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명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권도희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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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코 아가일은 양어머니를 살해한 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에 폐렴으로 사망한다. 그리고 2년 후, 갑자기 재코의 알리바이를 입증해 주는 사람이 나타나고, 아가일 가족은 '제일 그럴듯했던 모범 답안'인 '범인 재코설'이 무너지자 가족들 가운데 여전히 살인자가 있다는 끔찍한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가족들은 의심의 그림자 아래 단결했다가도 서로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으로 다시금 뿔뿔이 흩어진다. 교통사고로 인한 기억상실 후, 바로 남극 대륙으로 가는 탐험대에 합류했던 지구 물리학자 아서 캘거리는 “문제는 죄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헤스터 아가일의 말에 마음이 움직여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고, 그늘에 숨어 있는 살인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또다시 살인을 계획한다.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마음이 놓이는 것이 아니라 무거워진다.

진실이 드러나므로써 죄를 지은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순수하고 무고인 사람들이 문제가 된다.

누가 봐도 범인일수 밖에 없는 인물이 범인이 되어 봉합되었던 사건이 다시 시작된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게 되고 자기 입장에 따라 자기가 범인으로 몰릴수 있음을 알게 된다.

부유하고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는 사실 독재자였다.

모든 것을 움켜쥐고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아이들을 입양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그리고 인생을 좌지우지한다. 아내의 관심에서 밀려난 남편은 어린 비서를 만나 새로운 행복을 알게 된다.

아내의 죽음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던 남편

어머니의 죽음으로 자유와 경제적 풍요를 갖게 된 자식들

가족중 가장 비열하고 양아치스러웠던 잭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버린 후 모든것은 그저 평화로워졌다.

그러나 사실 잭이 범인이 아니라면 범인은 우리중에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스로가 의심받을지 모를 상황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스포가 있음

 

뭐 불안한 상태에서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심리묘사가 잘 되었다는 거 인정

누구나 범인일 수 있는 상황으로 몰아간 서스펜스도 인정

그런데 하필이면 외부인이며 이방인이 범인이어야 하지?

상황상 맥락상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게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건 작가가 그렇게 함정을 팠으니까

가족중 남편이거나 자녀이거나 혹은 남편을 사랑하게된 비서일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가정이 무너질까봐?

이미 부모의 간섭과 억압이라는 폭력이 있고 자녀들은 제각각 감정을 품고 부모를 바라보고 저마다 속내를 숨기고 있는데 여기 살인이 더해지만  완전히 무너져 버릴까봐?

그래서 늘 문제는 외부에 있고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될까

가족의 변호사는 아마도 외부인이 침입해서 돈을 노리고 부인을 살해했다고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말을 한다. 누구나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차라리 그러기를 바란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일이 너무 고통스럽고 이렇게 가족이 무너질 수가 없다는 신념때문일까

그렇게 드러난 범인은 변호사의  어처구니없는 범인 유추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뭐... 내가 꼬아서 보는 걸 수도 있지만

늘 불행은 밖에서 들어온다고..

그래서 가족내에서는 불행이 싹틀리가 없고 늘 안전하고 화목하고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신성불가침이라고 여기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미 썩어서 냄새가 진동하지만 향수를 덧뿌리고 뿌려대며 자기들만 모른다고 아니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다.

 

나름 진지하게 읽었지만 마지막.. 마음이 꼬여버렸다.

나는 가족에게 맺힌게 많은 모양이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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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도란스 기획 총서 3
권김현영 외 지음, 권김현영 엮음 / 교양인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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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글을 읽고 갸우뚱해서 다시 읽었다.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가해라는 말에 대

 

해 거리를 두고 생각한다.

나는 '피해자 중심'이라는 의미를 '피해자 우선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2차 가해'라는 말은 누구도 피해사실에 대해 다른 토를 달지 말라고 강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남의 말에 쉽게 이러쿵 저러쿵 하는거 아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것이 잘못이었을까

잘못은 아니다.

여태 살아오면서 약하고 힘없고 당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 아니 그들이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쉽게 내쳐지고 존재하지 않는양 여겨지고 행여 들어보더라도 나중에... 나중에 합시다.. 우선은 다른 더 크고 급하고 중대한 사안들 우선... 이라고 밀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내가 하는 말을 우선 듣고 내가 하는 말을 믿어주고 내 말에 공감해주는 일은 정말 갑격스럽다. 내가 당하고 쪼그라들고 아픈 내 말이 우선이라는 건 감격을 넘어 어리둥절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하지 성폭력이라는 것이 어떤 증거를 내밀기도 어렵고 당사자들의 상황과 당시의 맥락에서 들여다 봐야 하는 문제가 수두룩하다보니 보는 입장에 따라 제각각의 의견들이 충돌하고 목소리가 큰놈들 사회적 당위성에 보호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이기는  싸움이다.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과 사건을 말할 때 일목요연하게 일관성 있게 이성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누구도 쉽게 믿지 않는다.

