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 젊은 인문학자 27인의 종횡무진 문화읽기
정민.김동준 외 지음 / 태학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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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성격은 일종의 잡지라고 보면 된다. 비슷한 주제이지만 서로 논리적인 연결성은 없는 짧막한 글들을 모아 모자이크를 만드는 것이다.

이책에 실린 27편의 글은 필자도 다르고 소재도 모두 다르다. 그들을 하나의 책으로 묶어주는 것은 한국의 역사라는 울타리 외에는 없다.

잘 알려져있지만 내용을 아는 사람은 드문, 퇴계의 성학십도의 짧은 해설이 나오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남명 조식의 도상이 소개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책의 아티클들이 그렇게 울트라 하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절대 다수가 말랑말랑 소프트하다.

가령 다산이 그린 매조도가 왜 두점이 남아 있고 한 점에는 새가 두마리인데 왜 한 점에는 한 마리인가를 캐들어가는 아티클은 두마리가 그려진 잘 알려진 매조도는 시집가는 딸에게 준 것이고 한 마리가 그려진 매조도는 늙으막에 얻은 딸을 위해 그린 것이라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그 딸과 생이별할 수 밖에 없었던 다산은 그 그림을 갖고 있을 수 없었고 지인에게 선물해 눈 앞에서 그림을 치울 수 밖에 없었다는 사연을 추적한다.

재미는 있지만 다산 정약용이란 거물의 사연이 아니라면 시시콜콜하다. 물론 그림에 그런 사연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으로도 꽤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좀스럽다고 까지 생각할 소재이다.

이책의 아티클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대다수는 좀더 보편적인 내용을 다룬다. 고려시대 불화와 동시대 중국과 일본의 불화를 비교하는 아티클이나 정선의 금강산도를 읽어내리면서 당시 바위에 글을 새기는 관습의 권력론적 독해라든가, 영화 ‘왕의 남자’를 실제 역사와 비교하면서 비판적인 지식인으로서 조선시대 궁중광대를 읽는 아티클, 문중에 내려오는 기념화를 읽으면서 임진왜란 전후 조선의 전술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보여주는 아티클 등은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이책의 제목을 말해주는 성격의 아티클들은 보편적인 성격을 갖지만 좀더 사적인 레벨의 팩트를 다루는 아티클들이다. 책의 앞부분에 배치된 아티클들이 그런 성격을 잘 보여준다. 사대부들의 모임을 다룬 그림에서 당시 사대부들이 어떤 취미를 가졌었고 양반의 풍류라는 것이 실제 어떤 내용이었는가를 보여주는 몇 편의 글이 앞머리에 배치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어떤 ‘상업가’ 부인의 회갑연 기념사진을 파고 드는 글은 이책에 실린 아티클들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다.

회갑연 기념사진이 다 그렇듯이 이 사진 역시 일가 사람을 모두 찍은 사진이다. 그러나 사진의 사람들은 ‘상업가’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한 가운데의 가장은 물론 뒷줄의 남자들도 관복을 입었고 여자들도 신분이 높다는 것을 나타내는 옷을 입었으며 하나 같이 용모가 번듯하다. 사농공상의 서열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 글은 불일치를 파고 든다. 주인공의 가문을 추적하면서 가장 주인섭이 2품 가선대부까지 오른 고위관료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고위관료가 상업가? 그런데 실제 주인공은 종로 요지에서 지전, 즉 종이가게를 운영했다.

이런 불일치가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추적하면서 저자는 구한말 몰락해가는 국권을 읽는다. 2품 고위직을 지낸 사람까지 자구책을 마련해야 할 정도로 국가의 힘이 약해졌던 시절을 읽는 것이다. 주인공의 아들들은 아버지처럼 상인이 되어 종로통의 상권을 장악해간다.

주인섭의 가문만이 아니었다. 무늬만 양반이 아니라 고위직을 지낸 실세 양반들이 상업에 뛰어든 경우가 당시에 꽤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쩌면 이들은 구한말 전환기의 향방을 그 누구보다 직시하고 가장 현실적으로 처신한 것은 아닐가? 왕실과 국가가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취한 마지막 자구책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이들이 지금처럼 자신을 소개하는 명함을 만들었다면 아마도 ‘상인’이 아닌 ‘상업가’로 표기했을 것이다. 신분의 반전을 요구하는 시대에 꿋굿히 맞선 새로운 상인층이라는 자의식에서 말이다. 이재현과 주인섭의 사례는 과거에 누린 지위와 허세를 버리고 새로이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던 구한말 관료들의 쓸쓸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한장의 사진을 읽으면서 시대를 읽는 것. 이책의 아티클들의 성격이다. 이책이 읽는 그림들은 주인섭 가문의 회갑연 사진처럼 사연을 담고 잇다. 당시의 그림은 지금의 사진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일이 있을 때 그 일을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이책의 저자들은 그 그림들을 읽으면서 그림을 의뢰한 사람들이 기념하고 기억하려 했던 사연들을 읽는다. 그리고 사연들을 읽으면서 시대를 읽는 것이다.

그렇게 읽어낸 사연들은 이책이 다루는 그림들이 서로 아무 인연이 없듯이 제각각이다. 단지 과거 역사의 한 시점에 있었던 사연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 공통점이 없다. 그렇기에 이책의 아티클들은 순서 없이 아무데나 읽기 시작해도 어느 것을 빠트리고 읽어도 무방하다. 유기적인 연결이 없다는 말이다. 한권의 책으로 묶일 이유가 없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책으로 묶여진 27편의 글들은 하나로 묶여 과거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그 이미지들은 서로 아구가 맞지 않는 모자이크를 만들 뿐이지만 과거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구체적으로 그린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는 책이 되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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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왜 반복되는가 - 공황과 번영, 불황 그리고 제4의 시대
로버트 라이시 지음, 박슬라.안진환 옮김 / 김영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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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20년 새로 창당된 독립당의 마거릿 존스는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독립당의 공약은 분명하고 단호했다. 불법이민의 강력한 단속은 물론 합법이민에 대한 대폭축소, 관세 인상, 미국기업의 해외투자 또는 아웃소싱 금지, 외국인의 미국투자 금지.

아직 놀라기에는 이르다. 미국은 UN과 WTO를 탈퇴하고 일체의 해외개입을 중지하며 해외, 특히 중국에 대한 채무를 동결한다.

적자를 내지 않는 한 기업은 직원을 해고할 수도 임금을 삭감할 수도 없다. 연방정부는 적자예산을 운영할 수 없다. 은행은 예대업무만 할 수 있으며 투자은행은 금지된다.

국민의 소득은 50만달러로 제한되며 그 이상에 대해선 100% 과세되고 25만 달러이상은 80%를 징수한다. 세금도피에 관해선 시민권이 박탈된다.

“여러분은 우리의 조국을 되찾기 위해 투표했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앗아간 정치가들로부터 우리의 직장을 배앗아간 외국인들로부터 애국심이 없는 부자들로부터 기생충 같은 이민자들로부터 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행동했습니다. 이곳은 우리의 나라입니다! 열심히 일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좋은 직장과 높은 임금으로 보답해주는 나라입니다! 위만의 나라! 미국인만을 위한 미국입니다!”

