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밤 세계문학의 숲 4
바진 지음, 김하림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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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重慶森林)’, 이책을 보면서 떠오른 이름이다. 왕가위 감독의 초기작인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왜 제목이 중경삼림이라 붙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소설을 보면서 왜 그런 제목이 붙었는지 알게 되었다.

충칭(重慶)은 안개로 유명한 도시이다. 안개. 새벽의 숲을 거닐거나 강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산뜻하면서 편안한 느낌이다. 그러나 도시의 안개는 어떨까? 원시림 한가운데 길을 잃고 헤맬 때의 기분이 아닐까? 오리무중(五里霧中), 오리에 뻗은 안개 가운데 있다는 말과 같은 느낌일 것이다.

중국인은 개인주의가 강한 민족이다. 그들의 개인주의가 화려하게(?) 만개한 홍콩. 왕가위 영화는 도시라는 바다에 갇혀 갈 곳 없이 ‘섬’처럼 고립된 개인들을 그린다. 그의 영화 역시 사랑 타령이지만 그들의 사랑은 어딘가 어긋나 있고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다. 섬끼리는 바라만 볼 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바라보는 것 조차도 안개에 가려 윤곽만 보일 뿐이다.

중경삼림의 여주인공 페이(왕비)는 주인공 633(양조위)과 사랑을 꿈꾸며 그의 집에 몰래 들어가 청소를 하고 인테리어를 바꾼다. 우렁각시와 같은 페이의 행동은 ‘타락천사’의 이가흔에게 복제되는데 이는 어쩌면 모든 남자들이 꿈꾸는 판타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슬픈 사랑이며 판타지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홍콩이란 거대도시의 사랑을 말하는 왕가위의 영화는 ‘영웅본색’과 같은 홍콩느와르만큼이나 암울하다.

이 소설 역시 암울하다. 이 소설의 무대는 중일전쟁이 막바지에 달한 1944년에서 45년 일본이 패전하기 충칭이다.

이 소설은 전쟁을 피해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쫓겨온 한 가족이 전쟁의 무게에 눌려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그린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전쟁소설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전쟁은 무대배경 이상이 아니다. 일본군과 중국군의 전투는 도시 멀리서 일어나고 가끔 일본군의 폭격을 조심하라는 사이렌이 울릴 뿐이다.

이 소설에서 전쟁은 지평선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그 전쟁은 때때로 일본군이 이웃도시를 점령했다, 충칭으로 진격하고 있다, 피난을 가야할지도 모른다는 루머로만 떠돈다.

그러나 전쟁은 주인공의 가족을 짓누르는 실체이다. 충칭의 안개처럼 그들의 숨을 조이는 조건이다.

대학을 나와 교육자로 일하던 주인공 부부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당시 일제시대 조선에서도 그랬지만 대학을 나올 정도면 상당한 집안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집안일은 모두 하인이 알아서 하는 것이었고 손에 물 한방울 묻혀본 일 없던 집안이엇다. 그러나 피난을 다니면서 돈도 떨어지고 아는 인맥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 떨어진 가족.

대학시절, 교사 시절의 꿈은 피난생활의 고달픔에 온데간데 없고 가진 것도 없이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쓸데 없는 지식뿐. 충칭에 와 얻은 것이라고는 야워어 허약해가는 몸뚱아리 뿐이고 생활고와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그의 어깨에 가족의 불화까지 더해진다.

어려울 때 의지할 곳은 가족뿐인데도 주인공의 가족은 싸움으로 지세운다. 이기적이고 보수적인 시어머니는 대학을 나온 신여성인 며느리를 이해할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다.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며느리에게 아들을 뺐기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 더군다나 무능한 아들은 하고싶지도 않은 교정일이나 하면서 푼돈을 벌 뿐인데 수완이 좋은 며느리는 은행에 취직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그러니 자존심이 상하면서 더더욱 좋아질 수가 없다.

아내는 가족의 생계를 떠안으면서 시어머니와 싸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 하루를 마감하는 생활에 지쳐간다. 남편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안다. 그녀도 남편을 사랑한다. 그러나 자신의 무능 때문에 가족이 이런 고생을 한다는 자괴감 때문에 그와 아내 사이엔 대화도 뜸해진다. 더군다나 세상에 남은 것이라고는 어머니와 아내 뿐인데 둘이 싸우기만 한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 중에서 아들은 누구 편도 들지 못하고 지쳐가고 병들어간다.

이 소설의 부부는 중경삼림에 나오는 왕비와 양조위와 비슷한 캐릭터이다. 중경삼림의 주제가로 쓰인 크랜베리의 히트곡처럼 가벼운 발걸음에 생명력이 넘치는 아내는 아무리 어려워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밝게 표정을 지으려 노력한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그녀를 맞는 것은 충칭의 차가운 안개 같은 냉냉함과 적막함. 남편은 그런 그녀에게 아무 것도 해줄 힘이 없고 의지도 없다.

전쟁이란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에 짓눌린 세 사람은 어서 전쟁이 끝나 지긋지긋한 현실이 끝나기를, 전쟁이란 안개가 걷히고 해가 뜨기를 기다리는 것 밖에는.

결국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그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파멸 밖에 없다. 시어머니와 다투는 것도 더 이상 인내하기 힘들어졌을 때 그녀는 집을 떠나 다른 도시로 전출한다. 이 소설의 시작이 그녀의 가출에서 시작했듯이 소설의 끝도 그녀의 가출에서 끝난다. 떠나기 전날까지도 그녀는 남편이 잡아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를 잡지 못한다. 잡을 자격을 없다고 그리고 그녀를 잡을 수단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떠났을 때 그를 지탱하던 힘이 소진되어 그의 병이 악화된다. 그래도 그녀에게 마지막 배려로 병이 좋아지고 있다고 마지막 죽는 날까지 편지에는 쓴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본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곧 붕괴할 구사회, 구제도, 구세력이 뒤에서 그들을 지휘하고 있다. 그들은 반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희생자가 되고 만 것이다. 나는 세 명의 주인공을 모두 동정하지만, 그러나 또한 그들 모두를 비판한다.”

이 가족의 비극은 그들보다 거대한 힘에 눌려 그 힘에 반항할 수 없었던 나약한 인간의 무함 때문에 일어난 것이란 말이다. 작가는 그 거대한 힘을 당시 중국의 모순에서 찾지만 그들이 느꼈던 자신이 어쩔 수 없는 힘에 휘둘린다는 무력감,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무력감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가족이 무너져 가는 것을 우유부단하게 손 놓고 있었던 남편에게 답답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을 짓누르던 충칭의 안개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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