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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비숍 Werner Bischof ㅣ 열화당 사진문고 7
클로드 쿡맨 지음, 이영준 옮김, 베르너 비숍 사진 / 열화당 / 2003년 1월
평점 :
베르너 비숍의 삶은 우연이 지배했다. 사진하게 된 것도 사진작가에서 기자가 된 것도 모두 우연이었다.
유복하고 지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베르너 비숍은 어릴 적부터 미술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재정적으로 안정된 직업을 가지길 원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화가가 아닌 산업디자인을 선택해 1933년 취리히 응용미술학교(the School for Arts and Crafts)에 들어간다. 그러나 “응용미술학교에서 상업미술 수업은 이미 자리가 찼기 때문에 사진을 하기로 했다. 카메라라는 새로운 매체의 끝없는 가능성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가 사진을 선택한 1930년대는 모더니즘의 시대였고 파리와 함께 유럽 사진의 중심지인 베를린에선 사진 역시 그 영향을 받은 뉴 비전 운동(참고: http://www.metmuseum.org/toah/hd/nvis/hd_nvis.htm) 이 한창이었다. 뉴 비전이란 말을 만든 모홀리 나기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뉴 비전)로 사진을 정의했다. “낡은 비전은 1890년대에서 1910년대까지 꽃을 피웠던 픽토리얼리즘이었다. 모더니스트 사진가들은 회화주의자들의 부드러운 초점과 톤의 효과를 거부햇다. 그들은 다른 예술을 흉내내는 대신, 매체 자체의 독특한 능력을 탐색하면서 순수성을 고집했다. 모홀리 나기는 스스로 빛을 그리는 화가라 말했다.”
30년대 비숍의 사진은 뉴 비전 운동의 일부였다. “초기 십 년간의 사진에 대해 회상하면서 비숍은 ‘나는(계란, 식물 등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을 배웠다.’고 썼다.” 졸업 후 그의 작품들은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그 당시 비숍의 작업태도를 완벽주의라 말한다. “한 예로 조개껍질은 비숍이 광고사진 일을 하던 시절 계속 나타나던 소재였다. Argonauta(취리히, 1941)란 사진은 자연에서 발견한 바닷가 풍경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장면을 연출하는데 비숍이 얼마나 극도의 완벅주의를 추구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 스튜디오에서 직은 이 정물사진은 조개의 뿔들이 배경에 비해 희게 보이고, 앞쪽에서 떨어진 그림자는 모래에 비해 검게 보이도록 세심하게 배치되고 조명된 것이다. 그런 효과를 얻기 위해 비숍은 수도 없이 많은 시간을 조개껍질을 자르고 사포질하고 윤을 내는 데 썼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은 사진에 그려진 사물이어야 한다. 사진이 실제보다 더 실제같이 보이도록 하가 위해선 사물 자체의 모습이 아니라 매체의 성격에 맞는 것이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된다.
사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이 피사체가 될 때 역시 마찬가지이다. '뒷 모습 누드' (취리히, 1937)는 실제보다 더 실제같은 사진을 찍는 비숍의 능력을 잘 보여준다. "비숍은 모델의 등을 톤에 대한 연구로 바꿀 정도로 빛을 아주 잘 다뤘다. 진한 검은색의 넓은 영역과 좁지만 강한 하이라이트 사이에 잘 조절된 회색의 영역이 있다. 비숍은 또한 일반적인 기대와는 다르게 보이는 공간적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배경으로 보여야 할 왼쪽의 검은 부분은 모델의 앞에 있는 평면처럼 보여서 마치 모델이 오른쪽의 검은 평면 앞쪽에 떠 있는 듯이 보인다."
“역사적인 사건만 아니었다면 베르너 비숍은 독창적인 빛의 작용과 형식에 대한 순수한 연구를 통해 예술계에 뛰어난 사진작업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2차대전은 비숍이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를 떠나게 만든다.