꽃뱀이 되는 것도 쉽고 뭔가 노리는게 있어서 몸으로 덤볐다는 말도 너무 많고 좋아서 해놓고 뭔가 틀어지니까 들고나오는 복수아니냐는 말도 참 쉽게 납득이 되는 세상이다.

물론 개중에 그런 사악한 사람이 절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뒤집어 보면 꽃뱀이 되어가면서 쌍년이 되고 걸레같이 가벼운 년이 되어가면서 사실을 말해야하는 현실을 보지 못한다. 성공하려면 몸으로 거래를 할 수도 있는게 꼭 여자들이만의 문제일까? 몸을 주면 니가 원하는 걸 줄게라고 제안한 놈도 있을 거고 행여 먼저 제안한 어떤 여자에게 그거  정정당당하지 않소 하고 끊어내지 않고 좋다고 냉큼 받아먹은 놈도 있을거고... 결국 그렇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결국 남은 건 꽃뱀과 쌍년과 걸레다.

 

폭력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문제로 나누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진정한 문제 해결이 아니다.... 라는 것이 이 책의 근본 태도라고 생각한다. 개개의 가해, 피해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사회제도의 문제이고 인식의 문제이고 아직도 기울어진 정의가 반듯하다고 믿는 사팔뜨기들의 문제다.

 

그렇게 망신 줬으면 됐잖아.

고소 했고 처벌 받았으면 된거 아니야?

물론  원하는 만큼 형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재판까지 가고 알려질대로 알려진것으로 됐잖아

그것도 미투로 봐야돼?

좋아서 한거 아니었어? 제정신으로 모텔을 가고 오피스텔을 가?

한번 당했으면 두번은 가지 말아야지  무슨 음모가 있는거 아니야?

심년도 더 전에 있던 일을 지금 말해서 어쩌자는 거지?

순수한 미투가 있고 물타기 하는 미투가 있어

미투가 변질되고 있는 중이야

 

오가는 말들이 그건 아니잖아 라고 버럭해버릴 문제가 아니다.

여기저기 문제가 터지고 드러나는 일은 결국 지나야 할 과정이고 겪어야할 현실이지만

그 모든 사정사정에 자를 들이대고 조건들을 붙이는 건 누가 기준을 만들었을까?

 

결국 문제는 성폭력 문제를 바라보는 지배규범을 바꾸기 위한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내고 인식의 틀을 바구어 나가는 것인데  법이 바뀌고 규범이 바뀌어도 그것이 사회전체에서 통용되는 상식으로 인식의 틀로 자리 잡지 않으면 기본 규범들을 좀처럼 제자리에서 내려올 수가 없다 바뀔 수가 없다.

피해자의 말을 듣고 가해자를 처벌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식의 문제라는 생각이 없다면 누군가의 재수없는 일이 되거나 나와 상관없는 흥미거리 추잡한 스캔들이 되어버린다.

피해자 가해자만 관련된 '협의의 당사자성'을 극복하지 못하면 성폭력은 다시 개인의 문제이자 고통과 불행의 문제가 될 뿐이다. 성폭력을 둘러싼 투쟁은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그런 행동르 하면 안 되지 않나' 라는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가는 싸움이어야 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의자들은 피해자 주관적인 느낌은 가해자 중심사회에서 판단을 할 때 중요한 참조 사항이자 증거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피해자의 주관적인 느낌이 유일한 판단기준이어서는 안된다. 피해자는 당연히 자신의 경험을 주관적으로 해석할 권리가 있지만 그 경험을 공론의 영역으로 가져올 때는 정당한 의무를 지게 된다. 패미니즘은 그 정당화 과정에서 해적 투쟁에 연대하는 언어이지 무조건 편들어주는 언어는 아니다.

냉정하게 들리지만 생각해 볼 문제다.

 

오히려 우리는 무엇이 성폭력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한다. 우리의 주장은 언제나 맥락에 의존적이며 상황적이다. 이때 상황애 대한 상이한 해석을 허용하고 그 해석이 얼마나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성찰적인지 그러면서도 설명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자 했는지(사실이 아니라 정의로서) 판단기준이 될 수 있다

 

기준이 없는 문제는 늘 사회적 당위성이 힘을 갖는다. 힘이 있는 사람 여론을 만들 수 있는 사람 상식이라는 기준을 만들고 거기 한점 차별이 없는 사람들의 시선이 늘 통용된다.

섹스는 욕망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추구하는 일이고

강간 피해에 있어 모든 여성들은 신경증이 생길만큼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일이지만 남자들 사이에서의 행위는 그렇게 크지 않다 그들에게는 한순간의 재미이고 경쟁이고 힘을 보여주는 순간의 놀이로 치부된다. 그렇게 한가지 사항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차이가 날 경우 결국 폭력의 문제도 단순화되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예민하고 까탈스럽고 욕심을 내며 억지를 부린다는 것이 통용된다.