히틀러의 등극을 연상시키는 충격에 당연히 미국의 기성정치권과 재계는 물론 동맹국들도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다. 대선 다음날 다우존스 지수는 절반, 달러 가치는 30% 하락했다. 경제계 인사와 학자들 정치 컨설턴트들은 방송에 나와 충격과 공포를 전달한다. 그들은 모두 같은 질문을 던졋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저자의 2020년 대선 시나리오에 대해선 한가지 밖에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설마. 저자도 그런 지경까지 갈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미국의 시스템이 그 정도로 엉성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200여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미국은 한번도 혁명을 허용하지 않았다. 문제가 있으면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개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1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판 나치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지금 개혁이 없으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경제 체체는 무엇을 위한 것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학술적으로 말하자면 대불황은 끝났다. 그러나 충격의 여파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경제는 언제나 쇠퇴를 딛고 일어선다. 그보다 의미심장하고 흥미로운 질문은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는 것이다.” 그 질문에 답하려면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의 역사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두가지 가지고 잇었다. 그것은 공동체와 개인 사이에서 어느 쪽이 중요하냐에 대한 답이었고 불평등을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답이엇다. “현대 미국 자본주의의 제1단계(1890~1929)는 수입과 부가 점차 집중되는 시기였고 제2단계(1947~1975)는 번영이 더욱 폭넓게 공유되는 시기였다. 제3단계(1980~2010)는 다시 점진적 집중의 시기였다.” 저자는 이제 역사의 시계추가 공동체적 사고, 공유의 방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때라고 말한다.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는 방향전환을 시작해야 한다는 신호라고 저자는 말한다.

“너무 오랫동안 미국인들은 너무 많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저축햇다.” 가이트너 재무장관의 말이다. 이번 위기는 부채위기이다. 미국인들이 능력 이상으로 빚을 끌어썼기 때문에 부채의 거품이 터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왜 미국인들이 그렇게 했는가는 묻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과소비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지난 30년간 미국은 물론 세계경제는 번영을 누렷다. 문제는 중산층들이 그 번영의 몫을 나눠갖지 못했던 것이다. 번영의 결과는 거의 대부분 상류층에게만 돌아갔다.

“근원적 문제가 부상한 것은 사실 사실 미국 중산층들이 글로벌 경쟁과 노동대체 기술로 인해 이중고를 겪기 시작한 1980년경이엇다. 이때부터 미국은 자국의 노동인력이 급격히 달라진 환경에 더 잘 적응하도록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노조에 권한을 부여하고 교육과 직업훈련을 개선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햇다. 그러나 그러기는커녕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중산층이 번성할 수 잇는 일련의 새로운 정책들을 시행하는 대신 정치 리더들은 전지전능한 자유 시장에 대한 우세한 신념을 바탕으로 규제완화와 민영화를 수용했고 노조를 탄압하여 축소시켰으,며 부자들에게 세금을 깎아주엇고 사회안전망을 분쇄햇다. 이로 인해 미국인 대부분의 임금은 침체되었고 일자리는 더욱 불안해졌으며 소득 불균형은 점진적으로 확대되었다. 경제 성장의 혜택이 갈수록 더 작은 그룹에 돌아가 축적된 것이다.”

미국인의 실질임금은 지난 30년 동안 거의 오르지 않았다. 30년 동안 경제성장의 결과가 “동등하게 분배되었다면 2007년 일반적인 국민의 생활형편은 실제보다 60% 이상 나아졌을 것이다. 그 증가분은 어디로 갔을까?” 증가분의 행방이 이번 위기의 원인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대량 생산이 대량 소비와 동행해야 할 때 대량 소비는 다시 부의 분배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기존의 부가 아닌 현재 생산되고 잇는 부의 분배 말이다. 그래야 국가의 경제 조직이 공급하는 재화와 용역의 양에 상응하는 구매력을 국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그런 종류의 분배가 달성되기는커녕 거대한 흡입 펌프가 작동해 당시 생산되던 부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소수의 손에 안겨주엇으며 이는 그들의 자본 축적을 도왔다. 대량 소비자들의 손에서 구매력을 앗아감으로써 자본가들은 그들의 축적 자본을 새로운 생산설비에 재투자할 근거를 세워주는 조건, 즉 자신들의 생산품에 대한 효과적인 수요까지 없애버린 셈이 되엇다. 결과적으로 마치 포커 게임에서 시간이 갈수록 소수의 플레이어에게 칩이 집중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른 플레이어들 즉 여타의 국민들은 돈을 빌려야만 게임에 계속 참여할 수 있었다. 대다수 국민들의 신용이 바닥나자 게임은 중단되엇다.”

이번 위기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1934년부터 1950년까지 연준의장을 지낸 애클스가 대공황의 원인을 설명한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 이번 위기의 원인이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애클스가 지목한 공황의 주범은 ‘불균형의 심화’였고 이번 위기의 주범 역시 동일범이란 것이다.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역사는 반복되지는 않지만 운율이 맞기는 한다. 2007년에 이르던 그 세월 동안 중산층의 실질임금이 오르지 않거나 떨어진 탓에 그들이 구매를 계속할 수 잇는 유일한 방법은 다시 말해서 국가의 경제발전에 비례하여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더욱 많은 빚을 지는 길뿐이엇다.”

저자가 ‘대번영’의 시대라 말하는 시절이 끝난 1970년대 미국인들은 이전과 같은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3가지 대응 메커니즘을 만들어냈다고 저자는 말한다.

첫째는 맞벌이로 가정의 총수입을 늘렸다. 그러나 “미국 가정들은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햇다. 가계의 추가소득이 가져다주는 혜택으로도 가사나 자녀를 돌봐줄 사람을 고용하는 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지 못하는 시점에 이른 것이다.”

두번째 메커니즘은 일하는 시간을 늘려 수입을 늘리는 것이다. 미국인의 노동시간은 일벌레로 소문난 일본인들보다 더 늘었다. 그러나 “역시 한계에 다다르고 말앗다. (투잡) 일자리를 더 구할 수 있다 해도 일할 수 있는 시간은 분명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는 방법은 저축을 줄이고 빚을 늘리는 것이다. 금융선진국 답게 미국은 돈 빌릴 수단이 널려 있다. 신용카드는 넘쳐나고 대출도 쉽다. 그런데 때마침 집값이 뛰기 시작하자 주택은 야금야금 꺼내쓰는 돼지저금통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거품이 그렇듯 부동산거품도 꺼지게 되어 잇었고 위기가 온 것이다. “그와 동시에 미국인들이 의지하던 마지막 대응 메커니즘도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비로서 더는 과거와 같은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없다는 놀랍고도 끔찍한 현실을 직시하게 되엇다. 상류층의 풍족한 생활수준을 감안할 때 자신들도 마땅히 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 여유를 소유하지 못하리라는 사실, 좀더 향상된 사람에 대한 기대를 충족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 대번영 시기에 경험한 여러 종류의 개선과 번영이 다시금 가능하리라는 예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 것이다.”

중산층의 수요는 사라졋다. 그러면 이제 수요는 어디서 만들어질까? 이제 악순환이 시작될 순서다. 부채거품으로 부양되던 경제에서 거품이 사라졌으니 남은 것은 꺼진 거품과 함께 경제도 꺼지는 것 뿐이다.

