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 - 소녀들을 위한 페미니즘 입문서 우리학교 소년소녀 시리즈
정희진 외 지음 / 우리학교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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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페미니즘인지 그 생각의 전환이 왜 중요한지를 우리가 접하는 현재의 상황으로 잘 풀어냈다. 누군가에는 시시할테고 누군가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일 수 있지만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생각하고 이야기 나눠야할 것들이 알차게 다 있다. 왜 억울하고 화나고 부끄러운지 묻는다면 이 책부터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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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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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은 관계를 떠나 살 수 없다.

누군가 타인과 관계를 맻는다는 것은 입고 먹고 자고 배설하는 일만큼 중요하다.

기본 욕구가 충족된 다음 사람은 누구와 관계를 맺고 인정받고 이해받고 사랑받고 싶어한다

동시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인정하고 싶다.

어쩌면 사람이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관계를 통한 인정받음이고 그 방식은 상대가 보여주는 감정반응일 것이다,

웃어주고 울어주고 화도 냈다가 어깨를 툭툭 치면서 괜찮다고  힘내라고 하는 말과 행동과 표정들   그런 하나하나의 몸짓이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것같다.

내가 웃으면 함께 웃고 울면 함께 울어주고 어깨를 다독여주고 무서울 땐 안아주고 힘들 땐 가만히 기다려주고 하는 감정표현들이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다.

 

다만 그 감정의 표현에 대해 우리가 기대하는 바가 늘 있다,

내가 깨닫지 못하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

나는 지금 화내지만 그냥 다독여주면 좋겠어요

나는 지금 화를 내지만 사실은 그냥 울고 싶은 걸 참는 거예요

웃고 있지만 지금 너무 불안하고 무서워요.

울고 있지만 사실 개운하기도 해요....

어쩌면 사람마다 가지는 감정의 패턴은 조금씩 다르다,

 

아니 우리는 모두 우리감정조차 모르기때문에 타인의 감정은 더더구나 알지 못한다.

내가 가진 감정조차 그것이 무엇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데 남의 욕구나 감정을 어떻게 알까

그냥 알아주길 바라지만 사실 서로 오해하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

우리는 서로 잘 안다고  니마음은 내가 잘 안다고 너말고 누가 날 알아주겠냐고

그렇게 조금씩 어긋나고 조금씩 오해하고 오해받으면서도 관계를 이어나간다

그건

모두에게 통용되고 인정받는 방식과 함께 사회마다 개인마다 조금씩 다른 방식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각각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공통으로 통하는 무언가를 가지는 것 그것이 사람들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들의 질서다.

그래서 누구나 알기도 쉽지만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 감정이고 표현이고  가장 쉬우면서 어려운 것이 타인과 관계하는 일이다,

 

선윤재는 선천적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이다,

자기에게 일어나지 않은  감정이므로 타인의 감정도 알지 못한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이 드는지 선재는 일일이 상황마다 경우마다 그때의 감정들을 배우고 외울 뿐이다, 쉽지 않다,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다른데 사람ㄷ과 상황이 뒤섞이면 그 경우의 수는 기하급수로 늘어날 뿐이다,

다만 선재는 내 감정도 모르고 타인의 감정도 모르기에 솔직하다,

나는 모른다, 나는 다르다, 나는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엄마라는 울타리가 없어진 이후 어쩌면 선재에게 솔직함만이 살아가는 무기가 될수 있겠다,

그리고 곤이를 만난다,

전재와는 정반대에 있는 곤이

아무것도 모르고 무심한 선재와 달리 가장 에민하고 가장 민감하고 가장 약한 곤이가 만난다,

서로는 서로를 알 수 없다,

복잡한 수학공식보다 더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 서로에게

그리고 소년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성장한다,

윤재는 윤재의 방식으로 그리고 곤이는 곤이의 방식으로  나중에 등장하는 도라 역시 그만의 방식으로 성장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각각이고 그래서 아름답고  세상은 괴롭고 동시에 즐겁다.

 

 

소설은 조금은 독특한 선재의 성장담이며 동시에 선재가 만나고 관게맻는 사람들과 나누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관계 맺음은 세가지로 나뉜다,

나와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사람들은 나와 다른 타인과의 관계맺음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쩌면 그건 가장 쉬운 방법일 수도 있다. 그저 맞는 척 연기할 수도 있고 조금 양보하면 그만이거나 무대뽀로 밀고 나갈 수도 있다. 연기할 수도 있고 그래서 상처받기도 하지만  타인과의 관계없이 살기는 쉽지 않기때문에 누구나 어쨌든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살아가는 사회에서 누군가 타인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면 사회와의 관계도 맺어 나가기 어렵지 않다,

가장 어려운 일은 아무래도 자기와의 관계 맺기다,

사람들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믿어서 가장 무심하게 대하는 존재가 바로 자신이다,

곤이는 스스로 곤이를 모른다, 이수였던 곤이 그리고 댱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곤이이전의 이후의 이름들의 그 존재를 스스로 잘 모른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그토록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아니 어쩌면 그 감정들이 두렵고 낯설어서 더 설쳐대고 더 강한 척하고 더 거칠게 군다,

윤재도 윤재자신을 모른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 무엇이 꿈틀거리는지 알지 못한다, 단지 감정을 알지 못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자신을 모른다고 여긴다,  윤재와 곤이의 다른점은 여기서 시작한다,

윤재는 자기를 모른다는 걸 알고 있고 곤이는 그것조차 모른다,

윤재는 그저 솔직하게 자기를 드러낼 뿐이다, 상처를 입거나 상처를 주거나 정직하게 직면하고 받아들이고 학습한다

곤이는 피하고 무시하고 도망칠뿐이다, 더럽고 치사하고 싫고 두려워서..