피해가 있다면 가해도 있다.

아무도 아무짓을 하지 않았는데 아프고 소외받고 상처받고 죽음을 당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그정도의 일이 누군가에게는 이만큼의 일이 된다.

계속 드러나는 미투과정에서 이건 그들의 개인적인 문제다. 이제 충분하지 않았는가 피로감을 느낀다. 개인적으로 고소하는 것으로 처리하지 왜자꾸 크게 떠들고 모두에게 원치않은 과잉정보를 제공하는가...  이미 변질되었고 이용당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떠들지 않았더라면 관용으로 넘어가거나 있을 수 있는 일 좋은게 좋은 일  사회생활을 하면 겪을 수 있는 일 누구는  조용히 넘어가는데 꼭 뭣도 아닌 것들이 떠들고 문제를 만든다는 생각들....

그리고 몸을 사리며 팬스를 쳐야겠다고 단세포적으로 나오는 반응들까지 .

결국 문제들을 드러나지만 누구도 이것이 나의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문제이고 사적인 문제이고 알아서 할일이라는 것

 

 

이런 통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두번째 글 < 문단내 성폭력 연대를 다시 생각한다> 였다.

누가 가해자인가? 누가 나쁜 놈인가 누가 더 나쁜가 누가 더 당했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무엇'이 폭력인가를 질문해야했다고 말한다. 2차 가해에 대해 발언할 때도 무엇이 성폭력 피해를 의심하게 하고 성폭력 고발을 어렵게 하는지를 질문해야 했다고  말한다.

너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라는 말로  순수에 조금의 티끌이라도 묻으면 끌어내야하고 의심해야하고 조작이 아닌가 생각하는 일들이 빈번했따.

이것이 왜 폭력이고 아파하는 일인지 생각하기보다 누구야 누구? 이쪽에 더 관심이 쏠린다.

한바탕 욕을 하고 법적으로 처벌을 받고 나면 끝!!이 되고 처벌이 끝난 자리에 또다른 가해자가 들어오고 또 처벌을 하고 또 누군가는 다시 '개인적인'문제로 피해를 호소하고 누군가는 '개인적인 판단 착오'로 욕을 얻어 먹는다. 구조와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모든 일은 돌림노래처럼 계속된다.

용서라는 말은 용인이라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는 문장이 그래서 아프다.

 

정채윤의 글 < 소수자는 피해자인가>는 그 피해 가해 대상을 여성-남성의 문제를 확장해서 다양한 성적소수자들에게로 확대된다.

웃자고 하는 농담이 폭력이 되는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글은 쉽게 들어온다.

여기는 앞에서 언급된 일반 통념들이 더 확장이 된다.

 

동성애자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으로 가족으로 친구와 동료로 존재한다는것, 이 세상은 이성애자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은 일급비밀이다. 존재하지도 않은 동질감으로 사회 공동의 규범과 성 역할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비밀은 늘 위태위태하다. 즉 커밍아웃은 벽장에서 나와  내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벽장을 열고 나와도 우리는 여전히 벽장속에 있다. 그런데도 이성애자들은 동성애자를 자신의 세상 밖에 사는 존재로 상상하며 세상을 자신들만의 것으로 지켰다. 동성애자들은 상상의 세계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 현실에서 오히려 투명인간이 되어야 했다.

 

아웃팅 방지 캠페인은 '커밍아웃할 권리와 우웃팅당하지 않을 권리는 성적소수자의기본권'이라고도 주장하지만 이런 권리란 성립 불가능하고 쟁취 불가능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커밍 아웃을 할 권리가 있는게 아니라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고 스스로 밝혔든 우연히 또는 강제적으로 밝혀졌든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말이 꼬이는 것 같지만 내가 차별받지 않고 권리를 가지겠다면 누구에게도 내가 소수자라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웃팅 당할 일도 없고 그로 인한 범죄도 생기지 않는다

아웃팅은 범죄라는 것은 희안한 슬로건이다.

누군가가 타인의 정체성을 강제로 밝히는 것은 폭력의 한가지이긴 하지만 그래서 드러난 정체성이 사회에 잘 스며들고 누구나 무심하게 인정해버리는 것이라면 2차 문제는 생각할 이유가 없다. 결국 범죄로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이 사회의 통념이 범죄를 양산한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이어지는 루인의 <피해자 유발론과 제이 트렌스젠더 패닉방어> 에서 패닉방어라는 용어를 처음 보았고 결국 성적 소수자라는 것을 미리 밝히지 않아서 내가 충격을 받아서 제정신이 아니어서 이렇게 사람을 폭행하고 죽일 수 밖에 없다는 말... 이게 말인지 막걸린지 모르겠다.

