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이미 10여 년전에 세상을 떠났다. 시간이 지나자 나중에는 아예 잊고 살았다. 그런데 실명의 위기를 앞두고 또다시 아버지가 내 곁에 오신 것이다. ‘무서워 말거라. 나는 살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냈다. 너도 그럴 수 있을게야.’” 두권으로 된 펑유란의 ‘중국철학사’가 나온 것이 1930년대이니 이제 거의 백년이 되어간다. 그러나 그 세월을 건너 지금까지 중국철학의 기본입문서로 아직도 부동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쓴 조지프 니덤은 펑유란에 대해 이렇게 말햇다. “펑 선생의 글은 현대 중국철학사에서 가장 해박하며 깊이가 있다. 이 분의 저서는 분명히 전 세계에 오랫동안 영향을 줄 것이다. 펑 선생의 저서는 일반적인 연구 방법을 사용하고 참고자료 역시 역대 여느 저서와도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수많은 한학자와 서구의 중국학자들이 그의 저서를 세기의 책이라고 보는 데 이의가 없다.” 이책은 사실상 비서로 아버지의 옆을 지킨 딸이 펑유란의 삶에 대해 말한다. “아버지의 만년은 고달팠지만 동시에 찬란했다. 정치적 소용돌이의 늪에서 벗어날 때까지 전신에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을 만큼 핍박을 당했지만 다행히 목숨만은 건지셨다. 1980년 이미 85세의 고령인 아버지는 ‘중국철학사신편’ 일곱권을 쓰기 시작했다.” 눈도 보이지 않아 머리 속의 도서관을 뒤지며 구술로 150만자를 써내려가 1990년에 원고를 넘기고 그해 95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평생을 철학에 바친 학자로서 할 일을 모두 끝낸 것이며 한 세기에 가까운 삶의 목표를 이룬 것이다. “아버지 세대는 19세기 말에 태어나 중국의 신문화를 창조한 세대였다. 어느 학과,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그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뜨거운 조국애. 자신의 조국이 눈을 부릅뜨고 세계 모든 민족 가운데 우뚝 서기를 열망하는 뜨거운 마음이엇다. 아버지는 ‘옛것을 밝혀 새것을 일구다’ , 즉 중국 문화의 정수를 빨아들여 신중국을 건설하는 자양분으로 삼고자 하셨다. 아버지가 임종 전에 완성한 ‘중국철학사신편’의 마지막 구절은 역시나 장재(송나라 사상가로 성리학의 기초를 닦음)의 말이었다. ‘세상을 위해 마음을 정하고 백성을 위해 사명을 다한다. 앞서간 성현들을 위해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해 태평성세를 연다.’ 아버지는 여전히 ‘비록 다다르지는 못할지라도 마음으로 갈망’하고 계셨다.” 그가 송유 장재의 말을 빌려 자신의 말을 대신한 것은 송유들과 같은 사명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라질 위기에 있는 문화전통을 되살린다는. 성리학은 중국문화의 부흥이란 사명감을 가진 유학자들의 문화운동이었고 펑유란 세대 역시 위기에 처한 나라와 문화를 구하자는 사명감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문명국가로서 동아시아의 천혜의 자리에 있습닏. 한당 시대의 영광을 잇고 세계를 이끌 것입니다. 중국이 바로 서면 역사에서 반드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할 것입니다.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새로우며 뒤처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와 로마는 과거는 있지만 현재가 없습니다. 중국만이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고 옛것과 새것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나라가 비록 옛 나라이나 그 천명이 새롭다’는 것입니다.” 중일전쟁 시절 펑유란이 쓴 비문이다. 루카치는 초기저작인 ‘소설의 이론’에서 고대 그리스 시대를 말하며 ‘별을 보고 길을 가던 시절은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말했다. 삶의 목표가 분명했고 세상이 분명하게 설명되던 시절, 그런 시절에 대해 말하며 책을 시작한다. 펑유란의 세대는 그런 별이 있었던 사람들이엇다. 