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도란스 기획 총서 3
권김현영 외 지음, 권김현영 엮음 / 교양인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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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글을 읽고 갸우뚱해서 다시 읽었다.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가해라는 말에 대

 

해 거리를 두고 생각한다.

나는 '피해자 중심'이라는 의미를 '피해자 우선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2차 가해'라는 말은 누구도 피해사실에 대해 다른 토를 달지 말라고 강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남의 말에 쉽게 이러쿵 저러쿵 하는거 아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것이 잘못이었을까

잘못은 아니다.

여태 살아오면서 약하고 힘없고 당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 아니 그들이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쉽게 내쳐지고 존재하지 않는양 여겨지고 행여 들어보더라도 나중에... 나중에 합시다.. 우선은 다른 더 크고 급하고 중대한 사안들 우선... 이라고 밀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내가 하는 말을 우선 듣고 내가 하는 말을 믿어주고 내 말에 공감해주는 일은 정말 갑격스럽다. 내가 당하고 쪼그라들고 아픈 내 말이 우선이라는 건 감격을 넘어 어리둥절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하지 성폭력이라는 것이 어떤 증거를 내밀기도 어렵고 당사자들의 상황과 당시의 맥락에서 들여다 봐야 하는 문제가 수두룩하다보니 보는 입장에 따라 제각각의 의견들이 충돌하고 목소리가 큰놈들 사회적 당위성에 보호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이기는  싸움이다.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과 사건을 말할 때 일목요연하게 일관성 있게 이성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누구도 쉽게 믿지 않는다.

꽃뱀이 되는 것도 쉽고 뭔가 노리는게 있어서 몸으로 덤볐다는 말도 너무 많고 좋아서 해놓고 뭔가 틀어지니까 들고나오는 복수아니냐는 말도 참 쉽게 납득이 되는 세상이다.

물론 개중에 그런 사악한 사람이 절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뒤집어 보면 꽃뱀이 되어가면서 쌍년이 되고 걸레같이 가벼운 년이 되어가면서 사실을 말해야하는 현실을 보지 못한다. 성공하려면 몸으로 거래를 할 수도 있는게 꼭 여자들이만의 문제일까? 몸을 주면 니가 원하는 걸 줄게라고 제안한 놈도 있을 거고 행여 먼저 제안한 어떤 여자에게 그거  정정당당하지 않소 하고 끊어내지 않고 좋다고 냉큼 받아먹은 놈도 있을거고... 결국 그렇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결국 남은 건 꽃뱀과 쌍년과 걸레다.

 

폭력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문제로 나누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진정한 문제 해결이 아니다.... 라는 것이 이 책의 근본 태도라고 생각한다. 개개의 가해, 피해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사회제도의 문제이고 인식의 문제이고 아직도 기울어진 정의가 반듯하다고 믿는 사팔뜨기들의 문제다.

 

그렇게 망신 줬으면 됐잖아.

고소 했고 처벌 받았으면 된거 아니야?

물론  원하는 만큼 형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재판까지 가고 알려질대로 알려진것으로 됐잖아

그것도 미투로 봐야돼?

좋아서 한거 아니었어? 제정신으로 모텔을 가고 오피스텔을 가?

한번 당했으면 두번은 가지 말아야지  무슨 음모가 있는거 아니야?

심년도 더 전에 있던 일을 지금 말해서 어쩌자는 거지?

순수한 미투가 있고 물타기 하는 미투가 있어

미투가 변질되고 있는 중이야

 

오가는 말들이 그건 아니잖아 라고 버럭해버릴 문제가 아니다.

여기저기 문제가 터지고 드러나는 일은 결국 지나야 할 과정이고 겪어야할 현실이지만

그 모든 사정사정에 자를 들이대고 조건들을 붙이는 건 누가 기준을 만들었을까?

 

결국 문제는 성폭력 문제를 바라보는 지배규범을 바꾸기 위한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내고 인식의 틀을 바구어 나가는 것인데  법이 바뀌고 규범이 바뀌어도 그것이 사회전체에서 통용되는 상식으로 인식의 틀로 자리 잡지 않으면 기본 규범들을 좀처럼 제자리에서 내려올 수가 없다 바뀔 수가 없다.

