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앗제 Euge'ne Atget 열화당 사진문고 16
게리 뱃저 지음, 정재곤 옮김, 외젠 앗제 사진 / 열화당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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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망의 업적은 근대 도시계획의 위대한 전설이 되었다. 황제의 지원을 업고 자본과 노동의 잉여를 광대한 공공사업계획으로 흡수하는 수단으로 무장한 그는 수도의 사회적 경제적 삶의 공간적 틀을 재조직할 일관성 있는 계획을 고안했다. 오스망은 ‘다양한 지역적 상황을 충분히 적절하게 조화시킬 수 잇도록 상세하면서도 전반적인 계획’을 추구햇다. 도시공간은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되고 다루어지며 그 안에서 도시의 상이한 구역과 상이한 기능들은 상관관계를 맺고 활동하는 전체를 형성한다. 도시공간의 전체성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때문에 오스망은 대도시 지역 내 공간질서의 합리적 진화를 위협하는 불균등한 개발이 진행되던 근교를 병합하기 위해 격렬한 투쟁을 벌여야 했다. 1860년대에 그는 끝내 승리했다.” (데이비드 하비)오스망의 승리 덕분에 우리는 모두가 아름답다 말하는 오늘날의 파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옛 파리(Vieux Paris)’는 회화적인 한 장르일 뿐 아니라 삶의 방식이며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19세기 내내 산업혁명으로 프랑스에서는 변화가 불가피했으며 따라서 사진이 발명되기도 전부터 과거 ‘문화유산’에 대한 체계적인 시각자료 목록을 시큽히 마련해야 한다는 범국가적 과제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오스망 남작의 도시계획으로 위협받는 지역을 기록하는 일이 급선무였는데 그 계획은 부르주아 계급의 신거주 지역 건설을 위해 옛 시가지 전체를 철거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문화유산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초조함은 19세기 말 ‘옛 파리’ 운동이 생겨나면서 절정에 달했으며 급기야는 1860년대 오스망의 급진적인 재개발에서 살아남은 역사적 지역이 파리 시내 지하철 건설로 입게 될 피해를 최소호하하기 위한 위원회까지 설립도이ㅓㅆ다. 파리 시립역사도서관, 카르나발레 박물관, 국립도서관 등의 공공기관은 파리의 과거 모습을 담은 드로잉, 판화, 사진 또는 다른 형태의 자료들을 수집하려고 서로 경쟁햇다.”

이책의 주인공인 외젠 앗제의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그는 공공기관을 고객으로 ‘옛 파리’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한 많은 사진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주된 작업은 어디까지나 건축물과 풍경을 찍는 것이었고 이 같은 작업 결과물은 십여장씩 개인 고객들에게 백여장씩 공공기관에 팔려나갔다.” 직업사진가로서 앗제는 당시’옛 파리’를 주제로 한 다른 사진가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앗제의 사진은 특별햇다.

고객인 공공기관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기록이었다. 사라질 건물과 거리의 객관적인 초상을 원했다. 그러나 앗제는 “건물 정면을 찍을 때도 마치 거리의 동상이나 호기심 많은 개구쟁이들 같은 불필요한 요소까지 화면에 등장하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고객인 공공기관의 신경을 자극햇다.”

예를 들어 ‘안뜰로 들어가는 입구, 드라공 거리, 렌가 50번지 (파리, 1899)’엔 전경에 고객의 입장에선 불순물인 삼륜거가 전경에 끼워져 잇다. 그러나 그 불순물 덕분에 앗제는 “동시대의 틀에 박힌 사진가들을 뛰어넘는다. 앗제는 ‘주제가 돋보이도록 화면을 고정시키되 그 주제가 놓여 있는 삶의 문맥을 배제시키지 않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마스카리니 후작 저택, 샤를로가 83번지 (파리, 1901)’ 역시 앗제의 그런 재능을 보여준다. “마레가나 탕플가, 생 제르맹 등 현대화의 물결이 미치지 않는 지역에 밀집되어 있던 귀족들의 저택을 촬영하면서 앗제는 건축양ㅅ힉, 건물의 높이 및 중량감, 건축물을 장식하는 디테일 등에 역점을 두엇다. 이들 작업의 대부분은 상투적이다. 실제로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오로지 명확하고 중립적인 묘사만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앗제는 그다지 흥미로울 것이 없는 건축사진을 많이 찍었다. 앗제는 이 같은 작업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때때로 부주의하고 서툰 사진을 찍기도 햇다. 그러나 그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라 할 수 있는 이 사진의 경우 정면에서 약간 비켜선 각도에서 대상을 촬영하는 그의 경향이 우아하기는 하지만 단조로울 수 있는 건물에 한층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단순한 기록을 뛰어넘는 앗제 사진의 성격은 평론가에게 ‘앗제의 문제’라 부르는 화두를 던진다. “그는 자기가 찍은 사진들을 기록자료로 관심있는 개인이나 공공기관에 팔앗고 그랬기 때문에 그의 사진들은 작가명으로 분류되지 않고 주제별로 분류되었다.” 그러므로 맥락주의적 경향의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은 “상업적인 사진장이일 뿐인 인물을 위대한 예술가로 보는 것은 고의적 오류라고 주장한다.” ‘앗제의 문제’는 앗제를 예술가라 부를 수 잇느냐의 문제이다.

