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 오브 워터 - 흑인 아들이 백인 어머니에게 바치는 글
제임스 맥브라이드 지음, 황정아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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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버지니아에 의붓 아버지 가까이 묻어 드릴께요.”
“오 아니야. 날 버지니아에 묻지 마. 난 버지니아에서 도망쳐 나왔어. 다시 그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구나.”
“노스캐롤라이나는 어때요? 아버지 계신 곳에 묻어 드릴께요.”
“아니야. 남부에서 도망치느라 평생을 다 보냈어. 도로 남부에 데려다 놓지 마.”
“알았어요. 그럼 뉴욕 어때요 거기서 40년을 사셨잖아요.”
“너무 복닥복닥해. 난 다른 사람 밑에 눌리고 싶진 않구나.”

죽어서 묻힐 곳도 없는 여자.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취미는 이사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십 년 내내 이사 중인 유일한 사람이다. 말 그대로 이사는 곧 엄마의 생활양식이 되었다. 동네에 있는 부동산업자라면 누구하고라도 다 허물없이 지내는 것 같았다.”

묻힐 곳도 없고 정 붙이고 살 곳도 없는 그녀가 태어난 곳은 폴란드의 유대인 게토였다. 폴란드에서 두살까지 산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 뉴욕으로 갔다. 랍비였던 아버지는 어렵지 않게 일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집불통이고 기익적인 그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아버지를 따라 여기저기를 떠돌아야 했다. 그러다 버지니아의 가난한 촌구석에 가게를 내고 거기에 정착하게 된다.

그러나 그곳은 그녀의 집이면서 집일 수 없는 곳이었다. 학교에선 예수를 죽인 유대인 계집이라며 따돌림을 당하며 외톨이로 지내야 했다. 

당시 남부에선 인종차별이 심했다. 트럭을 타고 KKK단이 돌아다니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고 강에서 ‘니그로’ 시체가 떠올랐다는 말은 심심치 않게 들렸다.

100년전 조상까지 올라가도 노예소유주였던 사람은 드문 그들이 흑인을 깔보고 학대하는 것은 가난하고 별볼일 없는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학교에서 그녀가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왕따를 당하는 것도 같은 심리였고 그녀는 단지 희생양으로 걸려든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린 그녀에겐 그런 집단폭력에 저항할 힘도 자존심도 없었다. 애초에 그녀의 환경은 그런 자존감을 키워주지 않았다.

얼마 안되는 유대인들에겐 흑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집안이라며 무시당해야 했다. 가족조차 그녀에겐 의지할 대상이 아니었다. 자기 차는 매년 새것으로 사면서 아이들 옷은 헌옷이어야 하는 이기적인 아버지. 애초에 미국행 티켓으로서 (그녀의 외가친척들이 뉴욕에 살고 있었다) 결혼했을 뿐이며 소아마비 때문에 몸의 왼쪽 절반을 쓰지 못하는 아내에겐 아무런 애정도 없었고 그걸 비열하게 놀리고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친딸의 몸을 더듬으며 성적 학대를 하는 아버지.

그녀가 의지할 상대는 어머니와 형제들 뿐이었지만 어머니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오빠도 집을 나갔다. 여동생과는 가깝지만 속을 터놓을 정도의 사이는 아니다.

혼자인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인간적으로 다가온 것은 가게에 오는 흑인들이었다. 그녀는 차별받고 가난한,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인 그들이 더 인간답고 밝게 사는 모습을 본다.

그런 그녀가 숨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외가가 있는 뉴욕에 방학동안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외가의 이모들은 (내논 자식으로 처분해버린) 불구인 동생의 딸인 그녀에게 무관심했다. 그저 머물게 해주는 것으로 의무를 다한다고 여겼다.

그녀는 혼자였다. 혼자인 그녀에게 어느날 이모 공장에 일하는 흑인청년이 들어왔고 그녀는 그와 사랑에 빠진다. 교양이 넘치고 반듯하게 자란 그의 인품과 인간미에 반한 것이다.

