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천하를 논하다 - 공자와 그의 제자들 1 이상의 도서관 2
신동준 지음 / 한길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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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에서 ‘인(人)’은 왕에게만 쓰던 말이었다. 인(人)이외에는 민(民)이란 말을 썼다. 인과 민의 차이는 정치적 권리가 있는가의 차이이다. 오직 정치적 권리가 있는 사람만이 사람이란 말을 들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정치적 권리가 있어야만 사람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마찬가지였다.

후에 인(人)의 의미는 왕에서 제후, 제후에서 경, 대부로 확대되었다. 시간에 지나면서 정치적 권리가 확대되어가면서 의미가 확대되어간 것이다.

공자 이전에 인(人)으로 분류되는 사람을 군자라 불렀다. “군자는 문자 그대로 ‘군주의 아들’로 군주의 친척을 의미했다. 이는 생산에 종사하는 평민 즉 ‘소인’과 대비되는 말로 사용되었다. 초기 문헌에는 세습귀족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공자가 의미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공자가 말한 ‘군자’는 혈연에 의해 얻어지는 자격이 아니다. 공자가 말한 ‘군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하는 사람이다.

“공자사상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여타 사상과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하나는 치평(治平: 치국평천하)을 중시한 점이다. ‘치평’은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비오스 폴리티코스(bios politikos)’에 해당한다. 정치적 삶이 배제된 삶은 진정한 삶이 될 수 없다는 통찰이 번득이는 대목이다. 다른 하나는 학지(學知: 학문과 지식)를 중시한 점이다. 아렌트의 표현으로는 ‘비오스 테오레티코스(bios theretikos)’다. 학문적 소양을 기초로 한 사려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삶을 추구할 길이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때문에 공학이 수천 년에 걸쳐 제왕학의 전범으로 통용된 것이다.”

정치적 삶과 관조적 삶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공자는 극기복례라 했다.

“극기복례(克己復禮: 자신을 억제해 예로 돌아감)가 인을 이루는 것이다. 하루만이라도 극기복례하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간다.” (논어, 안연)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봍통 극기복례의 극기를 극욕(克慾)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저자는 극기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공자사상에 대한 왜곡이라 말한다. “공자는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거나 없애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단지 과도하게 노출되는 것을 경계했을 뿐이다.” 저자는 극기의 나와 복례의 례의 균형, 즉 정치적 삶과 관조적 삶의 균형을 말한 것이라 본다. 그러므로 저자는 순자가 예로서 욕망을 다스린다는 제욕(制慾)으로 극기를 해석한 것이 정확하다고 본다.

“’복례는 수기를 통해 예로 상징되는 정치공동체의 기본질서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이는 개인의 수기와 국가사회질서가 유기적으로 합일된 상태를 말한다. 순자가 말하는 융례(隆禮)가 이에 해당한다. 복례는 곧 순자가 말한 예치의 취지가 구현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극기복례는 곧 극기인 수기와 복례인 치인이 통일적으로 결합돼 군자의 위정(爲政)이 궁극적인 목료로 삼고 있는 지치(至治)의 경지에 도달한 것을 의미한다.”

저자의 극기복례에 대한 해석은 공자 사상의 핵심이 수제인가 치평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관중에 대한 평가를 증거로 든다.

관중에 대해 맹자와 성리학자들은 수제의 차원에서 폄하햇다. 그러나 공자는 “그러나 ‘관중의 그릇이 작구나 그가 예를 안다면 누가 예를 알지 못한다고 하겠는가.’라며 개인적인 행실에선 비례(非禮)로 비판했다. 그러나 비례하다고 비판한 관중을 ‘제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하여 병거를 동원하지 않은 것은 모두 관중의 공이다. 그 누가 그의 인만 하겠는가’라며 논어 전편을 통해 관중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공자에게 중요한 것은 수제의 차원의 비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중시한 것은 치평의 문제엿다고 저자는 말한다.