맞벌이와 과로, 빚까지 고통을 감내하며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메리칸 드림은 이제 드림에 불과하게 되었다. “중산층 미국인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무서운 사실은 ‘지금은 아니더라도 미래에는 물질적으로 더 나은 삶을 영위하리라’는 기대감을 포기하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끊임없이 위로 올라가고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더 나은 것을 쟁취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오랫동안 미국 중산층은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면 그들을 위해 그리고 그들의 자녀를 위해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어왔다. 더 나은 삶에 대한 의망이 가장 처참하게 부서진 시기는 바로 대공황 때였다.” 당시 미국인들은 엘리트들을 탓하고 체제를 탓하지 않고 ‘무능한’ 자신을 탓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럴까?대공황 시절 사람들처럼 인내심이 많을지 의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미래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꺾일 때 그들은 눈앞의 부자들에게 분노를 느낄 가능성이 높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도 그들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할 때와 달리 그들처럼 될 수 없다고 느낄 때 그들과의 거리감이 생기고 그들이 누리는 것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더군다나 그들은 이번 위기의 원인이면서도 위기의 책임은 지지 않고 부담은 자신들에게 떠넘기면서 ‘그들만의 리그’의 정상에서 배를 두드린다면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경제 게임이 대기업과 부유층에게만 유리하게 흘러가리라는 증거는 대불황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하나 둘씩 쌓여가고 있었다. 노동조합의 붕괴, 인건비 절감, 사회안전망 축소 등. 더군다나 정부는 일런 제도들을 유지하거ㅓ나 되살리려는 의지를 눈곱만큼도 보여주지 않았다. 불량채권과 사모투자는 기업들을 파산시키거나 심각한 부채를 안겨주었고 근로자의 대량해고를 강요했다. 반면 대기업과 금융회사의 경영진과 트레이더들의 눈부신 연봉과 성과습, 더불어 부자들의 한계세가 감축되엇고 월스트리트에 대한 규제들이 폐지되었다.”

미국의 나머지를 희생해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은행가들, 미국은 그들만의 나라로 보인다. “그러니 경제 게임이 조작되엇다고 믿는다고 해서 어찌 대중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은행가는 정치가가 되고 정치가는 은행가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익숙해진다. 유권자는 은행가들의 정치헌금으로 살 수 있는 숫자에 불과하다. 퇴직후엔 두둑한 보수를 받으며 은행가들을 위해 로비스트가 된다.

“흥미로운 민담이 있다. 부잣집 옆에 사는 농부가 있었다. 부자에게는 암소가 한 마리 있었는데 가난한 농부는 평생 뼈 빠지게 일해도 갖지 못할 가축이엇다. 농부는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햇다. 하느님께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웃집 암소를 죽여주세요.”

경제 게임이 자주 조작되는 러시아에서 농부들의 봉기는 대개 모든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보다는 부자들을 끌어내리는 쪽에 기울었다. 현재 추세가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도 러시아 농부들과 비슷한 처지가 될지 모른다. 독립당이 암소를 죽여 버리는 것이다.”

저자는 암소가 죽기 전에 불균형이 바로잡혀야 한다고 말한다.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중산층이 공평한 부를 분배받지 못한다면” 경제의 수요가 회복될 수 없고 “성장 둔화와 호황, 불황을 오가는 매우 불안정한 경제사회가 그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부자들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

둘째는 정치이다. 불평등이 바로잡히지 않는다면 극좌파와 극우파가 날뛰게 된다. 히틀러가 그 좋은 예이며 2020년의 시나리오는 현실이 될 것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부가 더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를 위해 세제를 다시 분배를 위한 방향으로 바꿔야 하며 실업자를 위해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재교육 정책을 도입해야 하며 미래의 중산층을 위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등의 중산층을 위한 정책 프레임을 짜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정책틀이 자리잡을 수 잇도록 정경유착의 시스템을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소수가 부와 소득을 독점하고 다수가 그 나머지를 나눠 갖는 나라에서는 그 누구도 성공할 수 없다. 불균형은 단순히 경제적 성장만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날실과 씨실을 가르고 찢어버린다. 경제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 합의가 깨진다면 국가는 무너질 것이다. ㅇ리가 성공을 거두고 권력의 정점에 이를 수 잇는 것은 오직 경제 및 정치체제가 안정되어 잇을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안전은 사회 체제가 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해 돌아가고 잇다는 대중의 믿음에서 비롯되낟. 그러한 믿음이 사라지면 모두의 행복과 안녕이 위협받고 결국 우리는 개혁을 택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합리적인 사람들이고 개혁이야말고 우리에게 남은 유일하게 합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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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펑유란 - 소설가 딸이 그려낸 한 철인의 인간적 초상
펑종푸 지음, 은미영 옮김 / 글항아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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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이미 10여 년전에 세상을 떠났다. 시간이 지나자 나중에는 아예 잊고 살았다. 그런데 실명의 위기를 앞두고 또다시 아버지가 내 곁에 오신 것이다.

‘무서워 말거라. 나는 살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냈다. 너도 그럴 수 있을게야.’”

두권으로 된 펑유란의 ‘중국철학사’가 나온 것이 1930년대이니 이제 거의 백년이 되어간다. 그러나 그 세월을 건너 지금까지 중국철학의 기본입문서로 아직도 부동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쓴 조지프 니덤은 펑유란에 대해 이렇게 말햇다. “펑 선생의 글은 현대 중국철학사에서 가장 해박하며 깊이가 있다. 이 분의 저서는 분명히 전 세계에 오랫동안 영향을 줄 것이다. 펑 선생의 저서는 일반적인 연구 방법을 사용하고 참고자료 역시 역대 여느 저서와도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수많은 한학자와 서구의 중국학자들이 그의 저서를 세기의 책이라고 보는 데 이의가 없다.”

이책은 사실상 비서로 아버지의 옆을 지킨 딸이 펑유란의 삶에 대해 말한다.

“아버지의 만년은 고달팠지만 동시에 찬란했다. 정치적 소용돌이의 늪에서 벗어날 때까지 전신에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을 만큼 핍박을 당했지만 다행히 목숨만은 건지셨다. 1980년 이미 85세의 고령인 아버지는 ‘중국철학사신편’ 일곱권을 쓰기 시작했다.” 눈도 보이지 않아 머리 속의 도서관을 뒤지며 구술로 150만자를 써내려가 1990년에 원고를 넘기고 그해 95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평생을 철학에 바친 학자로서 할 일을 모두 끝낸 것이며 한 세기에 가까운 삶의 목표를 이룬 것이다.

“아버지 세대는 19세기 말에 태어나 중국의 신문화를 창조한 세대였다. 어느 학과,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그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뜨거운 조국애. 자신의 조국이 눈을 부릅뜨고 세계 모든 민족 가운데 우뚝 서기를 열망하는 뜨거운 마음이엇다. 아버지는 ‘옛것을 밝혀 새것을 일구다’ , 즉 중국 문화의 정수를 빨아들여 신중국을 건설하는 자양분으로 삼고자 하셨다. 아버지가 임종 전에 완성한 ‘중국철학사신편’의 마지막 구절은 역시나 장재(송나라 사상가로 성리학의 기초를 닦음)의 말이었다. ‘세상을 위해 마음을 정하고 백성을 위해 사명을 다한다. 앞서간 성현들을 위해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해 태평성세를 연다.’ 아버지는 여전히 ‘비록 다다르지는 못할지라도 마음으로 갈망’하고 계셨다.”