흑인과 백인이 결혼하면 남부였으면 죽을 수 있던 시절에 그와 결혼한다는 것은 스캔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에겐 잃을 것이 없었으니까.

그와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흑인과 결혼하면서 유대인 사회에서도 절연당하고 백인들에게 외면당하고 흑인들에겐 백인이라고 외면당했지만 그녀는 행복했다. 그녀가 있을 곳을 같이 있어줄 사람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와 8명의 자식을 남겨둔 채 40대에 남편은 죽는다. “하느님을 먼저 생각해” “머리가 텅 비었는데 돈이 다 뭐냐” 그녀는 목사였던 남편의 방식대로 신앙과 배움을 기준으로 자신만의 성에서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다시 반듯하고 인간미 넘치는 흑인과 재혼해 4명의 자식을 더 얻지만 그녀의 세상은 어디까지나 그녀와 자식들이 머무는 ‘성채’에 머물렀다. 그녀가 있을 곳은 가족이 있는 집 이외에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이책의 저자이며 8째인 아들의 이야기로 전해진다. 자신은 흑인인데 엄마는 백인인 이상한 상황에서 흑인들 동네인 할렘에 살아야 했던 저자는 언제나 자신은 누구인가란 물음을 가지고 살았다. 그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저자가 10대를 보냈던 시절은 인권운동으로 시끄러웠던 시절이었고 흑인들의 저항의식과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강하던 시절이었다. 이책은 어릴 때부터 나는 어떤 사람인가란 질문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어머니는 어떤 사람인가란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 쓰인 책이다.

이렇게 보면 이책은 혼혈가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일 뿐으로 들릴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자식 12명을 모두 대학원까지 보내고 교수, 의사, 교사, 기자, 전문직 공무원으로 만든 억척 어머니의 아메리칸 드림 스토리로 말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책이 100주 연속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미국의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교재로 쓰인 이유는 그런 것에 있지 않다. 위에서 요약한 것과 같이 미국역사에서 어두운 부분인 인종차별을 대공황 시절 남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어머니의 이야기와 60년대 할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저자의 이야기에서 그 차별을 겪으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상처를 가지고 살아야 햇는가를 평이하고 간결하게 보고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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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그대 신을 벗어라
임광명 지음 / 클리어마인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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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가 처음 새워졌을 때 사람들은 그 건축물을 어떻게 보았을까? 당시 사람들이 살던 집이래 봐야 오막살이 초가집이던 시절에 말이다.

물론 그런 규모의 기와건물이 경주에 불국사 같은 절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왕궁도 있고 권세가의 저택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왜 절이 왕궁의 규모를 가져야 했을까? 종교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왕궁과 같은 규모가 주는 장엄함은 이곳은 다른 곳과 다르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곳은 거룩함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수학여행에 불국사를 보고 옛날 사람들이 느껐던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가? 턱도 없는 이야기이다. 수십미터 높이의 빌딩을 보며 하루 하루를 보내는 사람의 눈에 불국사는 퇴락한 아담한 문화재일 뿐이다.

오늘날 종교건축은 세속건축과 장엄함을 겨룰 수 없다. 이것이  종교건축의 고민이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종교건축물은 건물을 기준으로 여기는 거룩함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다.

자연을 배경으로 한 산사에선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신앙도 생활의 일부여야 하기에 성소도 도시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거대한 세속건축물들과 힘겹게 경쟁하면서 자신을 구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도시의 교회, 성당, 절은 세속의 도시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저 여기는 교회다 여기는 절이다고 자기최면을 걸어야 한다.

이책에 소개되는 현대 종교건축물들은 그런 고민에 대한 나름대로의 모범답안을 낸 사례들이다.

이책에는  불국사, 통도사, 송광사, 범어사와 같은 전통건물부터 개화기에 지어진 성당, 일제시대에 지어진 성당, 교회 등을 잡다하게 나열한다.