 

성장을 말하고 있을지 모를 이야기에서 나는 관계맺음을 찾는다,

나와 타인과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

그래서 내 삶이 해피앤딩이 되는 것인지 새드 앤딩이 되는 것인지는 다 살기전에 알 수 없다.

다 살고 나서도 쉽게 단정지을 수 없을 것이다,

삶은 그냥 그대로의 삶이지 그게 행복이든 불행이든 의미가 없을것이다,

그건 다만 나중에 관계 없는 타인들이 붙이는 이름이다,

 

다행히 이야기 말미에 모두기 조금씩은 더 행복해지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나가지만

그래도 삶이 끝나지 않은 한 또 다른 모퉁이가 나오고 또다른 복병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래서 살만한지도 모르겠다.

 

 

사족  요즘 보는 드라마 '비밀의 숲'에 나오는 황시목이라는 인물이 윤재의 20년 쯤 후의 인물이 아닐까 싶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해 지나치게 솔직하고 직선적인 인물

드라마를 보면서 자꾸  아몬드의 윤재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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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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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

독일의 어느 학교 교실에서 유대인 소년과 독일 귀족 소년이 동급생이 되었고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친구가 될 수도 ... 라는 예감에 서로 친구가 된다.

 

작가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자연과 계절과 성과 시내 곳곳을 묘사하고 있지만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책을 넘기면서

언제 뇌관이 뽑힌 폭탄이 터질지 조마조마하다,

더 친하기 전에

더 상처받기 전에

이 우정을 멈추는 것이 낫지 않을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이기적인 마음은 두 소년의 우정이 기쁘지만은 않았다,

 

저자는 노골적으로 나치즘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언뜻 보이는 히틀러의 초상화 나치의 문양을 스치듯 표현하고 말지만 그 은밀하고 습습하고 불길한 냄새는 자꾸 책장밖으로 넘어나왔다,

이제 그만.... 더 상처 입기 전에 이 우정을 멈추기를...'

 

결국 갈등이 일어나고 두 사람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다른 길을 갈 수 밖에 없었고

그리고 전쟁의 기운이 드리워진 후

한스는 미국으로 떠나고 콘라드는 독일에 남는다, 당연하게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둘은 이미 잊었다고 여겼고 삶은 절대 어느 지점에서도 만날일이 없는 긴 선을 만들어 갔지만  우연히도 날아온 동창명부에서 한스는 콘라드를 발견한다,

단 한문장이 그렇게 중격적인 반전을 만들었다.

 

단 한문장이 주는 반전  이라는 광고가 과장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뭐 다 아는 역사. 다 아는 상황

누구나 아는 결말이지만

어떤 피도 전쟁도 갈등도 다루지 않으면서 서로 어긋나야하는 친구관계만으로도 이렇게 긴장감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다 알아서 더 불안하고 두근거렸다,

다 알아서 무섭고 한장 한장 줄어드는게 가슴을 조이더니

결국 마지막에  불협화음같은 대단원이 나타났다.

 

다 읽고 나면 아름다웠구나... 하는 마음이 절로 들것이다,

두 소년의 우정도 작가의 문장들도...

 

그는 1932년 내 삶으로 둘어와서 다시는 떠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넘은 9천일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별다른 희망도 없이 그저 애쓰거나 일한다는 느낌으로 공허한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갔다, 그 중 많은 나날들이 죽은 나무에 매달린 마른 잎들처럼 종작없고 따분했다,

내 가장 큰 행복과 가장 큰 절망의 원천이 될 그 소년에게 처음 눈길이 멈췄던 것이 어느 날 어느 때였는지를 나는 지금도 기억할 수 있다. 그것은 내 열여섯 번째 생일이 지나고 나서 이틀 뒤 하늘이 잿빛으로 흐리고 어두컴컴했던 독일의 겨울날 오후 3시 였다.

 

 

어떤 작품도 이처럼 아름답지 않고 이 두 소년처럼 순수하지 않다,

이 소설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첫사랑의 이야기일 것이다,

저 첫 도입부에서 느껴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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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세상에서는 어떤 질문도 나올 수 없다,

모든 것은 의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고 모든 질서들은 당연하다.