피해자의 말을 듣고 가해자를 처벌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식의 문제라는 생각이 없다면 누군가의 재수없는 일이 되거나 나와 상관없는 흥미거리 추잡한 스캔들이 되어버린다.

피해자 가해자만 관련된 '협의의 당사자성'을 극복하지 못하면 성폭력은 다시 개인의 문제이자 고통과 불행의 문제가 될 뿐이다. 성폭력을 둘러싼 투쟁은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그런 행동르 하면 안 되지 않나' 라는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가는 싸움이어야 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의자들은 피해자 주관적인 느낌은 가해자 중심사회에서 판단을 할 때 중요한 참조 사항이자 증거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피해자의 주관적인 느낌이 유일한 판단기준이어서는 안된다. 피해자는 당연히 자신의 경험을 주관적으로 해석할 권리가 있지만 그 경험을 공론의 영역으로 가져올 때는 정당한 의무를 지게 된다. 패미니즘은 그 정당화 과정에서 해적 투쟁에 연대하는 언어이지 무조건 편들어주는 언어는 아니다.

냉정하게 들리지만 생각해 볼 문제다.

 

오히려 우리는 무엇이 성폭력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한다. 우리의 주장은 언제나 맥락에 의존적이며 상황적이다. 이때 상황애 대한 상이한 해석을 허용하고 그 해석이 얼마나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성찰적인지 그러면서도 설명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자 했는지(사실이 아니라 정의로서) 판단기준이 될 수 있다

 

기준이 없는 문제는 늘 사회적 당위성이 힘을 갖는다. 힘이 있는 사람 여론을 만들 수 있는 사람 상식이라는 기준을 만들고 거기 한점 차별이 없는 사람들의 시선이 늘 통용된다.

섹스는 욕망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추구하는 일이고

강간 피해에 있어 모든 여성들은 신경증이 생길만큼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일이지만 남자들 사이에서의 행위는 그렇게 크지 않다 그들에게는 한순간의 재미이고 경쟁이고 힘을 보여주는 순간의 놀이로 치부된다. 그렇게 한가지 사항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차이가 날 경우 결국 폭력의 문제도 단순화되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예민하고 까탈스럽고 욕심을 내며 억지를 부린다는 것이 통용된다.

피해가 있다면 가해도 있다.

아무도 아무짓을 하지 않았는데 아프고 소외받고 상처받고 죽음을 당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그정도의 일이 누군가에게는 이만큼의 일이 된다.

계속 드러나는 미투과정에서 이건 그들의 개인적인 문제다. 이제 충분하지 않았는가 피로감을 느낀다. 개인적으로 고소하는 것으로 처리하지 왜자꾸 크게 떠들고 모두에게 원치않은 과잉정보를 제공하는가...  이미 변질되었고 이용당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떠들지 않았더라면 관용으로 넘어가거나 있을 수 있는 일 좋은게 좋은 일  사회생활을 하면 겪을 수 있는 일 누구는  조용히 넘어가는데 꼭 뭣도 아닌 것들이 떠들고 문제를 만든다는 생각들....

그리고 몸을 사리며 팬스를 쳐야겠다고 단세포적으로 나오는 반응들까지 .

결국 문제들을 드러나지만 누구도 이것이 나의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문제이고 사적인 문제이고 알아서 할일이라는 것

 

 

이런 통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두번째 글 < 문단내 성폭력 연대를 다시 생각한다> 였다.

누가 가해자인가? 누가 나쁜 놈인가 누가 더 나쁜가 누가 더 당했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무엇'이 폭력인가를 질문해야했다고 말한다. 2차 가해에 대해 발언할 때도 무엇이 성폭력 피해를 의심하게 하고 성폭력 고발을 어렵게 하는지를 질문해야 했다고  말한다.

너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라는 말로  순수에 조금의 티끌이라도 묻으면 끌어내야하고 의심해야하고 조작이 아닌가 생각하는 일들이 빈번했따.

이것이 왜 폭력이고 아파하는 일인지 생각하기보다 누구야 누구? 이쪽에 더 관심이 쏠린다.

한바탕 욕을 하고 법적으로 처벌을 받고 나면 끝!!이 되고 처벌이 끝난 자리에 또다른 가해자가 들어오고 또 처벌을 하고 또 누군가는 다시 '개인적인'문제로 피해를 호소하고 누군가는 '개인적인 판단 착오'로 욕을 얻어 먹는다. 구조와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모든 일은 돌림노래처럼 계속된다.

