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산월기(山月記) / 이능(李陵)
나카지마 아츠시 지음, 명진숙 옮김, 이철수 그림, 신영복 추천.감역 / 다섯수레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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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책에 대해 안 것은 이책을 감수한 신영복 씨의 책에서 이다. 논어를 다룰 때 이책에 수록된 ‘제자’를 언급했다.

논어를 읽는 방법은 여러가지이다. 주자가 논어집주 첫머리에 인용한 “논어를 읽고도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는 정자의 말은 논어를 읽는 방법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말이다.

논어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인(仁)이라든가 성(誠)이라든가 또는 충, 효 등의 추상적 개념이나 가치가 아니다. 공자라는 사람의 구체적인 삶의 진실이다. 공자의 논술이 아니라 공자의 말을 기록한 논어는 제자들과의 대화를 기록했다. 그렇기에 논어의 말은 구체적인 상황이 있고 대화의 상대방이 있다.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상황을 이해해야 하고 누구에게 한 말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공자라는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런 구체적인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이책에 실린 ‘제자’는 그렇기에 논어를 읽는 사람에겐 공자를 이해하려는 사람에겐 가치가 높다.

언뜻 보기에 ‘제자’는 그리 대단한 작품은 아니다. 한문고전을 어느 정도 읽은 사람에겐 어디선가 읽은 말들을 이어붙인 글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원칙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로서의 나카지마는 ‘이능’뿐만 아니라 ‘산월기’ ‘명인전’ ‘제자’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술이부작이라는 절제된 필의로 역사의 사람들을 단지 현재에다 생환해 놓는데에 자신의 역할을 한정해 둔다.” 그러나 그 술이부작은 문학적 상상력의 술이부작이다.

“이대로 좋은 것인가? 사마천은 자문했다. 이렇게 열띤 필치가 과연 괜찮은 것인가? 그는 ‘만드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자신이 할일은 ‘논술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사실 그는 논술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얼마나 생기발랄한 논술 방법이가? 비상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기술이엇다. 그는 때때로 ‘만드는 것’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이미 쓴 부분을 다시 읽어보고 그것이 있으므로 해서 역사상의 인물이 살아서 움직인다고 생각되는 자구는 지웠다. 그러면 인물은 분명히 생생했던 호흡을 먼춘다. 이로써 ‘만드는 것’에 대한 우려는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면 항우가 항우가 아니지 않은가. 항우도 시황제도 초나라 장왕도 모두 같은 인물이 되어 버린다.

다른 인간을 같은 인간으로 기술하는 것을 ‘논술한다’고 할 수 있는가? ‘논술한다’란 다른 인간은 다른 인간으로 기술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되면 그는 역시 지워버린 자구를 다시 살려 두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원래대로 고쳐 다시 한 번 읽어본다ㅑ. 그제야 그는 마음이 가라앉는다. 아니 그뿐이 아니다. 거기에 기록된 역사상의 인물들, 항우나 번쾌, 그리고 범증 등이 모두 이제는 제대로 각각의 자리에 안주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어떤 고민을 했을지 저자가 상상한 대목이다. 사마천의 사기, 특히 열전은 역사이기도 하지만 문학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실만 기록했다면 사기열전이 지금까지 널리 읽히는 힘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사마천은 역사적 사실만 기록하지 않고 그 인물이 되어 그 사람이 했을 법한 말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었기에 인물은 더 진실에 가까운 인물이 되었다.

저자가 이책에 실린 작품들에서 하려한 것이 바로 그런 일이다. 술이부작하기 위해 창작하는 것.

이책에 실린 역사상의 인물들에 대한 저자의 해석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 위에서 인용한 사마천에 대한 ‘창작’도 사마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제자’에서 그리는 자로와 공자에 대한 저자의 인물분석도 새로운 것은 없다. 이책에서 읽는 자로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논어 전체를 통하여 자로는 가장 많은 단편에서 그 언행을 보여 주고 잇을 뿐 아니라 그의 두드러진 개성 때무누에 논어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는다. 이를테면 그가 용기와 신의를 중히 여긴다던가 성격이 직설적이라던가 공자에 대해 종종 불만도 갖는 강한 의협심의 소유자라던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자로는 공자가 자신에게 하는 대부분의 말이 어떤 커다란 가르침의 일환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공자의 노선과 갈등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자로 자신의 타고난 기질이 공자의 세계를 수용하기에는 늘 지나치게 견고하였기 때문이다.

