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가 꽤 괜찮은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 합니다.

 

내가 아직도 덜 자라서 유치하고 어린데 그걸 감추느라 전전긍긍하면서

모성이 강한 엄마  자상하고 친구같은 아빠가 되려고 할게 아니라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 되어서 말하고 행동하고 반성하고 표현하는 일

그게 결국 좋은 부모라는 생각을 합니다.

 

자식 이야기는 늘 끝이 없고 답이 없고 어떤 상황도 늘 새로워서 전전긍긍하게 되네요

남의 자식일은 그렇게 쉽게 눈에 보이고 판단이 서는데

내 자식의 문제는 앞이 뿌옇고 흐려서 한발자국도 내디딜 수가 없습니다.

 

내가 과연 건강한 사람인가  건전한 사람인가

그걸 먼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조금 이기적이긴 하지만 부모지만

아이들만을 위해 살 수는 없습니다,

아이에게 무슨일이 생길때 그 아이를 위해 죽을 수는 있지만

삶 전체를 아이만을 위해 살 수는 없지 않나요

내 삶을 주인공으로 살면서 나이들어감에 따라 어른이 되어가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부모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왜 모성이 없을까

왜 아이들이 이렇게 귀찮고 힘들기만 할까

내가 뭐가 문제일까 너무 이기적인가?

그건 결국 내가 아직 내 속에 작은 아이를 키우지 못한 반쪽 어른이라서.. 깨닫습니다.

 

그냥 좋은 부모 이전에

좋은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나이 50이 가까우면 진짜 어른이 되어야 할 나이이니까요...

이 나이 먹도록  동안이고 어리고 발랄하기만 한건.. 좀 징그럽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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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플라워 - 삶의 가장자리에 서 있으면, 특별한 것들을 볼 수 있어
스티븐 크보스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나는 성장소설을 참 좋아하는 모양이다.

아직도 미숙한 부분이 많아서일까?

어떤 모퉁이를 돌고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그래서 쨍한 빛과 마주하고 미지의 어딘가로 향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잘 먹고 잘 살았답니다 하고 끝! 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직도 지나야할 많은 모퉁이들과 많은 터널과 많은 골짜기와 많은 습지가 남았지만 그래도 괜찮단다고 스스로 다독이는 힘을 가지는 그런 성장드라마.....

어쩌면 이런 이야기들을 만나고 내가 접해야할 그런 나이에 나는 너무 소극적으로 틀에 갇혀서  그게 옳다고 믿으며 내가 잘하고 있는 중이라고 착각하며 그 좋은 시간들을 다 보내버렸던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키는 크고 몸무게는 늘고 뼈마디는 점점 삭아가지만 나는 여전히 어리고 유치하고 서투른 그때 그자리에 있기 때문일것이다.

 

미숙한 주인공 찰리가 자기의 과거를 마주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세상에 나아가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찰리앞에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있고 많은 불안과 미쳐 알지 못하는 세상에 놓여있다. 여전히 넘어지고 우울하고 도망갈 일도 남았겠지만 그래도 한 고비는 넘겼다.

산다는 건 멈추지 않은 이상 계속 고개를 넘어가고 물을 건너고 평지는 걷고 쉬기도 하는 일이다.

하나의 고개를 넘어서 이제 직진대로가 놓이게 되는 게 아니다 늘 만나는 그 고비마다 우리는 조금씩 성장할 수도 있고 점점 고립되고 딱딱하게 굳어갈 수도 있다.

어쩌면 굳었다가  너무 굳어 감각이 없어져버린 그 부분이 아픈 줄 모르고 베어져 나가기도 하고 다시 말랑말랑 새 살이 돋기도 하고 어느 순간은 팔이 자라고 어느 순간은 몸통만 자라시 기이하고 불균형한 순간을 겪으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 책 이야기를 해야지...

갓 고등학교에 진학한 찰리는 모든 것이 새롭고 두렵다.

중학교때 친했던 친구가 자살한 경험이 있고 이야기에 제대로 드러나진 않지만 무언가 우울하고 충격적인 경험을 했었고 그래서 정신과 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다,

그러나 찰리의 주위 사람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다정하고 화목한 부모님이 있고 현실적이지만 다정한 형과 누나가 있고 샘과 패트릭이라는 절친을 만나게 된다.