그가 송유 장재의 말을 빌려 자신의 말을 대신한 것은 송유들과 같은 사명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라질 위기에 있는 문화전통을 되살린다는. 성리학은 중국문화의 부흥이란 사명감을 가진 유학자들의 문화운동이었고 펑유란 세대 역시 위기에 처한 나라와 문화를 구하자는 사명감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문명국가로서 동아시아의 천혜의 자리에 있습닏. 한당 시대의 영광을 잇고 세계를 이끌 것입니다. 중국이 바로 서면 역사에서 반드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할 것입니다.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새로우며 뒤처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와 로마는 과거는 있지만 현재가 없습니다. 중국만이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고 옛것과 새것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나라가 비록 옛 나라이나 그 천명이 새롭다’는 것입니다.” 중일전쟁 시절 펑유란이 쓴 비문이다.

루카치는 초기저작인 ‘소설의 이론’에서 고대 그리스 시대를 말하며 ‘별을 보고 길을 가던 시절은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말했다. 삶의 목표가 분명했고 세상이 분명하게 설명되던 시절, 그런 시절에 대해 말하며 책을 시작한다. 펑유란의 세대는 그런 별이 있었던 사람들이엇다.

90을 넘겨 눈도 안보이고 서지도 걷지도 못하면서 150만자의 책을 써내려간 것을 저자는 집념과 애정이엇다고 말한다. “아버지 정신의 두 기둥은 확고하고 특별했다. 하나의 기둥은 철학에 대한 사랑이며 또 다른 기둥은 조국에 대한 사랑이엇다.”

중국인민공화국이 들어선 후에도 그의 사명감은 여전했다. 1982년 모교인 컬럼비아대에서 명예학위를 받을때 “아버지는 자신의 사상에 대해 말씀하셨다. 통일 국가가 세워지고 강력한 정부가 수립되면 새롭고 광범위한 철학 사상이 출현하는데 이 사상은 나라의 기틀이 된다는 요지였다. 중국은 현재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지침이 되는 철학 사상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의 중국철학사를 영역한 보드는 그의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펑 선생은 국가가 수립하면 필연적으로 새롭고 통일된 철학을 요구하고 오늘날에도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고 하셨어요. 이 말은 어느 시대나 국가든지 사람들이 대부분 특히 가혹한 정치나 긴장된 사회를 경험하고 나면 하나의 공통된 가치를 찾고자 한다는 말씀이지요. 바로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답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가치 말입니다. 이런 공통의 가치는 사회에 목적성을 부여하고 심리적인 안정을 제공하지요.” 그는 ‘하늘이 공자를 내려 오랜 세월 세상을 밝혓다’고 햇다. ‘인류가 사상과 철학의 불을 밝히지 않으면 삶의 의미도 없었을 것”이란 뜻이다.

“하루는 갑자기 심장 발작이 나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병상에서 힘겹게 말씀을 이어가며 내게 당부하셨다. “장자는 삶이란 살에 덧나는 사마귀와 같은 군더더기로 여겼고 죽음은 곪은 곳이 터진 것이라고 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장재는 ‘살아있는 동안 (하늘과 땅을) 섬기고 죽으면 편히 쉴 것이다’라고 했다. 얘야 이번에 나를 꼭 살려내다오. 아직 책을 마치지 못했어. 책이 완성되면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지금은 아니야.”

‘살아있는 동안 (하늘과 땅을) 섬기고 죽으면 편히 쉴 것이다’ 장재가 쓴 ‘서명(西銘)’의 마지막 구절이다. 살아서는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죽어서는 영원한 안식을 얻는다. 그가 자주 인용하던 그 구절처럼 “아버지는 삶과 죽음에서 모든 것을 이루고 가셨다. 쓸쓸하고 차가운 밤에도 늘 깨어있는 철학자엿던 아버지는 영면하셨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중국이 준 것은 핍박이엇다. “1983년 12월에 있었던 베이징대 철학과 기념식이 생각난다. 아버지와 장다이녠 교수의 지난 60년의 강의를 치하하는 자리였다. 철이 들고 30년 가까이 나는 아버지를 비판하는 소리만 들었다. 그 기념식에서 아버지에 대한 연이은 찬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그 순간 내 머리를 내리누르던 거대한 돌덩이가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렇다. 이제 세상이 달라졋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나는 살아남았다! 다행히 아직 살아 잇다. 문화혁명을 견뎌냈다.”

“오래 살아 참 다행이야. 장수하니 진실을 더 많이 알 수 있어서 좋아.” 그가 기념식에서 딸에게 한 말이다.

“아버지는 내면의 단련으로 정수를 끌어냈기 때문에 그간의 숱한 비판에도 끝내 쓰러지지 않았고 (수많은 동료의) 희생속에서도 살아남으셨다. 남다른 정신세계 덕분에 다른 늙은이들처럼 괴팍하지 않고 명철하셨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보통 자신이 쓴 글도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다. 눈빛에 총기가 사라지고 불안에 떠는 경우도 많지만 아버지는 시력과 청력을 거의 잃고도 한결같으셨다.”

그가 그런 수모와 몰이해를 견딘 것은 그의 특유한 ‘아둔함’ 때문이었다. 중일전쟁 “초기에 칭화대 교수 분들과 창사에서 쿤밍으로 갈 때였다. 도중에 전난관을 지났는데 창밖에 손을 내민 채 있다가 성벽에 부딪혀 그만 팔이 부러지셨다. 진웨린 선생이 이일로 놀리기도 했다.

‘운전기사가 성문을 통과하니 창밖에 손을 내밀지 말라고 분명히 말햇단 말이지.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얼른 손을 집어 넣었거든. 그런데 네 부친만 그 말을 생각하느라 바빴지. 왜 창 밖으로 손을 내밀면 안 되는가? 창밖에 손을 내미는 것과 창 안에 손을 두는 차이는 무엇인가? 그 보편적인 의미와 특수 의미는 어떻게 다른가? 하고 말이지. 그런데 이를 어쩌나 사색이 끝나기도 전에 팔부터 부러졌으니.’

이일은 아버지가 얼마나 생각을 좋아하는지 말하려고 부풀린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는 그런 아둔함 덕분에 묵묵히 비판을 견딜 수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중국정부는 아둔한 철학자를 개조하려 들었다. 그러나 “철학자의 머리를 개조하는 일은 힘든 일이다. 철학자는 어떤 개조든지 사상적인 이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끝없이 반성을 해야 했고 그 반성은 ‘자신의 생각’을 가진 대가였다.”

아둔한 노학자를 중국은 함부로 대했다.

