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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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먹고 나면 모든 것이 스톱된 상황처럼 느껴진다.

더 이상 발전할 수도 없고 성장할 수도 없는 완전체로서 인간 발달과정의 마지막 목적지에 다다른 기분이다

나는 아직도 한참 멀었는데 이미 나이를 먹었고 누구나 나에게 어른이라고 말하고 인지하고 있고 나도 더 이상 어디로 도망치거나 모른 척 하거나 실수하고 미숙해서는 안된다는 강박이 빠진다

내가 생각했던 어른들

커보였고 완벽해 보였고 꽤 근사했던 어른은 어디에도 없고

극악스럽고 한심하고 아직도 많이 미숙하면서도 본인은 전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데다가 교활하기까지한 어른들만 보이고 나도 그 속에서 티나지 않게 묻혀서 그렇게 살고 있었다.

어른이라는 건 완성형일까

나는 아직도 많이 모자라고 이뤄야 할 과정들이 있는 것 같은데 이제 다 마쳤으니 졸업하라고 이제 세상에서 어른으로 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 않으면 중간이라도 간다고

모르면서 아는 척 알지만 아닌 척 그런 척 그렇지 않은 척

어른이란 그렇게 나를 꾸미고 아닌척 그런척 하는 잔꾀를 가진 존재구나 라고 배우고 있는 중이다.

 

윤성희의 이번 소설집에는 각각의 어른들이 나온다,

어른이란 세상의 지혜로운 어른의 의미가 아니라 나이먹은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제 중년이라고 하기에도 멋쩍지만 초로라고 하기에는 아직은 아니라고 감정을 넣어 손사래치고 싶은 그 나이 그 순간의 어른들이 등장한다.

대단한 사람들도 아니다.

결혼하지도 못하고 혼자 살면서 이제 예전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갖고 싶은 어른

살면서 6번의 깁스를 해야했던 조금은 조심성이 없다고 해야할까 운이 없다고 해야할까 그런 인물이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버린 친구를 기억하기도 하고

나이들어 암이 전이되었고 살아온 날을 돌아보니 회한 뿐이라 마지막으로 남편의 내연녀와 남편에게 사기친 남자가 함께하는 국수집에 가서 욕을 해주겠다는 결심을 하고 실행하거나

버스정류장에 있다가 사고로 돌진하는 승합차에 치이거나

첫사랑이기를 바라는 여자와 떡볶이를 먹다가 부모몰래 차를 몰고 나온 중학생이 돌진하는 바람에 사고가 나기도 하고

놀이터에 덩그러니 놓인 킥보드를 타고 동네를 돌다가 넘어져 꼼짝할 수 없는 어른도 있다.

이제 나만큼 늙어서 흰머릭 가득한 여동생과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으며 이상한 주문을 외우기도 한다.

담 넘어온 감나무의 감을 밟아 넘어진 이웃 할아버지에게 보상해주고 천불이 나서 감나무를 베어버리려다가 담장이 무너지는 사고로 다친 어른이 있고 그 뒤치다꺼리를 하다가 다시 요양원에 들어간 배우자와 그 자녀들도 있다

나이든 삼촌을 면회갔다가 내리는 눈에 막걸리를 마시고 무단횡단을 하다가 자기차 앞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어른도 있고

그 모든 일이 다 거짓말이야 하며 깔깔대는 조금은 슬프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한 가족도 있다.

이렇게 한줄로 요약하면 도데체 이 사람들은 철이 콧구멍으로 들었나 싶게 한심하고 어이없다

그러나 윤성희는 그런 작가가 아니다.

그 한명 한명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그럴 수 밖에 없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어쩌면 내가 지금 어정쩡한 어른이 아니라 좀 더 팔팔하고 예민하고 선이 분명한 젊은 나이였다면 몇장 읽지 않고 책을 던져버렸을 수도 있다.

나이가 들면 좋은 점은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여전히 심술나고 마음에 들지 않은 것들 투성이지만

그래도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마음이 늦게라도 들게 된다.