그중에는 특이한 것도 많고 아름다운 건물도 많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건물이라는 전주 전동성당부터 특이하게 기와와 고딕첨탑을 조화시킨 익산 나바위성당, 한옥에 불교식 종이 있는 강화읍성당.

그러나 도시에 지어져야 할 성소는 어떤 곳이어야 할까는 그런 건물들과는 달라야 한다.

이책에 소개된 몇몇 건물들은 그 해법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이다.

거룩함이 現前하는 곳으로서 성소는 거룩함의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근대 이전의 종교건축에선 장엄함과 위압감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세속건축이 중심이 된 지금 그런 건물을 만들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다르다는 것, 일상의 세속의 공간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주면 된다. 부산 남천성당과 부산 홍법사 대웅전과 안국선원이 좋은 예이다.

두 건물은 기능을 우선하는 세속건물과는 모양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보통 건물은 공간활용을 최대화하기 위해 사각형 박스형태가 많이 선택된다.

그러나 남천성당은 직사각형을 비스듬하게 잘라낸 삼각형의 형태이며 비스듬한 사면을 스테인드 글래스로 처리했다.

홍법사 대웅전도 비행접시를 떠올리게 하는 원형으로 처리되었으며 법당 안 역시 천정이 높은 돔형 아래 연꽃을 떠오르게 하는 원형을 반복한다.

두 건물은 형태에서부터 세속건물과는 차별화된다. 그리고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이용해 내부 공간을 세속공간과는 차이를 둔 것 역시 뛰어난 처리다.

이상에서 이책의 내용을 일부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책은 위에서 소개한 것이 주 내용은 아니다. 이책의 성격은 그보다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저것 많은 것을 담으려는 잡탕이라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뚜렷한 성격이 없다. 저자 나름의 종교건축에 대한 주관이 있어서 그 주관에 따라 쓴 것이 아니라 전국을 돌며 유명하다는 건물을 브리꼴라쥬 식으로 나열해 엮은 것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된 결과가 안쓰럽다. 지면은 제약이 되어 있고 너무 많은 것을 넣으려니 설명은 짧아지고 사진도 적게 작게 들어가 읽는 이를 답답하게 한다. 그러나 그런 한계없이 제대로 시원한 내용의 책을 만들려면 지금보다 페이지도 늘어야 하고 판형도 커져야 한다. 제작비가 뛰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비싸더라도 제대로 된 책이었다면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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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새 - 타임패트롤 시리즈 3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16
폴 앤더슨 지음, 강수백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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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된 타임 패트롤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이책에서 저자는 승자들이 악의적으로 왜곡한 패자들에 대해 다룬다.

번역서의 제목이기도 한 첫편에서 저자는 구약시대 유대인들의 이웃이었던 페니키아인들은 실제 어떤 사람들이엇는가를 파고든다.

우리가 페니키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주 적다. 그리스인들처럼 상업민족이었으며 무역로를 따라 해외식민지를 건설했으며 그 중 하나인 카르타고는 로마인들에 의해 철저하게 말살당했다. 그들의 주 상품은 달팽이를 짜서 얻는 자주색 염료와 유리였으며 알파벳을 창시하였고 자음만 기록하는 그들의 알파벳 시스템이 헤브라이어의 알파벳의 근간이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거기에 모음 시스템을 더해 오늘날의 알파벳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 정도가 우리가 페니키아인들에 대해 아는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구약을 읽은 사람들이면 페니키아인들에 대해 몇가지를 더 알 수 있다.