용서라는 말은 용인이라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는 문장이 그래서 아프다.

 

정채윤의 글 < 소수자는 피해자인가>는 그 피해 가해 대상을 여성-남성의 문제를 확장해서 다양한 성적소수자들에게로 확대된다.

웃자고 하는 농담이 폭력이 되는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글은 쉽게 들어온다.

여기는 앞에서 언급된 일반 통념들이 더 확장이 된다.

 

동성애자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으로 가족으로 친구와 동료로 존재한다는것, 이 세상은 이성애자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은 일급비밀이다. 존재하지도 않은 동질감으로 사회 공동의 규범과 성 역할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비밀은 늘 위태위태하다. 즉 커밍아웃은 벽장에서 나와  내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벽장을 열고 나와도 우리는 여전히 벽장속에 있다. 그런데도 이성애자들은 동성애자를 자신의 세상 밖에 사는 존재로 상상하며 세상을 자신들만의 것으로 지켰다. 동성애자들은 상상의 세계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 현실에서 오히려 투명인간이 되어야 했다.

 

아웃팅 방지 캠페인은 '커밍아웃할 권리와 우웃팅당하지 않을 권리는 성적소수자의기본권'이라고도 주장하지만 이런 권리란 성립 불가능하고 쟁취 불가능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커밍 아웃을 할 권리가 있는게 아니라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고 스스로 밝혔든 우연히 또는 강제적으로 밝혀졌든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말이 꼬이는 것 같지만 내가 차별받지 않고 권리를 가지겠다면 누구에게도 내가 소수자라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웃팅 당할 일도 없고 그로 인한 범죄도 생기지 않는다

아웃팅은 범죄라는 것은 희안한 슬로건이다.

누군가가 타인의 정체성을 강제로 밝히는 것은 폭력의 한가지이긴 하지만 그래서 드러난 정체성이 사회에 잘 스며들고 누구나 무심하게 인정해버리는 것이라면 2차 문제는 생각할 이유가 없다. 결국 범죄로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이 사회의 통념이 범죄를 양산한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이어지는 루인의 <피해자 유발론과 제이 트렌스젠더 패닉방어> 에서 패닉방어라는 용어를 처음 보았고 결국 성적 소수자라는 것을 미리 밝히지 않아서 내가 충격을 받아서 제정신이 아니어서 이렇게 사람을 폭행하고 죽일 수 밖에 없다는 말... 이게 말인지 막걸린지 모르겠다.

성적 소수자라는 것 표면적인 성과 성기가 일치하지 않은 것을 알아버린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래서 배신당했고 그래서 죽였다?????

좀 심한 말이지만 그렇게 충격으로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그 당사자가 존재할 필요가 없는게 아닐까? 그런 쿠크다스도 못되는 멘탈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나?

결국 모든 것은 남탓이고 나는 사회적 통념을 잘 지키고 믿는 성실한 시민이며 건강하고 건전한 인간이라는 걸 타인의 죽음과 피해앞에서만 증명한다.

 

그리고 역시 마지막 정희진의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에서 모든 주제를 아우르고 정리된다.

피해자는 그 자체로 진실이 아니고 투쟁으로 획득되는 개념이며 이 과정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누가 사회적 약자이고 무엇이 피해인지 이문제에 대한 복잡한 논쟁이 먼저 되어야 한다. 가해자이 패해의식 피해자의 죄의식이 우리사회에는 여전히 흔하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가장 급진적이고 선진적인 정치일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은 비정치적으로 간주되어 왔거나 비가시화되었던 피해를 드러내고 가해와 피해를 둘러싼 갈등 곧 사회 정의의 중요한 의제를 제기한다.

 

단순히 피해자를 돕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 페미니즘은 아니다

그건 법치주의라면 당연한 일이고 모든 사회, 국가의 당연한 의무이다 이걸 위해 피해자가 인생을 걸어야 하고 불신과 치욕을 견여야 하는 사회란 희망이 없는 지옥이다. 페미니즘의 관심사는 피해 가해라는 위치가 주어지는 방식자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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