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제국 이야기 - 유라시아 대륙 양단에 강력한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흉노를 찾아서
장진퀘이 지음, 남은숙 옮김 / 아이필드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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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을 기억할 것이다. 그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암흑 군대가 내뿜는 장엄하면서 압도적인 암울한 기세이다. 그러면 그 모델은 무엇이었을까? 톨킨은 그 원형을 로마제국을 무너트린 훈족의 침략에서 얻었다.

“로마제국을 무너트린 힘은 바로 중앙아시아에서 온 갈리아와 이탈리아를 침략한 아시아의 야만족들이다. 로마를 무너트린 것은 로마제국에 입성한 게르만족이엇지만 그들 역시 피난민 신세에 불과햇다. 고트족이 로마군단보다 더 두려워한 존재는 따로 있었다ㅓ. 바로 중앙아시아에서 말을 타고 바람처럼 나타난 난폭한 전사들이다. 그들은 매우 위협적인 존재로 곧 로마군대의 방어를 뚫고 로마 각 전역에 퍼져나갓다.”

“흉노족(훈족)이 처음 유럽에 나타났을 때 두터운 갑옷으로 무장한 채 자신들이 최고라 자신하던 로마 군사들은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말을 제 몸 다루듯하는 륭노와 같은 민족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흉노를 보며 신화에 나오는 켄타우루스보다 더 신기해햇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신기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가공할 전쟁기술로 게르만족과 로마군을 무너트렸다.

그들의 주무기는 말 위에서 쏘는 활이었는데 그들의 활은 조선시대에도 사용햇던 복합궁으로 사거리가 200미터에 달했다.

“당시 로마 군사들의 무기를 살펴보면 그들이 왜 흉노군을 두려워했는지 그 이유가 쉽게 이해될 것이다. 로마군이 사용하던 원거리 무기는 투창인데 치명적인 약점은 사정거리에 한계가 잇다는 것이다. 로마군의 화살 역시 최대사거리가 30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로마군이 적들의 정체를 파악도 하기 전에 흉노의 화살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고 로마군의 갑옷을 종이 뚫듯 뚫어버렸다.”

당시 기병은 보병 20명과 맞먹는 전력이엇다. 후에 몽골군이 그랬듯이 복합궁을 사용한 타격력에 더해진 기병을 활용한 전격전에 게르만족은 물론 로마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유럽에 간 것일까? 그 이유는 쫓겨났기 때문이다.

유럽에선 훈족이라 불린 그들을 중국에선 흉노라 불렀다. 그들은 몽골고원의 첫번째 주인이었고 그 이웃인 중국인들은 역사 이전부터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진시황은 그들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세웠다. 연나라, 조나라, 진나라가 이전에 쌓았던 방벽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한 것이니 흉노의 위협은 진시황 때도 상당히 오래된 것이었다.

흉노는 몽골고원의 주인으로서 제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유목민이 하나의 정치체를 이루어 통일되었을 땐 칭기스칸이 그랬듯이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진의 뒤를 이은 한나라 역시 흉노제국 때문에 고생을 했고 저자세로 조공이란 뇌물을 바치고 신하를 자칭하며 자존심을 구겨야 햇다.

흉노에 대해 이를 갈 수 밖에 없었던 한나라는 조용히 칼을 갈았고 한무제에 이르러 힘이 갖춰졌을 때 흉노와 전쟁을 벌인다. 한무제와의 전쟁은 그리 대단한 타격은 아니었다.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대패하는 경우도 잇었지만 대개는 그리 큰 패배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한무제는 물론 그 후의 황제들도 흉노와의 전쟁을 계속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일어나는 피해는 눈덩이가 되어 감당하기 힘들게 되었다. 소모전에 지친 흉노제국의 권위는 무너져 갔고 유목민들의 고질병인 분열증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흉노제국은 내분으로 더욱 약화되고 분열되어 마침내 한나라에 속국이 된다.

한나라와 속국의 관계가 되면서 둘의 관계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된다. 그러나 전한이 망하고 신나라가 들어섰을 때 신나라는 얌전히 있는 흉노를 완전히 꺾어버릴 생각을 하게 되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흉노로선 살기 위해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새로 시작된 적대관계에서 흉노는 패하게 되고 속국이 될 때 그랫던 것처럼 내분이 일어나 한 무리는 한나라에 붙어 남흉노가 되고 북흉노와 대리전을 벌인다. 고립된 북흉노는 점점 몽골고원에서 쫓겨나 서쪽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이후 남흉노는 5호16국 시대의 동란에 참여해 나라를 세우지만 그 동란에 참여했던 다른 호족들과 마찬가지로 민족 자체가 중국에 동화되어 사라진다.

서쪽으로 간 북흉노는 400년간 서쪽으로 서쪽으로 근거지를 옮기다 우크라이나에 도달한다.

“20년 동안 매일같이 로마인의 선혈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알프스 산맥으로 흘러들어갔다. 훈족은 알란족을 알란족은 고트족을 고트족은 다시 타이팔리족과 사르마트인을 공격했고 일리리아에서 쫓겨나온 고트족은 또 다시 우리 로마를 공격햇다. 이 전쟁의 끝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엇다.” 당시 로마의 역사가 암브로시우스의 기록이다.

훈족의 위세는 대단했다. 아틸라의 대에 훈족은 흑해에서 라인강까지의 영토를 차지하고 로마제국을 압박하며 조공을 챙기는 유럽 최강의 제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훈족의 제국은 아틸라가 죽고 바로 무너진다. 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성숙한 관료체제가 형성된 로마제국과 비교하면 훈족의 정치체제는 지나치게 단선적이엇다. 심지어 그들의 선조들보다도 못햇다. 좌현왕이 선우의 공인된 후계자가 되는 최소한의 제도조차 아틸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시행한 것은 전형적인 영웅 정치로 만약 피라미드 맨 위의 지도층이 무너질 경우 전 제국이 한순간에 와해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물 형태의 통치체제만이 정권의 장기적 안정을 보장할 수 있지만 아틸라는 이러한 시스템을 유지하지 않았고 잠재 후계자들 중에도 정권의 핵심계층에 속한 자들이 얼마 없었다. 아틸라가 죽은 후 훈제국이 급속히 붕괴한 것도 이 때문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스스로 자초한 결과엿다.”

“말 위에서 세계를 정복할 수는 잇지만 말 위에서 세계를 다스릴 수는 없다.” 칭기스칸 때 나온 말이다. “말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채찍을 휘두르며 방목하는 것과 칼을 휘드르며 사람을 죽이는 것 고작 이 두 가지 뿐이다. 정복 후에는 어땠을까? 비록 크나큰 영토가 수중에 들어왔건만 언어도 종교도 다르고 각기 다른 생활방식을 지닌 민족들이 섞여 있는 고아활한 영토를 무슨 수로 다스린단 말인가? 각 민족에게 골고루 이익을 배분하여 균형 잡힌 세력을 유지하는 일은 영웅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였다. 이럴 때 고ㅝㄴ력 유지와 원활한 통치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각 민족 사이에 경제적 유대관계와 정신적 유대감을 만드는 것이다. 초원 제국은 군사정복으로 형성된 하나의 결과물로 초원지대를 생활의 근거지로 삼고 잇었지만 지형이 복잡하여 경제 여건과 발전 속도는 제각기 달랐고 따라서 통일된 국내시장을 형성하기가 불가능햇다. 통일된 시장이 없다보니 자연히 경제적인 유대관계가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그래서 광활한 초원을 다스리는 영웅은 두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간섭이나 참견 없이 조공만 열심히 관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예 농경지를 유목지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합리적인 통치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초원제국의 영토가 넓어질수록 분열과 붕괴의 속도는 그만큼 빨라졋다.”

말 위에서 어떻게 내려올 것인가가 언제나 유목민족의 제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엿다. 훈족의 제국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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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사 2 - 일본이 말하는 일본 현대사, 1945-1989 전후편戰後篇
한도 가즈토시 지음, 박현미 옮김 / 루비박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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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전쟁 책임을 질 것인가?
천황: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할 이야기가 있다.
맥: 좋다. 말해라.
천: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하건 상관없다. 나는 모든 책임을 지겟다. 당신이 대표하는 연합국의 결정에 나를 맡기기 위해 찾아왔다. 나를 교수형에 처해도 상관없다(You may hang me).

