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달걀 4 - 완결
마키무라 사토루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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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만화의 처음에 나오는 서양 속담이다. 주인공이 TV를 보며 요리를 할 때  나오는 말이다. 그 뒤에는 이런 말이 이어진다. "당연한 말이지만 깨뜨리지 않으면 썩을 뿐이죠. 인생에서 벽에 부딪혔다면  껍질을 한번 벗어보세요." 이 만화는 주인공의 껍질이 강제로 깨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회사에 출근했을 때 로커의 대화는 구조조정이 주제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주인공의 이야기가 된다. 지방으로 가라는 말을 듣는다. 자신의 껍질이 부서지는 이야기이다.

'지방에선 못 살아. 어떻게 하지 지금 일이 없어지면. 이런 시기에 다음 직장은 구할 수 없어!'
'벌서 모두 알고 잇구나 내가 짤렸다는 걸. 그렇다면 말이라도 걸어줘. 위로라도 좀 해줘. 너희들이 적당히 해온 일을 내가 다 처이해왔잖아. 친구잖아. 친구? 착각이었나. 시간 때우기 위한 사이였구나. 크게 믿지는 않았어... 만약의 경우에 전화할만한 사이도 아니고 의지하고 싶지도 않아. 누구에게도? 결혼...해 버릴까"

그러나 그녀의 껍질은 한번 더 부서진다. "회사 남자를 다 건드렸다는 타치바나 유가! 양디라 걸쳤었어? 나... 난 애인이 아니었어."

껍질이 부서지면서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시골의 명문 여고를 나와 도쿄의 명문여대를 다니고 일류기업의 사무직원으로 남들이 가는 레일을 따라 별 생각없이 적당히 적당히 남이 하는대로 해왔을 뿐

"좀 기다려 줘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아무 일도 안 했기 때문에 이런 꼴을 당하는 거야. 호황기에 입사해서 쉽게 쉽게 회사생활하고 세상을 안이하게 봤지.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잇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도 생각해보지 않고."
"생각해볼게요. 지금 당장! 당장 쓸모있는 인간이 되겠어요!"
"8년씩이나 엄청히 있다가 이미 늦었어!"
꿈이다.

양다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그리 마음이 아프지 않다. "이런 사람 좋아하지도 아무 것도 아니야." 연애도 진지하게 이 남자야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혼자 살 생각이었던 것도 아닌...

"대학 4년 회사원 8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따뜻해지지 않아. 가슴이 따뜻해지지 않아. 대단한 게 아냐. 인생을 정하는데 고집 외에 아무것도 없다니 뭘 하고 싶은지 자기 자신이 모르다니. 이대로 흘러가 버리면 또 똑같아."

그녀는 지사 발령 환송회 자리에서 퇴사를 결심한다. 이 만화는 그녀가 껍질을 깨고 나와 자신이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막상 울분을 참지 못해 뛰쳐나왔지만 마땅히 할 것이 없다. 그러다 얼떨결에 점심을 먹던 카페에 점원으로 취직한다. 일단 급하게 땜방일 뿐이라 생각하고 구한 자리이다. 그러나 "내 적성에 맞고 돈도 되는 자격이 도대체 뭐야?" 어중간한 8년 경력의 사무경험 밖에 없는 30살의 그녀에게 다니던 직장같은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다 그녀는 임시라고 생각했던 카페에 계속 다니게 되고 건축일을 하면서 학비를 벌어 학교를 다니는 연하의 건축학과 학생(27살)과 사귀게 된다.

애인의 친구들은 예술계통의 사람들이다. 조각, 그림, 사진 그들의 세계는 이렇게 표현된다. "좋아하는 걸 한다는 건 어설프게 해서는 안돼 정말 극소수의 사람밖에는 성공 못 해 대부분은 백수인 상태로 언젠가는 꿈을 접고 말아요. 자기를 잘 모르고 이루지 못할 꿈을 쫓아 주변사람을 슬프게 하는 일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다"

'난 아트는 잘 모르겠어. 강한. 강한. 강한 주장.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느낌. 아티스트들은 잘 이해가 안돼. 자기 중심적인 데다 제멋대로여서 어려워.' 그러나 '재능, 눈부심.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질투 때문에 괴로워...'