성적 소수자라는 것 표면적인 성과 성기가 일치하지 않은 것을 알아버린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래서 배신당했고 그래서 죽였다?????

좀 심한 말이지만 그렇게 충격으로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그 당사자가 존재할 필요가 없는게 아닐까? 그런 쿠크다스도 못되는 멘탈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나?

결국 모든 것은 남탓이고 나는 사회적 통념을 잘 지키고 믿는 성실한 시민이며 건강하고 건전한 인간이라는 걸 타인의 죽음과 피해앞에서만 증명한다.

 

그리고 역시 마지막 정희진의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에서 모든 주제를 아우르고 정리된다.

피해자는 그 자체로 진실이 아니고 투쟁으로 획득되는 개념이며 이 과정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누가 사회적 약자이고 무엇이 피해인지 이문제에 대한 복잡한 논쟁이 먼저 되어야 한다. 가해자이 패해의식 피해자의 죄의식이 우리사회에는 여전히 흔하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가장 급진적이고 선진적인 정치일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은 비정치적으로 간주되어 왔거나 비가시화되었던 피해를 드러내고 가해와 피해를 둘러싼 갈등 곧 사회 정의의 중요한 의제를 제기한다.

 

단순히 피해자를 돕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 페미니즘은 아니다

그건 법치주의라면 당연한 일이고 모든 사회, 국가의 당연한 의무이다 이걸 위해 피해자가 인생을 걸어야 하고 불신과 치욕을 견여야 하는 사회란 희망이 없는 지옥이다. 페미니즘의 관심사는 피해 가해라는 위치가 주어지는 방식자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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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작가인 당신 사츠오는 아내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 머리를 자르게 했다.

어쩌면 아내가 원한 일일 수도 있다.

어중간하게 길어 보기 좋지 않은 남편의 머리가 걸려 잘라줘야 겠다고 마음먹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가 해준다는데 뭐 괜찮으니까 먼제 나서지 않았나 그렇게 스스로 위안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과정조차 없이 단순하게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머리를 자르는 동안 늘 그랬듯 아내에게 무뚝둑하게 서운한 소리를 한다.

그리고 아내가 급하게 집을 나섰다.

그리고 순간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순간 시간이 정지해버린 것같은 그 찰라동안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뒷정리를 부탁해"라는 아내의 말이 그저 이발 이후의 뒷정리 정도였을까?

어쩌면 그땐 아차 싶었던 마음이 후에 두고두고 생각나며 당신을 괴롭힐지도 모른다.

그때 아내는 어떤 마음이었고 무엇을 보았을까?

 

친구와 여행을 갔고 아내를 존중한다는 마음에 당연히 전화연락 따위는 하지 않았고

습관처럼 (아마 그랬을거다) 애인을 불렀고 부부 침실에서 섹스를 한다.

어떤 죄책감도 끼어들지 않는다.

그리고 부재중으로 돌려놓은 전화에서 경찰의 전화통화를 듣는다.

아내가 죽었다.

시신을 확인하고 유류품을 받아오고 아내를 화장하고 장례를 치르면서 당신은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담담하게 어디에나 있는 카메라를 의식하면서 어떻게 보여야 할지를 잘 아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갑작스런 사고에 화를 내는 조문객들에게도 덤덤했고 함꼐 여행을 갔던 아내의 친구의 남편 요이치를 만났을 때도 덤덤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냈다. 죄책감에 찾아오는 애인에게 다시 욕구를 느낄만큼 정말 아무일도 없다는 듯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그랬다면 뜬금없이 걸려온 요치오의 전화에 대응하지 않았을텐데.

그리고 불쑥 요치오의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제안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당신의 매니저가 물어봤지만 당신도 왜 느닷없이 요치오의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했는지 알지 못했다.

 엄마가 없는 빈자리가 큰 아이들

엄마가 없어도 화물차를 몰아야 하는 아빠는 여전히 바쁠 수 밖에 없고

그로 인해 아이들의 일상이 희생되고 뒤엉키고 포기되어야 하는 것을 보고 느낀 배려였을까

한번도 접하지 못한 아이들과의 생활이 어긋나고 삐거덕거리면서도 잘 적응되어갔다.

아이들은  당신 사츠오에게 적응하고 당신은 아이들에게 적응하고 그렇게 바쁘고 웃고 힘든 일상을 지내면서 당신은 당신 감정을 그렇게 눌렀다.

슬픔 상실 죄책감따위는 원래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저 아래로 눌러버리고 바쁘고 즐겁고 하루하루가 다르지 않은 일상을 지냈다.