흡연 마약 섹스 따돌림 동성애 등등의 여러가지 코드가 등장하며 학교 생활 교우관계가 쉽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주지만 찰리는 잘 적응해 나간다.

무언가 어두운 그림자가 있을 거 같은 가정도 생각보다 밝고 건전하다.

보여지는게 전부는 아니다.

내가 보기엔 무탈해 보이고 화목하기만 한 가족이라도 무언가 어두운 그림자가 있고

문제가 많을거 같은 가정도 의외로 작고 단단한 안전둥지가 있다.

 

아들의 첫 데이트에 콘돔 사용법과 상대가 싫다는 것은 정말 싫은 것이므로 하지 말아야 하고 내가 내키지 않은 것도 하지 말아야한다고 조언하는 아버지도 멋지고

늘 다정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단호하게 말하고 늘 일관성을 유지하는 엄마도 멋지다.

툴툴거리는 현실남매지만 꼭 필요한 순간에는 곁을 지켜주는 형제들도 대단하다.

그리고 보기엔 날라리에 또라이같지만 늘 적절한 순간 적절한 거리에서 딱 맞는 조언을 해주는 패트릭과 샘도 멋지다

찰리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 둘의 입장에서 풀어내는 이야기들도 참 흥미롭겠다는 생각을 했다.

학생의 문제를 문제로 다가가지 않고 책읽기를 통해서 관계를 맺고 성장을 도와주는 선생님도 멋지다. 내가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책을 읽고 꾸준히 기록하는 것도 꽤 멋질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에서도 꽤 좋은 장면이라고 기억하는데

크리스마스때 비밀산타놀이를 하면서  찰리가 주는 것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모른 척 하고 놀라고 좋아해주는 패트릭의 모습과 작가는 의당 멋져야 한다면서 받은 수트를 입은 어색하지만 괜찮았던 찰리의 모습 그리고 멋진 수동 타자기 선물 .. 장면은 소설로도 따듯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선물을 준비했을 그 마음이 글 속에서 장면속에서도 너무 착하고 따뜻했다.

 

월플라워처럼 벽에서서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하던 찰리는 점점 사람들 속에서 함께 행동하기 시작한다.

늘 생각하던 것이지만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만큼 가슴에서 발까지의 거리가 멀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은 의외로 쉽다.

관찰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이 어느 순간 느껴지고 이해되고 공감되는 순간이 오면 순간 내 속에 불이 하나 반짝하고 켜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순간까지 월플라워다.

그냥 서서 바라보고 생각하고 느껴지는 것 표현하지 못하거나 소극적으로 하는 순간

그리고 그 가슴에서 천천히 발로 이어지는 순간 발이 움직이고 한걸음 벽에서 떨어지는 순간 나는 더이상 벽에 선 한 송이 꽃이 아니다. 방관자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고 관찰자도 아니다.

그때 나는 행동하는 우리가 되고  주체자가 되고 비로소 내가 된다.

 

성장 소설은 그런 것이다. 내가 머뭇거리는 한걸음을 내딛는 것.

아기가 첫 걸음을 땟다고 바로  길을 떠날 수는 없다.

그냥 한걸음 내디뎠을 뿐이다 그게 처음이니까 의미가 있을 뿐

그 다음 한걸음 또 다른 날 의 한걸음의 반복된 훈련이 필요하다.

그렇게 찰리도 한걸음 한 걸음을 연습하기 시작했고 이제 길을 떠날 수도 있다는 마음을 품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알고 친구들과 지내는 시간도 경험하고 그리고 어두운 자기속의 기억과도 마주한다.. 걸음도 내것이고 넘어져서 생기는 생채기도 내것이므로..

여전히 벽에 서서 생각하고 느끼는 나에게 그래서 성장소설은 늘 매혹적인 모양이다

한걸음을 내딛는 일.... 이건 나이를 먹었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늘 첫걸음은 두렵고 불안하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성장소설이 좋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거라는  기대를 하게 되는 이야기에 끌린다.

 

별을 하나 뺀 이유는 너무 좋은 사람들만 나오기 때문이다.

 

<마천루>를 읽고 했던 이야기였던가

너를 위해 죽을 수는 있지만 너를 위해 살 수는 없다는 말... 가장 좋았다.

결국 살아가는 일은 내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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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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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학교에 작은 포스트 잇이 붙었다.