이 길지 않은 만화의 대부분은 연애 이야기이다. 그러나 주인공을 연애를 통해 자신은 누구인가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던 껍질이 사라진 후 "불안 속에서 자기가 사라져버리는 듯한 느낌" 그 느낌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뭘 해야 좋을지 모른 채 멍하니 지내다 회사에 들어가 마음놓고 있다가 너무 마음을 놓은 나머지 무엇을 잊어버렸는지조차 깨닫지 못하다... 레일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결혼도 하게 되고 얌전하고 성실하고 착한 남자랑 결혼해서 세상으로부터 보호받고 아이 낳고... 하지만 난 하고 싶었던게 있어.' 꿈이다. 깨었을 때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이 만화는 그 하고 싶었던 것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이다.

껍질이 깨진 주인공의 오믈렛이 만들어지는 것은 카페 주인이 입원하면서 2달동안 가게를 책임지면서이다. 도쿄 요지의 집세를 낼만한 매상을 올리게 위해 악전고투를 하고 난후 "이런 것 회사다닐 때는 느끼지 못햇었어. 회사란게... 보람을 갖고 노력해보지만 남의 일이라는 느낌뿐이야. 자기 일이라고 느끼면서 일했던 적 없었어. 이런 느낌이구나." 카페 주인은 퇴원하고 나서도 그녀에게 가게를 떠안긴다.

'점장을 맡고 나서는 시간이 아무리 있어도 부족하다. 그건 회사다닐 때도 마찬가지엿나? 예전에는 일에 쫓겨서 쉴 시간도 없이 일을 해도... 이렇다 할 강한 희망도 불만도 없는데도 항상 피곤했어. 어딘지 모르게 자신을 포기했었어.' 그러나 지금은 "내 자신이 가장 놀랐어. 이렇게 이 가게를 소중히 여기다니.'

주인공의 애인이 콘테스트에 대상을 받는다. "같이 갈래? 이탈리아..." 주인공은 자신에게 묻는다. "예쁜 옷에 맛잇는 음식... 남자의 사랑받으면서 뭐 하나 불편한 것 없이 걱정없이 살고 싶어... 그게 아냐!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건.... 뭐지?"

"레일만 따라가면 어딘가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레일에서는 언제든지 떨어질 수 있고 자기 발로 걷지 않으면 이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됐어. 무엇보다 어디로 갈 건지를 스스로 결정해야만 했어."

'엄마 머리 속에는 스스로 행복해진다는 생각은 없어. 집의 크기, 점포 규모, 돈이랑 그 누군가. 그 무엇인가에 기대면서 사는 것이 이미 기본이야. 기댈 수만 있으면 자기자신의 의견이나 감각은 안종에도 없어. 그래서 불안해서 불평불만만...' 고향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강제로 선을 보게 했을 때 주인공의 생각이다. 그러나 자신과 엄마가 같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우린 쌍둥이 같아...' 자신도 애인에게 기대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정한다. 자신의 카페를 갖겠다고 '정말로 뭔가가 시작되는 거야. 나 스스로. 마츠는 이탈리아에 유학가고 나는 도쿄에 남는다. 저금을 깨서 내 가게를 여는 거야. 처음으로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뭔가를 시작한다는 건 두근두근 굉장히 무서워. 하지만 아무것도 못했던 OL 시절의 불안감과는 달라. 혼자야. 이제 혼자 가는거야.'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마츠 사실은 계속 쭉 마츠 곁에 있고 싶어 감기걸려도 금방 알 수 있는 곳에 하지만 그러면 나 게을러서 홀로서기할 수 잇는 실력이 안 생길거야. 금방 다른 사람에게 기대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게 될거야. 그래서 이탈리아에는 안가. 나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느 사람이 되고 싶어 불안해도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해나갈 수 잇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런 능력 있는 사람이 돼서 마츠와 가족이 되고 싶어. 마츠와 가족이 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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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쿠바 - 시네아스트 송일곤의 감성 스토리
송일곤 글.사진 / 살림Life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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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쿠바란 단어에서 떠올리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이책의 제목처럼 ‘낭만’일 것이다. 최고의 시거라는 궐련의 향기처럼, 아바네라, 맘보, 살사, 손, 룸바, 구아히라, 구아라자, 파창가, 등등 쿠바에서 만들어진 리듬들 처럼 아니면, 체 게바라의 빛 바랜 사진처럼 무언가 일상의 것이 아닌 이미지.