 

"내가 잊으면 누가 기억하나요?" 라고 되묻는 요치오의 울음앞에서 순간 멈칫 하지만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기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지나간 일  돌이킬 수 없는 일은 그렇게 흘려버리는 것이 순리라고 생가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보살핌이 필요하고 나는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당신을 지탱하게 했지만 오히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이었다는 것을 당신은 몰랐을 때였으니까

매일매일을 울면서 저장된 아내의 메세지를 듣던 요치오는 의외로 건강하게 일상으로 돌아온다.

순간 울컥 눈물이 나지만 애써 감추지도 않는다.

그렇게 과학관 여선생님을 만나고 세상과 연결되어 가는데

당신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방송국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아내를 애도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다.

당신은 속이는 것이 아니라 몰랐던 것이다.

남들을 속이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기만이 아니었고 그저 어떻게 애도하고 어떻게 슬퍼해야하는지 몰라서 당신앞에 놓은 시간을 무엇으로든 채워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뭐든 채워놓지 않으면 그대로 바람이 빠지고 쪼그라들어버릴 것만 같았을테니까

요시오 가족에게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고 아이들이 호감을 표시하면서 당신은 당신의 자리를 잃은 것같았다. 질투를 하고 결국 자신의 죄책감을 고백한다.

"사고가 나던 날 애인을 불러 침실에서 섹스를 했었다고."

 

"잠든 아이의 숨소리가 낯설었던"당신은 아무렇게나 그러나 바쁘고 의미있다고 믿으며 채워졌던 일상이 비워지면서 "삶은 타인이다"라는 발견에 도달한다. 그리고 처음 울기 시작했다.

목놓아 울지 않고 꾸역꾸역 눈물만 흘리는 모습이 당신 다웠다.

 

삶이 갑작스럽게 당신앞에서 문을 닫아버렸을 때

늘 함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상대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없어져버렸을때

갑작스러운 충격은 사람의 감정을 굳게 만들어버린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리고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울어야 하는 것인지  견뎌야 하는 것인지  그저 모든 것을 놓아야 하는 것인지 그래도 살아온 리듬을 유지해야하는 것인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요치오처럼 모든 것을 놓는 순간을 경험하기도 하고 당신처럼 모든 것을 다름없이 끌고 갈 수도 있다. 누가 더 낫다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들은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맞았다면 애도를 겪어야 한다

오래오래 울거나  미치도록 원망하거나그리워하거나 미안해하거나 화를 내거나 애도를 겪지 않으면 앞으로 다음으로 나갈 수 없다. 그저 눌러놓은 감정으로 외면해버리면  늘 제자리에서 돌고 있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지만 웃을 수도 있다. 배가 고플 수도 있고 무언가가 아름답다고 느끼고 내가 잘  살고 있다고 대견해할 수도 있고 누군가를 도와주는 뿌듯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순간순간 불쑥 튀어나오는 먹먹함도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이 그 감정을 받아들이기로 한 순간 외롭다고 느꼈나 보다.

결국 삶은 타인이었다는 당신의 문장이 슬프고 아름다웠다.

 

왜 당신의 책 제목이 (영화의 제목이) 아주 긴 변명이었을까

단순히 길다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끝나지 않을 변명이라는 말

결국 살아간다는 건 계속되는 변명이 아닐까...유치하게 생각해본다.

내가 그땐 그래서 그랬고 어쩔 수 없었고 늘 생기는 결과에 입장을 변명하고  상실 이후에도 살아가야 하는 일들이 자꾸 변명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상실을 경험해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요치오의 남매는 엄마가 없어도 훌쩍 자랐고

당신도 아내가 없어도 이제 머리를 자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책을 쓸 수도 있었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사실은 그런게 아니라고 변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니 변명해도 괜찮다

당신의 변명을 납득하고 받아줄 테니까...누구나 변명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

 

뜬금없이 마지막 당신이 아내의 이발 도구를 만져보고 정리하는 장면이 슬프고 좋았다

아내가 살아있을 때는 아마 당신은 도구따위엔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아내는 헤어디자이너라는 사실만 인지할 뿐 어떤 도구를 쓰고 어떤 마음으로 머리를 만지며 그 도구들이 아내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생각하지 않았고 생가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여행 떠나기 직전에도 당신의 머리를 잘라주던 아내의 모습처럼 그저 아내는 당신이 생각하고 의미하는 존재로만 여겼을 것이다.

당신이 도구들을 만지고 정리하며 아내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른 아내의 모습을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많이 늦었지만 안하는 것보다 괜찮다.

 

당신의 애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한 번 울고 이후의 일들을 기록해서 엮어내고 그리고 아내의 물건을을 정리하고

당신의 애도가 시작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왜 그랬냐면.... 하며 긴 변명을 늘어놓더라도 그걸 다 받아들일 수 있을것이다.

 

영화 초반 내내 당신이 너무너무 미웠는데  당신의 행동들이 가식이고 찌질하다고 욕했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그럴 수 있겠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나 자신을 본다.

그래 그럴 수 있겠다.