자로는 적어도 공자가 어떤 측면에서는 소극적이고 옹색하다고 불만스러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결코 그러한 현실적 조건들에 얽매이지 않고 초연할 수 있다는 자신만만했다. 그것은 그가 호방한 사람이엇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이전에 부귀와 공명 등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행동하는 신념의 사람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개성적이고 자기중심이 강한 제자와 공자와의 사제관계는 특별했다. 공자는 자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르침에 있어서 바로 그의 여러 자기 자긍하는 부분을 정면으로 찌르며 그의 가르침을 시도햇다. 따라서 공자가 자로의 장점으로 인정하는 바는 다음 순간 어김없이 비판의 표적이 된다. 공자의 비판을 읽다보면 자로가 어떻게 공자와 각별한 사제의 인연을 유지하며 공문의 중요한 인물로 부각될 수 있엇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자로에게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 특별한 미덕이 었었다. 그의 두드러진 미덕인 저으이감이라든가 신의 또는 용기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공자에 대한 아주 특이한 경외심이엇다. 이 경외심은 자로에 있어써 언제나 그 어떤 예감과ㅣ도 같이 늘 그를 사로잡고 있었지만 좀처럼 의식적으로 자각되지는 않았고 그만큼 논어 단편에서도 은미한 모습으로만 나타난다. 자로와 공자의 관계를 이해할 때 이 측면을 놓치면 자로는 거의 희화화되는 것이 보통이다.

자로는 공자라는 이 희유한 인물과의 만남을 그 자신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전 생애를 걸고 이 인물을 돌보고 존중하고 또 그의 진실성을 끊임없이 시험하면서 그와의 이 인연을 유지해갔다. 그러나 정작 그는 위나라 대부 공회의 읍재로 있던 중 위나라의 정변에 휘말려 공자보다 한 해 먼저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비극적 최후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스승과 제자로서의 길고도 절실한 인연에서 끊임없이 이끌리고 또 끊임없이 달아났던 그는 역시 완전히 끌려들 수도 오나전히 달아날 수도 없었던 그 미묘한 인간적 거리에서 공자와는 크ㅜ게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이수태)

좀 길게 인용한 것은 자로에 대한 표준적인 이해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이책의 ‘제자’는 위의 인용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논술’인 위의 인용에선 느낄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제자’만이 갖는 점이다. 그 느낌은 사기열전을 읽을 때의 맛과 같다. 그 느낌을 신영복 씨는 이렇게 말한다.

“견고하면서도 결코 과열하지 않는 그의 담담한 문장과 함께 그의 작품 도처에서 느껴지는 공간과 여백과 여유가 바로 그 점을 증거로 보여준다. 모든 문학작품의 여백은 곧 독자와 관객들의 창조적 공간이다. 독자들의 몫이고 책임이다. 뿐만 아니라 때와 장소를 초월해 생환한 역사의 사람들을 삶의 현장으로 인도하는 이른바 ‘생환의 완성’도 어차피 당대 사람들이 고뇌해야 할 몫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사람들을 살려내는 작업은 곧 역사를 완성시켜 가기 위한 실천이고 또 하나의 창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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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행성 환상문학전집 6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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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유지할 수 있는 도구는 일정한 수를 넘지 못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도구의 생산과 소비, 양쪽에 모두 최소한의 시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은 집단의 구성원들은 한정된 종류의 기술만을 배울 것이고 어떤 희귀한 기술을 가르쳐줄 전문가의 수가 충분치 않다면 그 기술은 맥이 끊어질 것이다. 뼈, 돌, 줄에 관한 좋은 아이디어가 살아남으려면 수가 많아야 한다. 진보는 비틀러기다가 퇴보로 바뀌기 쉽다.

기술적 퇴보의 가장 두드러진 예는 태즈메니아, 세계의 끝에 있는 섬이다. 이곳에 5,000명도 안 되는 수렵채집인이 아홉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잇다. 이들은 정체하거나 진보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다. 지속적이고 점진적으로 보다 단순한 도구와 생활방식으로 퇴보했다.

이는 오로지 기존의 기술을 유지할 사람의 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처음 이들 원주민과 접촉했을 ㅜ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원주민드에게는 본토의 친척들이 가진 기술과 도구 중 많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늘이나 송곳을 포함해 골각기는 전혀 없었다. 추울 때 입는 의복, 낚시바늘, 자루가 달린 도구, 미늘이 있는 창, 고기잡이 통발, 투창기, 부메랑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기술은 차근차근 가차없이 버려졌다. 예컨테 골각기는 점점 단순해지다 약 3,8000년 전부터 완전히 포기되었다. 골각기가 없어지자 가죽을 기워 옷을 만들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원주민들은 매서운 겨울 추위 속에서도 거의 벗고 지내야 했다. 피부에는 바다표범 지방을 바르고 어깨에는 왈라비 모피를 걸치는게 전부다.” (매트 리들리)