 

"feminist .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

 

"여자가 토막살인을 해도 토막녀 살인사건

  여자가 토막살인을 당해도 토막녀 살인사건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여자 아이들에게 '만지지 마세요'를 말하라고 가르치는게 아니라

  남자아이들에게 "허락없이 만지면 안돼" 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가해자가 없어지면 피해자도 없어집니다"

 

" 세상에 기아란 없다.

  나는 오늘 밥을 먹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여성 혐오란 없다

  나는 오늘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여자들은 "김치녀"가 되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검열하지만

 남자들은 "한남충"이  되지 않으려고 여자들을 검열한다.

젠더 권력의 차이란 그런 것이다"

 

 

누가 언제 왜 붙였는지는 모른다.

어느 순간 쉬는 시간에 봤더니 이런 포스트잇이 곳곳에 붙어 있었고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구경하고 있었고... 그리고 누군가는 욕을 했고 누군가는 포스트 잇을 잡아 뜯어버렸다고 했다.

그나마 일찍 발견한 아이는 그걸 사진에 담아 왔다.

누가 왜 했는지 알 수 없었고

읽고 지나가는 아이들도 있었고 무시하고 지나가는 아이들도 있었고 욕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왜 욕을 하지?

이게 붙어있는게 누구에게 피해를 준건 아니지 않나?

남자애들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런걸 싫어하는 여자애들도 있더라.. 아이는 그 사실에 더 놀랐다고 했다. 뭐 여자라고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욕할건 아니지 않나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누군가 공부하기 싫어서? 혹은 궁금해서 누가 복도에 이런걸 붙여놨더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지만 선생님은 답하지 않았다고 했다. 갑작스러웠을 것이고 뭐라고 해아할지 순간 머뭇거렸을 수도 있을 것이고 혹시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는게 멈칫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해프닝같은 하루가 지나고

며칠 뒤 이번엔 페미니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스티커를 붙이는 자보가 화장실에 붙었다고 했다. 그것 역시 몇몇이 보았고 몇몇이 욕을 하고 몇몇이 찢거나 스티커를 아무데나 붙이며 사라졌고 그날 오후 방송에서는 허락받지 않은 계시물을 함부로 부착하지 말라는 학생부의 통고가 들려왔다고 했다.

아이는 누군지 궁금하다고 했다.

처음엔 어떤 학생이 아닐까 했는데 어쩌면 선생님일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누구인지 용기가 있지만 용기가 없기도 하다고 조잘대다가 학원으로 갔다

 

 

예전 가정폭력 활동가 수업중에 한채윤 선생님 강의가 참 인상적이었다.

여러 성소수자들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강의가 정말 좋았다.

누구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던 부분을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이 쉽고 재미있게 거부감없이 하는 설명에 모두 넔을 잃었고 열광했었다.

돌아와서 이런  아이를 붙들고 설명했지만 듣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머리탓에 혼자 해매다가 이런 좋고 쉬운 강의를 너희 나이에 받으면 참 좋을텐데. 그러면 편견이 좀 적어지지 않을까

너무 쉬워서 누구나 듣고 금방 이해 되더라

물론 엄마도 이해는 다 했어 다만 외우질 못했을 뿐이야.... 하며 수다를 떠는데

아이가 말한다

"엄마 그런 강의 한 번 하는 건 하겠지만 하고 나면 학부모회에서 난리가 날 수도 있어"

아... 그럴수도 있겠다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은 아니니까 누구나 의견은 다르니까....

그래도 이렇게 좋은 강의는 모두 다 듣는게 좋은데... 아쉬웠다.

말랑말랑하고 알고 싶은 거 많은  그리고 어쩌면 이미 편견이 조금씩 자리를 넓히고 있을 지 모를 그때 이런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게 정말 좋을 텐데... 하고 아쉬워만 했었다.

 

조금씩 정말 아껴가며 읽었던 책의 마지막을 덮었다.

마음이 서늘해진다,

누군가는 몰라서 말하지 않았고 누군가는 알지만 말할 수 없었고 누군가는 알 필요조차 없는 진실들.. 사실들..

자기 의견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건 하나의 권리이며 동시에 권력이 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누구나 하는 생각 이미 세상의 당위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아닌 조금만 비틀리고 방향이 다른 이야기들은 그대로 침묵이 된다 누군가 힘이 있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불편해하는 기색이 보인다면 그건 폭언이고 반항이고 쓸데없으며 조용히 사라진다.