조금 이상하다 싶은 생각이 불쑥 들때가 있겠지만 그건 단지 내가 별나서거나 내가 모나서일 뿐이지 세상은 익숙하고 당연하다,

그런 세상에서 아니지 않은가? 라거나 이상하지 않니? 라는 목소리는 내는 것은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나대거나 튄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이젠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느냐고 하고 많이 달라졌음을 피부로 느끼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어디에서는 누군가 아프고 불편하고 힘들다,

그건 언제나 타인이지 않다,

 

 

 

전업주부로 살면서 아이을 키우게 되면 다양한 지영씨들을 만난다,

나처럼 서른 넘어 첫 아이를 낳은   지영씨부터 갓 스물 넷에 첫아이를 낳은 아직도 소녀같은 지영씨까지... 나이도 다르고 살던 곳도 다르고 학력도 다르고  좋아하는 것 원하는 것도 다르지만 아이를 키운다는 단하나의 공통점만으로 모여도 이야기는 잘 통한다,

비단 아이를 키우는 문제만이 아니었다,

시집식구들과 격는 갈등

우리도 밤에 모임을 하고 싶은데 자꾸 남편 눈치가 보인다는 말에서 시작해서

나도 한때 한 술 했는데 이젠 그런 모임은 고사하고 동네 엄마끼리 맥주한잔하는 것조차 힘들다는 푸념

내가 한때는 전세계를 돌아다녔지만 지금은 집 앞에서 커피를 마시는 일조차 사치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

아이가 있으니 어디 근사한 식당은 고사하고 동네 분식집이나 중국집에서도 구석자리를 잡아야 하고 얼른 아이 챙겨먹이고 일찍 일어나야하는 조급함도 같았다,

나이가 다른데 어쩜 이렇게 잘 맞을까?

그저 한때는 그게 우리가 잘 맞는 동네친구라서... 라고만 생각하고 뿌듯했드랬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변하지 않은 것이었을까?

우리 엄마가 나를 키울때  나처럼은 살지 마라 살지마라 했었고 나 역시 그래도 엄마처럼 살고 싶진 않아.. 라고 되뇌이면서 나는 다를 거라고 믿었다,

대학시절 겨우 한두학번 아래 후배를 보면서 꼭 나이든 사람 마냥  학번차이가 장난이 아니야 하면서  우리와 다른 세대를 바라보는 기분으로 후배들을 보곤 했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보면 엄마의 삶이나 나의 삶이 그렇게 멀지 않고

60년대 끄트머리에 태어난 지영씨와 70년대 중반에  태어난 지영씨가 다르지 않게 서로 통하고

결국은 소설속 82년 지영씨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다,

여자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공부하고 약간씩의 차별을 받았지만 그래도 표면적으로는 존중받고 귀하게 큰 딸들이었다, 악착같이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싶어했고 대학은 못가더라도 괜찮은 여상에 가서 괜찮은 직장을 잡고 싶어했었다,

남자못지 않게 학점도 따고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 적도 있었고

직장 생활에서도 간혹 보이는 덜떨어진 남자들을 보조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나름 보람있고 즐거운 시절도 있었다,

나는 엄마랑 다르구나.. 이젠 시대가 다르구나 하고 느끼던 찰라의 순간이 분명 있었다,

그런데 지금 열살이상 차이나는  고만고만한 아이를 키우고 또 아이가 자라서 학부형이 되고 진학을 걱정하는 나이까지 오면서 우리는 점점 닮아갈 뿐이었다,

 

아들을 낳을 때 딸을 낳을 때 역시 대접이 다르더라

티내진 않지만 은근히 손녀는 차별하더라

지금 시대가 다르긴 하지만 자꾸 눈치를 주니 지금이라도 아들을 낳아야 하는지 고민중이다,

아무래도 딸은 이쁘게 키우는게 젤 중요하지 않나?

아들이면 그냥 알아서 오겠거니 하겠지만 딸이니.. 힘들어도 어쩔 수 있나? 독서실에서 올때 데리러 가야지..

아무래도 딸이라 보니 선생님과 일대일로 하는 과외는 좀 꺼리게 되네

아이가 주번이라고 해도 딸아이라 보니 학교에 일찍 보내는 것도 좀 겁이 나

뭐 아들은 안그런가? 그래도 딸이 더 신경 쓰이긴 하겠지?

주위에서 스토커같은 엣애인때문에 고민하고 고생하는 남자들이 분명히 없진 않겠지만

드라마에서도 뉴스에서도  출처를 알 수 없는 톡에서의 소문들도 그 주인공은 늘 여자였다,

연애를 하고 싶고 멋진 사랑을 하고 싶지만  그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알 수 없어 두려워 하는 것

사귀다 보면 헤어질 수 있고 서로 마음이 멀어질 수도 있는 일인데 행여 그 때문에 험한 일 당하지 않을까 아예 연애를 포기해버릴까 하는 마음

남자에게는 당연히 묻지 않은 질문들

결혼하면 직장은 어떡할거예요?

애 낳고도 계속 다닐 건가요?

이렇게 밤늦게 일하면 남편이 뭐라고 하지 않나요?

남편도 이렇게 술 잘 마시는 거 알아?

