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백가, 사상을 논하다 - 공자와 그의 제자들 2 이상의 도서관 3
신동준 지음 / 한길사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공자가 활약한 춘추시대 말기는 봉건질서가 붕괴하면서 격렬한 변화의 움직임이 일었다. 이로 인해 하급 사족 중에도 발군의 재능을 토대로 신분세습의 한계를 뛰어넘어 경 대부의 반열에 오르는 자들이 나오게 되엇다. 공자가 그 산 증인이다.

신분세습에 기초한 봉건제의 붕괴는 명암이 교직되어 있다. 실력자가 전례의 예제를 무시하고 하극상을 야기한 무질서가 어두운 면이라면 신분세습으로 인해 빚어졌던 불합리와 불평등이 개선된 점이 밝은 면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이 밝은 면을 극대화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견인차 역할을 햇다. 사숙을 열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최상의 교양학인 ‘치평학’을 차별 없이 널리 가르쳤던 것이다. 당시 공자의 사숙을 제외하고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이처럼 체계적으로 수준 높은 학문을 가르친 곳은 없었다.’

공자는 자신의 원칙을 유교무류敎無類),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 는 말로 요약햇다. 공자가 가르친 군자학은 아무나 쉽게 배울 내용도 수준도 아니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처럼 호학(好學)하기만 하면 배움이 가능하다고 말한 것이다. 당시로서 이보다 “더 혁명적 발상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누구나 재능이 있고 노력하면 위정자는 물론 군주가 될 자격도 있다는 생각은 진시황의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를 만들어냈다.

“진시황이 처음으로 완결시킨 제국질서의 가장 큰 특징은 신분세습의 타파와 정권의 개방, 훈련받은 관원에 의한 통치에 있다. 후대에 출현한 서양의 제국질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ㄴ은 질서였다. 제왕정의 가장 큰 특징은 치자에 대해 무제한적인 도덕적 의무를 부과한 데서 찾을 수 잇다.” 군자의 자격을 물은 공자 때문이다.

유교무류란 공자의 이념 덕분에 동양에서는 폭군은 있었지만 전제군주가 등장한 적은 없었으며 “동양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즉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른 계층은 존재했어도 봉건질서의 고착화에 따른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호학의 대상이 무엇이냐 엿다. 그 대상을 놓고 공자 이후 분열이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공자 사후 공문은 5-6개 학파로 분열된다. 그 중에서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파는 단연 자하학파와 증자학파였다. 증자의 학통은 공자의 덕행에 무게를 둔 수제파에 속하는 데 반해 자하의 학통은 공자의 학술 및 통치사상에 무게를 둔 치평파에 속한다.”

자하의 문하에서 병가의 오자와 법가의 이극이 나왔고 순자가 맥을 이어 이 계통을 제학(제(齊學)이라 한다. 증자의 문하는 자사, 맹자로 이어져 이 계통을 노학(魯學)이라 한다.

제학과 노학의 분열은 맹자에 이르러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맹자사상이 공자사상의 덕행 측면을 강조한 수제파의 견해를 극히 이상주의적으로 강화한 공자좌파라고 한다면 한비자 사상은 공자사상의 통치측면을 강조한 치평파의 견해를 극히 현실주의적으로 강화한 공자우파라고 할 수 있다. 맹자와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은 순자가 아니라 한비자였다.”

수제파의 극단화는 맹자의 성선설에서 정점에 이른다. 수제파의 논리가 공자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공자의 인(仁)을 수제 차원에서 접근할 경우 ‘애인(愛人)’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놓고 인간의 이성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인간을 설득해 궁극적인 치평을 이룰 수 있다는 공자의 신념에 비롯된 것이다. 유가의 인본주의와 인문주의 정신이 바로 애인(愛人)이라는 두 글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맹자의 성선설은 공자의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 태어난 것이다. 누구나 기본적으로 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래 가진 선한 마음을 잘 기르면 능히 성인과 같은 성품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마음을 확충해 통지에 적용하면 바로 왕도가 실현된다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다.” 결국 수제를 확장한 것이 치평이란 말이 된다.

“맹자에 따르면 인의 단서ㅓ는 동정하고 아파하며 불상하게 여길 줄 아는 ‘측은지심’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단서를 확충하면 궁극적으로 인덕(仁德)을 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정치에 구현하는 것이 곧 인정(仁政)이다. 맹자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잇는 선단으로부터 외부의 통치질서로 나아가는 방식을 취햇다. 공자가 언급한 덕목을 통치질서의 보편적 윤리규범으로 확대시켜 놓은 셈이다.”