소리없이  사라지는 포스트 잇의 글귀들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지만 함부로 권할 수 없는 좋은 이야기들

세상에는 그렇게 조용히 사라지는것들이 참 많았다.

 

솔닛의 글에 '여성"의 자리에 누구든 약자를 넣으면 다 말이 되지 않을까

어린아이. 장애인. 성 소수자. 외노자 .

너희를 보호하기 위해서 ... 도와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야 하는 말이야

그러니 조용히 따르기만 하면 돼

꼭 그렇게 많이 알 필요는 없어

그렇게 세상의 많은 입들이 조용히 닫히고 세상은 고요하다. 그리고 그 고요는 평화가 되고 안전이라고 여겨진다.

 

뭐라고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저 솔닛의 책에 밑줄을 치고 소리내어 읽어 볼 뿐이다.

 

 

 

감정이입이란 우리가 타인을 진실되게 느끼기 위해서 타인을 위해서 느끼거나 타인과 더불어 느끼기 위해서 그럼으로써 자신을 넓히고 확장하고 개방하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와 같다. 감정이입을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인간성의 일부를 닫아두거나 제거해버렸다는 것. 자신을 어떤 종류의 취약함으로부터 막아두었다는 것이다. 남을 침묵시키는 것 혹은 남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는 것은 타인에게도 인간성이 있으며 우리는 모두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회적 계약을 깨뜨리는 것이다             p66

 

 

우리의 인간다움이란 이야기들로 구성되고 만일 언어와 서사가 없는 경우에는 상상력으로 구성된다. 그 상상력이란 어떤 이야기가 내가 아니라 네게 벌어졌기 때문에 내가 말 그대로 몸소 느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마치 내 일처럼 상상할 수 있고 내 일이 아니더라도 마음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이어져 있고 누구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살해되어 침묵당하면 감정이입을 끌어낼 수 있었던 목소리들이 침묵되고 의심받고 검열받고 말할 수 없게 되고 들리지 않게 된다. 차별은 누군가가 어떤 측면에서든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에게 동일시나 감정이입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 우리 서로 간의 차이가 전부이고 공통의 인간성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p67

 

 

랭턴은 우리의 논쟁의 촛점을 재설정하여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이 하는 일 말이 품은 힘에 주목한다. 그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언어를 써서 결혼하고 투표하고 평결하고 명령한다. 혹은 우리에게 그럴 힘이 없을 때는 하지 못한다. 주인이 노에에게 먹을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건 명령이지만 노예가 같은 말을 하는 것은 호소이다. 각자가 지닌 힘이 말의 의미와 말이 할 수 있는 일을 혹은 할 수 없는 일을 전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p109

 

 

수치심은 자존감을 파괴하는 것이다. 공격자가 피해자에게 스스로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시키기 위해 피해자가 스스로를 더럽고 역겹고 부끄러운 존재로 여기도록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가하는 것이다. 수치심은 피해자가 경찰에 범죄를 신고하거나 도움을 구할지 말지를 결정하는데도 영향을 미친다. 피해자는 또 자신의 과거 성경험과 폭행의 세세한 측면이 꼬치꼬치 파헤쳐질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p 140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이 여자들 일인것은 그저 그 일이 여자들에게 저질러지기 때문이다. 그 일을 저지르는 건 대부분 남자들이니 어쩌면 페미니즘은 줄곧 남자들일이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p148

 

 

집단이란 물 샐틈 없는 범주이므로 그 속의 모든 구성원이 하나의 사고방식, 신념, 나아가 책임을 공유한다는 생각은 차별의 핵심적 요인이다. 이런 생각은 집단 처벌로 이어진다. 이 여자가 나를 배신했으면 저 여자를 비난해도 된다는 생각 집 없는 사람들 중 일부가 범죄를 저질렀으면 모든 집 없는 사람들을 처벌하거나 쫓아내도 되고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다.

                                                           p 212

 

 

얼마전 나는 무지권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보았다.특권있는 사람 재현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의식할 필요가 없는 사람 실제로 자주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이 나름대로 일종의 상실이다.

페미니즘은 여자들이 과거에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경험에 대해 마침내 말을 꺼내는 것인 경우가 많다면 반페미니즘은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인 경우가 많다.  p242

 

 

누군가가 나에게 페미니스트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기 쉽지 않을것이다.