 

뭐 한편으로는 걱정하는 마음 베려하는 마음 챙겨주려는 마음일거라는 것도 안다,

세상이 험악하니까 ....

결국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분노나 개인적인 우울감 등으로 드러나느 폭력이나 사건에서 남자가 피해자라는 뉴스는 들은 기억이 없다, 언제나 피해자의 역할은 여자들이었다,

드라마를 봐도 연쇄 살인범은 남자였고 늘 그 피해대상은 힘없는 여자들이었다,

예전에 엄마가 말했었다,

딸들이  어리면 어린대로 걱정이고 다 크면 다 커서 걱정이다,

딸들이 다 귀가하면 비로소 하루가 무탈하게 지나갔다는 셍각이 든다...

가끔 친구와 술을 마시거나  수다가 길어져서 늦어지는 날마다 들었던 엄마의 전소리였다,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 집에 있으면 결혼이나 할려나 하고 걱정

약속을 하고 밖으로 나가면  언제 오나 왜저리 밖으로만 도나 하는 걱정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

결국 나도 어쩔 수 없이 그 엄마처럼 전전긍긍한다,

한참 이쁠 때고 이쁘고 싶을 때라는 걸 머리로 이해햐면서도

짧은 옷은 입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직은 학생이니까 화장은 안하면 좋겠고

어디 친구끼리 다닐때는 그냥 긴 청바지를 입고 나가면 좋겠고

아무리 기막힌 학원이라도 멀리 떨어진 곳은 일단 망설여지고..

학원 선생님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신경써야 하고 그 학원에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도 신경써야 하고  혹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가 으슥한 곳에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고 ...

어쩌면 그렇게 한치도 틀리지 않고

예전 엄마가 했던 걱정을 내가 그대로 하고 있고

나는 이렇게 엄마랑 다르니까.. 또 다르겠지 하고 믿으며 조금은 시샘하고  경계했던 나 이후의

후배들 역시 나와 다르지 않았다,

 

여자들이 자기 의견을 말하기 시작하는 거?

이제 사회로 진출하기 시작해서 남자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거?

각종 고시나 학교 교사들이 이제 남자보다 여자가 조금씩 더 많아지는거?

집안에서 엄마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더 커지기 시작한것?

단지 그것들 만으로 여자가 살만해졌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젠 역전되어 매맞는 남자도 생겼고  여학생들의 진학률이 남학생을 능가했고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지지 않았느냐고.. 남성부는 없는데 여성부는 있고 남성들은 여전히 군복무의 의무가 있지만 여성들은 그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있지 않냐고...

여대는 있지만 남대는 없으니 대학진학에서 여자들이 갖는 이익도 얼마나 크냐고...

웃기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에서는 학력 나이 등등 의 스펙중에 가장 큰 스펙이 남성이라는 거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그냥 우리끼리 이야기일 뿐이다,

세상의 절반은 이해하지도 않고 이해하지 못하며 또 여자들 중에도 자기 삶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있다, (몰른 그 속 마음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말하고 주장하는 여자들에게

나대고 시끄럽다고 말했던 개그맨의 언행은 그만의 것이 아닐것이다,

여자들은 수다스럽고 사소하고 속된 이야기를 좋아하고 큰 일은 함께 할 수가 없는 족속이며 언제나 한 발 뒤에서 도와주고 보조하고 보살피는 존재이길 바란다,

원하는 순간, 드러나는 사람이길 바란다, 평소에는 그림자처럼 조용하고 고요하고 아름다우면 그뿐이다,

모든 일에 보조하는 사람인  지영씨들이 오로지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에서는 주체적이길 바란다, 그 부분에서 지영씨가 아닌 이들은 그저 도와주고 조력하고 감사하면 된다, 왜냐하면 그건 사적이고 소소하며 개인적인 일이니까

결국 58년 지영씨도 69년 지영씨도 75년 지영씨도 82년 지영씨도 그리고 93년 지영씨도 아마 우리는 다를것이라고 굳게 믿겠지만 결국 우리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 억울하고 또 동시에 힘이 되리라 믿는다, 세대를 지나도 우리는 변하지 않지만 그래서 우리는 더 잘 소통하고 이해하고 그리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두 발을 다시 디딜것이라 믿는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지영씨를 응원하고 또 응원한다. 

 

 

 

 

 

 

 

 

 

 

 

 

 

 

 

 

 

 

 

 

 

 

 

연홍과 종찬의 딸 민진이 실종되었다,

하필 그날은  국회의뭔이 되려는 종찬의 선거 첫째날이었고

하필이면 그들의 딸은 문제아였고

이미 시작된 선거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고 지켜보는 시선들이 많다

전에도 있던 일이라고 하며 종찬은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한다,

행여 아이가 돌아왔을 때 더 곤란해질 수 있고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실종신고는 미뤄지고 연홍 혼자 초초하게 민진의 흔적을 쫒는다,

연홍이 알고 있는 민진의 정보는 모두 가짜가

연홍이 알고 있는 친구는 존재하지 않으며 연홍의 친구들은 여전히 날라리고 민진을 알지도 못하고 학교에서는 왕따였다,

연홍은 혼란스럽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나?