그런 이미지가 실제의 쿠바와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낭만의 이미지는 쿠바라는 동전의 한면일 뿐이다.

“한 때 쿠바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부자였다.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건물이 올드 아바나에 가득하다.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 화려한 조각들로 수을 놓은 문양들이 과거의 영화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창을 보라. 유리를 끼울 돈이 없어 낡은 합판으로 덧대어 햇빛을 막고 비가 새는 것을 막기 위해 슬레이트판을 얼기설기 얹어 놓았다. 회벽의 페인트는 벗겨지고 부식되어 폐허 직전의 색을 드러내고 잇다. 그러나 여전히 쿠바의 슬픈 건축은 쿠바다. 아무리 가난해도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다. 건물들은 기묘하게 어울리고 칠이 벗겨지고 나무로 덧댄 창들 또한 하나의 질서처럼 정연하다. 그래서 올드 아바나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으리라. 과거의 영화를 고스란히 견뎌낸 이 공간.”

이 책은 쿠바에 대한 안내서가 아니다. 이책은 저자가 영화를 찍기 위해 쿠바를 찾았을 때 찍은 사진들을 모은 사진집이다.

저자가 보여주는 사진을 보다보면 세피아 톤이란 말이 떠오른다. 흑백의 투톤을 갈색톤으로 처리하는 기법 말이다. 저자가 본 올드 아바나처럼 쿠바는 열대의 섬답게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는, 우리가 쿠바란 말에 떠올리는 ‘낭만’이란 말에 어울리는 땅이엇다.

그러나 가난에 허덕이는 오늘의 쿠바는 예전의 색채를 잃어버렸고 과거의 영광은 흔적만이 남았다. 그러나 그 흔적은 묘하게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게 한다. 시간이 박제된 오래된 사진처럼 시간의 벽을 넘어 과거를 엿보는 느낌이다.

“이 나라의 경제는 최악이기 때문에 이 아름다운 건축물들으ㅢ 색칠과 보수를 하지 못하고잇지만 20세기 초반에는 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잘 사는 나라였다는 것을 믿게 만든다.”

그 모순의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의 쿠바 자체가 모순이긴 하다. “ 쿠바 수입의 절반이 관광산업이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혁명 성공 후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하며 자봊주의 탐욕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러나 쿠바는 점점 가난해졌고 외국의 자본이 없으면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햇다. 자본과의 타협만이 생존이라는 답을 내렸다. 쿠바인 모두의 것인 바라데로 해안 중 가장 아름다운 곳에 유럽인의 돈으로 만들어진 리조트와 호텔이 들어섰고 그곳에서 쿠바인들이 유럽인과 캐나다인을 위해 침대의 시트를 갈고 청소를 하고 경비를 허며 노래를 불러주고 춤을 춘다. 기막힌 아이러니가 천국과 닮은 해안에서 차차차처럼 벌어지고 잇다.”

그러면 그 리조트와 호텔을 찾는 사람이 찾는 낭만의 이유는 무엇인가? 이책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세피아 톤의 쿠바에서 무엇을 느끼는 것일까? 그것은 시에스타의 거리가 아닐까? 모두가 쉬어야 하는 시에스타의 시간, 태양을 견지지 못해 모든 것이 비어버린 거리의 풍경에서, 그늘 밖의 뜨거움을 피해 즐기는 죽음처럼 달콤한 낮잠의 시간 같은 나른함. 포기의 나른함. 이책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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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껫 100배 즐기기 - 2011~2012년 최신판 100배 즐기기
한혜원.성희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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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을 보면서 떠오른 말이다. 전에 리뷰한 이 시리즈의 발리편과 푸껫을 소개하는 이책을 비교하면 비슷한 점도 많고 다른 점도 많다.

