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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 톨스토이와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인생
석영중 지음 / 예담 / 2009년 10월
평점 :
“톨스토이는 실로 매혹적인 작가다. 톨스토이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 광대무변한 성격의 스펙트럼에 놀라게 된다.” 이책의 결론의 첫머리이다. 그러나 언뜻 보면 그렇고 그런 주례사식 마무리로 보인다. 톨스토이. 읽지는 않았더라도 누구나 이름은 들어봤고 그가 대문호라는 것은 다 아는 것이니까. 그러나 저자는 뻔한 마무리를 하고 있지 않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글을 보자.
“한 인간 안에 그토록 섬세한 예술과 그토록 지겨운 설교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인류 보편에 대한 그토록 거룩한 사랑과 특정 대상에 대한 그토록 매서운 독설이 공존한다는 것이 놀랍고, 그토록 거대한 지성과 그토록 불가사의한 미련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그토록 실용적인 사람이 그토록 실천 불가능한 것들에 관해 그토록 끈질기게 설교를 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왜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는가? 저자는 톨스톨이가 황당한 인물이 된 것은 메멘토 모리,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 말한다.
“톨스토이는 평생을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보냈다. 아니 공포라는 표현은 조금 부족하다. 그는 죽음을 싫어했고 혐오했다. 죽음은 이 현실적인 청년을 철학적으로 만들어주었다. 그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는다는 것 자체가 아니다. 봐 두렵고 이상한 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것, 더불어 삶이라는 것 역시 알 수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리나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랄 수 있는 레빈이 이렇게 말하게 한다. “오늘내일 사이에 죽으면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결국 사람이란 오직 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사냥이나 노동으로 마음을 달래면서 일생을 보내는 거야.”
실존주의식으로 말하자면 톨스토이는 삶의 부조리함을 깨달은 것이다. 사르트르는 ‘의미없는 세상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인간뿐이다.”라고 말햇다. 세상이란, 삶이란 원래 설명되는 어떤 의미, 즉 조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그 의미없는 것, 설명되지 않는 것을 설명해내고 의미를 부여해야 직성이 풀리고 살아갈 힘이 나는 존재라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깨달은 것은 삶의 부조리성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는 게 의미가 없으니 죽자! “실제로 톨스토이는 여러 차례 자살을 생각했다. 전형적인 우울증 증세다. 아니면 복에 겨운 투정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그 후 약 삼십년간 그를 ‘인류의 스승’이라는 어려운 자리에 올려놓은 가장 직접적인 동인이었다. 죽음 앞에서의 허무, 바로 이것이야말로 톨스토이가 거대하면서도 기괴한 도덕가로 거듭나게 한 것이었다.”
이때부터의 톨스토이를 스테판 츠바이크는 ‘지성의 자살’이라 평하고 저자는 사이비 교주 같다고 말한다. 이때부터의 톨스토이는 ‘톨스토이교’의 교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톨스토이교의 교리는 무엇인가?
삶의 의미를 찾는 전통적인 수단은 종교이다. 그러나 너무나 똑똑한 “톨스토이는 이 세상 모든 것에서 거짓과 위선을 발견하는데 남다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다. 위선 탐지라는 영역에서 입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다. 그러니 그가 기존 종교에서 위선과 거짓을 찾아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그리스고교와 교회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그러나 올바르고 참되게 살기 위해 진지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다 결국 자신만의 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신의 이름은 ‘도덕’이었다.
안나 카레리나’에서 레빈은 우연히 어떤 농부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신’을 찾아낸다.
“그야 사람들 중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지요. 자기 이익만 차리고 살면서 자기 뱃속을 살찌게 하는 것만 생각하는 놈도 있고, 정직한 아저씨도 있지요. 아저씨는 영혼을 위해 살아서 하느님에 대해 알고 있거든요.”
“어떻게 하면 영혼을 위해 사는 거지?” 레빈은 거의 외치다시피 말했다.
“어떻게라니요? 뻔한 일 아닙니까? 정직하게 하느님의 율법대로 살아가는 겁니다요.”
저자는 이것이 레빈의 깨달음의 순간이라 말한다. “왜 사느냐 어떻게 사느냐 하는 의문은 어떤 사변적인 철학이나 교리로 설명될 수 없다. 생활 자체만이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 하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계시다.”
레빈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존재에 관한 명백하고 의심할 여지없이 유일한 표시는 전 세계에 계시되어 있는 선의 율법이다. 나는 그것을 내 마음속에서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톨스토이의 신은 ‘선’ 즉 도덕이 되었다. 도덕이 인생의 답인 것이다.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 즉 채식, 시골살이, 즉각적이고도 전면적인 성생활의 중단, 예술의 박멸 등은” 톨스토이교의 율법이 된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설교자가 된 톨스토이가 말하려는 메시지는 ‘잘 살자’였다. 그의 지루하고 고루한 그의 설교를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일단 환락의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야 한다.
자신이 먹을 것은 자기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 즉 육체노동을 해야 한다.
결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벌서 결혼했다면 부부 생활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형제처럼 사랑해야 한다
착하게 살고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
거짓말하지 말아야 한다
곡물과 채소만 먹어야 한다.
술과 담배는 끊어야 한다
어렵고 복잡한 예술은 다 버려야 한다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겸허하게 살아야 한다
“대충 다 옳은 말이고 다 좋은 생각이지만 아예 세상을 등지기로 작정하지 않은 이상 지킬 수가 없다. 그토록 똑똑한 사람이, 그토록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사람이 왜 이런 꿈 같은 이야기를 했을까?
확실히 톨스토이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일리가 있다는 것이 진리는 아니다. 톨스토이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그는 일리 있는 것을 진리라 믿고 싶어 했다. 부분적인 진실을 진리 그 자체라고 단정했다.
진리. 어딘지 먼 나라 이야기 같다. 요즘 세상에 진리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일종의 수사처럼 쓰일 따름이다. 그러나 톨스토일츨 읽고 나면 진리에 관해 생각하고 싶어진다. 그것이 스쳐 지나가는 한순간일망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