헤인 시리즈 둘째권인 이책에선 태즈메니아인에게 일어난 일이 우주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맹은 오랫동안 적에 맞서 싸울 준비를 했어요. 더 강한 세계들은 더 약한 세계들을 도와 무장을 하고 대비를 하도록 했지요. 지금 우리가 가알에 맞서기 위해 준비하려는 것과 약간 비슷할 겁니다. 마음듣기 역시 그들이 가르친 기술이었고 책에 따르면 온 행성을 다 태우고 별들마저 폭파할 수ㅜ 있는 불무기도 있었다고 해요. 내 동족들은 그 시대에 고향 세계를 떠나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니었어요. 그들은 당신네와 친구가 되고 당신들이 연맹의 일원이 되고 싶어할지 아니면 적에게 붙으려 할지 알아내고자 했어요. 하지만 적이 왔어요. 내 동족들을 태워온 배는 전쟁을 돕기 위해 왔던 곳으로 돌ㄹ아갔고 우리 중 일부는 세계에서 세계로 말을 전할 수 잇는 ‘멀리 말하기’와 함게 배를 타고 떠났지요. 하지만 일부는 이곳에 남았어요. 적이 올 경우 이 세계를 돕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고 그저 돌아갈 수가 없어서였는지도 모르지요. 이유는 알 수 없어요. 기록에는 그저 배가 떠났다고만 하니까요. 내 생각에는 조상들은 배가 금세 돌아올 줄 알았던 것 같아요. 그게 10년(지구시간으로 1000년)전의 일이죠.”

연맹이 침략을 받으면서 탐사대가 원시행성에 고립된다. 고립된지 지구시간으로 600년. 탐사대는 멸종의 위기에 있다.

“손에 쥔 푸른 도자기 잔은 무척이나 오래된 물건이었다. 다섯 번째 해(지구 시간으로 500년)에 만든 물건이었다. 창문 아래 서가에 꽂힌 수제 인쇄물도 오래디었고 창틀에 끼운 유리마저 낡았다. 그들의 사치품, 그들을 문명인으로 만들어주는 물건, 그들을 알테라로 유지시켜주는 물건은 모조리 옛ㄱ덧이었다. 아가트가 태어난 이후는 물론이고 그 찬참 전부터 인간의 복잡하고 미묘한 기술과 영혼을 지지해줄 에너지나 영ㅍ는 없어진지 오래엿다. 지금 그들은 고작해야 유지하고 지탱해 나갈 뿐이엇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아니 문제의 근원은 인구감소였다. “한 해 한 해 최소한 열 세대에 걸쳐 그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아주 완만한 속도로 줄기는 했지만 매번 조금씩 적은 수의 아이들이 태어난다. 그들은 규모를 줄이고 한곳에 모였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옛 지식과 옛 관습을 가르쳣지만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의 삶은 점차 초라해졌고 정교함보다는 간소함에 분쟁보다는 평온에 성공보다는 용기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들은 퇴보햇다.”

외계에서 온 종족에게 새로운 행성에 적응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생물학적으로. 원주민과그들은 유전자의 한두 분자가 다르다. 그러나 그 차이 때문에 그들은 그행성의 먹거리를 그대로 소화할 수도 없다. 효소를 정기적으로 먹어야 소화가 가능하다.

“고향 세4계는 태양에 좀더 가까웠고 일년의 길이가 월기(지구시간으로 1년) 한번만큼밖에 안됐어요. 책에서는 그렇게 말하지요. 생각해봐요. 겨울을 다 합쳐서 90일밖에 안된다면 어떨지…”
이말에 둘 다 웃음을 터트렸다.
“불 피울 시간도 없겠는걸요.”

그 행성에서 한 계절은 한 갑자와 맞먹는다. 임신이 되도 유산, 사산되는 비율이 높다. 생물학적인 부적응이 문제인 것으로 추정하지만 방법이 없다.

“어린 시절 느끼던 두려움이 되살아났다. 그는 어른이 된 후 그 두려움에 이유를 붙였다. 그가 태어나고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그 조상들이 스물세 세대에 걸쳐 태어난 이 세계가 그의 고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종족은 이곳에서 외계인이었다. 그들은 마음 속 깊이 언제나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먼 곳에서 난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는 조금씩 조금식 장엄할 정도로 느리게 식물처럼 끈기 있는 진화과정을 통해 접지를 거부하고 그들을 죽여갔다. 그러나 배는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죽어 없어질 것이다. 이곳에서의 삶, 이 세계에서의 긴 유배와 투쟁도 사기 조각처럼 깨어져 사라질 것이다.”

방법은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것이다. 원주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다.

“난 당신이 싫어 당신은 인간이 아냐 당신이 싫다고!” 후에 주인공의 아내가 되는 여자가 그에게 던진 말이다. 두 종족은 자신은 인간이라 부르면서 상대 종족은 인간이 아닌 무언가라고 부른다.