그리고 나도 나의 긴 변명을 주절주절 늘어놔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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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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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표현이란  소수자에  대한 편견 또는 차별을 확산시키거나 조장하는 행위 또는 어떤 개인 집단에 대해 그들이 소수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멸시 모욕 위협하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 적의 폭력을 선동하는 표현 정도로 그 개념을 정의해 볼 수 있다.

 

혐오표현의 유형

차별적 괴롭힘 ....>> 편견 조장.....>>  모욕 ...>> 증오 선동

 

 

말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지만 말 한마디에 칼날이 번득이기도 한다.

무심코 던진 말일 수도 있고 심사숙고해서 어렵게 꺼낸 말일 수도 있는 입에서 나오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말들은 그저 말이 아니다

내가 가진 생각과 입장과 시각을 모두 아우르는 결과물이다

생각없이 말한다고 하지만 그 생각없음이 아예 존재하지 않은 생각이 아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속에 젖어 있는 선입관과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인 세상의 상식과 당위들이 뒤엉켜서 나의 가치관이 형성되고 그것이 알게 모르게 내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그것이 말로 글로 나올 수 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한 번 더 생각하고 의심하고 질문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저 당연하게만 받아들여 내 뱉은 말이니 생각없이 나온 말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그런 말들이 누군가에게 꽂혀 칼이 되고 독이 독이 된다.

칼에 맞은 상처나 독에 찔린 상처는 깊은 통증과 흔적을 남기고 한 번 아팠던 사람은

다음에 비슷한 말에 다시 경기를 일으키고 몸을 움츠리며 불안에 떤다.

칼이 아픈지 독이 얼마나 지독한지는 경험해 본 사람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니까

 

모든 이들은 평등한 인간이고 인간성의 존엄을 가지며 모든 이들은 정의에 관한 기초적인 권한을 가지며 모든 이들은 폭력, 배제, 모욕, 종속의 가장 지독한 형태로부터 보호받을 자격이 있음에 확신하는 것이 정의의 가장 중요한 기초인데 혐오표현은 이 기초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혐오표현이 공존의 조건을 파괴한다면 이것은 헌법적 가치인 인간존엄 평등 차별로 부터 자유로울 권리 연대성 등을 훼손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표현이 이러한 가치들을 파괴한다면 표현의자유가 우선시될 수 없다.

 

누군가를 어떤 가치관을 싫어할 수 있다.

그리고 싫다고 당당하게 내 의견을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모이게 되고 많아지면 내가 가진 생각은 당연한 상식이 되고  힘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말로 인해 상처입을 타인이 있다는 건 잊게 된다

아니 타인을 인식하지만 그가 그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음 역시 당연하게 생각해버린다.

그리고 말들이 모이면서 행동이 되고 규칙이 되고 울타리가 되거나 분노가 되기도 한다.

하나의 생각이 말로 형태를 갖게 되고  모이게 되면서  움직임을 만들고 흐름을 만들어내면서 그 이면에 누군가  아파할 수 있다는 것은 잊어버린다. 아니 그게 당연하게 된다.

 

혐오표현이 잠재적 가해자들 사이에서 확산성이 있다는 점도 혐오표현의 해악을 가중시킨다. 명예 훼손이나 모욕은 특별히 전염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혐오표현은 다르다.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혐오감정과 차별적 편견이 권력욕이나 경제적 궁핍 사회불만등과 결합되어 문제의 원인을 소수자에게 전가하고 희생양을 만들기도 하고 혐오 이데올로기가 후대에 전승되어 사회에 뿌리박히고 혐오조직의 결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저자는 혐오표현이 가지는 제한성과 배타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그것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그런 혐오표현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제도적으로 법을 만들고 강제성을 띄어서 제한하는 방법이 있지만 그럴 경우 개인의 표현의 자유와 부딪칠 수 있다. 누구나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자유말이다.

누군가가 어떤 상황이 싫다고 말하는 건 나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재갈을 물리는 것이 제도화 되어버리면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사회가 평등하지 않고 누군가 어떤 집단은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경험했다면 그들에게 던져지는 어떤 부정적인 말 한마디는 그저 한마디의 말이 아니다.

그건 공포일 수 있고 불안 나아가 생명까지 위태로운 무시무시한 상황일 수 있다.

사회에서 배제되고 있다고 느끼고 스스로 투명인간처럼  취급당했던 어떤 소수자에게 나는 너희들에게 동의하지 않아. 라는 말은 그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의견일뿐 아니라 하나의 폭력으로 다가올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무심한 말들이 어느 순간 하나하나 개별적인 언어라 아니라 뭉쳐진 덩어리가 되어 어디서 나를 후려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공포로 다가오고 있다.