90을 넘겨 눈도 안보이고 서지도 걷지도 못하면서 150만자의 책을 써내려간 것을 저자는 집념과 애정이엇다고 말한다. “아버지 정신의 두 기둥은 확고하고 특별했다. 하나의 기둥은 철학에 대한 사랑이며 또 다른 기둥은 조국에 대한 사랑이엇다.” 중국인민공화국이 들어선 후에도 그의 사명감은 여전했다. 1982년 모교인 컬럼비아대에서 명예학위를 받을때 “아버지는 자신의 사상에 대해 말씀하셨다. 통일 국가가 세워지고 강력한 정부가 수립되면 새롭고 광범위한 철학 사상이 출현하는데 이 사상은 나라의 기틀이 된다는 요지였다. 중국은 현재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지침이 되는 철학 사상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의 중국철학사를 영역한 보드는 그의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펑 선생은 국가가 수립하면 필연적으로 새롭고 통일된 철학을 요구하고 오늘날에도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고 하셨어요. 이 말은 어느 시대나 국가든지 사람들이 대부분 특히 가혹한 정치나 긴장된 사회를 경험하고 나면 하나의 공통된 가치를 찾고자 한다는 말씀이지요. 바로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답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가치 말입니다. 이런 공통의 가치는 사회에 목적성을 부여하고 심리적인 안정을 제공하지요.” 그는 ‘하늘이 공자를 내려 오랜 세월 세상을 밝혓다’고 햇다. ‘인류가 사상과 철학의 불을 밝히지 않으면 삶의 의미도 없었을 것”이란 뜻이다. “하루는 갑자기 심장 발작이 나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병상에서 힘겹게 말씀을 이어가며 내게 당부하셨다. “장자는 삶이란 살에 덧나는 사마귀와 같은 군더더기로 여겼고 죽음은 곪은 곳이 터진 것이라고 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장재는 ‘살아있는 동안 (하늘과 땅을) 섬기고 죽으면 편히 쉴 것이다’라고 했다. 얘야 이번에 나를 꼭 살려내다오. 아직 책을 마치지 못했어. 책이 완성되면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지금은 아니야.” ‘살아있는 동안 (하늘과 땅을) 섬기고 죽으면 편히 쉴 것이다’ 장재가 쓴 ‘서명(西銘)’의 마지막 구절이다. 살아서는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죽어서는 영원한 안식을 얻는다. 그가 자주 인용하던 그 구절처럼 “아버지는 삶과 죽음에서 모든 것을 이루고 가셨다. 쓸쓸하고 차가운 밤에도 늘 깨어있는 철학자엿던 아버지는 영면하셨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중국이 준 것은 핍박이엇다. “1983년 12월에 있었던 베이징대 철학과 기념식이 생각난다. 아버지와 장다이녠 교수의 지난 60년의 강의를 치하하는 자리였다. 철이 들고 30년 가까이 나는 아버지를 비판하는 소리만 들었다. 그 기념식에서 아버지에 대한 연이은 찬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그 순간 내 머리를 내리누르던 거대한 돌덩이가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렇다. 이제 세상이 달라졋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나는 살아남았다! 다행히 아직 살아 잇다. 문화혁명을 견뎌냈다.” “오래 살아 참 다행이야. 장수하니 진실을 더 많이 알 수 있어서 좋아.” 그가 기념식에서 딸에게 한 말이다. “아버지는 내면의 단련으로 정수를 끌어냈기 때문에 그간의 숱한 비판에도 끝내 쓰러지지 않았고 (수많은 동료의) 희생속에서도 살아남으셨다. 남다른 정신세계 덕분에 다른 늙은이들처럼 괴팍하지 않고 명철하셨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보통 자신이 쓴 글도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다. 눈빛에 총기가 사라지고 불안에 떠는 경우도 많지만 아버지는 시력과 청력을 거의 잃고도 한결같으셨다.” 그가 그런 수모와 몰이해를 견딘 것은 그의 특유한 ‘아둔함’ 때문이었다. 중일전쟁 “초기에 칭화대 교수 분들과 창사에서 쿤밍으로 갈 때였다. 도중에 전난관을 지났는데 창밖에 손을 내민 채 있다가 성벽에 부딪혀 그만 팔이 부러지셨다. 