앗제는 “20세기 사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진가들 자신이 사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진가들이 앗제의 작품에 대해 실망했다. 모더니즘 사진이 지니는 형식미적 기준에 따르면 그의 작품에는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앗제는 기록사진의 기준에 따라 작업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 대부분은 형식미에서 심한 불균형을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흔히 예술사진가를 판단할 때 내세우는 기준, 즉 의도적인 형식미의 성공과 실패 여부, 스타일 전개 방식, 개인의 자발적 창작품인지 고객으로부터 주문받은 작품인지의 여부 등을 앗제에게 적용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영혼이 없는 상업사진이라 치부하기엔 “그의 작품의 아름다움은 당혹스럽다. 앗제의 이미지들을 보는 사람은 상업적 의도에 전혀 손상되지 않은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그의 작품을 좀더 세심하게 관찰하면 지극히 단순한 목적과 단조로운 작업방식이라는 한계 속에서는 나오기 어려운 감동을 맛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을 볼수록 단순히 상업적 이유에서 시작된 작업이 시간이 가면서 더욱 광범위하면서도 개인적인 관점을 지닌 작업으로 발전해 나갔음을 느낄 수 있다”

“앗제는 대체로 거리를 매우 서정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으며 거리를 관찰하는 훈련이 되어 있고 오래 된 것들에 대해 특별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으며 디테일을 찾아내는 눈을 지녓다. 그리고 이 모든 특성은 ‘거리의 서정’이나 ‘파리의 서정’이 아닌 앗제 자신의 서정이라고 불러야 할 시적 감수성 안에 하나가된다. 요컨데 너무 막연한 말일지 모르지만 ‘앗제의 파리’라 할 수 있는 무언가가 확실히 있다.”

앗제의 파리는 “동적이며 만져질 듯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앗제의 이미지를 관객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그 안으로 빨려드는지 관찰해보라. 우리는 사진의 공간을 소유하고 이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이 들게 하는 사진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앗제의 서정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우선 앗제 사진에서 무엇을 느끼는지를 말해야 할 것이다. “앗제 작품세계의 큰 특징은 대부분의 사진들이 눈 높이에서 지극히 평범한 시점으로 촬영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시점 때문에 앗제 작품의 상당 부분은 보행 경험을 담고 있는데 이 작품들은 대개 비교적 한가롭고 명상적인 산책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비슷한 이유로 앗제의 이미지에서 보이는 공간감 역시 비록 막힌 공간을 묘사하고 있을지라도 관람자들이 시각적으로 그 공간 속에 들어가거나 빠져 나오는 길을 택할 수 있게끔 함으로써 제한적이라기보다는 확산적이다. 또한 심리적으로 편안하고 내밀한 느낌을 제공하므로 그 공간에서 살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앗제의 사진은 “위안과 놀라움과 감동을 선사하기는 하지만 좀처럼 매혹시키는 법은 없다.” 앗제는 무대의 주연이 아니라 조연만 찍었기 때문이다. 앗제에게 도시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무언가를 소비하며 정신적인 휴식을 찾는 공간’이엇다. 그러나 앗제가 찍은 사진은 그 도시의 드라마 자체가 아닌 드라마의 배경인 미장센이었다. 건물에 사는 사람과 그들의 삶보다는 그 배경인 건물을 찍엇고 사람들이 사고 소비하는 자체보다는 그 대상인 상품들과 그 상품이 놓인 진열장을 찍었다.

무엇이 그를 그런 배경에 몰두하게 했을까? 더군다나 앗제의 사진작업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옛날을 다루는 영화에 보면 커다란 삼각대 위에 올려진 카메라에 고개를 쳐박고 천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찍는 사진사를 보았을 것이다. 앗제가 들고 다닌 사진기는 그런 사진기엿다. 건물을 찍기 위해선 그런 커다란 사진기가 필요했다. “큼직한 뷰 카메라와 그에 딸린 올망졸망한 가방들을 끌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일이 얼마나 힘든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건축물을 찍는 데 알맞은 그런 장비 때문에 그의 사진은 공간의 깊이감과 가파른 원근감을 갖게 되었고 그의 주제처럼 건축적인 구성을 만든다. 앗제는 “무거운 장비를 들고 허리가 휘도록 작업하러 다녀야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어디로 이끌지 알 수 없는 길을 닥치는대로 누비며 ‘無’에서 이미지를 창출하”려 했다.

“앗제가 무심하게 버려진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찍은 사진 들 중에 유난히 걸작들이 많이 잇다. 앗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다른 사진가들 같으면 이상하다고 여겼을 방식을 직관이 이끄는 대로 기꺼이 받아들여 작업했다는 점이다. 그의 작업은 사진적으로 말한다면 항상 ‘꽃을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꽃내음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존 사고우스키는 여러 차례에 걸친 앗제의 샤티용 방문을 두고 그가 기차역에서 간선도로를 따라 곧장 도심으로 걸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경치가 좋은 우회로인 페로탱가를 택함으로써 ‘페로탱가 (샤티용, 1915-1919)’ 사진에서 보이는 멋지게 굴곡 진 벽과 신비로 가득 찬 비밀의 문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그 밖의 많은 일급 이미지를 찾아냇다고 말햇다.”