구약에 나오는 바알신은 페니키아인들의 주신이었다. 그러나 굴어들어온 돌인 유대인은 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 페니키아인 즉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해야 했다. 그러나 선주인들은 결코 약하지 않았고 마치 미국인들이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했듯이 가나안을 차지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그들과 전쟁을 벌여야 햇고 그들의 신은 악신이 되어야 했고 악인이 되어야 했다. 바벨탑에 대한 구약의 악의적인 왜곡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아프로디테, 아도니스, 헤라클레스가 원래 페니키아인들의 신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바알 역시 풍요의 자연신일 뿐이었다.

악의적인 왜곡은 신전의 娼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전에서 여자가 몸을 팔게 하는 것을 보고 음탕한 종족이라 유대인들은 비난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 교리에 따른 것으로 교리에 따라 처녀는 결혼 전에 처녀성을 신전에 헌납하는 것을 요구받았고 그때 한번 뿐이었다. 그후에는 정숙하게 살았다. 유대인들과 같은 정조관념을 갖고 잇지 않다고 즉 자신들과 다르다고 틀렸다고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후 오늘날 레바논에 사는 필리스틴인들과 유대인들은 우호관계를 맺게 된다. 이편에서 저자가 다루는 것은 솔로몬 왕 시절 페니키아의 중심지였던 티레이다. 기원전 10세기 철기시대가 아직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티레는 소아시아 지역의 무역중심지였다.

이편의 제목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새’은 성서에 나오는 것으로 솔로몬의 부를 나타낸다. 그러나 솔로몬의 부라는 것은 모두 티레를 통해 들어온 것이었다. 티레는 유대가 세계와 연결되는 창이었다. 솔로몬의 업적이라는 예루살렘의 성전도 티레의 왕궁을 축소해 그대로 모방한 것일 뿐이었으며 성전을 짖는데 동원된 거의 모든 자원과 기술자는 모두 페니키아에서 온 것이었다.

3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이스라엘인들을 하나의 나라로 묶어놓을 수 있던 솔로몬의 힘도 티레의 원조와 동맹에 기대어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페니키아인들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책의 저자는 페니키아인들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이렇게 요약한다. “이런 모든 것들보다 제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은 개인의 차치와 권리를 중시하는 민주주의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페니키아인들이 그런 이론을 갖고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철학면에서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리 강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험가와 상인을 겸한 무역상은 페니키아인들의 이상형이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살아가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자율적인 인물상 말입니다. 지금 그들의 고향을 통치하는 히람 왕은 이집트나 동방의 신권왕이 아닙니다. 히람이 왕권을 조상에게서 이어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실상을 보면 수페트suffet, 즉 판관을 의미하는 士師들을 주재하는 정치 지도자에 더 가깝고, 어떤 결정을 내리든 사사들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사실 티레는 전성기의 베니스 공화국과 많이 비슷합니다. 저는 그리스인들이 페니키아 특히 티레의 강한 영향을 받고 민주제를 발달시켰다고 확신합니다.”


저자는 이책의 2편, ‘몸값의 해’에선 남미를 정복한 미치광이 스페인들은 실제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다룬다.

콜럼버스의 소위 ‘신대륙 발견’은 인디언들에겐 재앙이었다. 그리고 그 재앙의 주역은 야만스런 광신자들인, 기사란 직함을 쓰는 스페인 깡패들이었다는 것이 보통 대항해시대를 다루는 역사서들의 공통된 평이다. 저자는 거기에 대해서 별 이의가 없다.

이슬람세력으로부터 이베리아 반도를 탈환하는 수백년동안의 싸움은 그들의 기질을 만들었다. 실제 그 사업은 신앙의 이름을 걸고 이슬람 도시의 부를 약탈하고 착실한 농부였던 이슬람교도들을 농노로 착취하는 말 그대로 수지맞는 정복사업일 뿐이었다. 수백년을 그런 사업을 하면서 스페인 귀족들에게 밴 것은 무엇을 생산하는 것보다 남이 생산한 것을 뺐는 것이 휠씬 손쉽다는 것이었고 그런 습성은 남미를 정복할 때도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정복한 남미가 독립한 후에도 귀족적인 과시욕과 낭비벽, 약탈벽 이외에 무엇을 가르쳐 줄 것이 없었던 작자들에게 배운 사람들에겐 그럴듯한 문명을 이룰 무엇이 없었다.