그러나 나는 전쟁을 바란 적은 없다. 왜냐면 나는 전쟁에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군부에 불신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으며 일본 국민의 리더로서 신민이 취한 모든 행동에 책임을 질 생각이다.

“맥아더는 이때 매우 놀랐으며 감동했다. 전쟁에 패한 나라의 원수가 직접 찾아와 ‘나에게 책임이 있으니 처분을 받겠다’고 말한 것이니까. 역사를 살펴보면 대개 망명이나 목숨을 구걸하거나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고 버티지 스스로 ‘You may hang me’라고 말한 예는 없는 것 같다. 맥아더는 천황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회상록’에도 적었고 자기 입으로도 자주 이야기했다.”

천황에 대해 감동한 것은 맥아더 뿐만이 아니었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정부는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고 연합국에 통보했다. 단 연합국이 요구하는 무조건 항복이 아니라 단 하나의 조건을 내건다: 천황제의 보호를 보증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전보를 받은 미국은 무척 곤란해한 것 같앗다. 육군장관인 스팀슨은 ‘일본인은 어찌 되었든 끝까지 천황을 좋아하는구나’라며 말할 수 없이 감동했다고 나중에 글을 남겼다.”

천황과 첫만남에서 “맥아더는 처음에 아주 거만하게도 천황을 맞으러 나오지도 않았지만 돌아갈 때는 현관 입구까지 배웅을 하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이후 맥아더는 천황을 목 매달라는 연합국들의 여론에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맥아더가 보호한 것은 ‘천황’이지 ‘천황제’는 아니었다. 미국의 일본점령 정책의 목표는 군국주의의 해체였고 다시는 군국주의가 부활하지 않도록 일본의 체제를 바꾸는 것이었다. 군국주의의 해체에는 천황제도 포함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천황은 자신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인간선언을 한다. 이후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신앙처럼 일본인을 지탱해왔던 정신구조는 전부 다 날아가 버렸다. 그러면 그 대신에 무엇이 일본인의 정신을 지탱해 온 것일까? 그것은 미국식 민주주의일 것이다. 그때부터 일본은 미국식 민주주의에 의해 재건되어야만 했다.”

이후 미국이 만든 소위 ‘평화헌법’에서도 여전히 천황은 국가원수였다. 그러나 메이지 헌법과 달리 국가의 주권은 천황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었고 천황은 정치에 관여할 권한이 없는 상징에 불과하게 되었다.

천황이 국가의 상징이라는 것은 미국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다. 이후 1958년 미치코가 황태자비로 간택되었을 때의 ‘미치붐’과 국가적 행사로 성대하게 치뤄진 황태자의 결혼식 때 천황의 지위에 대한 문제는 사실상 결론이 난다. 천황제를 상징으로 만들고 그를 계속 중요한 존재로 떠받든다는 것이 결혼식을 둘러싼 열광으로 사실상 합의된 것이다.

천황은 상징으로 군림할 뿐 지배하지 않는 국민주권의 원칙이 만들어지면서 민주주의는 형식을 갖추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형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군국주의의 기둥들을 없애야 햇다.

GHQ는 가장 먼저 군대를 해체했다. 그리고 재벌도 해체되었다. “GHQ의 주장은 ‘일본의 산업은 일본의 지지를 받았고 그 덕분에 소수의 강화된 재벌의 지배하에 있었다. 산업지배권의 집중은 독립 기업가의 창업을 방해하고 일본의 중산계급의 진흥을 방해한다.’는 것이었다.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려면 경제도 민주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지주들도 없어져야 햇다. “이 농지개혁이 성공한 덕분에 일본의 농촌이 어느 정도 빈곤에서 해방이 되었고 그 덕분에 지금의 일본이 만들어졋다.”

그리고 자본가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으로 노조를 만들었다.

전전 일본의 시스템은 국가의 주권을 가진 천황을 정점으로 군부와 재벌, (정치 엘리트를 배출하는) 지주계급이 떠받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천황은 허수아비가 되고 군부와 재벌 그리고 지주계급이 거세되었으며 전전의 정치인들 역시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정치권이 진공상태가 된 것이다.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은 천황의 ‘관료’들이었다. 그리고 그 관료들을 이끈 것은 요시다 시게루 수상이었다. 전직 외교관 요시다 시게루는 전전에 태평양전쟁을 반대한 것이 훈장이 되어 공직추방에서 제외되었다. 전전의 거물 정치가들이 공직추방을 당해 진공상태가 된 정치권을 장악한 요시다 수상은 관료출신들을 문하생으로 키워 후에 자민당 ‘보수본류’를 만들었고 전후 일본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의 비전을 보통 ‘요시다 독트린’이라 부른다.

전후 일본의 원형을 결정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의 방침은 비군사화, 민주화였고 미국이 떠난 후에도 ‘평화와 민주주의’란 원칙으로 일본의 방향이 된다.

그러나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는 슬로건일 뿐이다. 슬로건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 해석에 따라 일본이 어떤 국가가 되어야 하는가는 4가지 견해가 있었다고 저자는 정리한다.

“첫째는 전쟁 전과 같이 천황을 제일 윗자리에 앉혀 육해군을 정비한 이른바 ‘보통 국가’가 되는 것이다. 두번째는 좌익이 주장하는 사회주의 국가이다. 세번째는 경무장을 한 통상무역국가이다. 경제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풍요로운 국가를 만든다는 선택지이다. 그리고 네번째는 소일본이다. 분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 문화국가로 동양의 스위가 되는 것이다.”

요시다 독트린은 세번째를 말한다. 그러나 1949년 공직추방이 해제되면서 복귀한 전전의 정치가들은 요시다 독트린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보통국가였다. 이후 요시다 독트린과 보통국가론이 자민당 내에서 충돌한다.

요시다 독트린은 ‘군비는 미국에 맡기고 일본은 경제를 다시 부흥시켜 무역국가로 살아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상적인 국가인가? 국가도 사람처럼 제 앞가림은 할 수 있어야 한다. 군대도 없이 집 지키는 일을 다른 나라에 맡기고 하라는 대로 뭐든 하는 자존심도 긍지도 없는 나라가 제대로 된 국가인가? 보통국가론자들의 질문이다.

같은 질문을 던졌던 사람이 1970년 자위대 건물에서 할복자살한 작가 미시마 유키오이다. “경제는 부흥했을지 몰라도 패전으로 상실한 일본인의 전통적인 문화와 정신은 전혀 부흥하지 않았다. 돈을 버는 것에만 만족하겠는가? 모두 그렇게 얼빠져 있어도 좋은가?”

“’나는 코를 막고 전후를 살아왔다.’고 말하며 이런 전후는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해왔던 미시마 유키오는 자위대의 이치가야 주둔지에서 연설을 한다. 11월 25일의 일이다. ‘자위대 제군들이여, 한심한 정부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켜라. 일본의 정신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라고 외치고 헌법개정, 천황친정의 부활을 큰소리로 호소랬지만 아무도 박수를 보내는 이가 없고 단지 어안이 벙벙해져서 바라만 볼 뿐이엇다. 미시마는 처음부터 예상을 하고 있었고 죽을 생각으로 들어왔으니 자기가 할 말을 다 하고 할복자살을 하고 만다. 이것은 텔레비전을 통해 전 일본에 중계되었다.”

후의 미시마처럼 국가의 자존심을 외치는 보통국가주의자들이 권력투쟁에서 이긴 후 50년대 후반은 보통국가론자들이 정치를 장악한다. 요시다 내각을 무너트리고 수상이 된 (전전의 거물) 하토야마는 선거에서 ‘헌법개정, 재군비, 공산권과의 외교’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지금까지처럼 미국이 시키는 대로 공산권 국가와는 외교를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버리고 우리는 독립국이므로 일본의 자주적인 외교정책으로 공산권과도 외교 관계를 맺자는 말이었다.”