이야기는 그냥 수다처럼 이어진다.

물감이 잔뜩 묻은 붓을 물어 넣어보면 슬슬 풀려나오는 색감처럼

처음엔 진하게 나오다가 점점 옅어지지만 그 꼬리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것

이야기는 그렇다. 첨엔 자기이야기를 하나보다 하고 듣다보면 어머니 이야기로 넘어가고 어느 순간 삼촌으로 이어지는가 하면 또 다른 이웃으로 넘어간다 맥락이 없다.

도데체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다.

우리가 늘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듯이 주장과 예시를 들지 않는다

기승전결에 맞게 이야기를 엮어내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이끌어 내지 않는다.

나만 그럴지 모르겠지만 막 이야기를 하다보면 지금, 내가 무엇을,누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몹시 헷갈리기 시작하고 부끄러워지고 입을 다물고 싶다는 욕구가 마구 들지만 그와 똑같은 무게로 어쨌든 이 이야기를 계속 하고 싶다는 욕구가 함께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

그래서 맥락없는 이야기를 계속하게 되고 듣는 사람의 따분한 얼굴 도데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하는 표정을 본다

이야기를 한다는 건 그렇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마구 토해내고 꺼집어 내야 내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 그것이 우선이다.

무엇이든 상관없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처음엔 여기였는데 나중에 저기로 혼자 튀거나 뛰거나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건 우리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삶이라는 것이 늘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느닷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마구 긴장하게 되는 일들이 맥락없는 결말로 치달아가 가기도 한다.

내 삶을 이야기로 풀어보면 대단한 무엇도 없고 주제도 없지만 그렇다고 내 삶이 시시하다고 말할 수 없다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들을 진지하고 의미있게 만들고 싶지만 대부분의 삶들은 그냥 그렇다 시시하기도 하고 별일 아니기도 하지만 그런 일들이 모이고 차곡차곡 쌓여서 누군가의 삶을 이루는 순간 그 삶은 그대로 대단하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삶

모든 삶은 숙연하고 가치있으며 무시할 수 없다

윤성희는 그런 삶들의 맥락없는 과정을 따라가지만 꼬이고 엉뚱한 골목으로 꺽어지는 그 이야기들을 다 듣고 나면 그냥 막연히 숙연해진다.

뭐라고 말하기 어렵고 더구나 판단하거나 가치를 매길 수 없다.

그냥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의 역사가 그대로 얼마나 가치있는가 얼마나 존중받아 마땅한가를 보여준다.

아침에 일어나 뻐근한 허리를 몇 번 돌렸고 그래도 아침을 해야 가족들이 먹을 테니 부엌으로 향한다.

어제 먹고 남은 국에 다시 두부를 썰어 넣고 대파를 다져서 함께 끓여낸다

그리고 씻어둔 쌀을 안치고 밥을 하고 이제 제법 익은 파김치와 깻잎김치를 꺼내놓고 계란을 말아낸다.

밥상에 앉은 딸이 묻는다

어제 먹던 연어 남은 거 없어? 나 그거 먹고 싶은데

기왕 국에도 고기가 있고 계란도 있는데 다시 연어라니...

귀찮기도 하고 그걸 내놓으면 이미 차려놓은 반찬은 또 남아버릴텐데 싶은 마음에 뭐라고 하고 싶지만 그냥 알았어 한다.

고삼이니까 심기를 건드리지 않은게 낫다.

그리고 연어를 내놓는다.

가끔 힐끔거린다. 다른 반찬은 손도 안대면 어쩌나 다시 넣어야 하나 버려야 하나

다시 넣자니 꾸덕꾸덕 한 날씨가 걸리고 그냥 버리자니 저것들이 너무 아까운데

다행히 딸은 다른 반찬도 잘 먹었다.

딸이 밥을 다 먹을 무렵 찌개 건더기만 건져서 옆에 앉아 함께 먹는다.