“그의 가장 잘된 작품 몇 점을 찍은 곳으로 왠지 모르게 그를 항상 잡아끄는 도시 파리를 내려다볼 수 잇는 생클루 공원 언덕, 그곳 연못까지 무거운 촬영 장비를 끌고 올라갔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예순여덞이었다. 앗제가 그 나이에 헤라클레스 같은 괴력을 요하는 일을 기꺼이 하게끔 이끈 원동력이 무엇일지는 짐작할 밖에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점은 그렇게 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는 것이다.” 편집자는 그 원동력이 소유욕 때문이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저는 옛 파리의 모습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소유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옛 파리의 모습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고? 사실과 다르다. 앗제의 파리는 보행자. 노동자 계급, 좁고 지저분한 안뜰을 감추고 있는 전기 산업화 단계의 별볼 일 없고 미천한 파리엿다 ‘다른 사람들’의 파리가 아니더라도 그저 보통 사람들의 파리일 뿐이다.”

그가 찍은 보통 사람들의 파리는 “오스망과 황제가 의도했던 것이 무엇이든 간에 ‘위험한 계급’과 불건전한 가옥과 산업을 도심에서 추방하는 일”(데이비드 하비)때문에 밀려나 사라져 버릴 운명에 놓인 것들이었다. 오스망이 만든 “널찍한 거리를 거니는 부르주아의 파리나 부르봉 왕조의 파리는 앗제의 진정한 관심 밖이었고 그의 거대한 계획과는 무관햇다.”

앗제에게 사진은 그렇게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상상적 소유였다. “그것은 프루스트적인 의미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자’하는 개인적인 추구이고 두번째는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소유, 즉 자기가 속한 계급에게 프랑스의 문화를 되찾아 주고자 공공 문서 봐관소에 조심스럽게 자기만의 소리를 불어넣는 행위를 가리켰다.그러므로 앗제의 광범위한 테마는 여러 평자들이 결론지었듯이 단지 프랑스 문화유산의 목록을 작성하고 그것이 지닌 정신을 고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뛰어난 감수성과 감각있는 눈으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앗제의 작품이 지니는 정령숭배적 경향이나 우울증, 사랑스러움 등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해줄 인물, 그의 삶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다. 이점이 앗제가 지닌 진정한 가치이며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시적인 답변을 제시하는 사진작업을 해온 모든 작가들에게 그가 남긴 유산이다.”

“앗제가 왜 그다지도 중요한지를 묻자 찰스 하벗은 다음과 같은 명답을 남겼다. ‘그가 서 있던 장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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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 반 데르 엘스켄 Ed van der Elsken 열화당 사진문고 17
흐립시메 피서르 지음, 이영준 옮김, 에드 반 데르 엘스켄 사진 / 열화당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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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 반 데르 엘스켄이 세계적인 사진가가 된 것은 Love on the Left Bank ‘(참고 http://www.guardian.co.uk/artanddesign/2011/feb/10/van-der-elsken-left-bank ) 사진집 때문이엇다. 사진집은 20세기 최고의 사진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이 사진집은 사진집이라기 보다는 영화에 가깝다. 이 사진집의 스토리는 앤이란 인물이 이국적인 댄서가 되고 술 마시고, 추파를 던지고, 싸우고, 자고,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환멸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이 사진집은 실제를 찍은 것이 아니라 연출된 것으로 사진 소설(photo novel)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 사진 소설의 스토리는 앤을 연기한 밸리 마이어스(Vali Myers)의 실제에 가깝다. 전설적인 보헤미안인 그녀는 콕토, 즈네와 친구였고 2차대전 후 파리로 도피한 보헤미언들의 중심에 있었다. 사진집이 다루는 것은 엘스켄 자신이 속해있던 공동체의 이야기이며 그들의 세계였다.

 

"온갖 나라에서 모여든 그들은 이러저라한 이유로 전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모두 바, 카레, 식당을 떠돌며 술과 마약에 취해 있었고 깊은 상처로 절망에 빠져 세상에 대해 부정적이엇다. 반 데르 엘스켄은 이들이 보여준 삶의 모습에 매료되어 사진을 찎었다. 간혹 그들이 내켜 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 섞여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담배 피우는 모습을 찍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의 스타일을 찾았는데 인공조명, 연기, 반사 등이 분위기를 지배하는 그런 것이었다. 그는 열광적으로 춤추고 논쟁하고 식사하는 모습을 찎었고 덧없음 혹은 절망을 드러내는 듯 서로 껴안은 채 잠에 빠져 있는 모습도 찎었다."

 

자의든 타의든 주류에서 밀려난 주변부의 문화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엘스켄은 낸 골딘(낸 골딘에 대한 자세한 것은 이전 리뷰 참고)과 자주 비교된다. 실제 "낸 골딘은 엘스켄의 작품을 대단히 좋아했다. 두 사람 다 자신이 기록하는 세대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낸 골딘과 엘스켄의 작업은 다르다.

 

낸 골딘의 작업은 자신의 대상에 대한 깊은 공감에서 우러나오는 따듯함이 있다. 엘스켄 역시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그렸고 그 공동체를 그리는 것은 자신을 그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선 따뜻함이, 공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엘스켄의 사진을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사진을 찍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기인식 때문이었다. 그의 사진에 나오는 인물과 상황은 항상 그의 감정을 반영한다. 이는 나르시시즘이라기보다 자기비하와 정반대되는 것이다. 엘스켄은 진정성을 추구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는 카메라에서 자신을 찾았고 자신이 발견하고 싶은 것을 찍었다. 그렇기에 그의 사진은 강렬하다.  "그의 사진을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인물들의 시선이다. 초기 작품 속의 인물들은 멍하니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젊은 사진가는 꿈과 외로움, 자신의 세계에 침잠해 있는 남자, 여자, 어린아이를 관찰한다. 그들은 다른 것은 바라지 않고 오로지 '당신 자신을 보여 달라'고 하는 감독의 지시를 받는 배우가 된다."