“1966년 말, 문화혁명이 한창일 때 오랜만에 모교인 베이징대를 찾았다. 우연히 도처에 걸린 대자보를 보다가 멀리서 교수님을 보게 되엇다. 이미 일흔을 넘긴 교수님이 마스크를 쓰고 기다란 빗자루를 들고 등을 구부린 채 힘들게 교정을 청소하고 계셨다. 마침 ‘홍위병’들이 나팔을 불며 ‘자본가계급 반동 학술 권위’ 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첸겅선)

“한번은 펑 교수님 집에서 스터디를 했는데 당시에 교수님은 비판의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엇다. 스터디 그룹이었던 우리는 차를 마시고 펑 교수님은 비판을 받았다. 그다음 모임에서도 똑 같은 모습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펑이다이)


“20세기 중국인 학자 중 글로써 가장 많이 비판을 받은 사람을 꼽으라면 아버지도 빠질 수 없을 것이다. 후스 선생의 저작이 여러 번 도마에 오르기는 햇지만 그분은 해외에 있었으니 국내에서 비판이 거세질수록 오히려 명성과 권위는 더 높아졋다. 반면에 아버지는 벌겋게 달아오른 국내 정치라는 철판 위에 그대로 앉아 계셨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아버지가 집에서 어느 누구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실제로 아버지를 혹독하게 비판하던 사람들은 나중에 거의 몰락했다.”

그는 붓을 접고 세월을 견뎌야만 했다. 그러나 그에겐 침묵마저 용납되지 않았다. “1949년 이후에 아버지의 삶도 반성의 연속이었지만 결코 자아를 상실하지 앟으셨다. 아버지는 무소불위의 정치 탄압 속에서도 자살하거나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가장 낙심했던 시기는 비림비공(批林批孔: 중국에서 린뱌오와 공자를 공격했던 운동) 시기였다. 이는 아버지가 자아를 상실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드러낸 때이다.” 그는 공자 비판에 참여해야만 햇다. “들끊는 철판 위에서 허무하게 타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잠시나마 피신해야 했다. 고난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잠시만이라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중국철학사신편’을 쓸 시간이 필요했다ㅣ. 당시 아버지는 이미 운신조차 힘든 여든의 고령이셨다. 아버지의 피신 방법은 앵무새처럼 따라 말하기였다.”

그는 여전히 조국을 사랑하는 아둔함 때문에, “중국의 귀중한 문화를 수호한다는” 아둔한 사명감 때문에 묵묵히 버텼다. “아버지의 ‘아둔함’에는 사실 유가의 위대한 정신이 숨어 있다. ‘하늘의 운행은 씩씩하니 군자도 이를 본받아 쉼 없이 강건해야 한다’에서 자강불식은 ‘블가함을 알고도 행하는’ 경지이다. 또 신선과 같은 아버지의 기풍은 도가의 활달하고 유유자적한 기풍이다. 이 두 철학 정신으로 고난 속에 내몰린 20세기 중국을 건너오셨다. 아버지의 일생은 바로 20세기 중국 문화의 한 단면이다.”

세월을 견디고 책을 마무리 짓고 떠났을 때 외국신문은 그에 대해 “치열하게 살았지만 삶을 향유했으며 아무런 여한을 남기지 않았다’고 평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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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 사상을 논하다 - 공자와 그의 제자들 2 이상의 도서관 3
신동준 지음 / 한길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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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공자가 활약한 춘추시대 말기는 봉건질서가 붕괴하면서 격렬한 변화의 움직임이 일었다. 이로 인해 하급 사족 중에도 발군의 재능을 토대로 신분세습의 한계를 뛰어넘어 경 대부의 반열에 오르는 자들이 나오게 되엇다. 공자가 그 산 증인이다.

신분세습에 기초한 봉건제의 붕괴는 명암이 교직되어 있다. 실력자가 전례의 예제를 무시하고 하극상을 야기한 무질서가 어두운 면이라면 신분세습으로 인해 빚어졌던 불합리와 불평등이 개선된 점이 밝은 면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이 밝은 면을 극대화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견인차 역할을 햇다. 사숙을 열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최상의 교양학인 ‘치평학’을 차별 없이 널리 가르쳤던 것이다. 당시 공자의 사숙을 제외하고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이처럼 체계적으로 수준 높은 학문을 가르친 곳은 없었다.’

공자는 자신의 원칙을 유교무류敎無類),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 는 말로 요약햇다. 공자가 가르친 군자학은 아무나 쉽게 배울 내용도 수준도 아니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처럼 호학(好學)하기만 하면 배움이 가능하다고 말한 것이다. 당시로서 이보다 “더 혁명적 발상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누구나 재능이 있고 노력하면 위정자는 물론 군주가 될 자격도 있다는 생각은 진시황의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를 만들어냈다.

“진시황이 처음으로 완결시킨 제국질서의 가장 큰 특징은 신분세습의 타파와 정권의 개방, 훈련받은 관원에 의한 통치에 있다. 후대에 출현한 서양의 제국질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ㄴ은 질서였다. 제왕정의 가장 큰 특징은 치자에 대해 무제한적인 도덕적 의무를 부과한 데서 찾을 수 잇다.” 군자의 자격을 물은 공자 때문이다.

유교무류란 공자의 이념 덕분에 동양에서는 폭군은 있었지만 전제군주가 등장한 적은 없었으며 “동양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즉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른 계층은 존재했어도 봉건질서의 고착화에 따른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호학의 대상이 무엇이냐 엿다. 그 대상을 놓고 공자 이후 분열이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공자 사후 공문은 5-6개 학파로 분열된다. 그 중에서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파는 단연 자하학파와 증자학파였다. 증자의 학통은 공자의 덕행에 무게를 둔 수제파에 속하는 데 반해 자하의 학통은 공자의 학술 및 통치사상에 무게를 둔 치평파에 속한다.”

자하의 문하에서 병가의 오자와 법가의 이극이 나왔고 순자가 맥을 이어 이 계통을 제학(제(齊學)이라 한다. 증자의 문하는 자사, 맹자로 이어져 이 계통을 노학(魯學)이라 한다.

제학과 노학의 분열은 맹자에 이르러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맹자사상이 공자사상의 덕행 측면을 강조한 수제파의 견해를 극히 이상주의적으로 강화한 공자좌파라고 한다면 한비자 사상은 공자사상의 통치측면을 강조한 치평파의 견해를 극히 현실주의적으로 강화한 공자우파라고 할 수 있다. 맹자와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은 순자가 아니라 한비자였다.”

수제파의 극단화는 맹자의 성선설에서 정점에 이른다. 수제파의 논리가 공자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공자의 인(仁)을 수제 차원에서 접근할 경우 ‘애인(愛人)’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놓고 인간의 이성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인간을 설득해 궁극적인 치평을 이룰 수 있다는 공자의 신념에 비롯된 것이다. 유가의 인본주의와 인문주의 정신이 바로 애인(愛人)이라는 두 글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맹자의 성선설은 공자의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 태어난 것이다. 누구나 기본적으로 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래 가진 선한 마음을 잘 기르면 능히 성인과 같은 성품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마음을 확충해 통지에 적용하면 바로 왕도가 실현된다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다.” 결국 수제를 확장한 것이 치평이란 말이 된다.

“맹자에 따르면 인의 단서ㅓ는 동정하고 아파하며 불상하게 여길 줄 아는 ‘측은지심’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단서를 확충하면 궁극적으로 인덕(仁德)을 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정치에 구현하는 것이 곧 인정(仁政)이다. 맹자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잇는 선단으로부터 외부의 통치질서로 나아가는 방식을 취햇다. 공자가 언급한 덕목을 통치질서의 보편적 윤리규범으로 확대시켜 놓은 셈이다.”