이 시리즈가 다 그렇듯이 이책의 구성은 인천공항에서의 출국부터 현지 공항에서의 출국, 목적지까지의 교통편의 종류와 비용, 그리고 목적지의 특징, 일정을 어떻게 짤 것인가, 그리고 그곳에서 묶을 숙소와 즐길 레스토랑, 스파, 쇼핑, 나이트 클럽 등이 사진과 함께 업소의 특징을 요점만 골라 낸 간략한 설명 등으로 되어 잇다.

책의 구성이 현지에서 겪게 될 여정을 따라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시리즈에 대한 다른 리뷰에서 말했듯이 현지에 가지 않더라도 그 공간의 느낌이 어떨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책을 쭉 훑어보면서 떠 오른 말은 ‘방콕 간다’는 말이다. 방콕하면 떠오르는 느낌은 향락가라는 것이다. 에이즈 문제가 심각하다는 보도가 예전에 있었는데 그 원인이 향락가를 드나드는 외국인 때문이었다. 매춘에다 게이들, 여장남자와 같은 태국만의 특징 아닌 특징은 푸껫을 소개한 이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책에 소개된 다른 곳은 그렇지 않지만 나이트 클럽이 밀집된 빠똥 지역은 방콕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물론 넓은 푸껫 섬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업체들이 밀집된 빠똥만 그런 것이다. 그러나 조용하고 한산한 편인 다른 지역들도 발리와 비교하면 향락이란 말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발리도 그렇지만 푸껫이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것은 해변 때문이다. 거친 남성적인 바다의 발리와 달리 열대의 바다하면 떠오르는 바닥이 비치는 것 같은 투명한 파란 바다, 그리고 말로만 듣던 에머랄드빛 물색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바다. 이런 바다 덕분에 푸껫이 유명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는 세계적 관광지가 될 수가 없다.

그런 자원만으로는 매니아 사이에만 떠도는 신비의 장소에 그칠 뿐이다. 이책의 대부분 지면을 차지하는 호텔, 레스토랑, 스파, 쇼핑시설 같은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으면 대중적인 명소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발리 역시 이책이 보여주는 푸껫만큼 그런 시설이 잘되어 있고 그런 업소들의 사진만 봐서는 발리인지 푸껫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외국인을 위한 시설이니 그들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라 어쩔 수 없다.

물론 인프라만 갖춰진다고 다가 아니다. 그 나라만의 특색있는 문화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푸껫도 그런 문화를 느낄 수 잇다. 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음식과 풍경, 공연은 이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짐작이 간다.

그러나 전체적인 느낌은 발리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발리와 비교하면 뚜렷한 나름의 컬러가 상당히 부족하다는 것을 이책을 보면서 느꼈다. 전체적인 느낌은 바다에서 해수욕하고 쇼핑하고 나이트클럽에서 즐긴다는 것이 다란 느낌이다.

물론 푸껫에 대해 들어본 것이 거의 없고 이책만으로 확인한 것이니 맞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시리즈를 여러권 보아온 경험으로 보면 아마 실제 푸껫의 사정이 그렇기 때문이고 그런 사정이 책에도 그대로 반영이 된 것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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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밤 세계문학의 숲 4
바진 지음, 김하림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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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重慶森林)’, 이책을 보면서 떠오른 이름이다. 왕가위 감독의 초기작인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왜 제목이 중경삼림이라 붙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소설을 보면서 왜 그런 제목이 붙었는지 알게 되었다.

충칭(重慶)은 안개로 유명한 도시이다. 안개. 새벽의 숲을 거닐거나 강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산뜻하면서 편안한 느낌이다. 그러나 도시의 안개는 어떨까? 원시림 한가운데 길을 잃고 헤맬 때의 기분이 아닐까? 오리무중(五里霧中), 오리에 뻗은 안개 가운데 있다는 말과 같은 느낌일 것이다.

