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명의 엄마들의 이야기

서로 관계를 맺는 일에 대한 이야기

부탁을 하고 부탁을 받는 입장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어떤 말 앞에서도 강하게 부정하지 않는 선한 사람들의 이야기

 

서른 두살의 효진은 죽은 남편의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엄마가 되어본 적이 없는 그녀는 덜컥 열여섯 소년의 엄마가 되어야 한단다.

그녀에게 동욱을 부탁하는 시동생이 너무 무례하고 폭력적이라고 느껴졌다. 사실 남남 아닌가?

이미 형도 죽고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그 아이를 키운다면 효진이 당연한거 아니냐고 아주 뻔뻔하게 말하며 느물거리며 밀어붙이는데 화가 났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어쨌든 엄마는 맞긴 하다. 아버지와 결혼한 여자라면 법적으로는 엄마는 맞다.

혈육이 아니고 함께 산 기억도 시간도 없는 사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오갈 데 없는 동욱과 매사가 무기력해져버린 효진은 함께 어설픈 모자가 된다.

 

효진의 친구도 엄마도 이런 상황을 반대했고 어처구니없이 여기지만 동욱을 받아들이기로 한 효진은 담담하다.

망설이는 시간이 길었을 뿐이지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면 아무 조건없이 받아들이는 효진의 자세가 좋았다. 그렇다고 성급하게 가까워지려고 노력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냥 그렇게 공간만 함께 사용할뿐 정서적으로는 천천히 느리게 존중한다고 해야할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서성인다고 해야할지 그렇게  어색하고 무덤덤한 동거가 이루어진다.

 

동욱을 거부하고 싶었던 효진은 어쩌면 이 상황이 죽은 남편의 부탁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언뜻언뜻 보이는 동욱에게서 남편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이게 맞는 거라고 받아들인다.

모두가 아니라고 했고 본인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거부하지 않은 것

그것은 효진만의 일은 아니다.

딸아이의 인생을 생각해서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했던 효진의 엄마도  자신의 거부를 조금씩 허물어뜨린다.

정깊은 잔소리를 퍼붓던 효진의 친구도 결국 그녀의 선택을 인정하고 몇가지 도움도 준다.

그렇게 누군가의 부탁을 모두 아닌데 하면서도 받아들인다.

결국은 내가 선택하고 내가 포기하는 일이므로

동욱의 친구 주미도 느닷없는 임신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 아이를 위한 선택을 한다.

이건 윤리적이 아니라거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시선속에서 오롯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 무엇일까만 생각한다.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싶었던 성급하고 정의로운 동욱도 결국은 포기함으로써 받아들이는 것을 배운다.

 

엄마가 아무리 온몸으로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부르짖어도 자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가 아니었어도 엄마는 엄마가 원하는대로 살지 못했을거라고. 누구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선택한 삶이었다고 뼈를 때리는 소리만 들을 뿐이다.

그래도 엄마들은 자식은 특히 딸만은 나와 다르게 살기를 바란다.그게 그들 방식의 사랑이다.

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여자도 아이가 생기면 어쩔 수 없이 엄마가 된다. 힘들고 고단하지만 그 노동을 기꺼이 감수한다. 비록 입으로 끊임없이 투덜거림이 나올지라도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 주미도 타인을 위한 선택을 할 줄 안다.

나중에 후회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것이 가장 최선이라고 믿는 쪽으로 움직인다.

모든 것을 가지고도 아이가 없는 여자도 그저 선하고 애닮다.

그리고 예전 아이를 두고 떠났던 여자도 낳지는 않았더라도 엄마는 엄마였다.

세상은 다양한 엄마가 있고 그 마음의 뿌리는 같더라도 싹이 나고 꽃피우는 방법은 다 다르다.

 

 

동욱을 데려오기 전부터 무기력하고 몸이 좋지 않음을 느끼는 효진에게 상담을 해주는 정우는 효진의 모든 문제는 마음의 문제라고 말한다.

마음이 몸을 아프게 하고 늘어지게 하고 의욕을 잃게 한다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효진은 갑상선이 좋지 않아 그 모든 증상들이 나타났다는 걸 알게 된다.

뭐 마음의 문제가 전혀 아니지는 않겠지만

효진은 자기의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받은 후 해결책도 알게 된다.

정해진 시간에 약을 챙겨먹는 것

문제를 직면하면 해결이 생기기 마련이다.