그러나 성선설에서 연역된 왕도설은 큰 문제를 안고 잇다. “후대의 성리학자들은 맹자의 왕도설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은 채 열국의 군주들에게 모든 책임을 물었다. 그들 모두가 무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맹자의 왕도설은 확실히 비현실적이었다.” 비현실적이었으니 구체적인 정책 프로그램도 없었다. 맹자의 왕도설은 단지 그의 신념에서 나온 우격다짐의 주장일 뿐이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왕도설은 치세와 난세를 구분하지 않고 오직 왕도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문제점을 안고 잇다. 특히 춘추전국시대라는 배경을 고려했을 때 애초부터 실현가능성이 없엇다. 전국시대에 칠웅이 이상적으로 그린 인물은 왕도를 실현한 요순우탕이 아니라 패도를 실현한 제환공과 관중이엇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맹자의 왕도설은 기본적으로 실현사능성과는 거리가 먼 이념적 지표의 성격을 띠고 잇었다. 당시의 시대적 흐름은 서주시대의 왕도와 춘추시대의 패도를 넘어 천하통일을 전제로 한 제도(帝道)로 진행되어 있었다. 이러한 때에 복고적인 왕도를 주장하는 것은 주왕조의 봉건체제를 옹호하는 시대퇴행적인 모습이었다.”

맹자는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킨 공자사상을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방향으로 왜곡시켜 놓았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면 왜 맹자는 그런 관념론으로 후퇴한 것일까? 그의 의(義) 개념이 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본다. 논어에서 의(義)는 이(利)의 상대개념으로 나올 뿐이다. 그러나 맹자는 인의(人意)말을 만들어 인의 작은 부분인 의를 과대하게 포장해 인을 왜곡했다. 그가 말하는 인정(仁政)은 사실 의정(義政)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맹자가 그린 이상국가는 일종의 왕도국가이자 정의국가였다. 맹자는 의인(義人)에 의해 다스려지는 정의의 나라를 왕도를 실현한 이상국가로 간주했다. 의치는 그의 성선설을 기본으로 하고 잇다. 맹자는 성선설에 입각해 인간의 근원적인 심성을 이성으로 해석했ㄷ가. 이에 대해 순자는 맹자를 ‘속유’로 간주하면서 심성을 이성이 아닌 지성으로 해석햇다. 맹자가 희노애락으로 상징되는 감성을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결과로 해석한 데 반해 순자는 감성을 지성에 대비되는 또 하나의 심성으로 파악한 것이다.”

맹자는 세상의 혼란이 인간의 욕망 때문이라 보았고 인간성의 본인 이성이 욕망 즉 감성을 억누른다면 세상은 난세에서 치세로 바뀐다고 본 것이다. “훗날 성리학은 사단의 선성을 본연지성, 희로애락의 감성을 기질지성으로 규정해 이를 이기론으로 정리했다.” 그러므로 성리학은 기가 이를 누르면 난세이고 이가 기를 누르면 치세란 입장이 된다.

“이에 반해 순자는 희로애락의 감성을 지성과 대비되는 인간 심성의 또 다른 한 측면으로 파악한 까닭에 지성을 동원해 이를 절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순자는 비록 감성을 인간의 악성으로 규정하기는 햇으나 어디까지나 이를 인간 심성의 자연스런 한 측면으로 보았던 까닭에 억제의 대상이 아닌 절제의 대상으로 본 것이다. 순자의 입장에서 볼 때 감성은 굳이 사단등과 같이 애매한 표현을 동원해 억제의 대상으로 볼 필요가 없었다. 순자가 인간의 사려 깊은 지혜를 바탕으로 한 ‘예치’를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이엇다. 순자의 ‘예치’는 일종의 지치(知治)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했다.”

“순자는 맹자와 정반대되는 성악설을 주장했다고 알려져 잇으나 사실 그의 주장은 가선가악설(可善可惡說)에 가깝다. 맹자와 정반대되는 주장은 한비자의 성악설이다. 한비자의 성악설은 기독교의 원죄설과 비슷하다. 원죄설은 유일신으로의 귀의를 통해 면죄받을 수 있다는 주장으로 종교의 우위를 강조한 데 반해 한비자의 성악설은 강력한 법치를 통해 인간의 악성을 교정할 수 있다는 정치 우위의 주장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저자는 맹자와 순자(그리고 그의 제자인 한비자)의 논의를 공자사상이 좌우로 분열된 것이라 본다. “공자는 인을 내재적 요소로 하고 예를 외재적 표현으로 한 군자를 이상적 인격으로 내세웠다. 공자의 군자는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의 두가지 모습을 겸유해야만 했다. 논어에 나오는 문(文) 행(行) 충(忠) 신(信)의 수양론은 어디까지나 시 서 예 악의 치평학에 기초한 외왕의 실천론으로 강조되었을 뿐이다. 당시 공문이 외왕을 지향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일 공문의 교육이 내성을 위주로 하는 수양론에 치중했다면 굳이 수업료를 내고 공문에 와서 교습을 받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인에 의를 더하여 내성으로 치달았고 순자는 예에 법을 더해 외왕으로 치달았다 (그런 방향의 극단화가 수제를 완전히 거세한 한비자이다)

“맹자는 호연지기로 충만한 인물을 군자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제시했다. 부귀에 미혹되지 않고 빈천에 구애받지 않고 무력에도 굴하지 않는 대장부가 맹자가 그린 이상적인 군자이다.” 그의 군자는 외왕의 구현인 군주보다는 내성이 구현인 사대부에 가깝다.

그러나 “순자는 지혜로써 치국평천하에 이르는 자를 군자의 모습으로 제시했다. 천하를 통일해 만물과 백성을 양육하고 천지를 주무르면서 만물을 활용하는 대유(大儒)가 순자가 그린 이상적인 군자의 모습이엇다. 순자가 말한 대유는 내성의 사대부보다 외왕의 군주에 가까웠다.”

맹자의 계보인 성리학 역시 외왕을 버리고 내성의 사대부를 군자로 보았으며 통치의 주체도 왕이 아닌 사대부로 본 것이 당연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맹자의 성선설에 입각한 성리학이 탄생한 이래 동양에서 인간의 선성에 대한 확신을 전제로 한 덕치가 유독 강조된 것은 필연이엇다.” 그러나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선성을 맹신함으로써 치평의 논리보다는 인간의 선성을 밝게 드러내는 수제의 논리에 함몰되는 결과를 빚었다.” 왕도설은 “치국 내지 치인의 논리가 전제되지 않는 한 공론일 수 밖에 없다. 성선설은 성리학이 탄생하면서 치국평천하 위에 수신제가의 치기 논리를 두는 일종의 윤리설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윤리설로 전락한 성선설은 겉으로는 정치의 우위를 내세우지만 야훼 및 부처에비견되는 도와 리(理) 등을 내세운 이성종교의 양상을 띠며 종교의 옷만 걸치지 않았을 뿐 실상 일종의 종교였다. 이는 정치의 우위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것으로 이미 치국논리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치세의 시기에는 그런대로 통용될 수 있으나 난세의 시기에는 치국논리에서 벗어난 이성종교인 성리학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양명학도 치국논리에서 벗어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리학에 매몰되엇던 조선과 청제국이 서양과 일제에 맥없이 무릎을 꿇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수제를 치평의 위에 놓은 결과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저자는 말한다. “구한말 전국 13도의 의병장들이 만든 창의군의 대장이엇던 이인양은 1908년 통감부를 공격하기로 한 계획에 따라 의병들이 집결지로 몰려들 때 부친상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 버렷다.” 황당하지만 성리학의 논리에선 가능한 일이다. “조선은 유독 나라에 대한 충성보다 조상과 가족에 대한 효성을 강조햇다. 송나라의 성리학보다 더욱 극단적인 명분론에 빠진 조선성리학이 효를 충보다 앞세운 결과 누란의 위기에서 이런 해괴한 모습이 나온 것이다.”