중국인은 개인주의가 강한 민족이다. 그들의 개인주의가 화려하게(?) 만개한 홍콩. 왕가위 영화는 도시라는 바다에 갇혀 갈 곳 없이 ‘섬’처럼 고립된 개인들을 그린다. 그의 영화 역시 사랑 타령이지만 그들의 사랑은 어딘가 어긋나 있고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다. 섬끼리는 바라만 볼 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바라보는 것 조차도 안개에 가려 윤곽만 보일 뿐이다.

중경삼림의 여주인공 페이(왕비)는 주인공 633(양조위)과 사랑을 꿈꾸며 그의 집에 몰래 들어가 청소를 하고 인테리어를 바꾼다. 우렁각시와 같은 페이의 행동은 ‘타락천사’의 이가흔에게 복제되는데 이는 어쩌면 모든 남자들이 꿈꾸는 판타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슬픈 사랑이며 판타지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홍콩이란 거대도시의 사랑을 말하는 왕가위의 영화는 ‘영웅본색’과 같은 홍콩느와르만큼이나 암울하다.

이 소설 역시 암울하다. 이 소설의 무대는 중일전쟁이 막바지에 달한 1944년에서 45년 일본이 패전하기 충칭이다.

이 소설은 전쟁을 피해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쫓겨온 한 가족이 전쟁의 무게에 눌려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그린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전쟁소설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전쟁은 무대배경 이상이 아니다. 일본군과 중국군의 전투는 도시 멀리서 일어나고 가끔 일본군의 폭격을 조심하라는 사이렌이 울릴 뿐이다.

이 소설에서 전쟁은 지평선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그 전쟁은 때때로 일본군이 이웃도시를 점령했다, 충칭으로 진격하고 있다, 피난을 가야할지도 모른다는 루머로만 떠돈다.

그러나 전쟁은 주인공의 가족을 짓누르는 실체이다. 충칭의 안개처럼 그들의 숨을 조이는 조건이다.

대학을 나와 교육자로 일하던 주인공 부부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당시 일제시대 조선에서도 그랬지만 대학을 나올 정도면 상당한 집안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집안일은 모두 하인이 알아서 하는 것이었고 손에 물 한방울 묻혀본 일 없던 집안이엇다. 그러나 피난을 다니면서 돈도 떨어지고 아는 인맥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 떨어진 가족.

대학시절, 교사 시절의 꿈은 피난생활의 고달픔에 온데간데 없고 가진 것도 없이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쓸데 없는 지식뿐. 충칭에 와 얻은 것이라고는 야워어 허약해가는 몸뚱아리 뿐이고 생활고와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그의 어깨에 가족의 불화까지 더해진다.

어려울 때 의지할 곳은 가족뿐인데도 주인공의 가족은 싸움으로 지세운다. 이기적이고 보수적인 시어머니는 대학을 나온 신여성인 며느리를 이해할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다.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며느리에게 아들을 뺐기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 더군다나 무능한 아들은 하고싶지도 않은 교정일이나 하면서 푼돈을 벌 뿐인데 수완이 좋은 며느리는 은행에 취직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그러니 자존심이 상하면서 더더욱 좋아질 수가 없다.

아내는 가족의 생계를 떠안으면서 시어머니와 싸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 하루를 마감하는 생활에 지쳐간다. 남편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안다. 그녀도 남편을 사랑한다. 그러나 자신의 무능 때문에 가족이 이런 고생을 한다는 자괴감 때문에 그와 아내 사이엔 대화도 뜸해진다. 더군다나 세상에 남은 것이라고는 어머니와 아내 뿐인데 둘이 싸우기만 한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 중에서 아들은 누구 편도 들지 못하고 지쳐가고 병들어간다.