 

엘스켄에게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우연이 지배하는 세계와의 수동적인 만남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사진 찍는 방법이 사냥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는 멀리 있는 사냥감-인상적이고 아름다운, 혹은 기이한 사람들-을 점찍은 후, 망원 렌즈나 줌 렌즈로 천천히 따라가다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마지막에 광각으로 포착한다고 했다. 렌즈를 교체하는 일을 포함해서, 이 방법은 영화적이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그는 간간이 영화를 실험하고 있었고 영화는 그의 두번째 표현매체가 되었다"

 

그렇기에 그를 관음증 환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는 자신의 사냥감에게 언제나 '당신 자신을 보여달라'고 강요한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사진가들과 달리 관찰자로 머물 수 없었고 무대를 지배하는 감독이 되어야 햇다. 그의 이름을 알린 첫번째 사진집이 영화에 가까운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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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edvanderelsken.nl/index.php?page=f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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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비숍 Werner Bischof 열화당 사진문고 7
클로드 쿡맨 지음, 이영준 옮김, 베르너 비숍 사진 / 열화당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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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비숍의 삶은 우연이 지배했다. 사진하게 된 것도 사진작가에서 기자가 된 것도 모두 우연이었다.

 

유복하고 지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베르너 비숍은 어릴 적부터 미술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재정적으로 안정된 직업을 가지길 원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화가가 아닌 산업디자인을 선택해 1933년 취리히 응용미술학교(the School for Arts and Crafts)에 들어간다. 그러나 응용미술학교에서 상업미술 수업은 이미 자리가 찼기 때문에 사진을 하기로 했다. 카메라라는 새로운 매체의 끝없는 가능성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가 사진을 선택한 1930년대는 모더니즘의 시대였고 파리와 함께 유럽 사진의 중심지인 베를린에선 사진 역시 그 영향을 받은 뉴 비전 운동(참고: http://www.metmuseum.org/toah/hd/nvis/hd_nvis.htm) 이 한창이었다. 뉴 비전이란 말을 만든 모홀리 나기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뉴 비전)로 사진을 정의했다. “낡은 비전은 1890년대에서 1910년대까지 꽃을 피웠던 픽토리얼리즘이었다. 모더니스트 사진가들은 회화주의자들의 부드러운 초점과 톤의 효과를 거부햇다. 그들은 다른 예술을 흉내내는 대신, 매체 자체의 독특한 능력을 탐색하면서 순수성을 고집했다. 모홀리 나기는 스스로 빛을 그리는 화가라 말했다.”

 

30년대 비숍의 사진은 뉴 비전 운동의 일부였다. “초기 십 년간의 사진에 대해 회상하면서 비숍은 나는(계란, 식물 등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을 배웠다.’고 썼다.” 졸업 후 그의 작품들은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그 당시 비숍의 작업태도를 완벽주의라 말한다. “한 예로 조개껍질은 비숍이 광고사진 일을 하던 시절 계속 나타나던 소재였다. Argonauta(취리히, 1941)란 사진은 자연에서 발견한 바닷가 풍경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장면을 연출하는데 비숍이 얼마나 극도의 완벅주의를 추구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 스튜디오에서 직은 이 정물사진은 조개의 뿔들이 배경에 비해 희게 보이고, 앞쪽에서 떨어진 그림자는 모래에 비해 검게 보이도록 세심하게 배치되고 조명된 것이다. 그런 효과를 얻기 위해 비숍은 수도 없이 많은 시간을 조개껍질을 자르고 사포질하고 윤을 내는 데 썼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은 사진에 그려진 사물이어야 한다. 사진이 실제보다 더 실제같이 보이도록 하가 위해선 사물 자체의 모습이 아니라 매체의 성격에 맞는 것이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된다.

 

사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이 피사체가 될 때 역시 마찬가지이다. '뒷 모습 누드' (취리히, 1937)는 실제보다 더 실제같은 사진을 찍는 비숍의 능력을 잘 보여준다. "비숍은 모델의 등을 톤에 대한 연구로 바꿀 정도로 빛을 아주 잘 다뤘다. 진한 검은색의 넓은 영역과 좁지만 강한 하이라이트 사이에 잘 조절된 회색의 영역이 있다. 비숍은 또한 일반적인 기대와는 다르게 보이는 공간적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배경으로 보여야 할 왼쪽의 검은 부분은 모델의 앞에 있는 평면처럼 보여서 마치 모델이 오른쪽의 검은 평면 앞쪽에 떠 있는 듯이 보인다."

 

역사적인 사건만 아니었다면 베르너 비숍은 독창적인 빛의 작용과 형식에 대한 순수한 연구를 통해 예술계에 뛰어난 사진작업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2차대전은 비숍이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를 떠나게 만든다.

 

사건이란 2차세계대전과 그 후유증으로 나타난 유럽의 황폐, 식민주의ㅏ의 해체와 냉전이었다. 격동의 세계를 맞아 비숍은 예술 사진가로 남아 있을 수 없엇다. 그는 인간과 그 문제에 대한 열렬한 증언자로 변신했다.” 덩굴, 민들레 씨앗, 누드, 레이스를 대신해 그의 사진에는 갑자기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비숍은 스위스의 노동자들, 맹아학교, 이탈리아의 티치노에 있는 난민수용소, 그리고 스위스의 이탈리아어 사용지역을 찎었다. 평화주의자 로맹 롤랑의 열렬한 독자인 그는 이 사진들과 이후 작업들에서 휴머니즘과 사회주의를 받아들인다.