그러나 성선설에서 연역된 왕도설은 큰 문제를 안고 잇다. “후대의 성리학자들은 맹자의 왕도설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은 채 열국의 군주들에게 모든 책임을 물었다. 그들 모두가 무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맹자의 왕도설은 확실히 비현실적이었다.” 비현실적이었으니 구체적인 정책 프로그램도 없었다. 맹자의 왕도설은 단지 그의 신념에서 나온 우격다짐의 주장일 뿐이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왕도설은 치세와 난세를 구분하지 않고 오직 왕도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문제점을 안고 잇다. 특히 춘추전국시대라는 배경을 고려했을 때 애초부터 실현가능성이 없엇다. 전국시대에 칠웅이 이상적으로 그린 인물은 왕도를 실현한 요순우탕이 아니라 패도를 실현한 제환공과 관중이엇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맹자의 왕도설은 기본적으로 실현사능성과는 거리가 먼 이념적 지표의 성격을 띠고 잇었다. 당시의 시대적 흐름은 서주시대의 왕도와 춘추시대의 패도를 넘어 천하통일을 전제로 한 제도(帝道)로 진행되어 있었다. 이러한 때에 복고적인 왕도를 주장하는 것은 주왕조의 봉건체제를 옹호하는 시대퇴행적인 모습이었다.”

맹자는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킨 공자사상을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방향으로 왜곡시켜 놓았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면 왜 맹자는 그런 관념론으로 후퇴한 것일까? 그의 의(義) 개념이 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본다. 논어에서 의(義)는 이(利)의 상대개념으로 나올 뿐이다. 그러나 맹자는 인의(人意)말을 만들어 인의 작은 부분인 의를 과대하게 포장해 인을 왜곡했다. 그가 말하는 인정(仁政)은 사실 의정(義政)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맹자가 그린 이상국가는 일종의 왕도국가이자 정의국가였다. 맹자는 의인(義人)에 의해 다스려지는 정의의 나라를 왕도를 실현한 이상국가로 간주했다. 의치는 그의 성선설을 기본으로 하고 잇다. 맹자는 성선설에 입각해 인간의 근원적인 심성을 이성으로 해석했ㄷ가. 이에 대해 순자는 맹자를 ‘속유’로 간주하면서 심성을 이성이 아닌 지성으로 해석햇다. 맹자가 희노애락으로 상징되는 감성을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결과로 해석한 데 반해 순자는 감성을 지성에 대비되는 또 하나의 심성으로 파악한 것이다.”

맹자는 세상의 혼란이 인간의 욕망 때문이라 보았고 인간성의 본인 이성이 욕망 즉 감성을 억누른다면 세상은 난세에서 치세로 바뀐다고 본 것이다. “훗날 성리학은 사단의 선성을 본연지성, 희로애락의 감성을 기질지성으로 규정해 이를 이기론으로 정리했다.” 그러므로 성리학은 기가 이를 누르면 난세이고 이가 기를 누르면 치세란 입장이 된다.

“이에 반해 순자는 희로애락의 감성을 지성과 대비되는 인간 심성의 또 다른 한 측면으로 파악한 까닭에 지성을 동원해 이를 절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순자는 비록 감성을 인간의 악성으로 규정하기는 햇으나 어디까지나 이를 인간 심성의 자연스런 한 측면으로 보았던 까닭에 억제의 대상이 아닌 절제의 대상으로 본 것이다. 순자의 입장에서 볼 때 감성은 굳이 사단등과 같이 애매한 표현을 동원해 억제의 대상으로 볼 필요가 없었다. 순자가 인간의 사려 깊은 지혜를 바탕으로 한 ‘예치’를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이엇다. 순자의 ‘예치’는 일종의 지치(知治)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했다.”

“순자는 맹자와 정반대되는 성악설을 주장했다고 알려져 잇으나 사실 그의 주장은 가선가악설(可善可惡說)에 가깝다. 맹자와 정반대되는 주장은 한비자의 성악설이다. 한비자의 성악설은 기독교의 원죄설과 비슷하다. 원죄설은 유일신으로의 귀의를 통해 면죄받을 수 있다는 주장으로 종교의 우위를 강조한 데 반해 한비자의 성악설은 강력한 법치를 통해 인간의 악성을 교정할 수 있다는 정치 우위의 주장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저자는 맹자와 순자(그리고 그의 제자인 한비자)의 논의를 공자사상이 좌우로 분열된 것이라 본다. “공자는 인을 내재적 요소로 하고 예를 외재적 표현으로 한 군자를 이상적 인격으로 내세웠다. 공자의 군자는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의 두가지 모습을 겸유해야만 했다. 논어에 나오는 문(文) 행(行) 충(忠) 신(信)의 수양론은 어디까지나 시 서 예 악의 치평학에 기초한 외왕의 실천론으로 강조되었을 뿐이다. 당시 공문이 외왕을 지향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일 공문의 교육이 내성을 위주로 하는 수양론에 치중했다면 굳이 수업료를 내고 공문에 와서 교습을 받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인에 의를 더하여 내성으로 치달았고 순자는 예에 법을 더해 외왕으로 치달았다 (그런 방향의 극단화가 수제를 완전히 거세한 한비자이다)

“맹자는 호연지기로 충만한 인물을 군자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제시했다. 부귀에 미혹되지 않고 빈천에 구애받지 않고 무력에도 굴하지 않는 대장부가 맹자가 그린 이상적인 군자이다.” 그의 군자는 외왕의 구현인 군주보다는 내성이 구현인 사대부에 가깝다.