이 소설의 부부는 중경삼림에 나오는 왕비와 양조위와 비슷한 캐릭터이다. 중경삼림의 주제가로 쓰인 크랜베리의 히트곡처럼 가벼운 발걸음에 생명력이 넘치는 아내는 아무리 어려워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밝게 표정을 지으려 노력한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그녀를 맞는 것은 충칭의 차가운 안개 같은 냉냉함과 적막함. 남편은 그런 그녀에게 아무 것도 해줄 힘이 없고 의지도 없다.

전쟁이란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에 짓눌린 세 사람은 어서 전쟁이 끝나 지긋지긋한 현실이 끝나기를, 전쟁이란 안개가 걷히고 해가 뜨기를 기다리는 것 밖에는.

결국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그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파멸 밖에 없다. 시어머니와 다투는 것도 더 이상 인내하기 힘들어졌을 때 그녀는 집을 떠나 다른 도시로 전출한다. 이 소설의 시작이 그녀의 가출에서 시작했듯이 소설의 끝도 그녀의 가출에서 끝난다. 떠나기 전날까지도 그녀는 남편이 잡아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를 잡지 못한다. 잡을 자격을 없다고 그리고 그녀를 잡을 수단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떠났을 때 그를 지탱하던 힘이 소진되어 그의 병이 악화된다. 그래도 그녀에게 마지막 배려로 병이 좋아지고 있다고 마지막 죽는 날까지 편지에는 쓴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본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곧 붕괴할 구사회, 구제도, 구세력이 뒤에서 그들을 지휘하고 있다. 그들은 반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희생자가 되고 만 것이다. 나는 세 명의 주인공을 모두 동정하지만, 그러나 또한 그들 모두를 비판한다.”

이 가족의 비극은 그들보다 거대한 힘에 눌려 그 힘에 반항할 수 없었던 나약한 인간의 무함 때문에 일어난 것이란 말이다. 작가는 그 거대한 힘을 당시 중국의 모순에서 찾지만 그들이 느꼈던 자신이 어쩔 수 없는 힘에 휘둘린다는 무력감,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무력감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가족이 무너져 가는 것을 우유부단하게 손 놓고 있었던 남편에게 답답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을 짓누르던 충칭의 안개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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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 톨스토이와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인생
석영중 지음 / 예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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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실로 매혹적인 작가다. 톨스토이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 광대무변한 성격의 스펙트럼에 놀라게 된다.” 이책의 결론의 첫머리이다. 그러나 언뜻 보면 그렇고 그런 주례사식 마무리로 보인다. 톨스토이. 읽지는 않았더라도 누구나 이름은 들어봤고 그가 대문호라는 것은 다 아는 것이니까. 그러나 저자는 뻔한 마무리를 하고 있지 않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글을 보자.

“한 인간 안에 그토록 섬세한 예술과 그토록 지겨운 설교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인류 보편에 대한 그토록 거룩한 사랑과 특정 대상에 대한 그토록 매서운 독설이 공존한다는 것이 놀랍고, 그토록 거대한 지성과 그토록 불가사의한 미련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그토록 실용적인 사람이 그토록 실천 불가능한 것들에 관해 그토록 끈질기게 설교를 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왜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는가? 저자는 톨스톨이가 황당한 인물이 된 것은 메멘토 모리,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 말한다.

“톨스토이는 평생을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보냈다. 아니 공포라는 표현은 조금 부족하다. 그는 죽음을 싫어했고 혐오했다. 죽음은 이 현실적인 청년을 철학적으로 만들어주었다. 그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는다는 것 자체가 아니다. 봐 두렵고 이상한 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것, 더불어 삶이라는 것 역시 알 수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리나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랄 수 있는 레빈이 이렇게 말하게 한다. “오늘내일 사이에 죽으면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결국 사람이란 오직 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사냥이나 노동으로 마음을 달래면서 일생을 보내는 거야.”