 

”티치노의 수용소에서 찍은 이 사진은 텅 빈 시선이 깊은 심리적 상처를 암시하는 난민 어린이를 보여준다. 비숍은 전쟁이 그의 '상아탑'을 파괴해버렸다고 썼다. 그리고 '그 후로 나의 관심은 고통받는 인간의 얼굴에 집중되었다. 집에서는 전쟁 전에 찍은 섬세한 사진들을 생각에 잠긴 채 연구했다. 그것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은 사진들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나는 나날의 공포로 감각이 마비되고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십만의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전후 6년간 유럽 가로지르며 그가 많은 "사진들이 불에 타 버린 독일 국회의사당 건물에서부터 수많은 도시의 벽돌과 돌무더기들까지 물리적인 폐허를 강조하고 있다. 어떤 사진들은 상징적인데, 구멍나고 짖어진 병사의 철모가 폭격 맞은 독일 국회의사당 앞 물웅덩이에 놓여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국회의사당' 베를린, 1946) 불에 타 버린 차와 트럭의 잔해가 독일 국회의사당을 감싸고 있다. 돔은 부서졌지만 건물의 독특한 외양은 알아 볼 수 있다." 비숍은 폐허의 도시적인 스케일을 배경으로 인간의 스케일을 사진의 전경에 배치한다. 그러나 그 역시 도시의 폐허와 마찬가지로 "파편들이 뚫고 지나간 철모가 물웅덩이에 녹슬어가는, 폐허"로 상징할 뿐이다.

 

"그러나 비숍이 전후에 찍은 대부분의 사진은 첫번째 여행에서 발견한 주제를 나타낸다. 그것은 인간의 불굴의 용기이다. 몬테 카시노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새집을 짓기 위해 큰 돌 두개를 머리에 이고 간다. 그리스의 지로스에서는 넝마 같은 바지를 걸친 사람들이 전쟁고아를 위한 시설물의 뼈대를 올린다. 비숍의 어린이 사진도 그것들만큼이나 복합적이다. 그는 천장도 없는 교회에서 줄넘기를 하는 여자 아이, 그리고 폐허 속에서 게임을 하는 아이들의 사진을 통해 그들의 활기를 찬양했다. 그러나 그들의 텅빈 시선과 말 없는 눈물에서 그들이 받았을 상처를 회상하기도 했다."

 

포토저널리즘으로 전향한 비숍은 '초기의 심미주의와는 분명히 단절을 했다. 에든버러의 성당을 찍고는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이 죽은 것을 찍으려고 몇 시간 동안 조명과 삼각대와 씨름하는 일은 이제 정말 매력 없다. 차라리 사람들이 오가는 혼잡한 철도역에 서 있는 것이 낫겠다.' 그는 곧 훨씬 더 생생한 곳을 경험하게 된다. 1951년 2월 그는 인도로 갔고 극동에서 거의 이 년을 있었다. 거기서 그의 이후 사진 경력을 채워 줄 자신만의 주제를 개발해낸다. 서구화가 옛날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을 휩쓸었을 때 비숍은 보통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을 느꼈다. 그는 현대의 경제적인 힘의 공세에 대항해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그들의 투쟁을 기록하고 싶어했다. 인도, 일본, 한국, 홍콩, 인도차이나, 멕시코, 페루 등지에서 그는 도시를 벗어나 모더니즘의 침범에 해를 입지 않은 마을들을 찾아 다녔다."

 

'어머니와 아이' (비하르 주 인도, 1951)는 그의 전후 유럽을 다룬 사진들과 연속선 상에 있다. 인도를 덮친 대기근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사진이라 할 만한 이 장면에서 비숍은 낮은 앵글을 써 도움을 청하는 이 바싹 마른 여인을 기념비처럼 보여준다. 아이도 어머니의 제스처를 흉내내고 있는데 마치 가난과 배고픔이 미래의 세대에게도 되풀이될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비숍이 찍은 인도의 대기근 사진들은 미국의회가 인도원조안을 통과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제3세계 사진들 역시 그의 전후 유럽 사진들처럼 복합적이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을 다룬 사진들처럼 전쟁의 파괴를 다루기도 했지만 그런 폐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의지와 삶의 진정성을 보여준다.

 

그가 본 제3세계는 그가 겪은 뉴욕의 대립항이었다. "그는 뉴욕의 멈출 줄 모른 에너지를 '요부같이 흥분되고 매력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뉴욕의 '일상의 공허함과 메마른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강한 느낌을 받앗다. 맨해튼의 거리를 메운 얼굴들의 홍수 속에서 그는 '성공한 사람들, 환멸을 느낀 사람들, 살려고 버둥거리는 사람들, 생기를 잃은 사람들, 포기햇지만 아직 불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사람들, 크고 멋지지만 차갑고 무자비한 달러의 세계에서 서서히 쇠퇴해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의 사진에서 뉴욕이란 도시는 억압적이고 비개성적으로 느껴진다. 사람들은 익명적이고 눅눅한 길거리를 서둘러 걷고 있거나 가게 진열장 속에 희미하게 모습을 보이며 걸설용 철근 더미 속에 갇혀있기도 하다."