진웨린 선생이 이일로 놀리기도 했다. ‘운전기사가 성문을 통과하니 창밖에 손을 내밀지 말라고 분명히 말햇단 말이지.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얼른 손을 집어 넣었거든. 그런데 네 부친만 그 말을 생각하느라 바빴지. 왜 창 밖으로 손을 내밀면 안 되는가? 창밖에 손을 내미는 것과 창 안에 손을 두는 차이는 무엇인가? 그 보편적인 의미와 특수 의미는 어떻게 다른가? 하고 말이지. 그런데 이를 어쩌나 사색이 끝나기도 전에 팔부터 부러졌으니.’ 이일은 아버지가 얼마나 생각을 좋아하는지 말하려고 부풀린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는 그런 아둔함 덕분에 묵묵히 비판을 견딜 수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중국정부는 아둔한 철학자를 개조하려 들었다. 그러나 “철학자의 머리를 개조하는 일은 힘든 일이다. 철학자는 어떤 개조든지 사상적인 이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끝없이 반성을 해야 했고 그 반성은 ‘자신의 생각’을 가진 대가였다.” 아둔한 노학자를 중국은 함부로 대했다. “1966년 말, 문화혁명이 한창일 때 오랜만에 모교인 베이징대를 찾았다. 우연히 도처에 걸린 대자보를 보다가 멀리서 교수님을 보게 되엇다. 이미 일흔을 넘긴 교수님이 마스크를 쓰고 기다란 빗자루를 들고 등을 구부린 채 힘들게 교정을 청소하고 계셨다. 마침 ‘홍위병’들이 나팔을 불며 ‘자본가계급 반동 학술 권위’ 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첸겅선) “한번은 펑 교수님 집에서 스터디를 했는데 당시에 교수님은 비판의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엇다. 스터디 그룹이었던 우리는 차를 마시고 펑 교수님은 비판을 받았다. 그다음 모임에서도 똑 같은 모습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펑이다이) “20세기 중국인 학자 중 글로써 가장 많이 비판을 받은 사람을 꼽으라면 아버지도 빠질 수 없을 것이다. 후스 선생의 저작이 여러 번 도마에 오르기는 햇지만 그분은 해외에 있었으니 국내에서 비판이 거세질수록 오히려 명성과 권위는 더 높아졋다. 반면에 아버지는 벌겋게 달아오른 국내 정치라는 철판 위에 그대로 앉아 계셨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아버지가 집에서 어느 누구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실제로 아버지를 혹독하게 비판하던 사람들은 나중에 거의 몰락했다.” 그는 붓을 접고 세월을 견뎌야만 했다. 그러나 그에겐 침묵마저 용납되지 않았다. “1949년 이후에 아버지의 삶도 반성의 연속이었지만 결코 자아를 상실하지 앟으셨다. 아버지는 무소불위의 정치 탄압 속에서도 자살하거나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가장 낙심했던 시기는 비림비공(批林批孔: 중국에서 린뱌오와 공자를 공격했던 운동) 시기였다. 이는 아버지가 자아를 상실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드러낸 때이다.” 그는 공자 비판에 참여해야만 햇다. “들끊는 철판 위에서 허무하게 타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잠시나마 피신해야 했다. 고난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잠시만이라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중국철학사신편’을 쓸 시간이 필요했다ㅣ. 당시 아버지는 이미 운신조차 힘든 여든의 고령이셨다. 아버지의 피신 방법은 앵무새처럼 따라 말하기였다.” 그는 여전히 조국을 사랑하는 아둔함 때문에, “중국의 귀중한 문화를 수호한다는” 아둔한 사명감 때문에 묵묵히 버텼다. “아버지의 ‘아둔함’에는 사실 유가의 위대한 정신이 숨어 있다. ‘하늘의 운행은 씩씩하니 군자도 이를 본받아 쉼 없이 강건해야 한다’에서 자강불식은 ‘블가함을 알고도 행하는’ 경지이다. 또 신선과 같은 아버지의 기풍은 도가의 활달하고 유유자적한 기풍이다. 이 두 철학 정신으로 고난 속에 내몰린 20세기 중국을 건너오셨다. 아버지의 일생은 바로 20세기 중국 문화의 한 단면이다.” 세월을 견디고 책을 마무리 짓고 떠났을 때 외국신문은 그에 대해 “치열하게 살았지만 삶을 향유했으며 아무런 여한을 남기지 않았다’고 평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