실존주의식으로 말하자면 톨스토이는 삶의 부조리함을 깨달은 것이다. 사르트르는 ‘의미없는 세상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인간뿐이다.”라고 말햇다. 세상이란, 삶이란 원래 설명되는 어떤 의미, 즉 조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그 의미없는 것, 설명되지 않는 것을 설명해내고 의미를 부여해야 직성이 풀리고 살아갈 힘이 나는 존재라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깨달은 것은 삶의 부조리성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는 게 의미가 없으니 죽자! “실제로 톨스토이는 여러 차례 자살을 생각했다. 전형적인 우울증 증세다. 아니면 복에 겨운 투정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그 후 약 삼십년간 그를 ‘인류의 스승’이라는 어려운 자리에 올려놓은 가장 직접적인 동인이었다. 죽음 앞에서의 허무, 바로 이것이야말로 톨스토이가 거대하면서도 기괴한 도덕가로 거듭나게 한 것이었다.”

이때부터의 톨스토이를 스테판 츠바이크는 ‘지성의 자살’이라 평하고 저자는 사이비 교주 같다고 말한다. 이때부터의 톨스토이는 ‘톨스토이교’의 교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톨스토이교의 교리는 무엇인가?

삶의 의미를 찾는 전통적인 수단은 종교이다. 그러나 너무나 똑똑한 “톨스토이는 이 세상 모든 것에서 거짓과 위선을 발견하는데 남다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다. 위선 탐지라는 영역에서 입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다. 그러니 그가 기존 종교에서 위선과 거짓을 찾아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그리스고교와 교회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그러나 올바르고 참되게 살기 위해 진지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다 결국 자신만의 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신의 이름은 ‘도덕’이었다.

안나 카레리나’에서 레빈은 우연히 어떤 농부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신’을 찾아낸다.

“그야 사람들 중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지요. 자기 이익만 차리고 살면서 자기 뱃속을 살찌게 하는 것만 생각하는 놈도 있고, 정직한 아저씨도 있지요. 아저씨는 영혼을 위해 살아서 하느님에 대해 알고 있거든요.”
“어떻게 하면 영혼을 위해 사는 거지?” 레빈은 거의 외치다시피 말했다.
“어떻게라니요? 뻔한 일 아닙니까? 정직하게 하느님의 율법대로 살아가는 겁니다요.”

저자는 이것이 레빈의 깨달음의 순간이라 말한다. “왜 사느냐 어떻게 사느냐 하는 의문은 어떤 사변적인 철학이나 교리로 설명될 수 없다. 생활 자체만이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 하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계시다.”

레빈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존재에 관한 명백하고 의심할 여지없이 유일한 표시는 전 세계에 계시되어 있는 선의 율법이다. 나는 그것을 내 마음속에서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톨스토이의 신은 ‘선’ 즉 도덕이 되었다. 도덕이 인생의 답인 것이다.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 즉 채식, 시골살이, 즉각적이고도 전면적인 성생활의 중단, 예술의 박멸 등은” 톨스토이교의 율법이 된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설교자가 된 톨스토이가 말하려는 메시지는 ‘잘 살자’였다. 그의 지루하고 고루한 그의 설교를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일단 환락의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야 한다.
자신이 먹을 것은 자기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 즉 육체노동을 해야 한다.
결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벌서 결혼했다면 부부 생활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형제처럼 사랑해야 한다
착하게 살고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
거짓말하지 말아야 한다
곡물과 채소만 먹어야 한다.
술과 담배는 끊어야 한다
어렵고 복잡한 예술은 다 버려야 한다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겸허하게 살아야 한다

“대충 다 옳은 말이고 다 좋은 생각이지만 아예 세상을 등지기로 작정하지 않은 이상 지킬 수가 없다. 그토록 똑똑한 사람이, 그토록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사람이 왜 이런 꿈 같은 이야기를 했을까?

확실히 톨스토이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일리가 있다는 것이 진리는 아니다. 톨스토이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그는 일리 있는 것을 진리라 믿고 싶어 했다. 부분적인 진실을 진리 그 자체라고 단정했다.

진리. 어딘지 먼 나라 이야기 같다. 요즘 세상에 진리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일종의 수사처럼 쓰일 따름이다. 그러나 톨스토일츨 읽고 나면 진리에 관해 생각하고 싶어진다. 그것이 스쳐 지나가는 한순간일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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