동욱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의 인생에 자꾸 끼어들게 되고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면서 가족이라는 관계를 만들어가면서 효진은 문제를 직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너무 미안해서 울지도 못했던 그 장례식장에서의 어정쩡함을 동욱에게 처음 고백한다.

그때 너도 울지 않아 참 다행이었다고

그렇게 이제 가족이 되어간다.

뭐 사실 가족이 된다고 대단할 것도 없고 앞으로 행복하게 살았다는 해피앤딩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안다.

가족이 얼마나 구질구질하고 귀찮고 아무도 모르게 저주할 수도 있는 존재라는 걸 점점 깨달아갈 수도 있다. (이건 저주인가?)

그럼에도 받아들이고 시작하기로 했다는 건 중요하다.

 

영화를 먼저 보고 찾아보니 만화로 나왔다는 걸 알았다.

영화를 먼저 봐서인지 책은 조금 밋밋했다.

영화의 장면과 다르지 않았고 영화에 담기지 않은 효진의 동생이라든가 다른 이야기들이 조금 더있어 인물의 입장이 조금 더 잘 설명되어있긴 하지만

친절하지 않고 인물들의 사연이 숨겨져 있는 영화가 더 깔끔하고 좋았다.

대사들이 배우를 통해 더 풍성해지고 표정과 행동이 함께 표현되면서 이야기가 더 애틋하고 아름답다.

모두가 힘을 빼고 자연스러운 연기도 좋았던거 같다.

임수정의 엄마 역할이 괜찮을까 싶었지만 효진같은 엄마라면 충분했고 또 그런 엄마도 현실에는 존재할 테니말이다.

 

마지막 에필로그처럼 붙은 동욱과 연화의 에피가 뭉클했다.

엄마가 아닌걸 알지만  내가 버려진것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었던 동욱과

아들이 아니지만 엄마였던 연화의 대면

그리고 포옹과 연화의 울먹임 "엄마 미안해 정말 미안해"

동욱은 그 말 한마디가 그리워서 그렇게 연화를 찾아다녔던 모양이다.

내가 괜찮다는 말 내 탓이 아니라는 것

 

그러고 보면 인물들은 모두 내탓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던거 같다.

딸이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사는게 내탓같은 효진의 엄마

남편이 죽고 이렇게 무기력한게 역시나 내문제인가 하는 효진

임신한 아이를 이렇게 보내는 게 맞는지 계속 고민했을 주미와

자기의 의사와 관계없이 어른들의 결정에 이리저리 옮겨야 하는 동욱의 불안이

모두 자기에게 문제가 있어서 자기가 잘못해서일까 하는 마음들

물론 나의 문제는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만 꼭 내가 잘못은 아니라는 것

그 말이 누구나 절실하지 않을까

괜찮다. 그럴 수 있지. 나도 미안해 하는 말...

 

선택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포기해야하는 일이라는 말

그말과도 닿지 않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였다.

그리고 책도 영화와 함께라면 나쁘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음을 쓴다는것 그건 아무것도 하지 않은것보다 낫고 마음을 버린다는것 보다는 서서히 녹아 스며들거나 사라지거나 하는게 낫지. 더디 걸리고 아프더라도. 단편이거나 중편이면 더 좋았을 텐데 상수와 경애의 마음에 오롯이 집중하기엔 다른 이야기가 넘 많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애란의 소설을 읽고나면 쉽게 지친다.

환절기 으슬으슬 몸살이 오는 순간처럼 온몸에 기운이 빠지면서 그저 드러누워 아무 생각없이 멍하게 오돌오돌 떨고 있고 싶어진다.

제발... 왜자꾸 이러는데.. 라고  부탁하고 싶을 만큼  힘들다.

 

아이를 잃고 남편을 잃고 오래 사귄 연인과 헤어져야만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기다리는 임용에서는 떨어지고 누군가의 부고를 드고 가장 가까운 이를 의심해야하는 일이 생긴다.

상실은 절망을 부르고 사는 일은 나를 바닥까지 끌어당긴다.

주위에서 악이 없이 재미로 오르내리는 구설수는 당사자들에게는 뼈를 때리는 아픔이다.

원망의 대상은 없어지는데 억울한 마음은 점점 커진다.