내가 아직 혐오표현을 경험하지 않았고 왠만한 말에 상처받은 경험이 없다면

사회가 살만한 곳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만큼 운이 좋고 소수자가 아닌 편에 있는 경우라고 생각을 해야한다. 사회는 여기저기 기울기가 다른 곳이다.

저자는 제도적인 장치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우선 사회적인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회에서 혐오표현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자꾸자꾸 말하고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혐오표현이 자리잡지 못하는 방향으로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걷잡을 수 없이 혐오표현들이 다양해지고 여기저기서 에상치 못하게 부 딪치고 충격을 주는 혐오표현들이 그렇게 정화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처럼 서로서로에게 겨눠지는 수많은 혐오들이 어떻게 다양하게 생겨났는지를 다시 돌아보게 되고 과연 개개인의 생각과 표현의 자유와 약자를 향한 (본인은 정당하다고 당당하게 믿는)혐오발언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무작정 금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고 결국은 사람 사이에서 생긴 갈등을 사랆들이 스스로 풀어야 하지 않나 하는 조금은 말랑말랑한 제안을 하지만.. 역시 생각해 볼 일이다

누군가를 향해 비난을 하고 혐오를 드러내는 일이 세상에 어떤 도움이 될까

아니 나아가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혐오하고 없어지기를 바라고 그래서 물리적인 행동을 옮기는 일이

나에게도 과연 득이 되는 일일까

그래서 사라진 누군가 약자 혹은 혐오대상이 언젠가는 내가 되지는 않을까

해결책 보다는 생각이 더 복잡해지는 책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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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등 뒤에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
오사 게렌발 지음, 강희진 옮김 / 우리나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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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에서 늦게 오는 아이를 마중갔다가 걸어오는 밤길

이런 저런 이야기끝에는 꼭 서운했던 일들이 튀어나온다.

동생이랑 말다툼하면 동생편만 드는 것

별 거 아닌걸로 화를 냈던 일

단 한번 먹기 싫어서 안먹겠다는데 그걸로 짜증을 내서 서운했다는 것

소소하고 시시하지만 혼자 쌓아놓기엔 억울하고 속상한 것들

아이 말을 듣다 보면 별 것도 아닌 걸가지고 그러냐고 퉁박을 주게 되고

나도 그러고 컸다는 찌질한 꼰대같은 변명만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아이가 불쑥 말했다

"엄마도 서운한게 있으면 지금 할머니한테 말해. 돌아가시고나면 말도 못할텐데.."

그럴까?

한때  상담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너무너무 우울할때 나를 들여다 보니 지금 내문제가 다 자랄때 양육문제고 그때의 애착관계의 문제라고 생각되서 억울하고 화가 나서 뭐라고 퍼붓고 싶다는 욕구를 마구마구 느낀 적이 있었다.

지금이라도 이걸 표현하지 않으면 억울할거 같고

왜 나만 내버려두고 왜 혼자 잘 할거라고 제멋대로 믿었냐고 따지고 싶었고

종가집이라는 거 다 이해해도 어떻게 그렇게 남동생이랑 알게 모르게 차별 했냐고 하고 싶었으나..

나도 아이를 키우고 동동거리고 이런저런 서운한 말을 듣고 보니

그때 우리 부모는 정말 젊었구나. 지금 이렇게 나이먹어 늙은 부모하는 나도 지혜가 없고 아량이 없어서 어린 것들과 기싸움 하고 하나라도 더 이겨먹으려고 하는데

그 파릇파릇 젊었던 우리 부모도 당연히 그랬겠구나

뭐 따지고 보면 내가 내 자식에게 잘하려고 하는 것이 아이들에겐 부담이고  불안이고 서운함인데 어쩌면 그때 당신들에게 그런 말과 행동과 선택이 최선이었던건 아닐까..

가난한 집 장남과 철없이 종부이 되어버려 다른 무게가 많았던 그 분들에게 자녀 양육이라는 거에 모든 걸 쏟아 부을 여력이 남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리고 지금 너무 늙어버린 부모에게 그렇게 조목조목 따지고 들어봤자....

기억할리 없고 기억한다고 한들 아름답게 편집된 그 기억속에 나만 결국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가며 키워놨더니  뒤통수만 친다고 더 억울해하며 방방 뛰시다 안그래도 혈압도 높으신데 쓰러지기라도 하면..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매사 생각만 많고 행동으로 옮기기엔 게으른 성정도 한몫했고

뭐 나도 무던하기만 한 사람은 아닌지라 한번씩 성질나면 팍팍 쏘아주기도 했으니 그것역시 지금 엄마가 된 입장에서 자녀가 그러는게 나름 상처라면 상천데... 서로 쎔쎔이구나 싶기도 했다.

 

 

 

만화속 주인공 제니는 나중에 제대로 된 상담사에게 "정서적 방치'로 인한 트라우마라는 진단을 받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이름붙일 수 있는 병명을 가짐으로서 제니는 조금 치유받았을 것이다.