문제는 보통국가론이 전후의 대원칙인 평화와 민주주의에서 평화를 깨는 것으로 들렸다는 것이다. 아직 그때만 해도 일본인들에게 만주사변부터 태평양전쟁까지의 ‘15년 전쟁’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었다. 그런데 전전에 그 전쟁을 일으켰던 정치가들이 주장하는 보통국가론은 다시 그때로 돌아가자는 말로 들렸다. 이후 평화란 슬로건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아 총대를 맨 것이 사회당이다. 전쟁포기를 명기한 ‘평화헌법’ 수호 단 한가지가 사회당의 존재이유가 된다. 사회당의 존재는 헌법개정을 불가능하게 했고 하토야마 내각 출범한 3쇼와 30년부터 쇼와 31년(1956)까지 평화운동을 명분으로 한 유혈사태가 종종 일어난다.

헌법개정과 재군비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토야마에게 남은 것은 자주외교 한 가지였다. 그는 소련과의 국교정상화에 매달린다. 소련과 국교가 회복된 후 일본은 UN 가맹국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하토야마는 할 일을 다했다며 물러난다.

하토야마의 퇴진 후 역시 기시가 수상이 된다(1957). 그 역시 하토야마 이상으로 강경한 헌법개정과 재군비론자였다. 그러나 평화주의가 강력한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던 기시는 안보조약 개정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는다. 그가 말하는 안보조약 개정은 미국과 일본이 대등해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기지를 빌려간 이상 미국은 제대로 일본의 방위를 할 의무가 있고 대신에 일본도 전면적으로 협력을 하겠다는 것이다.” 반대할 것이 없는 주장이다. 그러나 문제는 ‘극동의 국제평화 및 안전 유지를 위해 일본은 협력한다’는 부분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일본을 반공의 성채에 지나지 않았던 단계에서 이제는 공산주의에 맞서는 유력한 동맹으로 인정해달라는 말이다. 일본은 미국과 하나가 되어 열심히 싸울 테니 미국은 일본을 제대로 그리고 의무적으로 지켜주어야 한다는 계약을” 하자는 말이다.

미국으로선 불감청 고소원이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의 악몽을 떠올렸다. “전후 일본에서는 미국이 강요한 것라고는 하지만 신헌법에서 정해놓은 대로 평화주의적인 국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때 나온 안보개정이 개헌, 재군비로 이어지지 않을까 의심햇고 국내는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시는 강행돌파했다.

“이후 약 1개월은 정말로 끊임없이 데모가 벌어졌으니 매일매일 데모와 함께 시작해 데모로 끝났다. 경찰과의 싸움도 더욱 험악해졌다. 절정은 (1960년) 6월 15일 밤이엇다. 데모대가 의사당 문을 부수고 안으로 돌입했다. 그리고 경찰들이 데모대를 습격하였으니 수만 명의 대난투극이 벌어졌다. 그날 오후 7시 도쿄대생이었던 간바 미치코가 사람들에게 짓밟혀 사망했다. 사망 후에도 불을 피우고 라이트가 비춰져 하룻밤 내내 전쟁과 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후에 소방청이 발표하길 중상 43명을 포함하여 589명이 부상했다고 하는데 그보다는 좀 더 많았을 것같다.”

그러나 기시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임시각료회의에서 치안을 이유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일을 중지하기로 결정했다. 데모는 계속 이어져 조약 개정이 자동으로 성립하는 6월 19일이 왔다. 시각이 12시를 지나자 그 순간 국회를 둘러싼 35만명의 데모대의 마음속에서 커다란 한숨이 새어나왔다고 한다.

기시는 그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관을 덮으면 모든 일이 가라앉을 것이다.’ 자신이 죽고 나면 이해해줄 것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출처는 중국의 ‘진서’라고 한다. 그런 말을 남기고 관저를 나와 사저로 돌아갔다. 이렇게 기시 내각의 사명이엇던 안보조약 개정이 성립되었다.”

“이들은 백지상태에서 전전의 군국주의, 대일본제국시대에 대한 혐오감과 반발심을 계속 주입받으면서 자랐다. 그러니 그토록 혐오스러운 도조 내각의 각료였고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던 기시가 군사화 노선으로 달려가는 법안을 강행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안보파동은 군사대국 일본에 대한 결별이자 평화국가 일본에 대한 강한 기원을 의미했다.

소동은 기시가 퇴진하는 순간에 놀랍게도 뚝 끝나고 말앗다. 쇼와 3년에는 ‘더 이상 전쟁이 아니다’가 유행어가 되었다. 일본이 정말로 전후 기분을 졸업한 것은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안보소동은 전후의 불만을 전부 날려버린 이른바 가스 빼기라고 할 수 있으며 ‘전후 일본의 장례식(다나카 미치타로가 한 말)이었다.”

그 후 자민당은 다시 요시다 독트린으로 복귀했고 요시다 문하생들이 연이어 수상이 되었다.이후 보통국가론은 쇼와 연간에 다시는 제기되지 않았다. 저자는 안보파동 이후를 요약하는 말로 당시 유행했던 ‘데모는 끝났다. 이제 취직이다’를 내세운다.

기시의 뒤를 이은 요시다의 우등생 이케다 수상은 “일본 국민의 소득은 미국인의 1/8, 서독의 1/3입니다. 이 소득을 두 배로 만들겠습니다. 즉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월급을 두 배로 만들겠습니다.”고 선언한다. 소득배증운동 또는 ‘월급 두배론’이다.

“실제 쇼와 30년부터 35년까지 5년간 GNP 연평균 성장률은 8.8%를 상회하여 연간 10.4%로 성장하였으니 한 사람당 급료가 2.7배가 될 정도였다. 일본인의 생활면에서는 쇼화 20년대의 전후사가 여기서 일단 마무리되고 쇼와 30년대 이후의 진정한 전후사가 시작된 것이다.” 저자는 이때부터 일본의 고도성장이 개막되었고 국민들은 이때를 출발선으로 달리기 시작했다고 본다.

쇼와 39년(1964)엔 신칸센이 개통되었다.

“지금도 때때로 도쿄역에서 도카이도 신칸센을 탈 때 18번과 19번 선 계단 밑의 막다른 벽에 구리판으로 새겨진 문구를 읽곤 한다.

도카이도 신칸센
이 철도는 일본 국민의 지혜와 노력에 의해 완성되었다.
도쿄와 신 오사카 간 515킬로미터
기공 1959년 4월 20일
운행개시 1964년 10월 1일

허황됨이나 교만함, 흥분을 배제한 산뜻하고 깔끔한 문장이다. 운송대신이나 국철총재의 이름 따윈 없다. 일본 국민 모두가 만들었다고 적혀있을 뿐이다.”

그리고 도쿄 올림픽이 그해에 있었다. “당시 일본인이 마음속으로 느낀 것은 ‘이걸로 겨우 패전국에서 빠져나와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선진국의 일원이 되었다’라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올림픽은 일본인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 큰 역할을 햇다.

올림픽은 전후 국가건설 과정에서 커다란 변화를 이룬 중간지점이 되엇다. 점령으로 한번 전환이 찾아왔었고 안보소동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이제 다시 올림픽으로 한 획을 긋게 되었으니 여기서 다시 한 번 또 다른 전후가 시작되었다.”

올림픽 폐막식이 치러진 후 암으로 투병하던 이케다는 은퇴하고 역시 요시다 우등생인 (그리고 기시의 동생인) 사토내각이 성립한다.

“이케다는 드골이 ‘트랜지스터 라디오 세일즈맨’이라고 비웃을 정도로 경제성장에 전력을 다햇지만 정치적 외교적 문제에는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사토는 정치적 문제에도 맞대응할 각오를 한다.” 사토는 “오키나와가 조국으로 복귀하지 않는 한 전후는 끝난 것이 아니다’며 오키나와 문제를 자신의 사명으로 삼는다.

“생각해보면 전후 일본의 내각은 각각 자신이 수상이 되기만 하면 ‘이것만은 반드시 이루어내겠다’라는 커다란 명제를 안고서 그걸 달성하는 형태를 계승했다. 요시다 시게루는 (재군비를 하지 않는다는 것도 물론 중요한 일이었지만) 강화조약을 맺엇고 하토야마는 소련과의 국교를 회복했다. 기시는 맹렬한 반대에도 미일이 비교적 평등한 입장에 설 수 있는 안보조약의 개정을 이뤄냈다. 이케다는 고도성장을 실현시켰다. 그러므로 사토는 자신이 이룰 대사업으로 오키나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선언한 것같다.”