나는 부조리가 싫고 세상에 불만이 많고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을까? 고민할 것이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는 내게 좀 대단한 것이다.

나를 드러내는 일이 아직 익숙하지 않고 조금은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있는게 편한 입장에서 나는 페미니스트야 라고.. 말하기는 아직 쉽지 않다.

 

예전 김수현의 <사랑은 아름다워>라는 드라마에서 커밍아웃한 동성애 아들을 대하는 부모를 보면서 적어도 나도 저렇게 행동하고 말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우스개 소리로 지식이 마음에 들지 않은 이성을 데려오면 어떻게 할거냐는 닥치지도 않은 문제에 대해 설왕설래할때 그 수다들을 막은 질문은 그것이었다.

마음에 안드는 이성이 아니라 마음에 안드는 동성을 데리고 오면 어떡할래?

그 질문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지도 않은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내가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고 알지 못하는 보따리를 내미는 것이다,

나는 극히 이기적인 부모의 입장에서 나중에 내 자식이 어떤 입장이 되더라도 (그것이 누군가 목숨이나 재산이나 명예를 빼앗는게 아니라면) 그 입장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기를 바란다,

내 아이가 여자여서 밤길을 조심해야 하고 여자여서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을 다 잘하는 슈퍼우먼이 되어야 하고  여자를 사랑해서 사람들에게 돌팔매를 맞는 일은 없으면 좋겠다.

만에 하나 내 아이가 당할 차별과 불합리가 두려워서 나는 지금 이순간 누구도 차별하거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기적이지만...

내가 겨눈 칼끝이 언젠가 내게도 돌아올 수 있다.

지금 내가 살고 말 세상이라면 모르겠지만 언젠가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고 또 그 아이의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라면 내가 조금 더 살기 편하게 누구나 세상을 넓게 활용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그가 무엇무엇이어서 외롭고 아프고 답답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 대상이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병신같은 질문을 받지 않고  쓸데없는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먼저 말하고 내가 먼저 움직이고 내가 조금 더 따지려고 한다.

이것도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을까? 참 이기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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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억중에 하나다. 이것이 진실인지 혼자만의 상상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사실에 상상이 더해진 것일 수도 있다.

등에 동생을 엎은 엄마 손을 잡 고 시장엘 갔다.

장을 보긴 했는지 무얼 샀는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그냥 그 시장 어느 모퉁이에서 무언가를 모여서 구경했던 기억이 있다.

떠돌이 약장사였는지 어떤 시장 공연인지도 모르겠다.

구경을 했었고 혹시나 사람 틈에서 엄마를 잃어버릴까봐 동생을 둘러 엎은 포대기 끈을 잡고 있었다. 엄마 손을 잡지 않은 건 어쩌면 손에 물건들이 있었기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한 참을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니 그 곳에 엄마가 없었다.

내가 붙들고 있었던 것은 포대기 끈의 끝자락이 아니라 어떤 할머니가 입은 저고리 고름이었다.

내게 고름이 잡힌 그 할머니는 빙긋 웃으며 이제 다 봤냐 집에 가자.. 그러면서 나를 집에 데려다 주었다. 분명히 데려다 주었을 것이다. 혼자 간 기억은 없으니까

그 할머니가 누구인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아마 나를 알거나 우리 가족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갔고 엄마에게 왜 먼저 돌아갔냐고 떼를 쓰거나 따지지 않았다.

그때 내가 어떤 반응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때 감정은 떠오른다.

그때 내가 가진 감정은 체념이었던거 같다.

뭐 그렇지 뭐...... 그런 마음

가족이 많아서 언제나 바빠서 마음 편히 시장 구경도 못할 엄마를 이해한 건지

등에 엎은 아이는 처지고 장바구니는 무거워서 더 이상 서있을 수 없었던 그 상황을 이해한건지

그건 모르겠지만 그냥 내가 이해해야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을 뿐이다..

내 기억은 그것뿐이다

그 초기 기억이 어떤 작용을 했했는지 하긴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아주 어릴 적 기억이라는 게 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무심하게 떠올랐을 뿐이다.

억울했다거나 화가 났다거나 하는 마음은 아니었다.

이미 어른이 되어버렸기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뭐 그런 때도 있었구나 하는 마음 뿐이었다.

그 때 이후 나는 무언가 달라졌을까?