어쩌면 오리엔탈리즘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는 제3세계에 자신의 환상을 그리는 대신 제3세계를 있는 그대로 사진에 담으려 노력했다. 가령 '바닷가에서 (트리반드룸, 인도, 1951)'에서 '소년들이 바다와 모래의 경계에서 발가벗고 뛰놀고 있다. 인도에서 많은 서구 사진가들이 그랬듯이 대상을 이국적으로 보이게 하기보다 오히려 비숍은 자유와 즐거움이라는 보편적인 순간을 포착했다."



그가 제3세계에서 보려 했던 것은 그의 대표작이며 이책의 표지로 쓰인 '쿠스코로 가는 길' (페루, 1954)에 잘 나타난다. "피리를 불며 홀로 걸어가는 이 소년은 또 다른 인간적 보편성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바로 음악을 만들려는 충동이다. 자기가 만든 구조물에 갇혀버린 뉴욕의 노동자와는 달리 이 이미지는 사람들이 그들의 자연환경에 맞추어 편안하게 살아가는 곳에서 볼 수 잇느,ㄴ 전통문화의 인간적 진정성을 찬양하고 있다."



그 사진을 찍고 얼마 후 비숍은 페루의 어느 계곡에 차가 추락해 죽는다. "아흐레 후 비숍의 동료인 로버트 카파는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군인들을 찍다 지회를 밟아 죽게된다."



베르너 비숍의 유산은 그 아름다움과 인간적 상황에 공감하는 묘사로 돋보이는 사진 수백 점을 포함한다. 인간의 슬픔을 담은 얼굴에서 활력있는 인간의 정신까지, 전쟁과 기아의 상흔에서 전통문호의 단순한 진정성까지 비숍은 그의 시대를 용기와 사랑으로 찍었다. 비숍은 자신의 예술적 감수성과 참여하는 증언자로서의 유럽적 저널리즘의 전통을 결합하여 사진의 명확한 기준을 표현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이미지에서 이루고 잇는 것이었다. '깊이있게, 전적으로 자신을 헌신하고, 온 마음으로 싸워 얻어낸 작업만이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매그넘 갤러리:

http://www.magnumphotos.com/C.aspx?VP=XSpecific_MAG.PhotographerDetail_VPage&l1=0&pid=2K7O3R14WSNQ&nm=Werner%20Bisch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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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블로워 1 - 해군 사관 후보생
C.S. 포레스터 지음, 조학제 옮김 / 연경문화사(연경미디어)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만일 누군가 나에게 육전의 명저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삼국지’를 꼽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삼국지를 능가하는 해전의 명저는 없을까? 나는 그 해답을 이 책 ‘혼블로워’에서 찾았노라고 자신 있게 얘기하고 싶다. 혼블로워는 리얼리티 면에서 삼국지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에 가까울 뿐 아니라 근대 서구사를 꿰뚫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혼블로워를 만났을 때 나는 박진감 넘치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정밀한 항해묘사, 함상 생활의 애환, 리더십, 세계사를 좌우한 해양력의 운용, 나폴레온 전쟁은 물론 애틋하고 진실한 사랑의 이야기까지… 이렇게 다채로운 내용들을 함축하고 있는 혼블로워 시리즈는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의 독자들을 즐겁게 했으며 지금까지도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뒤늦게나마 한국판으로 출간되어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윤광웅 제독)

이책 표지 뒤에 인쇄된 추천사이다. 개인적으로 이 추천사보다 이 시리즈에 대해 더 잘 말할 능력은 없다. 단지 간결하고 명쾌한 추천사에 사족을 붙이는 것 밖에는.

추천사에 언급되듯이 이 방대한 시리즈의 매력은 리얼리티에 있다. 그러나 그 리얼리티는 삼국지와 같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혼블로워는 해가 저물어 가는 프랑스 해안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프랑스 혁명 정부를 전복하려는 그의 조국 영국의 시도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결국 패하고 말앗다. 파리의 신문은 미쳐 날뛸 것이며 런던의 관보는 이 사건에 대해 냉정한 다섯줄만 ㅎ할애할 것이다.

혼블로워는 1년도 지나지 않아 세계는 이 사건을 거의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20년이 지나면 아니 20년이 지나면 완전히 망각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저 뮤질락 시 광장의 목 없는 사체, 분쇄되어 버린 붉은 코트의 영국 병사들, 4파운드 포의 산탄 작렬로 흩어져 버린 저 프랑스 병사들… 그들은 전부, 마치 이 날이 역사가 뒤바뀐 하루인양 알고 그렇게 죽어갈 것이다.”

이 소설의 대상은 프랑스 혁명기 영국해군이다. 총이라고 해봐야 전장식 머스킷에 불과하고 전함이라해봐야 범선에 불과한 시대이다. 물론 그 시대는 근대에 보기 드문 영웅이 활약한 시대이기도 했다. 나폴레옹이라는.

그 영웅의 이야기는 이름없는 병사와 장교들 그리고 그들이 싸운 이름없이 잊혀져 버린 전투들이란 노이즈를 배경으로 말해지지 않는다. 나폴레옹이란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것은 러시아 침공이라든가 워털루 전투 같은 굵직한 이름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거대한 이름들과는 거리가 멀다. 이책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이름도 없는 전투들이며 그 전투에서 분투한 이름없는 병사와 장교들일 뿐이다. 소설의 주인공 역시 그런 이름없이 잊혀져간 사람일 뿐이다.

소설은 주인공 혼블로워가 장교도 아닌 장교후배생으로 전함에 배치되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귀족도 아니고 상류층도 아닌 열일곱 견습사관의 자리는 밑바닥부터일 수 밖에 없고 그 자리는 녹녹치 않다.