요시다 독트린이 부활한 이 시절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전체적으로 살기 좋은 시절이엇다. 이 시절을 에도 중기의 번영기에 빗대어 ‘쇼와 겐로쿠’리 한다.

그러나 풍요와 함께 체제가 굳어졌고 “아직 사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사람들은 그 굳어져 버린 체제의 어디에도 들어갈 여지가 없다는 생각이 든 것같다. 혼돈의 시기는 매우 먼 옛날 이야기가 되었고 빈부의 차가 뚜렷해졌으며 세상은 완성되어 버렸다. 남은 것은 폐쇄감뿐이었다. 그래서 젊은이들의 반역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68세대의 시작이엇다. “의기소침해 있었던 일본의 학생들이 쇼와 43년 가을 무렵부터 힘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이 힘의 중심을 이룬 것은 단카이 세대이다. 쇼와 22-25년 사이에 태어난 약 7백만의 베이비부머들이다.

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늘 경쟁을 해야 했다. 이들보다 조금 전인 쇼와 21년(1946)에 태어난 마쓰모토 겐이치는 자신이 초등학생이었을 때는 1학년이 4개였는데 다음 해는 8개가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10개반이 되었다고 했다. 학생 수가 너무 많아 한 명 한 명의 개인은 소홀하게 취급받았다. 모두 평등하게 그런 취급을 받았다면 몰라도 차별을 받게 되었으니 차별은 바로 불만이나 갈등으로 이어지고 반발심이 생겨 금방 화를 내는 성격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이 대학생이 된 것이다. 마침 그때 수업료 인상 문제로 충돌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는 쇼와 겐로쿠로 만사태평하게 지내온 교수들이 빛바랜 30년 전의 노트로 강의를 하고 잇었다. 몇 년전의 노트를 빌렸는데 ‘여기서 교수가 농담을 했다’는 메모가 적힌 곳에서 그대로 농담을 들여주는 강의도 있었다. 그런 일을 포함해 이 상황을 용서할 수 엇다는 생각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를 굳이 들자면 단카이 세대는 고도성장기에 철이 들었을 테니 치열한 경쟁을 겪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다. 지그시 뭘 참은 적이 없었다. 자신들의 생활이 풍족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부족한 건 참을 수 없다는 의식이 근저에 깔여 있었다.

한편으로는 단카이 세대의 아버지들은 정말로 열심히 일했고 게다가 조직에 소속되어 관리를 받고 잇었다. 회사중심의 회사 봉건 시대라 할 수 있다. 당시 자주 하던 말 중에 쇼와의 전쟁 때는 군국 봉건주의 시대였고 전후는 회사 봉건주의 시대라는 말이 있었다.

젊은이들은 그런 관리 사회에 대한 불만을 터트린 것이다. 그리고 대학수업은 지겹기만 했다. 공해나 환경문제, 세계각지의 혁명과 학생운동, 그런 것이 겹쳐져 세상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이 증대되어 반역이 시작되엇다.”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한 학생은 전체의 2할 정도엿다고 한다. 6할은 무관심햇다. 그러나 베이비부머의 2할이면 상당한 숫자엿다.

경찰 기동대와 학생 시위대의 난투가 일상이 되어가는 와중에 클라이막스인 도쿄대 야스다 강당 점거사건이 일어난다. 야스다 강당이 전쟁터가 된 후 “묘하게도 수많은 일반 학생이 투입되었던 대대적인 학생운동은 마치 자취를 감춘 것처럼 조용해졋다.” 이후 요도호 납치사건, 아사마 산장 농성, 텔아비브 공항 난사사건이 있었지만 신좌익은 고립되고 갈수록 소수가 되엇다.

1972년 오키나와가 반환된다. 저자는 오키나와 반환으로 일본의 전후는 일단 끝났다고 말하며 이책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1989년 쇼와 천황이 죽기까지의 나머지 쇼와사를 간략하게 돌아보면 이렇게 결론으르내린다.

“쇼와 천황이 사망한 그해의 12월29일 경제대국 일본은 최고로 빛나는 날을 맞이했다. 도쿄 증권 거래소의 평균주가가 3만 8915엔으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아니 영원히 나올 것같지 않은 사상 최대의 기록이었다. 이 기록이 나온 때가 쇼와 천황이 사망한 해였다는 점이 아이러니처럼 느껴지지만 전후 일본이 만들어온 경무장 경제제일의 통상국가가 이때 완성되었고 최고로 빛났던 순간이엇다.

그리고 쇼와 시대가 막을 닫는 것을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세계정세가 격변했다. 냉전의 종결은 일본의 버블을 터트렷다. 큰 번영도 일장춘몽이 되어 버렸다. 정말로 허망한 거품이엇다.

40년마다 일본이란 국가는 변해왔다. 전후 일본은 쇼와 27년(1952)에 독립국으로 발족한지 40년이라면 1992년인데 이 전년에 버블이 붕괴되었다. 모두가 열심히 노력해서 만들어 놓은 전후 일본은 40년 후에 주가가 최고치를 기록하고 세계 2위를 자랑할 정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근대국가를 만들고자 열심이엇던 일본이 러일전쟁에 이겨(1905) 국가건설에 성공하자 우쭐해진 나머지 점점 국제사회에서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결국에는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국가를 멸망시킨 것이 40년 후의 일이었다. 이것과 똑같았다. 전후 일본도 독립해서 국가건설을 시작한 후 40년 만에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리고 커다란 번영을 구가하여 다시 의기양양해 하더니 버블이 붕괴되어 우스운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이 이후의 일본은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 앞으로 어떤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목표조차 없이 부유ㅗ하고 있으니 다시 멸망의 40년이 시작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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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포기하지 않겠다 - 윈스턴 처칠, 그 불굴의 초상
제프리 베스트 지음, 김태훈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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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제목은 처칠의 말을 약간 변형한 것이다(원서의 제목은 그냥 건조하게 ‘위대함에 대한 연구’이다). 원래 처칠이 한 말은 ‘절대 포기하지 마라(You, never give up!)’는 15초짜리 졸업축사였다.

처질이 그 말을 했을 때는 2차대전 중인 1941년 10월29일이었다. 처칠은 단상에 올라 해로우 스쿨 졸업생을 응시하면서 나직이 말했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잠시 뜸을 들인 후 좀더 큰 소리로 말햇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다시 잠깐 졸업생들을 둘러보고 더 큰 소리로 말햇다.
“너희들, 절대 포기하지 마라!”
그리고는 단상을 내려왔다.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던 사람들은 정신을 차린 뒤 환호성과 함께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흐느껴 우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훌륭한 연설일 것이다. 물론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 그 연설은 위에서 말한 전설보다는 조금 길었고 조금 말이 달랐다. 짧은 연설에서 사람들은 다음 부분만 기억해 전설로 남게 된 것이다.

“지난 10개월간 제가 얻은 교훈은 단 한가지입니다: never give in, never give in, never never never never-in nothing, great or small, large or pretty-never give in except to convictions of honoour and good sense, Never yield to force; never yeild to the apparently overwhelming might of the enemy.

짧은 연설이다. 그 짧은 연설에서 사람들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은 것은 반복된 ‘never give in, never, never’였고 그것이 더 단순하게 정리되어 ‘never give up’으로 전해진 것이다.

그 연설이 사람들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전설이 된 것은 사람들이 ‘포기하지 말자’는 처칠의 메시지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을 포기하지 말자는 말이었나?

2차대전의 종전이 가까웠을 때 그는 영국이 “승전은 우리의 눈에 승리라기보다는 구원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그는 1940년대에 영국인을 이끌고 영국이 ‘홀로 맞서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도박이었고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살아남을 가능성조차 아주 낮았다.

처칠은 후에 전쟁 초기를 회상하며 이때처럼 “연이어 쏟아지는 뉴스를 보며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공포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던 때는 없었다”고 썼다.

그러나 더 문제는 영국인들의 태도엿다. 전쟁 초기 그가 싸운 대상은 (암울한 전황으로 인한) “패배주의가 아니라 혼란과 싫증 그리고 태만이엇다. 그가 계몽에 나선 대상은 ‘유럽 역사에서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자란 최초의 세대’였다.