나는 그 기억을 그날 집단 상담때 이외 누구에게- 가족에게 도 한 적이 없다.

 

 

 

 

 

 

 

 

 

 

 

 

 

 

 

 

 

 

 

 

 

 

 

 

 

 

헤어진 여자친구가  전에 선물했던 시계를 돌려달라고 연락이 왔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시계를 돌려주는 일이 주된 스토리는 아니었다.

유학을 떠난 여자친구를 위해 연락도 하지 않고 미국으로 간 남자의 이야기도 그들의 극적인 러브스토리가  주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한때 엄마 아빠가 동물원에서 버리려고 했다고 믿는 삼남매의 이야기도 그 비정한 부모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암투병으로 세브란스 지하에서 보낸  어두운 시간의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그런 투병기도 아니었고 다른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첫 문장이 이야기 전체를 보여줄 때도 있지만 그 이야기도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이야기는 맥락없이 시작했다가 느닷없이 마무리괸다.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이었고 소소하고 무심했다.

때로는 나의 사소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때로는 그저 누군가에게 들었던 이야기들 이젠 기억이라고 하기엔 주관이 너무 들어가버린 희미한 그림자같은 것도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어서 후회조차 소용이 없는 이야기들도 있다.

남에게 털어놓기에는 소소하고 시시한 이야기들이지만 그래도 내겐 어느 순간 느닷없이 떠오르는 기억이고 상처일 수도 있고  변화였던 이야기들이다.

이미 시간은 흘렀고 이젠 그저 되새김질 하는 것 이외엔 어떨 도리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히지 않는 것... 무심하게 들었거나 보았지만 내게 순간 의미로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살아가다보면 대단한 사건들이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온나라가 온 세상이 들썩이는 일들은 분명 역사를 바꾸기도 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어떤 무늬를 만들어 내는 게 분명하지만 때로는 사소하고 나만 알고 넘어갈 수 밖에 없는 누구에게 말하기 쑥스럽고 애매한 것들이 삶의 각도를 바꿀 때도 있다. 아주 미세하게 누구도 타인은 알아차릴 수 없지만 그럼에도 내 삶이 바뀌어버린 그런 변화를 가진다.

단편속의 인물들은 대단한 사람은 없다.

물론 그들이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 중엔 대단하고 위대한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그 주인공들이나 대부분의 인물들은 그저 우리곁을 스치는 사람들이고 지나가다 보아도 눈에 띄지 않는 그냥 그런 희미하고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겪는 소소한 일들이 어느 순간 삶의 각도를 미묘하게 벌어놓는다.

그리고 그 이전의 나와 달라진다. 뭐가 달라졌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을 할 수는 없다.

그건 나만 느끼고 나만 알아차리는 변화이니까...

 

사실 처음 이 단편을 읽었을 때는 그냥 그랬다.

좀 소녀취향인가 싶었고 뜬금없고 느닷없다는 기분도 들었고  심하게 말해서 한편한편이 너무 널뛰는 거 아닌가 싶었다.

 

몇해를 보내고 다시 읽는 지금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런게 없는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생각도 했다.

이어 쓴게 아니라 시기를 달리해서 다른 매체에 그때 그떄 써서 기고했던 작품들이라면 저마다 다른게 당연하다.

그동안 단편집에서 찾아내던 전체를 흐르는 무언가는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평론가의  발견이거나 나 개인의 착각일것이다.

그저 내가 경험했던 무언가와 내가 기억하는 어떤 정서들과 책을 읽는 지금 내가 가진 주위 환경과 나의 마음의 상태가 더해져 그 책에서 무언가를 찾아낼 뿐이다.

바람같은 사랑이나 이미 소멸해버린 무언가를 향한 손짓같은 건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무언가 일 것이다.

내가 가진 내 기억의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그건 나의 기억이고 나의 시간이다.

내가 기억한 모든 조각과 내가 느낀 정서의 조각들을 끌어모으면 내가 될까

그렇게 완성된 나는 어떤모습일까

지금 이순간 나이 먹은 나와 같은 모양일 수도 아닐 수도.....

그냥 의미없을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 그리고 그 작은 조각조각마다 의미가 있을거라고 믿는 것 그것만 남을 뿐이다

단편을 읽는다는 건 그렇다

별 거 아니지만 별난... 그런 묘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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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썼던가?

이제 이게 한 이야기인지 안한 이야기인지, 했다면 누구에게 했는지...