내성에 치중한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송나라와 조선이 외란에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패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엇다. 이적의 외침 앞에서 와왕의 힘이 뒷받침되지 못한 내성의 논리는 한낱 웃음거리밖에 안되는 것이다.”

성리학을 거부하고 공자 당시의 유학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고학(古學)이 지배했던 일본유학에선 공과 사가 중요한 주제엿다. 사무라이의 존재가치는 당연히 사가 아니라 공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리학이 교조화된 조선에서는 효를 충보다 즉 수제를 치평보다 위에 놓고 수제를 하면 자연히 치평이 된다는 논리에선 사가 공을 압도했고 공의 중심인 왕권이 제대로 설 수 없었으며 신권이 왕권을 압도하면서 조선의 정치는 공익이 아닌 사익의 전쟁터가 되엇다. “군권이 미약하고 신권이 막강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상황에서는 외환의 위기가 없을지라도 신권세력간의 파쟁으로 정국 혼란 끝에 예외 없이 쇠락의 길을 걸었다.”

공자가 “군주를 섬기는 데에는 정성을 다해야 한다’ (팔일편)며 존군(尊君)을 주장하고 한비자가 이를 강화해 귀군경신(貴君輕信)을 말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유가에서 말하는 ‘존군’ 사상의 근본취지는 본래 권신들의 전횡에 따른 질서의 붕괴를 막자는 것이엇다.”

법가의 뛰어난 점은 도가나 유가와 달리 공과 사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한비자는 공과 사를 엄격히 대립시켜 개인의 사가 지배하는 영역을 일체 봉쇄햇다. 공을 강조해 부국강병을 꾀한 한비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의 독자성을 가장 먼저 찾자낸 인물이다.” 한비자의 체계에서 군주는 공의 담지자로 상정된다. “법치의 요체는 군주의 무사(無私)에 있었다. 그러나 법가가 무사의 요체로 내세운 법치는 법의 권위를 현실적으로 군주에 기댈 수 밖에 없었던 까닭에 끝내 인치로 함몰되는 모순을 빗고 말앗다. 이는 법가가 말하는 법치가 귀군 사상과 결합되면서 사실상 군주를 견제할 장치가 소멸되어버린 것을 뜻한다. 바로 여기에 법가가 내세운 법치의 치명적인 약점이 도사리고 잇다.”법치가 결국 인치가 될 위험성이 순자가 예치를 주장한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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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천하를 논하다 - 공자와 그의 제자들 1 이상의 도서관 2
신동준 지음 / 한길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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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에서 ‘인(人)’은 왕에게만 쓰던 말이었다. 인(人)이외에는 민(民)이란 말을 썼다. 인과 민의 차이는 정치적 권리가 있는가의 차이이다. 오직 정치적 권리가 있는 사람만이 사람이란 말을 들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정치적 권리가 있어야만 사람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마찬가지였다.

후에 인(人)의 의미는 왕에서 제후, 제후에서 경, 대부로 확대되었다. 시간에 지나면서 정치적 권리가 확대되어가면서 의미가 확대되어간 것이다.

공자 이전에 인(人)으로 분류되는 사람을 군자라 불렀다. “군자는 문자 그대로 ‘군주의 아들’로 군주의 친척을 의미했다. 이는 생산에 종사하는 평민 즉 ‘소인’과 대비되는 말로 사용되었다. 초기 문헌에는 세습귀족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공자가 의미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공자가 말한 ‘군자’는 혈연에 의해 얻어지는 자격이 아니다. 공자가 말한 ‘군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하는 사람이다.

“공자사상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여타 사상과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하나는 치평(治平: 치국평천하)을 중시한 점이다. ‘치평’은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비오스 폴리티코스(bios politikos)’에 해당한다. 정치적 삶이 배제된 삶은 진정한 삶이 될 수 없다는 통찰이 번득이는 대목이다. 다른 하나는 학지(學知: 학문과 지식)를 중시한 점이다. 아렌트의 표현으로는 ‘비오스 테오레티코스(bios theretikos)’다. 학문적 소양을 기초로 한 사려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삶을 추구할 길이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때문에 공학이 수천 년에 걸쳐 제왕학의 전범으로 통용된 것이다.”

정치적 삶과 관조적 삶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공자는 극기복례라 했다.

“극기복례(克己復禮: 자신을 억제해 예로 돌아감)가 인을 이루는 것이다. 하루만이라도 극기복례하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간다.” (논어, 안연)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봍통 극기복례의 극기를 극욕(克慾)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저자는 극기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공자사상에 대한 왜곡이라 말한다. “공자는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거나 없애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단지 과도하게 노출되는 것을 경계했을 뿐이다.” 저자는 극기의 나와 복례의 례의 균형, 즉 정치적 삶과 관조적 삶의 균형을 말한 것이라 본다. 그러므로 저자는 순자가 예로서 욕망을 다스린다는 제욕(制慾)으로 극기를 해석한 것이 정확하다고 본다.

“’복례는 수기를 통해 예로 상징되는 정치공동체의 기본질서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이는 개인의 수기와 국가사회질서가 유기적으로 합일된 상태를 말한다. 순자가 말하는 융례(隆禮)가 이에 해당한다. 복례는 곧 순자가 말한 예치의 취지가 구현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극기복례는 곧 극기인 수기와 복례인 치인이 통일적으로 결합돼 군자의 위정(爲政)이 궁극적인 목료로 삼고 있는 지치(至治)의 경지에 도달한 것을 의미한다.”

저자의 극기복례에 대한 해석은 공자 사상의 핵심이 수제인가 치평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관중에 대한 평가를 증거로 든다.

관중에 대해 맹자와 성리학자들은 수제의 차원에서 폄하햇다. 그러나 공자는 “그러나 ‘관중의 그릇이 작구나 그가 예를 안다면 누가 예를 알지 못한다고 하겠는가.’라며 개인적인 행실에선 비례(非禮)로 비판했다. 그러나 비례하다고 비판한 관중을 ‘제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하여 병거를 동원하지 않은 것은 모두 관중의 공이다. 그 누가 그의 인만 하겠는가’라며 논어 전편을 통해 관중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공자에게 중요한 것은 수제의 차원의 비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중시한 것은 치평의 문제엿다고 저자는 말한다.