“민주 개념을 강조할수록 공동체의 ‘정치적 삶’보다 개인의 ‘관조적 삶’을 중시하게 되고 공화 개념을 강조할수록 개인의 ‘관조적 삶’보다 공동체의 ‘정치적 삶’을 중시하게 된다. 서구의 민주공화정이 프랑스혁명 이해 현쟁네 이르기까지 사회를 강조하는 민주 개념과 국가를 강조하는 공화 개념의 대립으로 끝없는 갈등을 겪고 잇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앙ㄶ다. 아렌트는 바로 이점에 주목해 개인 차원의 관조적 삶도 중요하지만 정치적 삶이 배제될 경우 결국 관조적 삶도 상실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공적인 충(忠)과 사적인 효(孝)의 갈등문제로 접근했다. 이는 ‘충’에 기초한 치국평천하와 ‘효’에 기초한 수신제가 간의 우선순위 문제로 단순화할 수 있다. 동양에서 내린 결론은 ‘충’과 ‘효’의 유기적 결합이었다. 맹자계통은 ‘수신제가 -> 치국평천하’에 입각해 있던 까닭에 상대적으로 ‘선효후충’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한비자 드으이 법가계통은 ‘치국평천하 -> 수신제가’에 입각해 ‘선충후효’의 입장에 서 있었다. 절충적인 입장에 서 있었던 순자계통은 ‘치국평천하 <-> 수신제가’에 입각해 충효합일을 주장했다.”

성리학자들은 공자사상이 선효후충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공자사상의 본령이 ‘치평’에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무리한 해석이다. 공문의 기본 목표는 기본적으로 ‘치평’에 헌신하는 군자를 만들어내는 데 있었다. 공자는 결코 개인적 차원의 효를 국가공동체 차원의 충보다 높인 적이 없다. 공자는 충과 효의 유기적인 합일을 추구햇다. 공자사상의 큰 특징이다.”



“14년에 걸친 공자의 천하유세가 완전히 실패작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보는 것이 옳다. 당시 공자는 일견 실패작으로 보이는 천하유세의 기간 중 ‘치평’의 이치를 완전히 터득하는 소득을 얻었다. ‘자로’ 편에 이를 뒷받침해주는 대목이 나온다.

염유가 묻기를 ‘이미 백성들이 많으면 또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하기를 ‘부유하게 해주어야 한다’
염유가 다시 묻기를 ‘이미 부유해졌으면 또 무엇을 더해야 함니까?’
공자가 대답하기를 ‘가르쳐야 한다’

공자사상의 큰 특징 중 하나로 선부후교(先富後敎) 사상을 들 수 있다. 공자는 군자학을 가르치면서 교민(敎民)의 중요성을 역설햇다. 그러나 그가 말한 교민은 어디까지나 부민을 전제로 한 것이다. 부유하게 해주지 않으면 교민 또한 실표를 거둘 수 없다고 보았다. 공자는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덕치의 전제조건인 교민이 이뤄질 수 없다고 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자사상을 논하면서 ‘선부후교’ 사상을 간과하고 있으나 이는 큰 잘못이다. ‘수제’를 지나치게 강조한 성리학의 유폐(遺弊)이다.”

공자처럼 천하유세를 한 사람은 이전에 없었고 그의 첫 시도는 시도로 끝났을 뿐이다. 사람들은 그가 ‘불가능한 것을 하려 한다’고 조롱했다. 당대에 희망을 접고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학교를 열었다. 희망을 미래에 건 것이다.

“천하유세를 마치고 돌아온 뒤 공자가 개설한 학교는 가장 정선된 교과목으로 최고 수준의 교양을 가르치는 당대 최고의 도장이었다.” 공자의 명성 덕분에 배우려는 학생들로 넘쳤다. 그러나 공자가 가르친 것은 개인의 도덕성을 수련하는 수제가 아니었다. 그런 것을 배우려고 멀고 먼 곳에서 까지 공자를 찾아오지는 않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가 가르친 것은 고위귀족들만 배우던 최고의 교양이었고 그 교양은 정치를 위해(치평을 위해) 필요한 교양이었다.