행여 같은 이에게 두번 세번 반복해서 이야기하며 나만 박장대소하는건 아닌지 두려울 때가 있다.

들었다면 처음 듣는 것 처럼.... 처음이라면 다행이고....

 

지금 이 도시에 이사를 와서 처음 만든 것이 도서관 대출증이었다.

그리고 처음 사람들과의 관계속으로 들어간 것이 학교 도서관 책읽는 모임이었다.

내가 대단히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거나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아니 그때는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책읽는 것밖에 없던 거였다.

기술도 없고 경력도 없으며 사회성이 아니고 사교성마저도 떨어지는 인간이라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도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도 두려워서  그저 내 편한대로 펼치고 접어버리면 그만인 책만이 유일한 방편이었다.

낯선 도시는 정이 들지 않았고 사람들은 모두가 바쁘거나 씩씩해보였다.

좋은 일로 이사를 한것도 아니어서 굳이 정을 붙이려고 애쓰고 싶지 않았고 그냥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투명하게 존재하기를 원했다.

그래도 무언가 생활에 재미는 있어야한다는 생각과 아이들 교육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 가족을 몰아서 도서관을 갔고 어색한 표정으로 즉석사진을 찍고 대출증을 만들었다.

다행이 이 도시는 도서관이 잘 되어 있어 여기저기 걸어가거나 조금만 버스를 타면 쉽게 갈 수 있었다. 워낙에 길치라 한동안은 딱 한 도서관만 죽어라 팠지만 점차 길을 알게 되면서 다른 도서관도 기웃거리고 그러다 상호대차라는 편리한 제도가 생긴 덕이 쉽게 책을 빌릴 수 있었다.

 

그 전에 살던 곳에서도 아이학교 도서관 도우미는 내내 했었다.

가장 사교성이 없어도 할 수 있는 봉사였다. 그냥 나가서 말없는 사서 선생님의 무뚝뚝함에 감사하며 책 정리하고 서가 정리하고 떠드는 아이들에게 주의만 주면 그만이었으니까

옮겨 와서도 그 일은 계속했다. 어느 학교나 도서관 봉사는 늘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연하게 독서모임에 참가했다.

어느 정도 책읽기는 자신있었다.

읽는 근력이 제법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보아하니 그리 어려운 책을 읽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씩이라면 그냥 그냥 읽어갈만한 가벼운 독서가 될거라 짐작했다. 틀리지는 않았다.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누고 토론을 한다는 것이 조금 주저되긴 했지만 꼭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을거라고 믿었고 실제 그랬다.

열명이 넘는 회원중에는 주로 이야기를 이끄는 사람도 있고 듣기만 하는 사람도 있고 간혹 삼천포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사람도 있고 다시 돌려 놓는 사람도 있었다.

제각각 다른 배경과 다른 학년의 아이를 가진 집단이라 의외로 편했다.

그렇게 그냥 우연하게 시작된 독서모임을 4년동안 했다.

고전들을 읽고 아이들 책을 읽고 소설을 읽고 인문학을 읽었다.

독서력이 제각각이라 다양한 수준의 책을 읽었고 매년 맴버들이 드나들면서 사람들도 바뀌었고

마음 맞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금 껄끄러운 사람도 있고 한 번만에 정이 가는 사람도 있었고 매년 보지만 어색하고 힘든 사람도 있었다. 나는 상대에게 어떤 사람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냥 잊어버렸다.

오랫동안 모임을 하지만 책을 통해 성장했다는 건 없었다. 단언컨대.....

그저 한때는 겨우 이수준을.... 하는 마음에 오만해지기도 했고

제대로 읽어오지 않은 멤버들때문에 짜증이 나기도 했고

내가 내켜지지 않은 책은 은근슬쩍 핑계를 대며 빠지기도 했으며

내가 느낀 감정과 의견이 반대에 부딪치면 빈정상했고 내가 거부당한 기분이었는데

타인의 의견은 쉽게 부정하고 반박했다.

그리고 이제 누군가와 함께 정하는 목록말고 내가 읽고 싶은  책들

조금 한편에 치우치거나 편협하더라도  그렇게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책을 모두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서 모든 책을 다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마음먹었다. 세상에 책은 많고 내가 읽은 책들은 바닷가 모래알 한줌정도나 될까

 

 

 

 

 

그 해 에이바가 북클럽에 들어간 것 역시 사람들이 절실했고 친교가 절실해서였다.