이정도가 보통 대항해시대를 다루는 역사서들이 스페인인들에 대해 언급하는 상식적인 평가이다. 저자는 특별하게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나 여러분은 영어권의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은 몇 세기 동안이나 영국의 라이벌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포로파간다는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남았습니다. 실제로는 종교 재판 따위로 악명이 높은 스페인인들은 다른 동시대인들에 비해 특별히 악랄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많은 나라보다 차라리 나은 점도 있었죠. 이를테면 코르테스 본인이나 토르케마다(스페인 최초의 종교재판소 소장)조차도 어느 정도는 정의롭게 현지인들을 대하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는 정복당한 현지인들이 조상의 땅에서 멸종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특히 영국인들과 그 후계자인 양키와 캐나다들이 현지인들의 씨를 거의 말리다시피 했다는 사실에 비추면 말입니다.”

물론 저자는 16세기의 기준으로도 스페인인들은 ‘괴물’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인들의 신대륙 정복은 완전히 사악하지도 않았고 완전히 선하지도 않았다. 코르테스는 적어도 아즈텍족의 소름끼치는 집단적 인신고양을 중지시켰고 피사로는 개인의 존엄과 가치라는 개념이 자리잡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도 있다. 이 두 침략자 모두 현지인들의 동쟁자들이 있었다. 그럴만한 동기를 가진 동맹자들이.” “잉카가 지배하는 나라는 평화롭고 순진한 사람들이 살던 곳은 아니었습니다.. 잉카 제국은 사방팔방을 향해 공격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전체주의 국가였죠. 삶의 온갖 소소한 부분까지 국가에서 통제를 했으니까요. 순순히 지시에 따른다면 냉대를 받지 않았지만 지시를 어기는 사람들은 가차없는 응징을 받았습니다. 귀족들조차 자유라고 할 만한 것을 전혀 누리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신권을 가진 왕인 잉카만이 자유를 향유할 수 있었죠.”

물론 그런 잉카제국을 무너트린 코르테스가 선인을 아니다. 지금의 우리로선 그렇게 잔인하고 탐욕스럽고 야만스러우면서 그 모든 악행을 신의 이름으로 태연히 행하는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저자는 “그는 괴물이 아녜요. 우리 기준으로 보면 잔인하지만, 그건 태어난 시대의 산물이라고 하는 쪽이 더 정확해요. 야심적이고 탐욕스럽지만 마음속으로는 자신을 고결한 기사로 여기고 있어요.

저자는 물론 스페인 정복자들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지금의 눈으로 보면 정신착란으로 보이는 그들의 신념과 행동이 그 시대에선 정상일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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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별 - 타임패트롤 시리즈 2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15
폴 앤더슨 지음, 이정인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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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패트롤 시리즈의 2권인 이책은 로마제국 시절 게르만족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당시의 게르만족에 대한 저자의 관점은 다음 구절로 요약된다.

“게르만 족이 로마를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르만 족은 결코 로마를 무너뜨리지 못했어. 고트 족, 반달 족, 부르군드 족, 롬바드드 족, 색슨 족 등과 같은 이들의 후손들이 로마를 정복한 건, 제국이 내부에서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에 거저 먹은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지. 게다가, 제국은 그 이전에 이미 게르만 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킴으로써 그들을 정신적으로 정복했어. 그래서 고대문명이 그랬듯이 라인 강이나 창백한 북해 바다가 아닌 지중해 연안에서 새로운 서구문명이 태어난 거야.”