“힐프가 뭐죠?”
“우린 당신들을 그렇게 불러요.”
“스스로는 뭐라고 부르고요?”
“인간”

퇴보하고 있지만 어쨌든 더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그들이 원주민을 다른 종이라 보는 것은 이유가 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원주민이 그들을 인간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은 전형적인 원시종족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이 계획적인 진군은 힐프답지 않았다. 힐프들은 시간이나 공간을 아가트의 종족처럼 선형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방식으로 생가하지 안항ㅆ다. 그들에게 시간이란 한 발짝 앞, 한 발짝 뒤에서 빛나는 등불일 뿐이엇다. 나머지는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엇다. 시간이란 이날, 까마득한 일 년 중 바로 이날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역사적인 어휘가 아예 없었다. 그저 오늘과 ‘지난날’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최대한이라고 해봐야 다음 절기밖에 내다보지 않았다. 그들은 바깥에서 시간을 보지 않고 밤의 등불처럼, 몸의 심장처럼 시간 속에 들어 있었다. 공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공간이란 경계를 지어놓은 어떤 표면이 아니라 영역, 자아와 씨족과 부족의 중심에 자리한 심장부였다. 영역 주위는 가까이 접근하면 밝아지고 떠나오면 희미해지는 지역들이었다. 멀면 멀수록 희미했다. 하지만 경계선이나 한계선은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은 인간이고 그 밖에 있는 사람은 인간일 수없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단순했다. 더군다나 혼혈도 되지 않으니 그들이 서로 어울릴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공동의 적을 만나면서 그들은 서로 가까워진다. 그리고 600년이란 시간이 그들의 유전자를 바꾸었다.

“생명체가 뭐라고요?”
“적응한다고. 반응하지. 변한단 말이야! 충분한 압력을 받고 충분한 충분한 세대가 흐르면 유리한 쪽으로 적응하게 되는 법…. 태양 방사선이 결국에는 이 생성에 적정한 생화학적 기준치까지 작용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사산과 유산은 모두 과잉적응이거나 어머니와 표준화된 태아가 서로 맞지 않아서… 이상하군 이상해 이상해…! 이건 이종 교배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뜻이야”
“다시 듣겠어요.”
‘인간과 힐프 사이에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잇다는 얘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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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캐넌의 세계 환상문학전집 5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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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헤인이라는 곳이 있다. 엄청나게 오래전부터 유지된 문명 세계이며 테라를 비롯하여 은하계 곳곳에 흩어져 잇는 인류 세계는 모두 헤인에 뿌리를 둔다. 수백만년 전에 흩어진 채 고립되어 각기 다른 진화와 적응을 거쳤기에 유전자에 약간의 차이가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어느 시점엔가 헤인은 다시금 예전의 식민지들을 찾아다니며 탐사를 벌이고 그 과정에서 다른 문명과 이방인들기리의 접촉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헤인 시리즈의 공통 배경이다. 그위에서 각각의 소설은 언제나 거대한 흐름 속에 있는 한 ‘세계’를 배경으로 그곳에서 배경으로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그 일을 겪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춘다.’

헤인 시리즈의 첫권인 이책 역시 그렇다. 이 소설의 무대는 아직 청동기 시대에 불과한 이름없는 행성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행성을 탐사하던 연맹의 조사단이 반란군의 공격을 받는다. 유일한 생존자가 된 로캐넌이 반란군의 위치를 연맹에 알리기 위해 대륙을 건너는 모험을 감행하고 고난 끝에 연맹에 반란군의 좌표를 알려 소탕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매력은 그 뻔한 모험 스토리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그 모험의 무대가 흥미롭다. 이 행성의 원주민은 세 종족으로 그들이 만드는 세계는 북구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대장장이인 지하종족은 드워프, 그들의 사촌으로 엘프(원래 북구신화에 나오는 귀여운 요정족에 가깝다)를 연상시키는 피아족, 그리고 인간과 거의 같은 전사종족.

엘프를 떠올리는 피아는 언제나 유쾌하다. “’할라의 신부, 키리엔 레이디, 바람의 딸, 아름다운 샘레이 만세!’ 그들은 그녀에게 사랑스러운 이름들을 선사했고 그녀는 그런 이름을 듣는 것이 좋았다. 모두가 웃고 잇다는 데는 신경쓰지 않았다. 피아는 말을 하면서 늘 웃었다. 말을 할 때는 말만 하고 웃을 때는 웃기만 하는 건 그녀의 방식일 뿐. 푸른 색 긴 망토를 입은 그녀는 소용독ㄺ이치는 환영 속에 우뚝 섰다.”

유쾌하고 무해한 종족. 그러나 연맹의 입장에선 쓸모가 없다. 연맹은 그들의 사촌인 대장장이 두더지들, 그데미아르를 선택했다. 연맹의 목적에선 그들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정책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주인공은 그런 종족들을 이해하기 위해 이 행성에 왔다. 연맹의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모든 세계의 연맹은 이;런 식으로 결정적인 적과의 대면을 준비했다. 백여개의 세계가 훈련을 받고 무장을 했으며 천여개의 세계가 강철과 바퀴와 트랙터와 원자로의 사용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러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 직업이며 확실히 뒤떨어진 세계 몇 곳에 살아본 힐퍼 로케넌은 모든 것을 무기와 기계 사용에 거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의심스러웠다. 켄타우루스, 어스(지구), 세티의 공격적인 도구 사용 인류들이 선도하는 연맹은 지성 생명체의 특정 기술과 능력과 잡재력을 경시했고 너무 편협한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해 왔다. 너무 많은 것을 훼손했고 그 결과 이제 반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물론 피아를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은 유쾌할 뿐 무력햇다. “피아에게는 검도 없고 재산도 없으며 적도 없다.” 그들은 말하지 않고도 서로에게 말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다른 마을에 있는 다른 피아의 마음은 들을 수 있나?”
“약간은요. 그들과 함께 산다면, 아마도요… 우리는 마을의 일원이 기억하는 것은 모두가 기억해요.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와 속삭임과 거짓과 진실을 알아요. 그중에 어떤 것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수가 없지요.”