갑작스럽게 알게된 남편의 외도 그리고 이혼

어릴 적 동생이 사고로 죽고 엄마마저 자동차 사고로 동생을 따라간 이후 꾹꾹 눌러놓았던 기억과 감정들을 해결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또한번 거절당하고 버려졌다.

무언가 절실할 수밖에 없다.

그녀가 참가한 북클럽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만 그래도 내가 경험한 북클럽과 다르지 않다

다만 도서관 사서인 케이트가 모든 일을 진행하고 매번 그 책에 맞게 다과를 준비하고 코스프레를 준비한다는 게 더해질 뿐이다(라고 우긴다)

간혹 다른 주제로 빠지기도 하고 활발하게 의견을 내는 사람과 조용히 듣는 사람이 뒤섞여 있다는 건 다르지 않다.

에이바가 가입한 해의 도서 주제가 < 내인생의 책>이었다.

내게 있어 내 인생의 책은 무엇일까?

그건 누군가의 말처럼 그때의 내 감정과 내 상황과 책이 함께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하나의 감동이거나 전율이다. 그때 그 느낌과 그 흥분이 다른 시간 다른 상황에서도 같게 느껴질까

다만 그때 그 책이 나의 삶의 방향을 조금 꺽어놓아서 내가 조금 다른 내가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면.... 그 달라짐을 그 순간 알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제각각 가지고 있던 내 인생의 책들이 모여서 북클럽은 진행된다.

책이 주는 감동은 찰라에 지나기도 한다.

그저 꾸역꾸역 읽어가다가

오홋 이거 흥미로운걸 하며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다가

조금씩 야금야금  남아있는 페이지를 세어가며 아쉬운 마음에 아껴가며 읽어가다가

어느 순간 그 책이 내 삶에 훅 들어올 때가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휘리릭 사라지기도 한다.

누구나 좋은 책이라고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추천하던 책이 그저 읽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다가

우연히 다시 읽는 순간 다른 모습으로 들어올 때도 있다

그럼에도 책일뿐이다.

책은 책일뿐이고 읽는다는 것이 사람을 드라마틱하게 바꾸진 않는다.

사람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니까....

에이바도 읽지 않고 읽은 척하다가 망신도 당하고  읽지 않고 얌전히 있거나 겨우겨우 읽는 과정을 거쳐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되고 어리고 힘들었던 시간을 견디게 한 <클레어에서 여기까지>를 기억한다. 내 인생의 책이라는 걸 알지만 그 책을 다시 읽는다는 걸 주저하기도 했다.

한때 책읽기를 좋아하던 에이바 그러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 즐거움을 잃어버렸고 잃었다는 걸 깨닫지도 못했다. 그리고 찾아온 고통앞에 다시 친교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책을 찾는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모두 책에서 길을 찾지는 않는다.

절실한 사람에게만 길이 보인다.

질실한 사람은 자기를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고 책을 통해 나를 만나고 나를 이해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저 많이 읽는다는 것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해 읽는것이다.

그걸 에이바는 해냈다. (소설이니까 흥흥흥)

 

 

4년간 독서모임을 하고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 역시 드라마틱하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4년전보다 조금 더 많이 읽은 인간이 되었고 조금 더 읽고 싶은 책이 늘어났을 뿐이고

조금은 책 욕심에서 놓여나기도 했고 관심분야가 일단은 넓어지기도 했다.

그림책이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걸 알게 된것도 독서모임덕분이었고

작가별로 책을 읽어보는 경험도 모임을 통해서였고

내가 제법 말을 잘 하고 진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것도 모임덕분이다.

그렇다면 나는 조금 더 괜찮은 인간이 되었을까?

여전히 싫은 사람은 너무너무 싫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고 싶고 거부당하면 화가 나고 쪼잔하게 복수하고 싶다.

다만 ... 도무지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예전보다 조금은 더 많이 한다.

당연히 .... 해야한다. 되어야 한다. 하는 것들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어짜피 너의 삶은 너의 것이고 나의 삶은 내것이라는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내가 생각보다는 괜찮은 구석이 좀 있다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여전히 실수하고 후회하고  아쉽다.

 

책은 책이고 삶은 삶이고 나는 나이다.

그래봐야 책이지만 그럼에도 책이다. 그게 내가 알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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