“공자는 학자라기보다는 혼탁한 세상을 구하고자 한 현실정치가였다. 그는 정치란 기본적으로 전체 인민의 복리와 행복의 증진을 위해 봉사해야 하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오직 높은 학덕을 군자에 의한 통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확신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했을 때 유학자들이 군현제를 반대하고 봉건제를 옹호했기 때문에 공자가 말한 주공의 예가 주나라의 봉건제라고 여기게 되었다. 물론 “공자는 평소 전통문화의 붕괴를 애석히 여겼다. 그는 신분세습에 기초한 통치체계인 봉건제의 붕괴를 애석히 여긴 것이 아니라 전통문화의 정수인 예제의 붕괴를 애석히 여긴 것이다. 그는 결코 맹자와 같이 전설상의 성군을 들먹이며 회고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거나 시대퇴행적인 전설상의 주왕조의 봉건제 붕괴를 아쉬워하며 신분세습의 반동적인 통치체제를 옹호한 적이 없다. 당시 예악은 국가질서의 차별과 통일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이엇다.” 그러나 공자는 예제의 구체적인 내용보다 그 정신을 중시했다. 공자가 주공이 완성한 예악제도를 중시한 것은 예의 정신을 구현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자한’ 편의 언급은 예제로 상징되는 전통문화에 대한 공자의 기본입장이 잘 드러난다.

“원래는 마면이 예에 맞다. 그러나 지금은 생사로 만들었어도 매우 검소하니 나는 뭇사람들을 따르겠다. 원래 절하는 것은 아래에서 하는 것이 예에 맞다. 그러나 지금은 절을 하며 위에서 하니 이는 교만한 것이다. 나는 비록 뭇사람들과 어긋날지라도 아래에서 절하겠다.” (자한편)

하급 사인이란 출신 때문에 하대부 이상 올라갈 수 없었던 공자가 세습귀족의 봉건제를 옹호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군자란 말의 뜻을 혈통에 의한 자격에서 실력에 의한 자격으로 바꾼 사람이다. 그가 노나라의 대부가 되었을 때 3환을 무력화하고 군권을 확립하려 한 것이 증거라며 저자는 공자의 정치적 이상은 “신분세습의 봉건정을 타파하고 군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가 평생을 두고 치평학의 정립에 헌신하면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군자의 길로 들어서고자 찾아온 자들을 모두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이 때문이엇다.” 그리고 공자가 군자의 자격이라 말한 것은 인격자를 말한 것이 아니다. 맹자가 말한 것처럼 인격을 닦으면(수제) 치평의 자격이 주어진다고 공자는 말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공자가 자신의 학교에서 가르친 것은 구체적인 통치의 기술인 치평학이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공자는 결코 맹학과 성리학이 주장한 것과 같이 ‘수제’만으로 ‘치평’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가 말한 ‘군자학’은 바로 ‘치평학’이엇다. 전국시대에 우후죽순으로 등장한 제자백가도 바로 공문의 교재인 치평학의 교과목을 통해 자신들의 사상적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다.”

공자 사후 “군자가 새로운 의미로 통용됨에 따라 유가의 행동규범에 따르지 않은 군주들은 자동적으로 ‘비군자’ 즉 ‘소인’으로 분류되엇다. 군자학의 세례를 받은 유가는 세습적 군주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 진정한 군자이며 국정운영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풍조가 봉건질서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공자는 비록 당대에는 성사시키지 못했으나 끝내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킨 인물이다. 전국시대에 군자학을 습득한 공문의 문인들이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등장해 신분세습의 봉건질서를 무너뜨리고 재덕을 갖춘 군자가 정치를 다루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인시대(士人時代)’를 열었다. 공자가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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