“쿄, 동족들 사이에서 혼자만의 이름은 없었나?”
“’목동’이나 ‘어린 형제’라고 아니면 ‘달리는 아이’라고 불렸지요. 달리기를 잘햇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별명이잖아. 설명하는 말이지,… 올호르나 키에므리르처럼. ㅍ피아는 뛰어난 작명가들이야. 찾아오는 사람마다 별명으로 인사하지. 스타로드, 검을 가진 이, 태양의 머리카락, 언어의 대가라는 식으로…. 안기야르가 별명 붙이기를 젛아하는 건 피아에게서 배운 것같아. 그런데 정작 본인들에겐 이름이 없군.”

내가 너가 너가 나이며 아버지가 나이고 할아버지가 나이고 증조부가 나인 존재.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고 서로의 마음을 듣는 존재. 그런 존재는 개인으로서 감정을 갖지 못한다.

주인공은 마음을 듣는 능력을 얻으면서 피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엿다.

“로캐넌의 머리는 낯선 생각과 느낌들의 파도, 머릿 속에서 웅성대는 천여명의 이방인들로 빙빙 돌았다. 외부인들이 일컫는 말이엇다. 그가 ‘듣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긴장, 욕망,ㅡ 감정, 신경 체계를 엉클어놓고 이리저리 겹치는 수많은 사람의 실제 위치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감각의 방향, 무시무시한 공포와 질투의 회오리, 표류하는 만족감, 잠의 심연, 반즘 이해하고 반쯤 지각한 거칠고 괴로운 혼란 상태 같은 것이었다.”

인간은 그런 상태를 견딜 수 없다. 주인공의 후대에 그 능력이 전해지면서 그 능력을 활용하는 방법론이 정립된다. 재능을 나고 난데다 훈련까지 받은 사람들은 머 거리에서도 상대방이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그 마음을 엿을 수 있었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누구든 그들의 두려움이나 기쁨을 알 수 있는 것과 비슷하죠. 마음듣기가 그보다 많은 것을ㄷ 알아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어를 동해 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마음으로 말하고 마음이야기를 듣는 것은 다른 문제예요.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 마음으로 말을 걸면 보통은 뭔가 듣고 있다는 걸 알기도 전에 마음을 닫아버리;죠. 특히 들리는 말이 스스로가 ㅇ원하거나 믿는 게 아닐 떼에는 더 그렇고. 비전달자들은 보통 완벽한 방어막을 갖고 있어요. 사실 비언어소통을 배운다는 것은 주로 어떻게 방어막을 내리는가를 배우는 작업이죠.


그런 능력을 얻은 주인공은 변했다. “’당신의 동족은 당신을 찾으러 오지 않나요?’ ‘올지도 모르지요. 8년 후에 말입니다. 죽음은 한순간에 오지만 삶은 그보다 훨씬 느리지요. 나는 산맥 속 샘에서 물을 마셨습니다. 르기고 다시는 내 적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잇는 곳으로 가고 싶지 않군요.” 개인으로선 반쪽이며 그들의 감정 역시 반쪽인 피아만이 마음을 듣고도 멀쩡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언제나 유쾌할 수 있다.

“피아는 두려운 것ㄹ은 기억하지 않아요. 왜 그래야 하죠? 우리는 선택하지요. (그데미야르와) 둘로 갈라졌을 때 우린 밤과 동굴과 금속의 칼은 진흙족에게 남기고 푸른 계곡과 햇빛, 나무 그릇ㅎ을 택했어요. 그래서 우린 반족 인간이죠. 그리고 우린 잊어버렸어요. 너무나 많이 잊어버렷죠.”

“상냥하고 파악하기 어려우며 아득하고 이상한 작은 사람들. 켜는 제 동족을 반쪽 인간이라 물렀다. 하지만 쿄 자신은 더 이상 완전한 그들의 일원이 아니었다. 그들이 준 새 옷을 입자 모습도 같아 보엿고 움직이는 것도 비슷했지만 그래도 그들 사이에서 쿄는 외따로 떨어져 서 있었다. 그건 그가 자유로이 마음의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이방인이라서였을가. 아니면 고캐넌과의 우정을 통해 그가 변했고 그래서 좀더 고독하고 좀더 슬프며 좀더 완전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기에 지상을 지배하는 종족은 안기야르, 전사들이다.