게르만 족을 논평하는 이 구절은 강대한 게르만 부족의 왕을 묘사한 다음에 따라오는 논평이다. 게르만 족의 왕은 부족의 회의와 대제사를 주재하고 전쟁의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왕의 일상은 땅을 가진 지주였고 소작인, 노예, 일꾼 들과 같이 농사일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왕은 지고한 존재가 아니라 부족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법과 전통을 따라야 하는 존재였고 폭동이 습관인 부족민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 왕을 끌어내렸다. 왕실의 자손은 누구라도 그 자리를 요구할 권리를 갖고 있었고 왕위는 자신을 지지할 전사를 얼마나 모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 시절 문명과 야만을 나누는 것은 정치제도의 문제였다고 저자는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책에 실린 ‘바다의 별’이란 중편에는 여주인공이 로마상인들에 의해 윤간을 당하는 장면이 있다.

당시 자신들을 문명인이라 생각하던 로마인과 그리스인들은 노예를 부렸다. 그러면 그 노예들은 어디서 나왔는가? 역사서에선 주로 전쟁포로들이었다고 말한다. 그리스와 로마가 끊임없이 전쟁을 한 것은 전리품과 노예를 획득하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그러나 노예는 대항해시대에 유럽인이나 바이킹들이 그렇게 했듯이 상인들이 변방을 돌아다니며 사기도 하고 지나가다 우연히 만난 사람을 습격해 사로잡아 얻기도 했다.

이책에서 여주인공은 연인과 함께 해변을 거닐다 그들을 본 로마교역선의 눈에 띄었고 윤간을 당한 다음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려갈 운명이었다. 타임 패트롤이 그녀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런 운명대로 흘러갔을 것이다.

당시 게르만족을 저자는 아이같이 솔직하고 순진하다고 평한다. 당시 로마인들의 평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순진함의 이면에는 아이 같은 잔인성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잔인성은 당시를 살던 자칭 문명인이라는 사람들도 다를 것이 하나 없었다.

저자는 문명과 야만을 나눈 것은 정치제도의 문제였다고 보는 것같다. 왕이라고 하지만 어떤 구심점도 될 수 없는 이름에 불과한 왕.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고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불안정한 왕의 지위.

더 큰 문제는 게르만족, 켈트족이라 칭해지지만 그것은 학문적인 총칭에 가까울 뿐 어떤 실체가 될 수 없는 그들의 분열성이다. 부족으로 나뉘고 그 부족도 넓은 지역에 흩어진 상태로는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로마제국이 그들을 압도한 것은 힘을 집중할 수 있었던 정치 시스템의 강점이엇다.

1권에서 저자는 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가 져 로마 대신 켈트족이 패권을 차지한 세계를 그린다. 그 세계는 조각 조각 나뉜 분열된 세계엿다. 지금의 프랑스가 그렇듯이 켈트족은 하나로 뭉치는 재주에선 잼병이다. 천성적으로 분열하기 좋아하는 켈트족의 성향은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정치의 아수라장을 설명한다.

로마가 자멸한 후 유럽의 패권을 잡은 게르만족은 저자가 말하듯이 이미 로마에 의해 정신적으로 정복당한 사람들이었다.

게르만족의 문화가 이후 역사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영어, 독어와 같은 언어를 물려주었고 부족의 민회와 같은 제도는 의회로 발전했으며 그들의 전사적 전통은 봉건제의 기사로 바뀌었으며 그들의 호전적이며 뒤떨어진 문화는 중세를 암흑기라 불리게 하는데 충분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를 정복하기 전부터 이미 로마에 의해 정신적으로 압도된 상태였고 그들은 로마라는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로마인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들이 노예상인과 세금징수인과 잔인한 놀이 말고 다른 것들도 가져온 건 사실이지. 평화, 번영, 넓어진 세계. 그러나 그것들은 오래 가지 않았어. 썰물이 빠져나가자 여기저기 잔해들이 남게 되었지. 책과 기술, 신앙, 사상, 예전에 존재했던 것에 대한 기억, 뒤의 세대들이 간직했다가 다시 건설할 재료들, 그 기억들 사이에 잠시 생존 그 자체에만 전적으로 목을 매지 않은 한 시기가 존재했었다는 것도 포함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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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 카툰 - 보이지 않는 영과 혼의 세계를 찾아가는 카툰 라이프
오차원 지음 / 펜타그램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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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이책은 '백귀야행', '세상이 가르쳐 준 비밀' 또는 '샤먼 시스터즈'와 비슷한 류의 책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책은 그런 만화와는 다른 종류의 책이다.

