가 화가 되고 짜증이 되고 윽박이 되고 그리고 물리적인 폭력으로까지 번지면서 오사는 생각한다. 이건 아니다. 이렇게 맞고 당하고 모든 관계를 끊어내고 고립되어 살수는 없다

내 모든 삶을 닐과 바꿀 수 없지 않을까

그러나 닐이 웃어주고 미안하다고 하고 안아주면 모든 것은 그저 녹아버린다.

그래 별일 아닐꺼야  이렇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인데

내가 뭐라고.

오사는 점점 닐에게 길들여지고 스스로 무능해지고 있다.

 

왜 그렇게 살지? 왜 그렇게 당하면서 한소리 못하고 나오지도 못하고 의지가 없이 끌려가는거지?

타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쉽게 말할 수 있다.

아니라고.. 아니되라고 왜 말하지 않았나요?

근데 그 순간 이게 잘못된건가?  아니면 내가 잘못하는 걸까? 그게 혼란스러운 지점이 있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겨버리면 내가 이상한가 생각할 수 밖에 없고

너는 못나고 못나고 못나고 어리석고 어리석고 어리석고 무능하고 무능하고 무능하고... 그렇게 되풀이해서 들어온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다. 의존적이고 약해질 수 밖에 없다.

 

책은 사람이 어떻게 길들여지고 어떻게 점점 약해지고 무능해지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현실을 용기있게 직면하는 순간 도움을 받을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길도 쉽지 않다.

다시 되돌아가는게 편하게 생각되기도 하고 내가 과연 할 수있을까 하는 마음도 들고 한번 든 상처로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상담을 받고 진단서를 끊고 고소를 하고 재판을 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

결국 오사 역시 모든 과정을 겪고도 한 참 후에 닐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장면을 보고 안도한다.

미안하지만 .. 이제 닐의 관심대상은 저 여자가 되겠구나 이제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겠구나 하는 순간 안도한다.

폭력이 나쁜 건 사람을 아프게 하고 다치게 하는 것이지만

스스로를 약하게 만들고 믿을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고 만드는 것이 더 위험하다.

 

사랑이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는 정의란다.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감정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다.

타인을 아끼고 귀중하게 여기는 것  내가 아닌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나를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기도 하다. 나만 아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아끼는 마음

그것만 기억하고 있어도 적어도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사랑이 폭력이 되어버리는 일은 적어지지 않을까

 

 

여기까지 페이퍼를 썼을 때 계속 미투  고백이 이어진다.

문단에서 연극계에서....

지금 드러난 분야 이외 다른 곳인들 당당할 수 있을까?

권력을 이용해서 지위를 이용해서 더럽고 추악한 폭력을 휘두른 사람들뿐 아니라

내 일이 아니니까 나는 직접 행동하지 않았으니까

뭔가 여지가 있으니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을 했거나

나는 그냥 침묵하고 말겠다고 그게 중립적인거라고 스스로 포장했던 모든 사람들

그들 역시 모든 비난과 죄의식에서 자유로울 순 없을 것이다

폭력 당사자가 아니라 옆에서 침묵하고  객관적인 입장이 되겠답시고 중립이라고 도망가던 모든 이들 역시 방관자라는 이름의 폭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건 아무것도 아닐거라고 애써 위안하고 나는 저만큼은 아니어서 괜찮다고 생각했다면 조금 더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세상에 당연하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 다 그렇고 그런거 아니겠냐고  잊으면 되고 툭툭 털면 되는거 아니냐고 쉽게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깃털만큼 가벼운 말이 누군가에겐 바위처럼 무겁게 내려치는 고통이다.

사랑한다면 이해한다면 아껴주고 싶다면

그 상대가  NO!! 라고 말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는게 먼저가 아닐까

그리고 당연히 받아들이는  마음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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