연홍은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생각하려고 애쓴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미친년처럼 중얼거리고 감정이 앞서고 흥분하고 날뛰면서 연홍을 뛰어다닌다,

엄마니까 무서울게 없고 부끄러울 게 없고 거리낄게 없이 학교로 거리로 경찰서로 쫓아다닌다

종찬은 무서울만치 냉정하다,

이미 문제를 일으켰던 딸이고 가출을 경험했던 딸이다, 앞에는 일생을 걸어야할 선거가 시작되었고 경쟁자는 시시틈틈을 노리며 약점을 찾고 있고 세상이 초짜 정치인을 지켜본다, 내편이라고 안심할수도 없는 상황이다, 종찬을 둘러싼 남성들의 세계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질서있게 움직인다, 어떤 시기에 경찰에 가야할지 어떤 타이밍에 어떤 표정을 보여야 할지 계산이 철저하다,

결국 시신으로 돌아온 민진앞에서 연홍은 미친년이 되고 종찬은 차본하게 연홍을 다독이고 협박한다, 이렇게 나가서 좋을게  이득 볼 게 하나도 없다고....

가족의 일은 사적인 일이고 사소한 일이며 지금 문제를 크게 일으킬 수는 없다,

오히려 딸의 죽음으로 동정표를 얻고 상대편 후보에게 의심이 가면서 선거판은 유리하게 돌아간다. 계산이 앞서고 머리회전이 먼저 될 수 밖에 없다,

연홍은 무엇이 대의이고 무엇이 사소한 일인지 구분할 수 없다, 아니 구분할 필요가 없다,

딸이 죽었고  이유를 알 수 없고 누가  죽였는지도 알 수 없으며  나아가 내 딸이 어떤 아이인지 조차 알 수 없다, 나쁜 아이? 영악한 아이? 내가 모르는 아이의 모습에 당혹할 뿐이다,

종찬은 계산을 하고 어떤 방향이 내게 이익인지 끊임없이 찾아내고 이성적으로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움직인다,

연홍은 흐트러졌다가 단정했다가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가 전라도 사투리를 썼다가 표준말을 썼다가 정신이 없다, 타인에게 덤비고 자해를 하고 폭력앞에 노출된다,

그러나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건 미친년처럼 돌아다니던 연홍이다,

뭐든 사소하지 않고 허투루 보지 않고 다가가도 마주하면서 연홍은 진실앞에 다가간다,

이성적이고 반듯하고 흐트러짐없다고 믿었던 대상에게 인간적인  실망.. 아니 존재론적인 배신감을 느끼며 연홍은 혼자 문제를 해결한다,

이성적이고 빈틈없는 종찬은 아무것도 모르고 손선생은 자기 죄를 덮으려고 이성을 잃고 날뛰었고 연홍은 또다시 문제를 파해치려고 정신을 잃고 날뛰었다,

그렇게 사건이 발생하고 그렇게 사건이 해결되었다(?)
감성적이고 작은 일에 집착하고 큰 그림을 보지 않고 바로 앞의 문제에만 골똘하던 연홍이 결국은  사건을 풀어낸다,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사건에 어떻게 연루가 되는지 도데체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조차 모르면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큰 그림을 볻다고 믿는  종찬대신 연홍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죄를 단죄하고 상처받은 아이를 안아준다,

연홍을 미친여자취급하고 전라도 여자라고 무시하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믿어버리고 그저 예쁘게 꾸며서 예쁘게 웃으면서 선거 송에 맞춰 율동을 하고 미소지으며 투표하는 사진만을 원할 뿐이다, 나에게 필요할때는 이용하고 필요없으면 무시하고 잊어버리는 것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는 그 들의 세계에서 문제를 파악하지도 무엇이 잘못인지도 알지 못한다, 당연히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문제는 사소하게 시작된다, 어떤 큰 대의나 정의? 정치적 암투따위는 끼어들지도 않았고 그 따위는 애초 있지도 않았다, 모든 문제가 그렇다, 별 일 아닌것 사소하고 사적인 일..그렇게 시작된다,

소문처럼 실체없이 번져나가지만 무시하기엔 어딘가 꺼림칙한 분위기

별거 아니라고 개인적인 일이고 집안일이라고 덮고 쉬쉬하고 뒤에서 쑥덕거리던 일들이 덮고 모른척하고  없던 일처럼 치부되면서 그 냄새는 점점 심해지고 썩어가고 악취를 풍기며 자란다

큰 그림에서 보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쪽에는 실체가 없다,

사소하게 시작된 불륜  남겨진 친구에 대한 연민  사생활이 노출될까하는 두려움  비밀 수치감 모욕과 분노가 뒤섞여서 사건이 자란다, 크게 보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상관하라 수 없는 부분 모른 척하는게 예의인 부분에서 사건은 자란다, 모른다고 모른 척 한다고 없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사소하다면 사소하게 사적인 부분 가정사인 부분에서 일은 시작되었고 사람이 죽었고 죽였고 복수가 시작되고 문제가 해결된다,