내내 스스로 느꼈던 불안과 죄책감 수치감에 모든게 내 잘못이라고만 생각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고 누군가에게 수용되지도 못했던 제니는 비로소 자기 상황과 상처에 이름을 갖게 되면서 치유가 시작되었다.

 

어쩌면 아이들에게 (어른도 마찬가지지만) 감정을 억제하라고 통제하는 것은 가장 큰 폭력이고 겁박이 된다.

슬플 때 울 수 없고  즐거워서 재잘재잘 떠들어댈 수 없고 누군가에게 위로받지 못하고 공감받지 못하는 것은 큰 고통이다.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감정을 조정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억누르는 걸 먼저 익혀야 하는 건 슬프다.

제니 부모 역시 어쩌면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된다고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누구에게 드러내지 못하고 그렇게 되는 걸 부끄럽게 여겨야 하는 상황에서 정서적 문제를 가지게 되고 결국 내가 가지지  못하고 수용받지 못한 정서는 누군가에게 나눠줄 수도 없다.

억누르는 것 감추는 것이 최선이라고 배운 부모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양육이었을 것이다.

물리적 폭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경제적 결핍도 없었고 어쩌면 남들 보기엔 조용하고 평화로운 수준있는 가족이라고 보였을 제니 가족이 속으로 그렇게 조용하게 무너지고 균열되는 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모든 가정이 자신의 가정과 같을 거라고 믿었던 제니는 우는 친구를 안아주고 달래주고 이야기를들어주는 친구 엄마에게 이질감을 느끼고 두려워진다 울면 안되는데 울면 모두가 피해버리거나 싫어하는 짓인데 그걸 태연하게하는 친구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는데 그 친구의 엄마는그런 어리광을 피우는 친구를 안아주고 달래주고이해하다니...

혼란스러운 제니는 세상이 두려워졌을 것이다

문제를 드러내면 등을 돌리는 가족들

칭찬과 관심에 인색한부모

표현하기도 전에 누르는 것을 배우고  어쩌지 못하는 감정에 드러내고 폭발시키고 나면 남는건 개운함이아니라 수치심과 죄책감이다 내가 엄마를 울게 했고 내가 아빠를 등돌리게만들었다는 마음만 남는다타인이라면 쉽게 등돌리고 다른 사람을 찾았을  수 있지만 가족이니까 계속 함께 보고 연결되고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조용히 무너지고 망가지는게 안타깝다.    누구에게도 사랑을 배우지 못한 제니는 조금만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 매달리고 사랑을 구걸한다 스스로 소중하고 가치있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다

엄마가 되고 아이를  사랑하지만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조차 죄책감이 든다.

내 속에는 사랑받지 못한 작은 아이가 아직도 관심과 사랑에 목말라하는데 내가 이렇게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괜찮을까?

불안과 갈등속에서 제니는 스스로 일어서기로 하고 자신 속의 자라지 못한 어린 제니를 마주한다 괜찮다고. 니가 잘못한게 아니라고 . 너는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어린 제니를 인지하고 마주하며 안아주면서 제니는 다시 성장한다.

결국 나를 돌아봐야 하는 건 나 자신뿐이라는게 슬프기도 하다.

이미 늙었고 변하지 않은 부모에게 소리쳐도 닿지 않는다. 상처는 아직도 여기 가득한데 그때 그곳에서 나를 돌봐주고 사랑해주어야 했을 대상이 나를 봐주지 않는다면 나라도 나를 마주하고 안아줄 수 밖에 없다.슬프지만 해야할 일...

 

 

가끔 아이들이 내가 어쩌지 못하는 고민들을 말하거나 나는 관심이 없는 일로 흥분해서 방방거리며 이야기할때  게다가 그런 순간이 내가 지쳤거나 뭔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상황까지 겹쳐진다면 나도  사실 ... 나 좀 내버려두고.. 입을 좀 다물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아닌 척 해도 기가 막히게 티가 나는지 상대는 금방 알아차린다.

지금 내말 듣기 싫어? 내가 귀찮아?

그제사 아니라고 손사래치지만 이미 정서에 작은 기스가 나고 ...한편으론 미안하지만 한편으로는 알면 조금 봐주면안될까싶기도 하고. 아 나도 정서적 방임을 하고 있었구나.... 아차 싶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사랑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베풀수 있다는 말은 반박하고 싶지만 할 수없는 진리다.

내 안의 그릇이 가득 차야 누군가에게 댓가없이 나눠줄 수 있다.

상대가 아이라면  나 혼자 이만큼 주었으니 되었다. 하는 만족감은 경계할 일이다.

 

우리애는 참 순해요 참 착해요. 혼자 알아서 잘 해요

이 말이 단지 칭찬일 수는 없다는 인식

혼자 알아서 잘 하는 아이가 얼마나 외로운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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