“사관실의 식사를 책임지는 선입 장교로서 그는 광범위한 공무상의 권한을 갖고 있었다. 말은 영악하게 잘했으며 나쁜 꼼수에 관한한 그는 도사였다. 저스티니안 함에서 그를 통제할 군기담장부장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어떤 꾀를 부릴지 구분하기는 어려웠을 터이앋.

어느 견습사관이 두어 번 심슨의 횡포에 반항했지만 그때마다 심슨은 반항자를 집어 던지고 무지막지한 주먹으로 상대를 기절시켜 버렸다. 심슨은 상대에게 어떠한 상처도 입지 않았으며 상대는 언제나 눈에 시퍼런 멍이 들었고 입술은 맞아 터졌다.

이제 견습사관실은 행동으로 폭발시킬 수 없는 노여움으로 들끓고 있었다. 견습 사고나 중에는 그에게 아첨하는 자나 추종자도 있었지만 그들도 내심 이 폭군을 증오하고 있었다. 문제의 뿌리는 깊었고 분노를 불러일으킨 원인은 보통 이런 횡포로 끝나지 않는데 있었다. 깨끗한 셔츠가 필요하면 동료들의 옷장에서 강제로 빼앗아 입는다든지, 식탁에 나온 고기 가운데 가장 맛있는 부분을 독차지한다든지, 모두가 간절히 기다리는 술 배급을 가로채는 것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이 정도라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모든 권력을 가진 자라면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일을 벌여 방해를 하는 것이엇다ㅓ. 고전을 공부한 혼블로워는 심슨에게서 마치 로마 황제들의 폭군 모습을 연상할 정도엿다. 심슨은 클리브랜드에게 그의 관록을 나타내는 구레나룻을 강제로 잘라버리게 했다. 또 해스터에게는 매킨지를 밤낮을 가리지 않고 30분마다 깨우라는 임무를 부여하여 두 사람 모두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헤스터가 그 임무에 조금이라도 게으르면 욕설을 퍼부었다.’

이책의 매력은 이런 사소한 디테일에 있다. 그런 디테일은 함상 생활의 디테일 뿐 아니라 마스트, 톱 세일, 커터, 프리깃, 전열함, 풍상, 풍하와 같은 범선 시대의 낯선 용어들로 채워진 항해 장면과 전투 장면들까지 포함한다. 이책은 잊혀져 사라져 버린 시대의 모습을, 역사책에도 나오기 힘든 소재들을 종이 위에 살려놓는 리얼리티가 매력이다.

그러한 매력은 이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쟁 장면들에도 해당된다. 이책을 메우는 전투들은 거창한 전투들이 아니다. 1권의 전투들은 영국해군의 대륙봉쇄작전의 일환으로 치뤄지는 전투들이다. 대함대가 서로 격돌하는 일은 볼 수 없다. 단지 적의 상선을 공격해 나포하고 군항에 정박한 적함 한척을 빼앗으러 잠입하고 나포한 상선을 모항으로 몰고 가는 작디 작은 해군의 일상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주인공이 대단한 것도 아니다. 주인공은 어느 정도 재능이 있는 전도유망한 사관후보생이다. 그러나 밑바닥에서 겪는 고난에 자살할 생각을 하고 처음 맡은 배를 부주의로 침몰시키고 포로로 잡히기까지 한다. 연전연승하며 승승장구하는 영웅이 아닌 약간 재능이 있지만 평범한 장교에 불과하다.

이책이 다루는 모든 것은 거창하지 않다. 평범할 뿐이다. 그러나 그런 평범함의 모자이크가 실제 전쟁의 현실에 가깝다. 바로 그렇게 쌓아올린 모자이크이기에 이책의 리얼리티는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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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 골딘 Nan Goldin 열화당 사진문고 11
귀도 코스타 지음, 김우룡 옮김, 낸 골딘 사진 / 열화당 / 200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사진집의 표지는 방콕 게이클럽의 여장남자를 찍은 사진이다. 이책에는 뉴욕의 게이바의 여장남자들, 트랜스젠터, 호모 또는 가끔씩 레즈비언들의 초상과 그들의 성교장면이 등장한다. 그 사진들은 연출된 것이 아니다. 모두 사진작가의 친구들이다.

퀴어, 뭔가 어긋났다고 말해지는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따뜻하며 그들에게 공감을 숨기지 않는다. 사진집의 처음에 놓인 사진은 강가에서의 소풍을 찍은 것이다. 그 사진에는 케이크를 먹으며 즐겁게 웃고 잡담을 나누는 여장남자들과 여성이 담겨져 있다. 작가가 퀴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 사진처럼 따뜻하다. 이성애자들이라면 역겹다고까지 생각할 동성애자들의 성교장면도 비정상이란 느낌을 갖기 어렵다. 그녀는 그 사진들에서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적인 아름다움을 잡아낸다.

그녀는 왜 그런 시선을 갖게 된 것일까? 물론 그녀가 동성애를 경험하긴 했지만 이성애자이기도 하다. 그녀가 레즈비언이 된 이유는 많은 레즈비언들이 그렇듯 남성과의 관계에서의 환멸때문이었다.