“당시 정치계에는 (전임 수상인) 체임벌린을 풍자하는 이런 시가 유행했다.

통풍에 걸린 늙은 정치가는
전쟁의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고
‘나와 나의 동료들은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소’라고
답장을 썼다.”

체임벌린을 대신해 수상이 된 첫해 처칠은 다른 무엇보다도 싸워야 할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프랑스가 항복한 사실을 전하면서 처칠은 “이제 우리는 전 세계를 위해 정의를 지키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인류를 덮친 히틀러의 저주가 사라질 때까지 싸울 것입닌다.”

“독일에 맞선 이 전쟁이 어떻게 진행될지, 얼마나 멀리 퍼질지, 얼마나 오래 계속될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과 슬픔이 우리의 여정을 따라다닐 것이고 고난은 우리의 옷이 될 것이며 끈기와 용기는 우리의 방패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과 업적은 진정한 구원의 횃불로 타오를 때까지 유럽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투쟁의 핵심은 문명과 자유, 관용, 그리고 법치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햇다. “만약 우리가 히틀러의 공격을 막아 낸다면 전 유럽이 해방될 것이고 인류의 삶은 밝고 넓은 고원으로 올라설 것입니다.”

그의 연설을 들은 영국인들은 책임감과 자부심을 느꼈고 위대한 드라마에 동참한다는 생각을 공유했다. 그들은 자신만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신성한 의무를 맡은 것이었고 대가를 치르더라도 싸울 가치가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사이아 베를린의 회상이다. “수상은 국민에게 상상력과 의지를 불어넣었다. 실제보다 더 거대하고 고귀한 인물처럼 보였던 그는 위기에 처한 국민의 정신을 크게 고양시켰다. 사람들은 원래 그렇게 어려운 생활을 원하지 않앗다. 그러나 그의 연설은 그러한 삶을 위대한 투쟁으로 묘사하고 국민에게 역사적 순간을 살아가는 영웅이라는 인식을 심어 줌으로써 국민이 일상적인 모습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덕분에 겁쟁이엿던 사람들은 용사가 되어 빛나는 갑옷을 걸치고 목표를 달성햇다.” 베를린은 거기에 덧붙여 이렇게 썼다. “그의 말은 매우 마술적이었고 그의 신념은 매우 강했다. 그는 뛰어난 웅변력으로 국민이 실제로 마음 속에 용기를 지녔다고 믿게 만들었다.”

“처칠의 연설을 듣는 일은 거대한 종교 행사와 같았다. 처칠은 국민에게 자부심과 자신감을불어넣엇다. 처칠의 연설을 들으면 영국인들은 용맹하고 가치있는 국민과 국가(그리고 지금은 쓸 수 없는 단어인 인종)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영국의 생존은 단지 한 국가만이 아닌 문명과 자유의 생존을 의미햇다.”

처칠은 “완전히 합리적이진 않지만 희망적이고 고무적인 원대한 비전 덕분에 그는 1940년 5월에 나라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을 때 국민이 지도자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처칠이 보여준 비전은 대영제국의 국민이라는 자부심이었고 대영제국의 운명은 세계의 운명이라는 신념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국민들과 공유햇던 것이다. 처칠은 수상직에 적임자이고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지도자라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신념은 시대에 뒤진 유물이었고 전쟁이 끝난 후 그 신념의 대가는 비참햇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끝까지 나치와 싸워야 한다는 처칠의 생각은 옳았다. 그러나 “승리를 위해 국력을 소진하는 바람에 대영제국은 와해되기 시작했고 영국의 자주성은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노동당이 승리하면서 반사회주의에 대한 처칠의 비전도 무너졌다.”

처칠은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자유주의자 및 제국주의자, 그리고 에드워드 시대의 인도주의자 및 국가 효율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다.” 그가 가진 열정과 원칙은 자유라는 문명의 가치와 (그 문명을 대표하는) 대영 제국의 위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그가 정치경력을 시작했을 때부터 낡은 것이었다.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기울기 시작한 제국은 다시는 회복되지 않았다.

1차대전이 끝났을 때 영국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식민지를 거느렸다. 그러나 영국의 최고위층은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광대한 제국을 지킬 수 있을지 근심하고 있었다. 제국은 밖에서도 안에서도 파열음을 내고 잇었다. 처칠은 자신의 손으로 아일랜드를 사실상 독립시켜야 했다. 그러나 인도의 자치를 인정해야만 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1930년 초 처칠은 인도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밀어붙이다가 당 지도부와 5년 동안 마찰을
빚었다. 이 마찰은 “황야에서 보낸 시기’라고 자평할 정도로 오랜 정치적 고립으로 이어졌다.

처칠은 평생 인도에 대한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다른 모든 것에는 시간과 함께 입장을 바꾸던 그로서는 특이한 일이엇다.”

왜냐하면 인도의 자치는 정치가 인생이었던 그의 모든 것인 제국을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35년 제정된 인도 정부법에서 제국의 종말의 시작되었음을 감지했고 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인도 독립을 지휘한 애틀리 수상은 처칠이 인도에 대하여 아직도 빅토리아 시대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처칠은 사적인 자리에서 마치 자신의 물건을 뺐긴 것처럼 영국의 왕관에 박힌 보석을 잃어버렷다고 한탄하면서 인도인들은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가 보기에 처칠의 태도는 완전히 잘못되었습니다. 현대의 모든 정치적 변화를 보지 못하고 제국의 권위와 그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관계에 대한 낡은 인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지배본능을 제국에 적용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갓습니다. 그런 제국 개념은 이미 끝났습니다.’인도 총독의 말이다.”

처칠의 태도는 분명 반동적이었다. 처칠의 견해는 식민 지배가 원주민들에게 혜택을 주며 원주민들이 자립할 역량을 갖출 때까지만 지속한다는 영국의 식민이론에 기초한 것이엇다. 문제는 더 이상 그런 제국은 존재할 수 없고 그런 이론은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전쟁 중에 처칠은 ‘대영제국의 해체를 관장하려고 수상이 된 것은 아니다’고 선언했지만 필연적인 변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종전 무렵 미국인들이 ‘중국을 잃었다’고 아쉬워한 것처럼 처칠은 ‘인도를 잃었다’고 인정해야 햇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시아에서 제국의 권리를 유지할 수단이 너무 제한적이엇고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잃어버린 영향력을 되찾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영국은 최대한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는 강대국의 역할을 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해졌다. 내각의 회의에선 대개 재무성의 의견이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햇다. 영국은 자신이 가치있는 동맹이라는 것을 미국에게 증명하기 위해 과감하게 재무장 정책을 추진했지만 그다지 크지 앟은 국방투자 조차도 허약해진 경제에는 무리엿다. 결국 처칠은 재무장 정책을 포기해야 했다.

“영국과 함께 독일에 맞서는 일에 뛰어들었을 때 미국의 전쟁 목표는 전후에 미국이 안전과 번영을 누릴 수 있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엇다. 그 세계는 당연히 나치즘이 없어야 햇고 (대영제국을 포함한) 제국주의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햇다.”

미국은 대영제국이 무너지도록 방관했고 오히려 조장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인들은 대영제국 또는 영연방과 연합하는 일에 처칠만큼 열성적이지 않았다. 그는 영국의 ‘백인 사촌’인 미국인들이 영국의 통치라는 ‘축복’을 거부하는 인도인들과 아랍인들을 돕는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햇다. 처칠은 그가 주문처럼 되풀이햇던 영어권 국민 사이의 애정에 대한 믿음을 정치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 믿음이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착각이라는 결론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젊은 시절에 앵글로색슨족이 지배자로서 장점을 타고낫다는 당시의 보편적 믿음을 공유햇다. 영어권 국민 사이의 단결은 그러한 믿음을 국제사뢰가 받아들이기 적절한 형태로 바꾼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처칠은 ‘철의 장막’이란 슬로건을 만들어 냉전을 공식화했고 EU의 기본개념을 만들고 그 초석이 될 프랑스와 독일이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했으며 ‘공포의 균형’이란 핵시대의 전략을 마련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난 후에도 여전히 세계를 움직이는 정치가로 군림햇다.