일이 커지고 곪아서 냄새가 진동하기 전까지 누구도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일

그런 일은 아직도 우리 주변에 많다,

 

 

 

 

 

 

 

 

 

 

 

 

 

 

 

 

 

 

가정폭력이라는 문제에서 해결책이라는 것이 "피해자와 가족구성원의 인권보호"라기 보다는 "가정폭력범죄로 파괴된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꾸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가정 폭력특레법이 제정되고 가정폭력에 대한 인식이 가족간의 사적인 문제나 가정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폭력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지만 결국 주된 목적은 사회의 기본단위이나 누구에게나 안정감을 주고 필요한 가정을 깨지 않고 잘 유지해야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가정"이라는 것에 대한 환상과 믿음  세상에서 절대 없어서도 안되며 보호하고 지켜줘야 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동시에 그런 가정은 결국 개인의 영역이고 사적인 문제라서 공권력이나 공공의 개입은 자제하고 그저 모른 척 존중(?)해주고 철저하게 사생활로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의지가 함께 포함된다, 가정이전의 개개인의 안전이나 지지 보호는 그저 가정안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누구든 가정을 꺠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행복과 사랑을 꿈꾸며 결혼을 선택하고 아이를 출산하고 가정을 이루며 바깥에서는 어떤 비바람이 몰아치고 거친 파도가 닥치더라도 우리 가정만은 안전하고 안정적이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누구나 가정은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하고 누구나 가정에 소속되어 있어야 하고 그래서 가정이란 어째 되었든 유지되고 지속되어야 한다, 다만 그 지속과 유지의 책임은 가족에게만 있을뿐 타인이 간여할 수 없다, 이런 근거없는 믿음속에서 가정을 꺤다는 일은 부도덕하고 패륜적이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은 가정이 사회의 기본이라고 하고   보금자리라고 하고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고 가정이 없다는 것 조금 다르다는 것만으로 열등하고 부족하고 문제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데  가정을 깨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죽을만큼 맞고 살아도 가정을 깨려고 한다면  그동안 죽을만큼 맞았던 시간과 고통은 싹 다 잊히고 가정을 깬 여자 혹은 자기 자식을 버린 여자가 되어버린다, 별일도 아닌것을 부부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법으로 보호한다고 하지만 결국 폭력으로 얼룩진 가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에게 폭력을 가했던 그 가해자를 다시 가족으로 받아들일것인가 말것인가의 결정은 오롯이 피해자에게 돌아간다,

나하나 참고 말것인가 ..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야 할것인가

가정폭력이 다른 어떤 폭력보다도 다루기가 힘든 건 결국 피해자와 가해자가 고소와 처벌로 끝이 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피해자가 죄책감을 가지고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잇고 최악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절대 분리될 수 없고 그 악순환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가정에서 가장 먼저 차별을 경험한다,  설령 에전같은 노골적인 차별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위험하고 험한 세상에 대한 공포감이 가정으로 스며들어 좀 더 세심하게 신경쓴다는 행동들이 하나의 차별이 될 수도 있다, 82년 지영씨가 할머니에게 받았던 차별이 지금은 없어졌을지라도 여전히 지금의 지영씨들도 밤길은 위험하고  짧은 옷들은 나의 의도과 상관없이 해석되고 보호와 배려라는 이름으로 소외된다, 여전히 말해서도 나서서도 주장해서도 안된다, 누구도 용감하게 나서서 안된다고 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눈쌀이 찌푸려지고 거부되고 조용히 무시될 수 있다

연홍처럼 여전히 진실을 다가가기 위해 혹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미친년처럼 뛰어야 할테고 여전히 가정내의 폭력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이된다,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라고 믿는게 가장 안전하다, 때로는 그 것만 알고 있다는 것이 권력이 될 수 있다, 모두가 동의하는 삶에 나도 속해있다고는 것이 하나의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이해하고 잇는 것 이상의 더 큰 세상이 존재한다,

내가 알고 믿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남의 일이고 남의 사생활이며 도덕적이고 정의롭고 이성적이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외면했던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처절하고 간절한 일일 수도 있다,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기에 누구도 깨서는 안되고 보호되어야 하는 그 곳에서

누군가는 신음하고 아파하고 치를 떤다,

당연한 거 아니야? 라고 믿었던 것들이 조금씩 흔들리고 균열되기도 한다,

모두가 행복할거라고 안전할거라고 믿고 있는 공간에서 느끼는 배신감 소외감 그리고 말로 꺼내기 애매하고  속에 쌓아두기엔 억울한 많은 일들이 지금도 여전히 여기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세상은 내가 아는 것 이상이며

여전히 설명하고 해명하고 이해시켜야만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많이 존재한다,

 

지영이들이 연홍이들이 그리고 살아남은 생존자들 그리고 죽어버린 피해자들이 여전히 여기 이곳에 있다,

나 가족이고 내 이웃이고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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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찮게 "가정폭력 상담활동가를 위한 양성교육"을 듣게 되었다.