그녀의 출세작인) ‘The Ballad of Sexual Dependecy’가 출간되었을 때 표지에 쓰인 ‘침실에서의 낸과 브라이언(1983)’을 보자. 이 사진은 “책 전체의 시상을 대변하는 결정체라 할 만하다. 친밀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고독하게 존재하는 두 사람과 남성과 여성 사이에 영속저긍로 존재하는 변증법을 완벽하게 묘사해내고 있다. 화면에 나타난 빛의 구성조차도 두 존재간의 거리감과 차이점을 강화한다. 골딘의 표정에는 남자와 좀더 접촉하기를 원하는 욕망과 함께 어떤 두려움이 동시에 나타난다.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암시해준다.”

‘친밀함 안에 존재하는 끝없는 거리감’은 ‘The Ballad of Sexual Dependecy’의 중심주제이다. ‘침실에서의 남녀(1977년) 역시 같은 주제를 다훈다. “이 이미지에서는 남녀가 섹스 후 종종 느끼게 되는 기묘한 소외감과 소원한 분위기가 드러나 있다. 골딘은 이런 상황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물론 남녀관계에 대해 골딘이 그렇게만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섹스 중의 스킨헤드족(1978)’이나 ‘쿠키와 빗토리오의 결혼식(1986)’, ‘키스하고 잇는 라이즈와 몬티(1988)’는 섹스에서 드러나는 연인사이의 일체감을 잘 포착한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이 포착한 일체감에 “이 에로틱한 마주함이 일시적인 것이며 실패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어떤 불편한 느낌”을 숨기고 있다.

“골딘은 섹스를 영혼을 비추는 하나의 거울로 보았다. 그리하여 섹스를 사랑과 우정에 동반하는 고통과 기쁨의 보다 깊고 복합적인 관계성의 한 부분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 관계는 고독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 없다. 그녀가 찍었던 친구들이 즐겼던 마약처럼 일시적인 위안일 뿐이다.

그녀는 그런 시선을 어떻게 얻은 것일까? 어린 시절의 상처를 많이 언급한다. “얘기는 1960년대 초, 워싱턴의 별 특징 없는 한적한 마을에 살던 한 중산층 가정에서 시작된다. 아버지와 아버지와 네 자녀가 있었고 그 네 아이들과 함께 민권운동 집회에 참가하곤 하던 리버럴하고 진보적인 어머니가 잇었다. 당시 미국의 보수적인 분위기에 식상해 있던 전형적인 유태인 지식인 가정이엇다.

가족 모두를 보여주는 폴라로이드 사진이 한 장 남아 잇다. 어느 식당에서의 축하모임이엇던 것으로 보인다. 1964년이엇다. 바버라 홀리와 스티븐이 부모와 함께 앞불에 앉아 있고 그 뒤로 이제 갓 열살을 넘긴 낸시와 조나단이 서 잇다. 앨리스 밴드를 착용한 낸시는 가족 중 유일하게 카메라를 응시하지 않고 잇다. 당시 낸시의 꿈은 정신분석가가 되는 것이엇다. 언니 바버라 홀리는 낸시에게 마음으로 통하는 친구이자 삶의 한 본보기엿고 재능있고 열성적인 피아니스트엿다. 나른하고 즐거운 시골 생활이 일년간 이어졌다. 같은 또래 여자아이들처럼 ‘아메리칸 드림’에 빠져 잇던 시간이엇다. 그런 후 어둠의 시기가 찾아왔다.

1965년 4월 12일 언니 바버라가 끔찍한 방법으로 자살한다. 당시 열여덟이었다. 바버라의 죽음은 가족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낸시의 부모들은 상실감과 죄책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엄청난 이 사실을 단지 부정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살아 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엇다ㅓ.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버라의 죽음을 이웃들이 모르게 하는 것이엇다. 낸시에게도 사고로 죽은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예민한 낸시는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고 있었고 깊이 상처받게 된다. 어떤 경우라도 진실을 찾아내는 데 집착하고 만일 그것이 진실이라면 불편함이나 따분함, 체면 손상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그의 태도는 아마 이 사건에 연원하는 것 같다.낸시는 온갖 사람들과 온갖 사물들을 대상으로 격렬한 싸움을 벌인다. 그녀는 미국 정신의 어두움으로 존재하는, 그 ‘꿈’ 뒤에 감춰진 악몽인 당대의 거짓과 물질주의를 가장 미워햇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녀는 싸움에 지친 것 같다. 그녀가 사진경력을 시작할 때 주류는 미술계와 마찬가지로 추상적 구조가 지배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만의 싸움을 해나갓다.

그러나 그녀는 진실만 보는데 지쳐간 것으로 보인다. ‘부두에 서 있는 귀도(1998)’을 보자. “이탈리아 친구 중 한 사람을 찍은 이 사진은 인물과 풍경 간의 대조를 담아내려는 골딘의 새로운 추구를 보여준다. 보다 묵상적이고 부드러운 것에 대한 골딘의 기호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어떤 특정한 작업 안에 들어가 잇지 않으면서도 골딘의 야외사진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자연광을 교묘히 이용해 사람의 몸을 순수 추상처럼 묘사해내고 있다.”

그리고 ‘실버 힐 병원의 골든 리버 다리 위에서 찍은 셀프 포트레이트(1998)’를 보자. “최근의 이 사진은 골딘의 자화상과 새롭게 발견한 자연을 하나로 결합하고 있는 것으로 그 안에는 개인의 고독이 묘사되어 잇다. 골딘으로서는 매우 힘겨운 시기에 찍은 이 사진은 배경의 아름다운 금빛과 완전히 대조되는 고통스런 내면으로부터 만들어졋다는데 큰 의미가 잇다. 슬픔과 비밀을 간직하고 잇으면서 동시에 희망과 화해를 암시하고 잇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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