그러나 “순자는 지혜로써 치국평천하에 이르는 자를 군자의 모습으로 제시했다. 천하를 통일해 만물과 백성을 양육하고 천지를 주무르면서 만물을 활용하는 대유(大儒)가 순자가 그린 이상적인 군자의 모습이엇다. 순자가 말한 대유는 내성의 사대부보다 외왕의 군주에 가까웠다.”

맹자의 계보인 성리학 역시 외왕을 버리고 내성의 사대부를 군자로 보았으며 통치의 주체도 왕이 아닌 사대부로 본 것이 당연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맹자의 성선설에 입각한 성리학이 탄생한 이래 동양에서 인간의 선성에 대한 확신을 전제로 한 덕치가 유독 강조된 것은 필연이엇다.” 그러나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선성을 맹신함으로써 치평의 논리보다는 인간의 선성을 밝게 드러내는 수제의 논리에 함몰되는 결과를 빚었다.” 왕도설은 “치국 내지 치인의 논리가 전제되지 않는 한 공론일 수 밖에 없다. 성선설은 성리학이 탄생하면서 치국평천하 위에 수신제가의 치기 논리를 두는 일종의 윤리설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윤리설로 전락한 성선설은 겉으로는 정치의 우위를 내세우지만 야훼 및 부처에비견되는 도와 리(理) 등을 내세운 이성종교의 양상을 띠며 종교의 옷만 걸치지 않았을 뿐 실상 일종의 종교였다. 이는 정치의 우위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것으로 이미 치국논리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치세의 시기에는 그런대로 통용될 수 있으나 난세의 시기에는 치국논리에서 벗어난 이성종교인 성리학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양명학도 치국논리에서 벗어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리학에 매몰되엇던 조선과 청제국이 서양과 일제에 맥없이 무릎을 꿇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수제를 치평의 위에 놓은 결과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저자는 말한다. “구한말 전국 13도의 의병장들이 만든 창의군의 대장이엇던 이인양은 1908년 통감부를 공격하기로 한 계획에 따라 의병들이 집결지로 몰려들 때 부친상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 버렷다.” 황당하지만 성리학의 논리에선 가능한 일이다. “조선은 유독 나라에 대한 충성보다 조상과 가족에 대한 효성을 강조햇다. 송나라의 성리학보다 더욱 극단적인 명분론에 빠진 조선성리학이 효를 충보다 앞세운 결과 누란의 위기에서 이런 해괴한 모습이 나온 것이다.”

내성에 치중한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송나라와 조선이 외란에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패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엇다. 이적의 외침 앞에서 와왕의 힘이 뒷받침되지 못한 내성의 논리는 한낱 웃음거리밖에 안되는 것이다.”

성리학을 거부하고 공자 당시의 유학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고학(古學)이 지배했던 일본유학에선 공과 사가 중요한 주제엿다. 사무라이의 존재가치는 당연히 사가 아니라 공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리학이 교조화된 조선에서는 효를 충보다 즉 수제를 치평보다 위에 놓고 수제를 하면 자연히 치평이 된다는 논리에선 사가 공을 압도했고 공의 중심인 왕권이 제대로 설 수 없었으며 신권이 왕권을 압도하면서 조선의 정치는 공익이 아닌 사익의 전쟁터가 되엇다. “군권이 미약하고 신권이 막강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상황에서는 외환의 위기가 없을지라도 신권세력간의 파쟁으로 정국 혼란 끝에 예외 없이 쇠락의 길을 걸었다.”

공자가 “군주를 섬기는 데에는 정성을 다해야 한다’ (팔일편)며 존군(尊君)을 주장하고 한비자가 이를 강화해 귀군경신(貴君輕信)을 말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유가에서 말하는 ‘존군’ 사상의 근본취지는 본래 권신들의 전횡에 따른 질서의 붕괴를 막자는 것이엇다.”

법가의 뛰어난 점은 도가나 유가와 달리 공과 사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한비자는 공과 사를 엄격히 대립시켜 개인의 사가 지배하는 영역을 일체 봉쇄햇다. 공을 강조해 부국강병을 꾀한 한비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의 독자성을 가장 먼저 찾자낸 인물이다.” 한비자의 체계에서 군주는 공의 담지자로 상정된다. “법치의 요체는 군주의 무사(無私)에 있었다. 그러나 법가가 무사의 요체로 내세운 법치는 법의 권위를 현실적으로 군주에 기댈 수 밖에 없었던 까닭에 끝내 인치로 함몰되는 모순을 빗고 말앗다. 이는 법가가 말하는 법치가 귀군 사상과 결합되면서 사실상 군주를 견제할 장치가 소멸되어버린 것을 뜻한다. 바로 여기에 법가가 내세운 법치의 치명적인 약점이 도사리고 잇다.”법치가 결국 인치가 될 위험성이 순자가 예치를 주장한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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