그러나 “그는 세계의 미래와 제국의 존립 그리고 유럽의 상황에 대한 깊은 불안을 갖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더 이상 글래드스턴이나 솔즈베리 같은 위인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위인의 시대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며 갈수록 진부해지는 세계에서 길을 잃은 구식 ‘위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것이 암울하던 1940년 “지금이 국민에게 최고의 시간”이라고 말햇다. 그때는 그에게도 최고의 시간이엇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대영제국이 서시히 그러나 확실하게 먼지만 남기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이젠 다 귀찮아.” 처칠의 마지막 말이었다. 1965년 여왕은 처칠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겠다고 발표햇다. 원래 국장은 왕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특별한 대우였다. 1월의 추운 날씨에 30만명이 참가한 그의 장례식은 거의 전 유럽에 방송되었고 라디오로 전 세계에 중계되었다. 유럽에서만 약 3억5천만명이 그의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추모한 것은 단지 위인이자 국가의 영웅이었던 사람이 아니라 그가 이끌었던 제국과시대였다. 처칠의 죽음은 영국사의 한 시대가 마감되었음을 말해주는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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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밥상 - 밥상으로 본 조선왕조사
함규진 지음 / 21세기북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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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
장지문이 드르륵 열린다. 사옹원 제조가 두 팔로 음식상을 받들어 들어오고 내관들이 종종걸음으로 따른다. 장지문이 스르르 닫힌다.
“젓수시옵소서”
“요즘 계속 비가 없소.”
“그러하옵니다.”
사옹원 제조와 왕은 날씨 이야기부터 정치문제까지 두루두루 화제에 올린다. 왕의 표정이 보일락 말락 굳어진다. 엄선된 식재료만 썼을텐데 음식의 일부가 물이 좋지 않다. 식재료를 진상한 지역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제주도의 비바람 피해가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 아니오?”
“황공하오나 그렇사옵니다..”
“쯧쯧. 농사지을 땅도 변변치 않아 물고기나 조개를 잡아 겨우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어제 휼전(재해를 당한 고을에 왕이 특별히 위로금이나 먹을 거리를 내리는 일)을 베풀라고 분부했지만 오늘 조회에서 더 근본적인 대책을 논의해야겠소. 진상도 당분간 그만두라 이르고.”
“아무래도 감선(왕이 자연재해나 인위적인 재난을 만나 반찬의 가짓수를 줄여 하늘과 백셩에게 반성하는 뜻을 보이는 일)에 들어가야겠소.”
“감선 말씀이옵니까? 황공하오나 대행대비마마의 1주기로 철선(상과 같은 이유로 고기반찬을 먹지 않는 것)을 하신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사온데…”
“아니, 아직 본격적인 가뭄은 아니라도 산과 들의 채소가 시들해질 정도라면 과인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오. 제주도의 피해도 있고 하니, 감선을 실시하여 천지신명과 백성들 앞에 과인의 부덕함을 자책하는 모습을 보여야겠소.”
“망극하옵니다. 전하!”
아침수라가 끝났다. 사옹원 제조는 들고 나온 수라상을 내관들에게 넘긴다.
사옹원 제조: 어흠, 그러니까, 뭐 다들 알겠지만, 요즘 주상께서 입맛이 통 없으시니 큰일이오. 찬을 불과 몇 가지만 집으시고, 그대로 물리고 계시오.
상선: 날씨가 하도 더우니 그렇기도 하시겠지만… 그러다 보니 얼마 전까지 시고 찬 음식을 자주 찾으셨지요. 입맛이 없으신 중에 동치미만은 싹싹 비우실 정도로. 그 때문에 비위가 손상되신 게 아닐는지?
상식: 확실히 중궁전에 납시셨을 때도 참외와 화채를 매번 드셨지요. 그러고 보니 중전께서 최근 주상 전하의 기가 많이 약해졌다고 걱정하고 계십니다.
상선: 선대께서도 여름이면 찬 것을 지나치게 드시고 탈이 여러 번 나시더니만… 약방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사옹원 제조: 아직은 그리 심각한 상태는 아닌가 보오. 그래서 약을 쓰기보다는 기력을 돋울 뭔가를 젓수실 필요가 있는 게요.
제거: 매운 맛으로 기혈의 운행을 돕고, 비위를 따뜻하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드시는 찬에 후추와 생강 양념을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옹원 제조: 좋소. 하지만 지나치지 않도록! 그리고 효과가 빨리 나야 합니다. 입맛과 기운이 없으시니 짜증도 느신 것 같고, 경연장에서도 신하들에게 말이 곱지 않다고 해요! 양념도 좋지만 기력을 회복하실 찬품을 생각해 보시오.

이책의 저자가 재구성한 장면이다. 저자는 이책에서 이 장면의 의미를 밥상을 통해 왕과 왕조의 ‘양생’을 도모한 것이라 해석한다.

“조선 왕들의 밥상에 올랐던 음식은 유별나게 희귀한 식재료를 쓴 것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교묘한 조리 기술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나라의 왕실에서 즐기던 요리에 비해 맛이라는 면에서 특별히 열등하지도 않다. 그러나 곰발바닥이나 제비집 같은 재료는 조선 왕 정도의 힘이라면 못 구할 것도 없었을 텐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외국에서 구입해 들여온 진기한 식재료나 국내에서 나지만 워낙 귀해 왕이나 먹을 수 있는 재료는 없었다. 나라가 가난해서 그랫다고도 볼 수 없다. 민간에서는 진귀한 식재료, 사치스러운 요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궁중요리가 특별한 점은 재료나 정교한 요리 기법에 있지 않고 다양한 재료를 써서 무척 많이 손을 대어 만든다는 데 있다. 이른바 정성의 요리다. 한 사람을 위해 많은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아서 음식을 만든다. 그러한 정성의 요리가 궁중요리의 특징인 것이다.

그것은 음식에서 사치스러움보다 정성을 추구하고 양생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음식에서도 여러 계통의 재료가 골고루 섞여 음양오행이 조화되도록 배려하는 독특한 음식 철학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런 왕의 몸을 생각하는 식단은 효과가 있었을까? 표면적으로 보면 그리 효과가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은 47.07세, 비슷한 시기 영국이 51.76세, 프랑스가 48.11세, 그리고 중국이 47.03세이니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건강과 수명을 좌우하는 것은 식사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문제, 과로와 운동의 문제도 크기 때문이다. “성인의 수준에까지 학문과 품행을 수련해야 참다운 왕이 도리 수 있다는 성리학적 군주상을 강요당했으며 신하들과의 권력투쟁으로 좀처럼 마음을 편안히 가질 수 없었던 조선의 군주들은 음식을 잘 먹는 것 말고 달리 양생 수단을 쓸 수도 없었고 적당한 오락으로 심신을 편안히 할 여유도 없이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격구나 사냥 등으로 운동과 오락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나, 중기 이후 성리학적 정치 문화가 고착화됨녀서 왕은 하루 세번이 넘는 경연과 여러 예식 절차 등에 얽매이며 궁궐 안의 포로처럼 고단하고 따분한 나날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생활을 견디지 못해 무예를 익히거나 음주 가무에 빠져든 왕이나 세자들, 즉 연산군, 효종, 사도세자 등은 모두 ‘임금 자격이 없는 자’로 매도되었으며 끝내 마지막이 좋지 못했다.”

그러나 저자는 왕의 밥상은 왕 개인의 밥상이 아닌 나라의 주인의 밥상으로서 정치적 의미가 있었고 그 정치적 의미를 살린 밥상이었기에 조선왕조가 5백년이란 장수를 누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왕의 밥상에는 왕 개인의 양생은 물론 왕조의 양생까지 담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진상의 예를 든다. 공납이 대동미로 일원화된 뒤에도 진상은 없어지지 않았다. “조선왕조가 끝까지 진상 제도를 버리지 않았던 까닭은 왕이 밥상머리에 앉아 방방곡곡에서 올라온 식재로를 대함으로써 ‘영남이 흉년이라더니 정말이로군’ ‘호남에서 올라온 고초로 담근 장맛이 점점 좋아지는군. 농법을 개량한 모양이야’ 등 구중궁궐에 낮아서 지방의 실태와 백성들의 살림을 살필 수 있었다. 상소문이나 보고서 등 글로만 알기보다 자신의 혀와 코와 목구멍으로 백성들의 참모습에 다가가는 것이었다.”