“’당신의 적이 자식 없이 죽기를’ 할란의 안기야르 전원이 모여 억수 같은 비유와 격한 과장법을 쏟아내 가며 적을 파멸시키고 절멸시키겠노라 맹세하고 있었다. 안기야르, 그들은 허풍쟁이들이었다. 복수심에 불타며, 자부심 강하고 완고하고 무식할뿐더러 ‘할 수 없다’는 동사에 해당하는 일인칭 표현을 아예 갖고 잇지 않은 사람들. 그들의 전설 속에는 신이 나오지 않았다. 오직 영웅들만 있을 뿐.”

그리폰을 타고 하늘을 나는 전사인 그들은 영웅시대를 살고 있었다. “차가운 분노에 휩싸여 사람을 죽이려다가 바로 다음 순간 친절하게 말을 걸다니 얼마나 묘한 존재인가. 오만함과 충실함, 무례함과 친절함. 그 지극한 부조화 속에서 모지언은 진정 군주다웠다.” 안기야르의 귀족만 그런 것은 아니엇다. 노예들 역시 자부심이 드높았고 그들 역시 영웅시대를 살고 있었다. 그들은 주인을 선택할 때 이렇게 맹세한다. “제 주인께 제가 살아 잇는 시간과 제 죽음을 바치나이다.”

“한 사람의 운명이 중요치 않다면 무엇이 중요합니까?” 두발로 서는 자인 안기야르는 모든 것에 당당하다.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두발로 걷기에 당당하다. 그렇기에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다.

“”놈이 나는 찾는 것을 평원에서 보았지요. 산맥을 넘기 위해 길을 찾는 중에도 두 번 보았습니다. 내가 아니라면 누구의 죽음이란 말입니까? 너의 것이겠느냐, 야한? 네가 두번째 검을 찬 군주, 안기야르였던가? 로카난ㄴ의 것일수도 없지. 그에게는 아직 가야 할 길이 있으니. 사람은 어니서나 죽을 수 있지만 군주가 자신만의 죽음, 진정한 죽음을 만나는 건 오로지 자신의 영지에서뿐이야. 전장이든 홀이든 길 끝이든, 진정한 죽음은 군주의 영지에서 기다리지. 그리고 이곳은 나의 땅이다. 이 산맥에서 나의 동족이 왔으며 내가 이곳으로 돌아왔으니 나의 두번재 검은 싸우다가 부러졌지. 하지만 들으라, 나의 죽음이여. 나는 할라의 후계자 모지언이다. 이제 나를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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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전쟁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11
조 홀드먼 지음, 강수백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차라리 우울한 편이 나았을텐데. 나는 생각에 잠겼다. 따지고 보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거의 확실한 파멸인 것이다. 우리들은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 한 번 이상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베테랑이었다. 전투당 평균 생존율이 34%에 불과한 전쟁에서 말이다. 만약 행운 따위를 믿는다면 옛날에 이미 다 써버렸다고 해야 옳지 않겠는가.”

미래로 끝도 없이 뻗어진 전장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 어떻게 어떻게 살아남아 지구로 돌아오면 훌쩍 몇십년, 몇백년이 흘러가버렸다. 모든 것이 달라져 있다. 수백년이란 시간에 언어조차 녹아내려 영어는 영어인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되어 있고 문화도 달라져 있다. 인구를 조절한다는 명목으로 인간의 유전자를 조작해 동성애자로 만들어놓고 이성애자는 변태가 된 세상, 더 이상 아이를 사람이 낳지 않고 기계가 낳는 ‘멋진 신세계’.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알 수 없다. 천년을 넘은 전쟁을 치르며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전투와 전투 사이의 길고 긴 훈련과 대기, 짧고 무의미한 살육과 죽음, 그리고 또 대기. “전쟁은 어땠나, 친구?” “대부분 지루햇지. 지루하지 않았을 때는 두려웟어.”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 어차피 아는 이도 없는 이 우주에서? “오 다이애나! 다음 항구에 닿을 때 최고급 스카치를 한 병 선물하게 해 다오. 700년 후의 얘기가 되겠지만.”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인류를 토오란이란 외계인으로부터 지킨다고 하지만 전투는 태양계 밖에서, 지구에선 보이지도 않는 은하 구석 또는 마젤란 성운의 황폐한 혹성에서 치뤄지고 그 전투를 기억해줄 전우마저 적의 손에 상대성의 시간에 사라져 버리는. 무의미함.

“과거에 전쟁을 하고 있었던 나라의 국민은 언제나 전쟁과 밀접한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신문은 전쟁 기사로 가득 차고 제대 군인들은 전선에서 돌아왔다. 때로는 그들의 고향이 전선으로 변했고 침략자들이 자기집 앞을 행군하는 것을 보거나 밤중에 폭탄이 쉭쉭거리며 덜어지는 소리를 들어야 햇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승리를 향해 가고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패배를 늦추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적은 손으로 만질 수 잇는 실체엿고 선동가가 만들어낸 이해가능하고 증오할 수 있는 괴물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적이란 모호하게 밖에는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생명체엿고 악몽이라기보다는 만화영화의 중인공에 더 걸맞았다. 전쟁이 모국에 끼친 영향은 주로 경제적인 것이엇고 감정적인 영향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세금이 늘어났지만 그만큼 일자리도 늘어나는 식이엇다. 22년만에 제대해서 돌아온 군인이라고는 27명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시가행진을 하기에도 모자라는 수였다. 절대 다수는 이 전쟁이 갑자기 끝나면 지구 경제가 붕괴하리라는 생각밖에는 하고 잇지 않았다.”