우선 책을 열면 보통 만화와는 다른 식으로 구성된 지면을 보게 된다. 보통 만화라면 컷으로 구분되고 말풍선이 있는 그런 구성이지만 이책은 만화라기보다는 글에 가깝다. 그림은 그 글에 대한 일러스트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구성이다.

두번째 차이점은 이책은 독자를 위해 만들어졌다기 보다 저자 자신을 위해 쓰여졌다는 것이다.

앞에서 든 일본만화들의 경우 목표는 재미에 있다. '신들의 나라'라는 별명에 맞게 부뚜막에도 신이 있는 나라인 일본은 수백만의 신이 모셔지는 나라이다. 그런 나라인만큼 오컬트 장르의 소재거리가 풍부하고 소재가 많다보니 재미있다.

그런 만화를 보면서 재미를 느끼기 그 스토리를 실제라고 생각하고 오싹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책은 그런 재미를 위해 쓰여진 책이 아니다.

저자는 이책의 소재를 저자 자신의 체험으로 한정하고 있다. 자신은 평범한 일반인일 뿐이라 말하는 저자의 체험에 한정되다 보니 이렇다할 스토리도 없고 일본만화와 같은 재미도 없다.

이책은 독자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저자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라는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 자신의 체험들이 어떤 것이고 그 의미를 알려고 하는 시도로서의 작업이다.

저자에 따르면 저자는 허약체질로 태어났고 기면증이란 문제를 가지고 잇다는 것 이외에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허약체질은 어쩔 수 없다지만 기면증은 심각한 문제였다.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쏟아지기 때문에 50분짜리 수업도 제대로 집중할 수 없는 체질 때문에 학생시절에도 많은 문제를 겪었지만 사회생활도 제대로 하기 힘든 심각한 체질이다.

기면증이 심각한 것은 잠이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진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잠을 자도 피곤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체질이니 허약한 것은 당연하고 늘 자신감이 없었다. 왜 그런 체질일까? 저자가 항상 불만이고 이유를 알고 싶어한 것은 당연하다.

저자는 그 원인을 자신이 영매체질이라는데서 찾는다. 잠을 잘 때 수도 없이 가위를 눌리고 깨어있을 때도 남들은 못보는 헛것을 보는 것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영매체질은 보통 신기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무당이 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저자는 무당이 될 정도로 영매체질이 강하지도 않은 어정쩡한 상태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어정쩡한 체질은 잡귀들의 좋은 먹이감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위를 눌리고 헛것을 볼 때 저자는 꼭 악령이나 악귀라고 불러야 할 존재들을 본다. 그러고 나면 몸이 엉망이 된다.  에너지를 빨리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이책은 어릴 때부터 저자가 겪은 그런 체험들을 말하고 그 체험들이 어떤 것이었는가 저자가 신지학적으로 해석해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다르고 왜 다른가를 알려고 하는 노력이다.

이상이 이책의 성격을 설명해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책은 별 의미가 없다. 저자가 체험한 심령현상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체험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는 남의 일일 뿐이다. 사람들이 이런 류의 이야기를 미신이라 말하거나 미신이라고 말하지는 않더라도 재미거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책의 저자가 말하는 체험을 부정할 생각도 없다. 부정할 근거도 마찬가지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 무당들의 체험이나 종교의 역사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비슷한 체험들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완전히 터무니없다고 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있을법한 이야기라고, 현실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책을 본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그런 현실도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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