과정이 끝나고 활동가로 활동을 하게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강의 내용이 좋아서 신청을 했다,

가보니 관심이 있어서 신청한 일반인보다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었다,

100시간의 과정이수가 필요해서 오신분들이 많고 몇몇 나처럼 그냥 관심을 가지고 온 사람들

혹은 다른 분야에서 상담활동을 하고 있는 분들...

강의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것보다 아는 것이 명확하게 정리되는 것 그리고 현장에서의 경험들을 들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의외로 아직도 사람들의 사고가 여성, 페미니즘  가정폭력에 무지하고 무심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다시 느끼는 경험이었다,

일주일에 두번  6시간씩의 강의가 쉽지는 않았다.

앉아서 듣기만 하면 되는 거지만.. 일단 모든 강의가 3시간을 꽉꽉 채워서 끝났고

모든 이야기가 쉽게 듣기엔 힘들때도 있고 마음 아프기도 하고 때로는 강사들이 울컥하는 모습에 저절로 나도 울컥해질 때도 있었다.

아직 초반이라 남은 강의가 많지만 여태 걍의는 다 괜찮았다,

특히 성 소수자에 대한 강의는 그게 최근이어서도 있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다,

전혀 거부감 없기  이해하기 쉽게 성정체성 성별정체성 등등을 설명하는데 3시간이 30분처럼 흘러갔다, 알고 있지만 정리되지 않았떤 개념들이 정리되고 아하.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이 이어졌다.

유익할 뿐 아니라 재미까지 있어서 왜 여태 아무도 저렇게 쉽게 설명하거나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을까 싶기까지 했다

너무 재미있어서 돌아와 딸한테 설명하면서 이런 강의가 학교마다 행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순진하게 말했더니 (난 그저 쉽고 아무런 거부감없이 설명하고 이해시키는데 너무 감동해서)

딸이 무심하게 말한다,

 "그런 강의 한번 하면 아마 학부모 항의전화가 빗발칠껄..."

아..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난 학생들도 충분히 이해가능한 좋은 강의라는데만 촛점이 맞춰졌는데

그 내용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구나... 양성애도 동성애도 가능하고 그건 이상현상이 아니라는 것

트렌스젠더에 대한 이해와 세상에는 여성 남성 이외의 다양한 성이 존재한다는 것 그 언급만으로도 불편하고 불쾌할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지... 하는 건 깜빡했다,

나 역시 강의 한 번 들었다고 사람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진 건 아닐것이다,

어쩌면 귀가 얇아서 쉽게 빠졌을 수도 있고 조금은 의식있고 다르게 보이려는 마음에서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가 더 강하게 이기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아이에게 설명하면서  이해된 개념들이 다시 꼬여가긴 했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알게 된건

 

세상이 모두 이성애자라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어버리는 사회적인 관습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세상에서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언제부터 당연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누가 당연하다고 정한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는 것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불안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많이 있고 우리가 무른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세상에 소개하거나 설명하지 않아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건 하나의 특권이고 권력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다.  성적 지향이나 성 정채성으로 차별 받을 수는 없다는 것

 

자기가 이성애자라거나 타고난 남성 혹은 여성이라고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지만 동성애자이거나 양성애자이거나  자기가 결정하지 않은 , 등록된 성별과 자기의 정체성이 다를 경우는 그걸 일일이 셜명하고 이해받아야 하는 입장은 평등하지 않고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

 

라는 것이다,

나도 몰랐는데 나는 많은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던 거였다,

단지 타인에게 내가 누구이고 어떤 취향인지 (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부분)을 설명하거나 이해시킬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책을 통해서 알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과 다르게 누군가 그 입장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또다른 강한 충격이고 꺠달음이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더 넓은 세계가 있고 내가 아는 범위밖의 존재들이 있고 그 세계와 그 존재들이 결코 비정상적이거나 모자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설령 비정상적이거나 모자란다고 하더라도 그 이유때문에 차별받고 부당하게 대우 받을 이유는 없다, 그건 사람이 사람을 해치거나 위해를 가하는 일이 아니다,

 

상담하려는 사람의 입장에서  알아야 할 것은 성 소수자들이 그들이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게 아니란다, 그들은 자기의 취향과 존재에 당당하지만 그런 자기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하나밖에 없는  가치관과 기준때문에 남들이 자신들을 다르게 보고 모자라게 보고 비정상적으로 보는 시선이 두렵고 불편하고 불안한 것이다,

솔직히 나도 내 아이가 그런 소수자가 아니길 바라고 아니었으면 좋겠고 아니면 다행일 것이지만

행여 그렇다면.... 그렇다는 이유로 차별받고 멸시받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이유로  그런 어쩌면이기적인 이유로 .. 지금 현재 그들이 차별받거나 무시당하지 않기를 원하고 지지하려고 한다,

어쩌면 여태까지 내가 그게 어때서? 라고 했던 태도들은 나와 상관없다는 입장에서 조금은 시혜를 베푸는 입장에서  그냥 무관심하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뭘... 하는 심정으로 괜찮다고 말했던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아닌다음에야.. 다르다는 것은 차별의 이유가되어서는 안된다... 라고 이제는 믿게 된다,