“사건이란 2차세계대전과 그 후유증으로 나타난 유럽의 황폐, 식민주의ㅏ의 해체와 냉전이었다. 격동의 세계를 맞아 비숍은 예술 사진가로 남아 있을 수 없엇다. 그는 인간과 그 문제에 대한 열렬한 증언자로 변신했다.” 덩굴, 민들레 씨앗, 누드, 레이스를 대신해 그의 사진에는 갑자기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비숍은 스위스의 노동자들, 맹아학교, 이탈리아의 티치노에 있는 난민수용소, 그리고 스위스의 이탈리아어 사용지역을 찎었다. 평화주의자 로맹 롤랑의 열렬한 독자인 그는 이 사진들과 이후 작업들에서 휴머니즘과 사회주의를 받아들인다.
”티치노의 수용소에서 찍은 이 사진은 텅 빈 시선이 깊은 심리적 상처를 암시하는 난민 어린이를 보여준다. 비숍은 전쟁이 그의 '상아탑'을 파괴해버렸다고 썼다. 그리고 '그 후로 나의 관심은 고통받는 인간의 얼굴에 집중되었다. 집에서는 전쟁 전에 찍은 섬세한 사진들을 생각에 잠긴 채 연구했다. 그것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은 사진들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나는 나날의 공포로 감각이 마비되고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십만의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전후 6년간 유럽 가로지르며 그가 많은 "사진들이 불에 타 버린 독일 국회의사당 건물에서부터 수많은 도시의 벽돌과 돌무더기들까지 물리적인 폐허를 강조하고 있다. 어떤 사진들은 상징적인데, 구멍나고 짖어진 병사의 철모가 폭격 맞은 독일 국회의사당 앞 물웅덩이에 놓여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국회의사당' 베를린, 1946) 불에 타 버린 차와 트럭의 잔해가 독일 국회의사당을 감싸고 있다. 돔은 부서졌지만 건물의 독특한 외양은 알아 볼 수 있다." 비숍은 폐허의 도시적인 스케일을 배경으로 인간의 스케일을 사진의 전경에 배치한다. 그러나 그 역시 도시의 폐허와 마찬가지로 "파편들이 뚫고 지나간 철모가 물웅덩이에 녹슬어가는, 폐허"로 상징할 뿐이다.
"그러나 비숍이 전후에 찍은 대부분의 사진은 첫번째 여행에서 발견한 주제를 나타낸다. 그것은 인간의 불굴의 용기이다. 몬테 카시노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새집을 짓기 위해 큰 돌 두개를 머리에 이고 간다. 그리스의 지로스에서는 넝마 같은 바지를 걸친 사람들이 전쟁고아를 위한 시설물의 뼈대를 올린다. 비숍의 어린이 사진도 그것들만큼이나 복합적이다. 그는 천장도 없는 교회에서 줄넘기를 하는 여자 아이, 그리고 폐허 속에서 게임을 하는 아이들의 사진을 통해 그들의 활기를 찬양했다. 그러나 그들의 텅빈 시선과 말 없는 눈물에서 그들이 받았을 상처를 회상하기도 했다."
포토저널리즘으로 전향한 비숍은 '초기의 심미주의와는 분명히 단절을 했다. 에든버러의 성당을 찍고는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이 죽은 것을 찍으려고 몇 시간 동안 조명과 삼각대와 씨름하는 일은 이제 정말 매력 없다. 차라리 사람들이 오가는 혼잡한 철도역에 서 있는 것이 낫겠다.' 그는 곧 훨씬 더 생생한 곳을 경험하게 된다. 1951년 2월 그는 인도로 갔고 극동에서 거의 이 년을 있었다. 거기서 그의 이후 사진 경력을 채워 줄 자신만의 주제를 개발해낸다. 서구화가 옛날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을 휩쓸었을 때 비숍은 보통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을 느꼈다. 그는 현대의 경제적인 힘의 공세에 대항해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그들의 투쟁을 기록하고 싶어했다. 인도, 일본, 한국, 홍콩, 인도차이나, 멕시코, 페루 등지에서 그는 도시를 벗어나 모더니즘의 침범에 해를 입지 않은 마을들을 찾아 다녔다."