무의미함에 질려 지구로 돌아가려 했지만 그곳은 알던 곳이 아니었다. 무의미한 전쟁에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받아주고 위로해줄 고향은 거기 없었다. 결국 갈 곳은 익숙해져버린 무의미한 전장뿐.

“필사적으로 즐겼던 것이다. 전쟁의 양태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3년 후까지 우리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극미에 가까웠다. 우리는 치명적인 병에 걸렸지만 놀랄 정도로 건강한 병자였고 일생동안 느낄 감각을 반 년 안에 경험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위안이 있기는 햇다. 남은 여생이 아무리 짧더라도 적어도 우리 두 사람은 함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기억에만 있는 20세기를 공유하는, 우주에서 서로를 이해해줄 수 잇는 유일한 연인을 빼앗겨야 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 취하는 것뿐.

“괜찮아. 약을 먹었거든.”
“그래. 나도 정말 행복해.”
나도 아까 내 약을 삼켰다. 판단력을 잃는 일이 없이 낙천적이 되는 약이란다. 우리들 대다수가 조금 후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왠일인지 그다지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무의미함을 견디고 전쟁의 끝을 보았다. 그러나 전쟁의 끝에서 본 것은 그 전쟁이 아무 명분 없는 농담이엇다는 것뿐. “1143년간 계속된 전쟁은 허위에 의해 시작되었고 두 종족 같의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했던 고로 계속되엇다. 처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을 때 제일 먼저 나온 질문은 “왜 너는 그런 일을 시작했지?’였고, 대답은 “내가?’였다.”

전쟁의 이유는 있었다. 우주선이 사고를 당해 사라졋고 군인들은 적대적 외계인의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받은대로 돌려주었다. 그렇게 전쟁은 천년이 넘게 지속되엇다. 그 끝은 무의미일 뿐이엇다. 그러나 무의미의 끝에는 구원이 있었다.


“2878년 10월 11일

윌리엄에게,
이 편지를 당신의 인사 파일 속에 넣어 둡니다. 하지만 당신 성격으로는 읽지도 않고 내버릴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꼭 당신 손에 전해달라고 못박아두었습니다.

보다시피 나는 살아남았습니다. 아마 당신도 마찬가지일 줄 압니다. 내게로 와 줘요.

기록을 보고 당신이 사데-128로 가 있고 몇 세기 후에나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문제없어요.

나는 미들 핑거라는 행성으로 갑니다. 그곳으로 가려면 콜랩서 점프가 두 번 필요하고 주관 시간으로는 10개월 걸립니다. 미들 핑거는 이성애자를 위한 일종의 도피처 같은 곳입니다.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아요. 내가 가진 돈 전부와 다른 제대 군인 다섯 명의 전재산을 털어서 UNEF의 순양함을 샀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타임 머신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상대성 이론적 셔틀을 타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유일한 목적은 매우 빠른 속도로 5광년을 나아간 다음 다시 미들 핑거로 돌아오는 일입니디ㅏ. 나는 십년에 한 달의 비율로 나이를 먹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이 아직도 살아 있고 예정대로 돌아온다면 당신이 도착할 때 나는 스물여덞살이 되어 있을겁니다. 빨리 와줘요!

지금까지 다른 남자를 만나지도 않았고 다른 남자 따위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아흔 살이건 서른 살이건 상관하지 않아요. 당신의 애인이 될 수 없다면 당신의 간호부가 되겠어요.

메리게이”


“베트남 전쟁의 영향을 무위로 돌리려는 역습에는 역사를 다시 쓰는 일도 포함된다. 여기서 중요했던 것ㅇ른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미국의 군인들이었다. 그들이 겪은 일들이 그들과 유리된 채 뭔가 다른 것으로 변잴도앴다. 참전군인들은 위험하ㅣ고 폭력적인 존재라는 것이 헐리우드의 일반적인 묘사방법이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영화들이 ‘택시 드라이버’, ‘람보’, ‘커밍 홈’이다. 그리고 다른 수십편의 B급 영화들도 마찬가지로 참전군인들을 위험한 존재로 그리고 있다. 그들은 정신과 의사들이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란 병을 발견하고 그런 사람들의 기억을 ‘환각 재현’이라고 부르기 훨씬 전부터 영화로 재현된 과거지사를 떠올리며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헐리우드의 선전 요지는 재향군인 병원 정신과 의사들의 선전 요지와 같았다. 사병들의 폭력적 욕구가 베트남 전쟁이 폭력으로 치달은 원인이라는 것이다.