견뎌내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 무조건 이불 뒤집어 쓰고 땀을 내면서 견디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다 열병으로 뇌가 상하거나 탈진하거나 어찌 되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너무 가까워져도 아프고 멀어지면 서럽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가 마지막 작품이어서 다행이었따.

부재와 애도를 원망하지 않고 공감하기 시작한 주인공에게 박수를....

지난 작품집의 마지막 수록작 <서른>은 너무 아프고 아파서 힘들었따.

건강하고 안전한 거리에 대해 생각한다.

부재. 슬픔 원망 죄책감에 대해 때로는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멀어지고 모른 척 해버리면 인간이 아니지만 너무 가까이 해도 인간으로 살 수 없다.

인간은 좋은 인간과 나쁜 인간으로 나뉘는게 아니다.

인간이거나 인간도 아니거나. 그렇게 나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십자수를 한 적이 있다.

도안에 그려진 밑그림을 보고 칸 수를 세어가면 아무것도 없는 흰천에 십자모양의 수를 채운다.

도안의 칸을 잘 세어서 흰천위에 하나둘씩 수를 채워넣다 보면 그림이 완성된다.

바느질을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

정확하게 수를 세어서 틀림없이 알맞은 색으로 채워나가다 보면 그림이 완성된다.

다만 지루하고 눈이 침침해질 수가 있다.

소설을 읽으며 십자수를 떠올린다.

어떤 이야기인지 전체적인 맥락을 알지 못한 채 그냥 읽는다.

더구나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책을 펼쳣는데 에세이같기도 하고 시 같기도 하다.

그냥 넋두리인가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대목에서는 어떤 광기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11년째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여자의 간병인으로 무대에서 발작을 일으켜 내려온 전직 배우가 온다. 같은 나이의 두 여자는 자매처럼 닮았다는 말을 듣는다.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않은 여자를 돌보면서 화자인 여자는 자신에거 혹은 그 여자에게 쓴 편지처럼 내용이 흘러간다. 아니 편지라기보다 독백에 가깝다.

여자가 배우여서일까.

모놀로그 무대위에선 배우처럼 독백하고 몸짓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그저 배경처럼 왔다가 지나간다

내가 나로 산다는 것

서로에게 닿는다는 것

본다는 것과 보여진다는 것

생각은 생각으로 이어진다

병원속 다양한 인물들도 당연히 등장한다.

약이 끔찍해진 같은 병실의 정옥 아줌마

전쟁통에 조카를 잃어버렸다는 비밀을 평생 간직한 노인

뇌로 전이된 암때문에 장작이 둘로 쪼개지는 아프을 느끼며 결국 마지막 선택을 해버린 남자

한때 유도 관장이었으나 사고로 마비가 와 그의 유도관 학생이었던 물리치료사에게 걷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하는 노인

남편이 죽고 다른 남자를 만난 적이 있다는 고백을 하는 감포 아줌마

생과 사를 함꼐 겪는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마주쳤다가 스쳐가고 서로를 알지못하지만 서로의 존재에는 익숙해진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끝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읽다보면 문장이 말처럼 흐르고 리듬을 타고 흘러내리고 굽이친다.

(누군가의 목소리로 듣는다면 더 멋질거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이 사람들이 이 생각들이 어떻게 될까?

말이 없고 누워만 있는 여자를 돌보고 만지며 화자는 그녀가 자기인지 자기가 그녀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오로지 한사람의 대상만 바라보고 몰입하는 시간이 계속 흐른다면 그리고 스스로를 고립시킨 상황이라면 둘 사이의 교감은 어쩌면 한사람의 그것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 여자는 요양소로 가게 되었을까?

능앞에서 혼자 걷기 연습을 하던 그 노인은 여전히 뚝뚝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을까

왜 하필 그 장소가 경주였을까?

한없이 낮고 수줍고 고즈넉한 그곳이 독백과 잘 어울린다고 느낀 건 나만의 생각일까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읽은 후

마침내 눈이 아리게 칸을 세고 그 칸에 맞는 숫자의 색실을 찾아 바늘을 꿰고 한땀 한땀 떠내려간  십자수는 완성이 된다.

과연 도안의 그림이 제대로 완성이 될지 알 수 없는 가운데 그저 근시안적으로 지금 당장 채워야 할 칸만 세고 색을 찾기에 급급했던 십자수는  멋진 그림으로 완성된다.

이거 였구나

누군가에게 닿으려는 손짓

누군가를 보려는 행동 보여지고 싶은 욕망

그것들이 켜켜이 알게 모르게 쌓여서 관계가 되었다.