'어머니와 아이' (비하르 주 인도, 1951)는 그의 전후 유럽을 다룬 사진들과 연속선 상에 있다. 인도를 덮친 대기근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사진이라 할 만한 이 장면에서 비숍은 낮은 앵글을 써 도움을 청하는 이 바싹 마른 여인을 기념비처럼 보여준다. 아이도 어머니의 제스처를 흉내내고 있는데 마치 가난과 배고픔이 미래의 세대에게도 되풀이될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비숍이 찍은 인도의 대기근 사진들은 미국의회가 인도원조안을 통과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제3세계 사진들 역시 그의 전후 유럽 사진들처럼 복합적이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을 다룬 사진들처럼 전쟁의 파괴를 다루기도 했지만 그런 폐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의지와 삶의 진정성을 보여준다.
그가 본 제3세계는 그가 겪은 뉴욕의 대립항이었다. "그는 뉴욕의 멈출 줄 모른 에너지를 '요부같이 흥분되고 매력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뉴욕의 '일상의 공허함과 메마른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강한 느낌을 받앗다. 맨해튼의 거리를 메운 얼굴들의 홍수 속에서 그는 '성공한 사람들, 환멸을 느낀 사람들, 살려고 버둥거리는 사람들, 생기를 잃은 사람들, 포기햇지만 아직 불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사람들, 크고 멋지지만 차갑고 무자비한 달러의 세계에서 서서히 쇠퇴해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의 사진에서 뉴욕이란 도시는 억압적이고 비개성적으로 느껴진다. 사람들은 익명적이고 눅눅한 길거리를 서둘러 걷고 있거나 가게 진열장 속에 희미하게 모습을 보이며 걸설용 철근 더미 속에 갇혀있기도 하다."
어쩌면 오리엔탈리즘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는 제3세계에 자신의 환상을 그리는 대신 제3세계를 있는 그대로 사진에 담으려 노력했다. 가령 '바닷가에서 (트리반드룸, 인도, 1951)'에서 '소년들이 바다와 모래의 경계에서 발가벗고 뛰놀고 있다. 인도에서 많은 서구 사진가들이 그랬듯이 대상을 이국적으로 보이게 하기보다 오히려 비숍은 자유와 즐거움이라는 보편적인 순간을 포착했다."
그가 제3세계에서 보려 했던 것은 그의 대표작이며 이책의 표지로 쓰인 '쿠스코로 가는 길' (페루, 1954)에 잘 나타난다. "피리를 불며 홀로 걸어가는 이 소년은 또 다른 인간적 보편성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바로 음악을 만들려는 충동이다. 자기가 만든 구조물에 갇혀버린 뉴욕의 노동자와는 달리 이 이미지는 사람들이 그들의 자연환경에 맞추어 편안하게 살아가는 곳에서 볼 수 잇느,ㄴ 전통문화의 인간적 진정성을 찬양하고 있다."
그 사진을 찍고 얼마 후 비숍은 페루의 어느 계곡에 차가 추락해 죽는다. "아흐레 후 비숍의 동료인 로버트 카파는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군인들을 찍다 지회를 밟아 죽게된다."
베르너 비숍의 유산은 그 아름다움과 인간적 상황에 공감하는 묘사로 돋보이는 사진 수백 점을 포함한다. 인간의 슬픔을 담은 얼굴에서 활력있는 인간의 정신까지, 전쟁과 기아의 상흔에서 전통문호의 단순한 진정성까지 비숍은 그의 시대를 용기와 사랑으로 찍었다. 비숍은 자신의 예술적 감수성과 참여하는 증언자로서의 유럽적 저널리즘의 전통을 결합하여 사진의 명확한 기준을 표현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이미지에서 이루고 잇는 것이었다. '깊이있게, 전적으로 자신을 헌신하고, 온 마음으로 싸워 얻어낸 작업만이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매그넘 갤러리:
http://www.magnumphotos.com/C.aspx?VP=XSpecific_MAG.PhotographerDetail_VPage&l1=0&pid=2K7O3R14WSNQ&nm=Werner%20Bisch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