“민주 개념을 강조할수록 공동체의 ‘정치적 삶’보다 개인의 ‘관조적 삶’을 중시하게 되고 공화 개념을 강조할수록 개인의 ‘관조적 삶’보다 공동체의 ‘정치적 삶’을 중시하게 된다. 서구의 민주공화정이 프랑스혁명 이해 현쟁네 이르기까지 사회를 강조하는 민주 개념과 국가를 강조하는 공화 개념의 대립으로 끝없는 갈등을 겪고 잇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앙ㄶ다. 아렌트는 바로 이점에 주목해 개인 차원의 관조적 삶도 중요하지만 정치적 삶이 배제될 경우 결국 관조적 삶도 상실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공적인 충(忠)과 사적인 효(孝)의 갈등문제로 접근했다. 이는 ‘충’에 기초한 치국평천하와 ‘효’에 기초한 수신제가 간의 우선순위 문제로 단순화할 수 있다. 동양에서 내린 결론은 ‘충’과 ‘효’의 유기적 결합이었다. 맹자계통은 ‘수신제가 -> 치국평천하’에 입각해 있던 까닭에 상대적으로 ‘선효후충’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한비자 드으이 법가계통은 ‘치국평천하 -> 수신제가’에 입각해 ‘선충후효’의 입장에 서 있었다. 절충적인 입장에 서 있었던 순자계통은 ‘치국평천하 <-> 수신제가’에 입각해 충효합일을 주장했다.”

성리학자들은 공자사상이 선효후충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공자사상의 본령이 ‘치평’에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무리한 해석이다. 공문의 기본 목표는 기본적으로 ‘치평’에 헌신하는 군자를 만들어내는 데 있었다. 공자는 결코 개인적 차원의 효를 국가공동체 차원의 충보다 높인 적이 없다. 공자는 충과 효의 유기적인 합일을 추구햇다. 공자사상의 큰 특징이다.”



“14년에 걸친 공자의 천하유세가 완전히 실패작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보는 것이 옳다. 당시 공자는 일견 실패작으로 보이는 천하유세의 기간 중 ‘치평’의 이치를 완전히 터득하는 소득을 얻었다. ‘자로’ 편에 이를 뒷받침해주는 대목이 나온다.

염유가 묻기를 ‘이미 백성들이 많으면 또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하기를 ‘부유하게 해주어야 한다’
염유가 다시 묻기를 ‘이미 부유해졌으면 또 무엇을 더해야 함니까?’
공자가 대답하기를 ‘가르쳐야 한다’

공자사상의 큰 특징 중 하나로 선부후교(先富後敎) 사상을 들 수 있다. 공자는 군자학을 가르치면서 교민(敎民)의 중요성을 역설햇다. 그러나 그가 말한 교민은 어디까지나 부민을 전제로 한 것이다. 부유하게 해주지 않으면 교민 또한 실표를 거둘 수 없다고 보았다. 공자는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덕치의 전제조건인 교민이 이뤄질 수 없다고 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자사상을 논하면서 ‘선부후교’ 사상을 간과하고 있으나 이는 큰 잘못이다. ‘수제’를 지나치게 강조한 성리학의 유폐(遺弊)이다.”

공자처럼 천하유세를 한 사람은 이전에 없었고 그의 첫 시도는 시도로 끝났을 뿐이다. 사람들은 그가 ‘불가능한 것을 하려 한다’고 조롱했다. 당대에 희망을 접고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학교를 열었다. 희망을 미래에 건 것이다.

“천하유세를 마치고 돌아온 뒤 공자가 개설한 학교는 가장 정선된 교과목으로 최고 수준의 교양을 가르치는 당대 최고의 도장이었다.” 공자의 명성 덕분에 배우려는 학생들로 넘쳤다. 그러나 공자가 가르친 것은 개인의 도덕성을 수련하는 수제가 아니었다. 그런 것을 배우려고 멀고 먼 곳에서 까지 공자를 찾아오지는 않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가 가르친 것은 고위귀족들만 배우던 최고의 교양이었고 그 교양은 정치를 위해(치평을 위해) 필요한 교양이었다.

“공자는 학자라기보다는 혼탁한 세상을 구하고자 한 현실정치가였다. 그는 정치란 기본적으로 전체 인민의 복리와 행복의 증진을 위해 봉사해야 하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오직 높은 학덕을 군자에 의한 통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확신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했을 때 유학자들이 군현제를 반대하고 봉건제를 옹호했기 때문에 공자가 말한 주공의 예가 주나라의 봉건제라고 여기게 되었다. 물론 “공자는 평소 전통문화의 붕괴를 애석히 여겼다. 그는 신분세습에 기초한 통치체계인 봉건제의 붕괴를 애석히 여긴 것이 아니라 전통문화의 정수인 예제의 붕괴를 애석히 여긴 것이다. 그는 결코 맹자와 같이 전설상의 성군을 들먹이며 회고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거나 시대퇴행적인 전설상의 주왕조의 봉건제 붕괴를 아쉬워하며 신분세습의 반동적인 통치체제를 옹호한 적이 없다. 당시 예악은 국가질서의 차별과 통일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이엇다.” 그러나 공자는 예제의 구체적인 내용보다 그 정신을 중시했다. 공자가 주공이 완성한 예악제도를 중시한 것은 예의 정신을 구현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자한’ 편의 언급은 예제로 상징되는 전통문화에 대한 공자의 기본입장이 잘 드러난다.

“원래는 마면이 예에 맞다. 그러나 지금은 생사로 만들었어도 매우 검소하니 나는 뭇사람들을 따르겠다. 원래 절하는 것은 아래에서 하는 것이 예에 맞다. 그러나 지금은 절을 하며 위에서 하니 이는 교만한 것이다. 나는 비록 뭇사람들과 어긋날지라도 아래에서 절하겠다.” (자한편)

하급 사인이란 출신 때문에 하대부 이상 올라갈 수 없었던 공자가 세습귀족의 봉건제를 옹호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군자란 말의 뜻을 혈통에 의한 자격에서 실력에 의한 자격으로 바꾼 사람이다. 그가 노나라의 대부가 되었을 때 3환을 무력화하고 군권을 확립하려 한 것이 증거라며 저자는 공자의 정치적 이상은 “신분세습의 봉건정을 타파하고 군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가 평생을 두고 치평학의 정립에 헌신하면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군자의 길로 들어서고자 찾아온 자들을 모두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이 때문이엇다.” 그리고 공자가 군자의 자격이라 말한 것은 인격자를 말한 것이 아니다. 맹자가 말한 것처럼 인격을 닦으면(수제) 치평의 자격이 주어진다고 공자는 말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공자가 자신의 학교에서 가르친 것은 구체적인 통치의 기술인 치평학이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공자는 결코 맹학과 성리학이 주장한 것과 같이 ‘수제’만으로 ‘치평’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가 말한 ‘군자학’은 바로 ‘치평학’이엇다. 전국시대에 우후죽순으로 등장한 제자백가도 바로 공문의 교재인 치평학의 교과목을 통해 자신들의 사상적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다.”

공자 사후 “군자가 새로운 의미로 통용됨에 따라 유가의 행동규범에 따르지 않은 군주들은 자동적으로 ‘비군자’ 즉 ‘소인’으로 분류되엇다. 군자학의 세례를 받은 유가는 세습적 군주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 진정한 군자이며 국정운영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풍조가 봉건질서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공자는 비록 당대에는 성사시키지 못했으나 끝내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킨 인물이다. 전국시대에 군자학을 습득한 공문의 문인들이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등장해 신분세습의 봉건질서를 무너뜨리고 재덕을 갖춘 군자가 정치를 다루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인시대(士人時代)’를 열었다. 공자가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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