 

 

강의이후 읽게 되는 벨 훅스의 책은 쉽게 정리되어 들어온다,

 

 

즉 지배가 있는 곳에 사랑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페미니즘 사고와 실천은 동반자관계와 육아를 통한 상호 성장과 자아실현의 가치를 강조한다, 누구나 욕구를 존중받고 누구나 권리를 누리고 누구든 예속이나 학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관계에 대한 이러한 비전은 가부장제가 관계의 구조를 지키기 위해 고수하는 모든 것과 반대가 된다,  우리 여성들은 대부분 아버지나 남자 형제 또는 이성애자 여성의 경우  연애관계까지 사생활에서 접하는 친밀한 관계에서 남성의 지배를 경험했거나 경험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남정과 여성이 모두 페미니즘 사고와 실천을 받아들일 경우 두 사람의 감정적 행복은 더 깊어질것이다, 진정한 페미니즘 정치는  언제나 우리를 속박에서 자유로 사랑없는 곳에서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이끈다, 상호 동반자 관계야 말로 사랑의 토대다, 그리고 페미니즘 의 실천은 상호성의 토양을 만드는 우리 사회의 유일한 운동이다,

 

    17장  다시 사랑하기 위하여

 

 

페미니즘 운동은 연령과 여남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성차별주의를 철페하기 위해 노력해야 진보한다, 이런 노력을 실천하기 위해 꼭 어떤 단체에 가입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선 그에서 페미니즘을 위한 행동을 하면 된다, 우리는 가정에서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우리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가르치며 페미니즘을 위한 노력을 시작할 수 있다,

(중략)

페미니즘으로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사람마다 살아온 배경이 천차만별이므로 각자의 삶에 곧장 말을 건네는 페미니즘 이론이 필요하다, 흑인 여성 페미니즘 사상가로서 나는 페미니즘 투쟁이 흑ㅇ니의 삶을 개선하는데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모든 흑인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구체적인 관심사와 전략을 찾아내기 위해서 반드시 흑인의 삶에서의 젠더 역할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야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구적인 급진적인 페미니즘은 우리 모두에게 제국주의 백인 우월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내에서 우리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끔 젠더와 인종 계급의 관점에서 각자의 삶을 용감하게 되돌아 보라고 격려한다,

 

                      19장 페미니즘의 미래

저자는 페미니스트인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남자'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남성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중요하지마 남자를 반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또한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가 피해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여성이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남자아이들은 주로 성차별주의적 남성성 규범에 맞지 않게 행동을 할  때  이런 학대의 대상이 된다' '가족내 성차별주의자의 주요 전파자는 대게 여성 양육자이다' '성인 여성이 아동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페미니즘 운동이 직시하려들지 않으면 여성이 다양한 형태로 아동을 학대하는 현실을 쉽사리 무시하게 만든다' 같은 구절은 그도안 페미니즘에서 강조되어온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의 다른면을 정확히 짚어낸다 젠더를 이분법으로 딱 잘라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고 남선을 없애는 식으로는 성차별주의를 없앨 수 없다,

벨 훅스는 "케럴 길라건같은 페미니즘 사상가들이 질리지도 않고 여성이 더 다정하고 윤리적이라고 말했지만 여성들이 자시보다 더 힘없는 다른 여성들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도무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며 여성들이 자신이 속한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는 같은 민족이나 인종집단에 보이지 않은 보사림의 윤리는 그들이 공감할 수 없고 동질성이나 연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치지 않았다'는 점을 통력하게 지적하기도 한다, "페미니즘은 테어나는 것이 아니라 민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르므로 여성 혹은 남성이라도 이원화된 성별 구분은 페미니스트 되기에 있어서 결정적이지도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나는 이런 시대에 특히 예민함이라는 감각이 재평가되ㅓ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민하다는 것은 상처를 잘 받는다거나 약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민한 사람들은 상황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예민함은 이상한 상황을 이사하다고 생각하고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에민하다는 건 주어진 질서의 오류와 모순을 눈치 챌 정도로 지적이며 동시에 강인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생각을 멈추지 않은 삶이라는 점에서 예민함이란 감각은 자기에의배려 혹은 통치되지 않으려는 의지로 이어질 수 있다, 예민함은 약자에게 강요되어지는 부정의한 제약을 거부하는 감각이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은 때로 권력이 될 수 있다, 예민한 사람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손에 쥔 사람이다, 사실 진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 착취와 억압에 저항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에민할 겨를이 없다, 예민함이라는 감각을 생각하고 말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하게 되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스스로 점점 무력해진다고 느끼는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더불어 '상처받았다"  발화자의 위치를 피해자의 위치로 지정해서 말하기에서 ' 상처주네?"라고 상대에게 되묻는 말하기로 전환하는  페미니즘 정치학을 제안하고 싶다, 페미니즘은 약자를 위한 정치학이지 약자가 되자는 정치학은 아니다.

 

 

                 해제  우리에겐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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