입맛은 없지만 뭐라도 먹어야지 낼모래 백신을 맞아야 하면 뭐라고 먹어서 기력이 떨어지면 안되지

건더기 위주로 딸이 먹고 남긴 파김치를 얹어 먹는다.

나이를 먹어서일까 고기가 영 역하게 느껴진다.

이 나이에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단백질을 섭취하라고 하는데 콩으로는 부족하려나??

아이는 어제와 달리 재잘재잘 말이 많다.

어제밤에 학원을 다녀와서 공부하는게 힘들다 수시로 논술을 쓰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울었다

사실 논술학원은 생각하지 않았다. 지 언니와 달리 논솔이 맞지 않을 거 같아서 그냥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해서 일점이라도 올리는게 나을 거 같은데 뭐라고 하고 싶다는데 반대할 수는 없었다. 지 언니가 논술로 대학을 가고 보니 자기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 같은데

버리는 셈 치고 돈을 썼지만 사실 아까웠다,

지금이라도 그마두겠다고 하면?? 이렇게 울면서 힘들다고 할거면 낮에 다시 재등록하기전에 말이라도 하지.. 아이는 울고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미 지불한 학원비를 계산했다.

사실 그 돈이면...

100일이 채 남지 않은 시점에 마음이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오르지 않은 성적 가고 싶은 대학과 갈 수 있는 곳의 거리감 그 깊고 넓은 간극앞에서 본인이 먼저 주저앉고 싶을 텐데

그 마음은 다 알지만 내가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조금 더 기운을 내고 한문제라도 더 풀자

어디를 가든 엄마는 괜찮다.

남들과 비교하지 마라 남들의 의견이나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

그런 말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나마나한 본인이 가장 잘 아는 이야기들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했고 딸은 화를 냈다. 그냥 들어줘 판단하고 충고하지 말고

부모는 충고하는 사람이다. 뭐라도 잔소리해야하고 걱정해야 하고 그러면서 외롭고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지만 사실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해야하는 입장

그렇게 나에게 고민만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던 딸이 지금은 헤실헤실 기분이 괜찮다.

다 먹고 설거지를 한다.

오늘이 광복절이라 티비를 돌리다가 광복절 기면식을 본다.

 

 

 

 

 

 

필사하고 싶은 문장은 없다, 그냥 밋밋하고 일상적인 문장이 이어질 뿐이다

그러나 그런 개성없는 밋밋한 문장이 모여서 이야기를 이루는데 그 이야기가 특출하지도 않다

갖고 싶은 문장도 아니고 기묘하거나 매력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하지만 전체를 다 읽고 난 후 마음은 먹먹하다.

이렇게 살아낼 수도 있는 것인데

내 삶도 그렇게 무료하고 무가치한 건 아니라는 위안

작가는 위로라는 말이 너무 싫다고 하지만

위로는 주기위해 만들지 않아도 받아 들일 수 있다.

그냥 무심하고 아무런 의미없는 한마디지만 그것이 와서 박힐때가 있다.

 

한두페이지를 휘리릭 넘겨 눈이 닿는곳을 읽고 넘기는 책이 아니고

자리 잡고 앉아서 한 이야기를 한 숨에 읽어내리면 나도 괜찮은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윤성희 글의 매력이다.

 

아마 일상을 살면서 참 오래 고민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닐가

하나의 떠오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그 모든 생각을 기록하는 사람

가끔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이 근사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지금 이런 생각을 한거야

이렇게 이어가면 어떨까 꽤 멋진걸

이걸 정리해봐야겠어

하지만 빈 종이에 펜을 들고 혹은 빈화면에 커서가 반짝이는 순간 머릿속은 하애진다.

지금까지 내가 한 생각이 어디로 간거지?

작가는 부지런하게 생각과 동시에 기록한다. 그런 생각들

누구나 했던 것들

내용이 비슷하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하나의 사물에 꽂혀서 어떤 기억에 꽂혀서 마구마구 끝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을 기록하는 것

그 기록들이 이어지고 연결되면서 나도 모르게 어떤 감각을 건드리게 되는 것

윤성희의 소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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