분명 진상은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다. 그런데도 진상 제도를 유지한 참뜻은 왕과 백성의 소통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진상 제도의 철학적 배경은 “천하가 한 사람을 봉양한다 以天下奉一人”이란 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만민의 어버이로서 왕은 만민의 봉양의 받는다는 것이다.

“진상은 세금이 아니라 어버이인 군주의 밥상을 차리기 위해 백성들이 모으는 정성이요. 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왕에게 차리는 예의다.”

물론 그 예의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어버이도 자식에게 보여야할 예의가 있다. “천인감응론적 이념 말고도 감선은 백선의 어버이인 왕이 자식과 같은 백성들과 함께 굶고 고통을 나누자는 의미가 있었다. 힘이 모자라서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 주지는 못하지만 함께 울어주는 정치 그것은 전근대 사회로 통칭되는 19세기 이전 사회에서 달리 찾아보기 어려운 정치였다.”

“밥상머리에 앉아 숟가락과 젓가락을 놀리는 지극히 사적인 시간에조차도 정치를 생각하고 즐거움의 조금이라도 나눠주고 싶고 그들이 느끼는 괴로움의 조금이라도 나눠 갖고 싶어하는 자세, 그것이 어쩌면 많은 어려움과 약점 속에서도 왕주과 500년 동안 ‘장수’할 수 있었던 ‘양생’의 비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공과 사가 뚜렷이 구별되지 않는 조선의 정치는 그것대로 많은 폐단을 낳았다. 위선, 실용성을 잊은 공론, 도덕주의와 형식주의가 배태되었다.” 저자는 음양오행의 법칙에 따라 양생 위주의 식단을 짜도록 한 것은 태종에서 시작하여 세조에서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의 경직화와 함께 그러한 식단의 균형도, 양생의 정신이 약화되고 형식화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현실정치에서 식단의 양생은 정치는 어떠했는가? 저자는 영조를 조선 왕의 (현실적) 밥상 철학을 보여주는 대표적 군주라 말한다.

“영조는 누구보다 자기 관리에 철저한 임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유롭게 사는 사람이 몸매나 성인병을 걱정해서 시도하는 자기 관리가 아니라 마치 운동선수의 자기 관리처럼 끊이지 않는 싸움에 대비해서 힘을 비축하고 건강을 잃지 않으려는 목적의식이 뚜렷한 자기 관리였다.

영조는 신하들의 분쟁을 잠재우고 모두들 자신 앞에 무릎 꿇리기 위해 여러 수단을 쓰는데 그중 하나가 감선이엇다. 보통 오아들의 두 배 이상으로 자주 감선했다. 그런데 영조는 정작 감선의 실효에 대해 별로 믿지 않았다. ‘어찌 감선으로 천재에 응답할 수 있겠는가? 감선이란 단지 하늘을 모독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권력투쟁에서 감선이 갖는 효과를 노렸다. 왕이 반찬 가짓수를 줄이며 반성하고 있는데 감히 신하들이 푸짐한 밥상을 차리거나 음주가무를 즐길 수는 없다. 임금이 반성하는데 신하들도 반성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런데 당론을 제기하며 조정을 시끄럽게 할 수는 없다. 그러니 한목소리로 “그만 감선을 거두시고 평상시대로 드소서’라는 주청을 드려야 한다.

영조는 심지어 삼선을 넘어 각선, 즉 단식도 십여 차례는 실시했다. 이래도 안되면 ‘세자에게 양위하겠다’는 양위 선언도 다섯 번 있었다. 그외에도 자잘한 ‘자해 시위’를 벌여 신하들을 난처하게 햇다.

신하들은 영조의 ‘자해 시위’가 끝없이 이어지자 피곤하게 여기면서 어쩔 수 없이 따를 뿐 충심으로 영조를 위하거나 존경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주는 사랑받는 자가 되기보다 두려워하는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란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영조는 속 보이는 감선과 자해로 신하들이 겉으로는 복종하도록 햇다. 속으로는 싫어하더라도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를 정착시켯던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자주 자해 시위를 하면서 영조는 어떻게 장수할 수 있었을까? 영조는 감선을 자주 했지만 날짜로는 그리 길게 하지 않았다. 또한 계획적으로 햇다. 감선을 하더라도 사흘간, 열흘간 식으로 기한을 정해 놓고 햇다. 오랜 감선이 건강에 좋지 않은 점은 골고루 먹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진다는 점도 잇지만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가 없어 식사가 즐겁지 않고 사실상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요인에 따라 식사가 정해지므로 스트레스가 쌓인다는 데 있다. 그러나 영조는 날짜를 스스로 통제햇다.

영조는 자신의 밥상에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원래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고 밥을 고봉으로 담아 올리는 관례를 폐하고 적당히 담도록 햇다. 이렇게 되면 평소의 밥상이나 감선한 밥상이나 큰 차이가 없다. 그러면서 정치적으로 ‘검약을 실천하는 임금’이라는 인상을 주고 개인 건강 차원에서는 과식을 삼가면서도 치우치지 않는 식사를 추구한 셈이다. 그리고 영조는 식사 시간을 일정하게 햇다. 일을 하다가도 식사 시간은 반드시 지켰다.

그리고 과도한 스트레스는 건강을 해치지만 납득할만한 스트레스는 기력을 돋우고 면역력을 키워준다. 영조는 언제나 신하들과의 싸움에 골몰했으며 날마다 전장에 나가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조회에 나갔다. 스스로 ‘체력을 지켜야 한다. 건강이 무너지면 지고 만다’란 의식이 있었다.

뚜렷한 목적의식, 그에 따른 적당한 스트레스, 적절한 음식 조절이 ‘투사’ 영조를 오해 싸울 수 있게 햇다. 조선의 왕이라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스스로는 보람을 나라와 백성에게는 혜택을 줄 수 잇는지 영조는 모범을 보여주엇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왕의 밥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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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스웜 -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세상을 뒤바꾼 가장 영리한 집단
피터 밀러 지음, 이한음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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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나온 '히든 브레인'에 나온 이야기이다(읽은 분은 인용문을 건너 뛰십시오)


"1995년 8월 셋째 주 금요일 밤은 전형적인 여름 밤이었다. 디드로이트에서 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젊은이들이 다리를 건너 벨아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었다. 어느새 자정이 지나갔다. 군중 속 어딘가에서 서른세 살의 한 여인이 마리화나를 한 모금 빨았다.가족들 사이엔 리사로 불렸던 데레사 워드는 키가 약 150센티미터에 몸무게가 52킬로그램이었다. 그녀는 식료품점에서 일하면서 마케팅으로 학위 과정을 마칠 예정이었고 열세 살짜리 딸이 있었다.


한 젊은 남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에게 치근덕 거리는 남자엿다. 그는 마르텔 웰치로 키가 185센티미터에 몸무게가 136킬로그램에 달했으며 전엔 고등학교 미식축구선수로 활동했다.


작은 몸집의 데레사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 열아홉 살 먹은 젋은이는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 데레사를 만졌다.


데레사는 자신의 차로 가 달아났다. 그 남자도 차에 뛰어들어 뒤쫗아왔다. 디트로이트로 가는 다리에 이르렀을 때 병목 현상이 있었고 추격전은 거기서 끝났다. 마르텔은 그녀의 차 바로 뒤에 멈췄고 그와 차에 같이 탄 세명의 젊은 남자들이 그녀의 차로 가 창문으로 여자를 움켜잡았고 차 밖으로 끌어냈다. 그러면서 주먹으로 그녀를 난타햇다. 여자의 모은 연이은 주먹질에 사시나무 떨듯 했다.


교통정체에 걸린 사람들은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게 믿어지지 않았다.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런 폭력사태가 일어난 걸까?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걱정되었다. 그러나 하무도 휴대폰으로 경찰에 신고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튼 여긴 사람이 많고 누군가는 신고했을 것이다.