스치는 것만으로 우리는 이어져 있었다.

그 여자. 그리고 그 곳 사람들

그속에 나는 나처럼 살고 있었다.

 

아직도 소설인지 시인지 에세이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몽환적이고 긴 독백으로 이어진 한편의 극을 보고난 느낌이다.

두시간을 꼬박 어두운 극장에 있다가 나온 뒤에 느끼는 피로감이 남는다.

내가 읽으며 무대를 상상하고 소리를 상상했던 특이한 독서 경험이다.

괜찮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제도의 운영을 위해 (그 주체가 국가든 회사이건 무엇이든)

이야기를 금지해야 했다

누군가 타인에게 관시을 가지지 말것

상상하지 말것

감정이입을 하지 말것

그렇다면 서성일 일도 고 주저하거나 자기가 가진 정의와 윤리를 다시 되돌아 볼 일도 없다.

듣고 보고 배운대로 믿으며 그대로가 전부라고 믿어버린다면 사회는 갈등도 없고 단순하고 효율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누구를 위해서? 그건 모르겠다.

소설을 읽는다는 일이 부질없다란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윤성희의 소설은 늘 내 발목을 잡고 옷깃을 붙든다.

'그리 서둘 필요 없잖아. 천천히 읽어  문장이 어딜 도망가니?'

단문들이 반복되면서 자구 헷갈렸다. 이 문장을 읽었던가? 건너뛴 문장이 있는건 아닐까?

가끔 건너뛰어도 별 문제는 없다. 그러나 하나도 빼먹을 수가 없다. 짧고 무심하고 건조한 문장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그려내는 사람들에게 눈을 뗄 수가 없다. 어쩌나. 이런 삶을 어쩌나...

평범하고 특징이 없고 이렇다할 드라마도 없는 이야기가 자꾸자꾸 궁금하다.

어릴 적 네번이나 죽을뻔한 경험을 했다는 것

이복형제들과 살았다는 것

열일곱의 딸을 잃고 아내와도 헤어졌다는 것

이젠 다니던 작장도 그만두었다는 것

쓰다보니 주인공의 삶이 별일 아닌건 아니다.

그러나 윤성희의 문장들은 워낙 덤덤하고 무심해서 별 일 아닌 것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고 자꾸 신경쓰인다.

단조로운 리듬이 적당히 지루해서 나른한 기분 그러나 딱 멈추는 지점이면 기가 막히게 눈이 떠지는 백색소음같은 것. 익숙하고 익숙한데 멈출 수 없는 것

그런 문장들이 모여 이야기를 만들과 사람을 보여준다.

 

근식이든 영무든 그는 여전히 그다.

첫문장.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죽은 딸을 설명해줄 첫문장을 찾는 남자.

어쩌면 뒤늦은 애도일 수도 있다.

또 어쩌면 늘 남들의 착각과 오해속에 숨어 살았던 삶에서 걸어나와 제대로 스스로 설명해보려는 용기일 수도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짧은 기억들이 파편처러 제각각이지만 그것들을 무장으로 이어붙이면 내가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

첫문장은 별 거 아니지만 별 거이기도 하다.

다음 문장 그 다음 문장으로 이어지며 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시작이다.

나는 나의 첫문장을 생각한다.

어떤 문장은 깊이 스며들지 못하기도 한다.

그저 몸에 붙었다가 부지불식간에 어디서 떨어져버리기도 한다. 내것이 되지 못하는 문장들이 수두룩하다. 왔다가 가버리는 언어들 문장들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걸 표현할 문잗을 찾지 못한 것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떤 문장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내 몸에 붙었다가 떨어져버린 스며들지 못한 문장들을 하나 하나 주워서 이어분다면 결국 그것들이 내가 아닐까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만 몰랐던 게 아닐까

 

문장을 쓰는 일

첫문장을 무엇으로 쓰느냐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멋진 첫문장이라고 생각하고 선택해서 문장들을 이었는데 다 쓰고 보니 빼버리는게 더 나을 수도 있고 다른 문장으로 바뀌어도 상관없을 떄도 있다.

중요한 것은 첫 문장으로 시작해서 문장을 차근 차근 쌓아가는 일이다.

첫문장은 첫문장이다.

그러나 첫문장이어서 쉽게 나오지 않는 문장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