사병들이 명령을 받아 잔혹한 일을 저지르고 그 대가로 보상을 받았고 전쟁 전략이 소모전이었으며 마침내 사병들이 교전 행위를 거부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잔혹성을 사병들 탓으로 돌리며 비난하는 일이 벌어졌다.

미국인들이 그 전쟁을 잔인한 전쟁으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헐리우드는 전쟁의 잔혹성ㅇ에 대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야 햇다.” (조너선 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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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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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레베카 피죤(Rebecca Pidgeon)은 가수보다는 배우로서 더 기억된다. 재미있게도 가수로서나 배우로서나 그녀의 분위기는 유사하다. 우아하면서 자연스러운 외모처럼 가수로서 그녀는 거부감 없는 특유의 아름다운 멜로디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그녀의 미성은 고급 클럽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갖는다.
피죤의 대표곡처럼 되어버린 'Spanish Harlem'은 오디오파일용 테스트 음반에 단골로 등장하는 곡이다. 그러나 그곡은 그녀가 쓴 것이 아니라 Ben E. King이 처음 부른 곡으로 끊임없이 커버되는 곡이다.

이 곡의 주제는 거리에 핀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이다. 베니 킹이 부른 원곡은 삭막한 거리에서 장미를 발견한 순간의 놀라움과 기쁨에 초점을 맞추며 리듬은 정서에 맞게 밝고 동적이다.
그러나 피죤은 가사는 그대로 두고 곡의 정서의 시제를 현재에서 과거로 옮긴다. 피죤의 커버는 살아있는 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책갈피에 박제된 장미를 보고 그 꽃이 살아 있을 때를 회상하는 것 같이 느껴지며 그녀의 건조하고 사색적인 쿨 재즈적 리듬처럼 정서적으로 정적이고 차갑다.

두 곡 중 어느 것이 아름다운가 물으면 누구나 피죤의 곡이 월등히 아름답고 말한다. 왜일까? 정서의 승화 때문이다.

피죤은 장미의 아름다움을 가사가 아니라 우아하게 변형된 멜로디나 리듬과 같은 음악형식의 아름다움에 의해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주제의 간접화는 보컬 정서의 억제로 구현되면서 아름다움이란 주제는 현재가 과거로 옮겨진다.

탐 맥크래( Tom McRae)는 음악이란 나비를 박제하듯 살아 움직이는 삶을 순간에 고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회상적이며 슬플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상하게도 좋은 음악, 뛰어난 음악은 압도적으로 회상적이다. 시간이 박제된 음악. 그런 음악의 매력은 듣는 이를 끌어당기는, 깊은 내면에서 끌어올려진 정서이다. 그러나 기쁨은 깊이 가라앉지 않는다. 내면의 깊이에 잠긴 감정은 슬픔이 대부분이며 그렇게 끌어올려진 감정은 깊은 울림을 갖는다.

(요즘도 교과서에 실리는지 모르겠지만) 황순원의 소나기는 문학에서 그런 울림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 그 단편을 아름답게 만들고 정서적 울림을 갖게 하는 힘이다.

이 단편집은 그런 울림을 갖는 기억을 이야기한다. “마음은 그 주인이 마음먹은 대로도, 마음먹고 싶은 대로도 움직여주지 않는다. 놓아버리고 싶어도 놓지 못하고(구멍), 버티려고 해도 무너지고(코요테), 잘하고 싶어도 잘되지 않고(아술), 잘하고 싶어도 잘되지 않고(아술), 곁에 남고 싶어도 떠나게 되고(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가 어렵고(강가의 개), 잡을 수 잇는데 잡아주지 못하고(외출), 입으로 말을 해도 귀로 듣지 못하고(머킨), 나아가고 싶은데 뒤돌아보게 되고(폭풍), 안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되고(피부), 보며 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코네티컷).”

이 단편집의 이야기들은 잃어버린 것들과 그 상실의 기억을 말한다. 그 이야기들은 특별하지 않다. 어릴 적 죽마고우의 죽음, 무능력한 아버지를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된 어머니의 결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결핍의 대리만족, 두 남자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햇던 여자의 상처, 용기가 없어 떠나보낸 어릴 적 사랑에 대한 후회, 어릴 때 죽은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자의 방황.

있을 법한 왠만한 사람이면 하나쯤은 겪었을 법한 평범한 이야기들이다. 이 단편집에는 황순원의 소나기 같은 극적인 스토리가 없다. 죽으면서 관속에까지 가져가야할 아름다운 기억도 없다. 이 책의 이야기들은 평범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평범하면서도 특별할 것 없으면서도 깊은 울림을 갖는다. 피죤이 베니 킹의 드라마틱한 원곡을 평범하게 바꾸었기에 더 아름답게 되었고 더 깊은 울림을 갖게 된 것처럼. 이 단편집의 이야기들은 내면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진 것이기에 울림을 갖는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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