방관자들은 충격과 공포를 느끼며 현장을 둘러쌌다. 마르텔은 그 순간에도 여자를 구타하고 있었고 여자를 끌어내고 그녀의 팬티를 벅기며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여자는 머리채를 잡힌 채 다리를 따라 끌려가고 있었다. 마르텔이 여자를 마치 인형처럼 마구 뱅뱅 돌리자 그녀는 팔과 다리를 연신 버둥거리며 몸부림쳤다. 마르텔은 여자의 머리를 남의 차 보닛에 마구 내리쳤다. 사람들은 입을 벌린 채 지켜보았다.


그가 벌거벗은 그녀를 번쩍 들어올리더니 "이 망할 년을 원하는 사람 없소? 이년은 내 차에 진 빚을 갚아야 하거든.' 그리고 다리의 바닥에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마르텔은 타이어를 빼는 데 쓰는 지랫대를 꺼내 친구들과 함께 데레사의 차를 박살냈다.


그녀는 멍한 상탤고 사람들 사이를 비틀거리며 지나갔다. 그녀의 일에 끼어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폭행이 시작된지 반 시간이 지났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50미터를 걸어갔다. 데레사는 어깨 너머로 뒤쪽을 쳐다보았다. 마르텔이 지렛대를 들고 다시 그녀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 난간을 기어올랐다. 그리고 디트로이트 강 위 9미터 높이에 매달렸다.


'넌 그쪽으로 도망칠 수 없어' 마르텔이 비웃었다. 그가 지렛대를 들어올리고 한발짝 다가갔을 때 수영을 못하는 그녀는 난간에서 손을 놓았다. 그녀는 다음날 한쪽 다리가 없어진 채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사건이 알려지고 사람들은 분노했다.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고 30분동안 폭행이 진행되었다. 심지어 마르텔은 그날 아무 일 없이 집에 돌아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히든 브레인'의 저자는 그날 다리에 모여던 100여명의 사람들이 비정하거나 겁쟁이들이 아니라 말한다. 그들은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자신들이 왜 아무 것도 하지 않앗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랬던 자신에 대한 죄의식에 시달렸다.


데레사가 13살 딸의 어머니란 말을 들은 티파니란 여자는 괴로움에 못이겨 행동에 나섰고 마르텔을 지목해내고 법정에서 증언을 햇다. 그런 사건에서 누구도 사람들의 비난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을 때 말이다. 증언이 끝나고 그녀는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가발을 쓰고 다녔다.


그런데 왜 100여명 중 아무도 행동에 나서지 않았을까? 저자는 그때 아무도 마르텔에게 맞서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고 말한다. 누군가 맞섰다면 곧 다른 사람들도 같은 행동에 나섰을 것이다. 문제는 집단의 모두가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사람이 많을수록 기꺼이 도움을 주는 사람도 많아야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큰 집단은 보통 더 적은 수의 '착한 사마리아인들'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보통 개인을 신뢰하거나 책망한다. 그러나 그 다리에선 개인의 자율성을 넘어서는 또 다른 층위가 존재했다는 곳을 보여준다."


이책의 저자는 그 '또 다른 층위'가 집단역학이라 말한다. 저자는 이책에서 집단역학의 4가지 원리를 설명한다. 디트로이트 강 위에 있었던 100여명의 사람들에게 작용했던 원리를 저자는 '적응 모방'이라 말한다.


적응 모방은 참새 들이 리더없이 떼를 지어 날고 물고기와 순록들이 떼를 지어 다닐 수 있게 하는 원리이다.


"풀밭의 상당히 넓은 면적에 걸쳐 짙게 그늘을 드리울 정도로 빽빽하게 모인, 적어도 200-300 마리, 그 이상일 수도 있는 새 떼 전체가 바람에 사로잡힌 어떤 검은 조각처럼 한순간에 날아올랐다. 참새들은 깜짝 놀라서 날아오른 것이 아니었다. 총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그들은 단숨에 한꺼번에 이륙햇다. 보이지 않는 철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그들 무리는 마치 모두가 한 생물의 일부인 것처럼 갈색에서 회색으로 밝은 색으로 변하면서 방향을 바꾸고 선회하고 비행순서를 뒤바꾸었다."

참새 떼 거의 동시에 움직이면서 공중에서 대형을 맞추고 행동을 일치시킬 수 있는 이유를 저자는 '적응 모방'이라 부른다. 적응 모방은 한 집단의 개체들이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자신이 뭘 알아야 할지를 단순하게 가장 가까이 있는 6-7 마리의 이웃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자신의 이웃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전체 집단은 정확히 행동을 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웃으로 분절된 네트웤을 통해 먹이가 있다든가 포식자가 나타났다든가에 대해 집단의 개체들이 얻은 정보는 빠르게 집단 끝에서 끝까지 전달된다.


참새 떼와 물고기 떼, 순록 떼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관한 단서를 계속 서로에게서 포착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이것은 불확실한 순간에 손쉽게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이다."


저자는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이것은 비행기에서 맨 처음 내린 승객들이 실제로 그럴 생각도 없는데 나머지 승객을 수화물 찾는 곳으로 이끄는 경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실험에서 주목할 점은 (수화물이 어디있는지) 아는 사람이 대단히 적게 필요했다는 것이다. 5%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은 적극적인 신호 전달 없이도 집단 전체로 정보가 대단히 빨리 아주 효율적으로 전파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집단역학이 디트로이트 강 위의 비극을 낳은 '또 다른 층위'였다. 그 다리 위에 있었던 사람들은 집단의 마법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집단에서 아무도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을 가만히 있으라는 무의식적 결정을 내리도록 만든 것이다. 저자는 적응 모방의 원리가 효율적인 정보전달을 위해 진화되었지만 "유행이나 어리석은 금융 계획에 휩쓸릴 때처럼 군중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도록 유혹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그 외에도 다른 집단역학 3가지를 이책에서 소개한다. 개미 집단의 자기조직화, 꿀벌 사회의 정보다양성, 흰개미의 간접 협동을 자세히 소개한다. 그리고 저자는 그들의 단순한 원리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환경이란 복잡계의 불확실성을 제어해내는지 그리고 그 원리에 따라 인간이 만든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사회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 원리에 의해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가 소개하는 4가지 원리는 오랜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그 오랜 시간을 견뎌온 만큼 효과적이라는 것을 보여온 원리들이다. 그리고 인간의 행동 역시 그 원리를 따른다. 위에서 본 디트로이트 강 위의 비극처럼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결론에서 인간은 동물들의 사회와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그 강 위에서 누군가가 감히 맞설 용기가 있는 한 사람만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람이 드물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잇다고 말한다.


"좋든 나쁘든 인간은 같은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우리의 딜레마를 대단히 단순화한다면 우리는 공동체에 소속되기와 자기 개인의 행복을 최대화하기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우리는 타고난 본능 외에 공통의 목표를 향해 일하도록 우리를 도와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우리는 합법적 계약, 세금, 혼란을 막는 법률, 차례를 기다리고 영화 상영 때ㅑ 떠들지 않는 드으이 사회 규범 같은 것들 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사회계약은 대단히 허약하다. 그것을 깨는 데는 그저 몇 사람이 속이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규칙을 왜곡하거나 규칙을 지키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만 하면 된다. 개미나 벌과 달리 우리는 집단의 요구에 무조건 봉사하도록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다.


그것이 동물 집단이 그렇게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잇다는 데 우리가 그토록 놀라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복잡성을 갖고 씨름한다. 이런 개인들로서는 올바른 일을 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렇게 보면 적어도 사회적 차원에서는 인간이 벌이나 개미보다 더 우월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바로 그런 약점이 인간의 강점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디트로이트 다리 위에 있었을 수도 있는 집단 압력에 저항할 수 있는 그 누군가처럼 "우리는 맹목적으로 남을 모방하거나 남을 이용하거나 더 나은 본능을 무시할 때가 아니라 확실하고 독창적인 것 즉 자신 만의 독특한 경험과 재주로부터 도출되는 것을 가져올 때만 집단에 가치 있는 무언가를 추가한다."


저자는 이렇게 이책을 끝맺는다. " 아무튼 인간의 행동이라는 불확실한 세계에서 당신은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집단은 올바로 기립 박수를 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당신은 실제로 즐겁지 않은 일에 박수를 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진정으로 굉장한 무언가에 환호할 완벽한 기회를 지나치고서 후회하고 싶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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