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의 나라 - 몽족 아이, 미국인 의사들 그리고 두 문화의 충돌
앤 패디먼 지음, 이한중 옮김 / 윌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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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두 문화가 충돌할 때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비극의 주인공은 몽족이며 몽족의 한 가족이다. 몽족이라 하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묘족이라면 알 사람이 꽤 될 것이다. 묘족은 중국인들이 몽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묘족 또는 몽족은 중국의 황제들에게 악몽이었다. 이들은 죽을지언정 굽히지 않는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묘족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그들은 양자강 이남의 땅에 살면서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영토를 넓힐 때마다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



몽족은 중국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존심 강한 몽족은 자신들 위에 지배자를 인정하지 않았고 중국어도 중국의 뛰어난 문명도 거부했으며 어디에 있던 자신들의 문화를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집했다. 한족과 몽족은 공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몽족도 농민이었다. 푸아는 내게 그녀가 살던 마을에서는 모두가 같은 일을 했기 때문에 누구도 남들보다 특별히 귀할 게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계급제도도 없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누구도 글을 몰라 박탈감이나 불편함을 느끼는 일도 없었다. 다음 세대가 알아야 할 것은 전부 구전이나 행동으로 전해졌다. 이를테면 조상을 공경하는 일도 켕을 연주하는 법도 장례를 치르는 법도 청혼을 하나느법도 사슴을 뒤쫓는 법도, 집을 짓는 법도, 치마에 수놓는 법도, 돼지를 잡는 법도, 낱알 터는 법도.”



결국 그들은 힘에 밀려 조금씩 조금씩 남쪽으로 산으로 밀려났고 지금은 운남성의 고산지대로 밀려났다. 그래서 몽족 속담은 이렇게 말한다. “물고기는 물에서 헤엄치고 새는 하늘을 날고 몽족은 산에 산다.”



그리고 운남성에서조차 살 수 없다고 느낀 몽족의 일부는 인도차이나로 떠났다. 이책의 주인공인 몽족은 19세기 라오스의 고산지대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몽족 속담대로 ‘산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들은 라오스의 산에서도 쫓겨나야 했다.



베트남전쟁에 휘말린 라오스에도 이념전쟁이 일어났다. 몽족은 라오스 국왕과 미국의 편을 들었다. 공산주의보다 자본주의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몽족에겐 그런 것은 상관이 없었다. 단지 공산주의자들이 몽족을 그들끼리 살던 대로 살도록 내벌려두지 않을 것같았기 때문이다. 프랑스도 건드리지 못했던 그들의 자치를 허용하지 않을 것 같았고 농지개혁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몽족의 화전농업을 봐줄 것 같지도 않았다.



몽족은 미국의 용병이 되었고 미국은 그 전쟁을 ‘조용한 전쟁’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 전쟁은 몽족에겐 조용한 전쟁일 수 없었다. “몽족은 자기 뜻대로 전사가 된 게 아니었다. 라오스 북부를 향한 폭격 때문에 농사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다른 일자리도 구할 수 엇ㅂ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라오스에 투하된 폭탄은 200만톤이 넘고 대부분 미군 비행기가 몽족 거주지에 있는 인민군 부대를 공격하면서 퍼부은 것이었다. 9년 동안 8분에 한 번꼴로 폭격을 위한 출격이 있었다. 1968년부터 1972년 사이 단지 평원 한 곳에 투하된 폭탄 통수가 2차 대전 동안 미군이 유럽과 태평양에 퍼부은 양보다 많았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며칠 전 장교들과 있는데 (몽족) 신병 300명을 막 데려오더군요. 그 아이들 중 30%는 열네 살이 안 됐고 여남은 명은 열 살밖에 안 됐어요. 다른 30%는 열대여섯 살이었고요. 나머지는 서른다섯 살 이상이었어요. 그렇다면 그 중간은 어디 있을까요? 답을 말씀드리죠. 전부 죽었습니다.”



1960년 라오스에 거주하는 몽족 인구는 30만에서 40만 사이였다. 그중 전쟁으로 죽은 수가 얼마인지는 추정치에 따라 10%에서 50%까지 편차가 크다. 그러나 1970년 인구의 1/3은 내국 난민이 되었다. 그리고 난민이 된 그들은 라오스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를 “메오는 종족의 뿌리를 아예 뽑아버려야 한다”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쫓겨 태국으로 그리고 미국으로 떠밀려가야 했다.



미국은 몽족에게 의리를 지켰다. 그러나 미국은 몽족의 긍지를 지켜주지는 않앗다. 몽족들은 라오스에서처럼 농사를 지을 땅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그들을 도시로 흩어놓았다. 말도 통하지 않는 도시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옮겨가는 새로운 산마다 살 만했던 것은 옛날 일이었다.”



“미국에 온 뒤로 이 부부는 ‘너희는 하찮다’고 느끼게 만드는 미국인들만 만나온 것이다. 두 사람이 받은 교육 때문인지 영어 실력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권위가 떨어질 수 밖에 없어서인지 분명치 않았다.



“내가 참 바보지.”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선 아무 것도 모르잖아요. 미국 말도 모르고. 하루 종일 TV를 봐도 하나도 모르겠어요. 전화도 못 걸어요. 숫자를 모르니까. 애들이 가르쳐 주는 데 바로 잊어버려요. 먹을 건 애들이 가게에서 가서 사와요. 난 가봤자 뭐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니까. 슬픈 일도 너무 많고 해서 머리가 이상해졌나봐요.



라오스에선 쉬웠어요. 난 농사만 알면 됐으니까. 벼가 자라는 철에는 첫닭이 울 때 일어나요. 다른 철엔 두 번째나 세 번째 울 때 일어나면 되고 세번 째 울 때도 아직 동이 안 터서 캄캄해요. 그래서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등불 켜는 거지. 등불은 이런 거였어요.”



푸아가 라오스에서 하던 ‘쉬운’ 일 수십 가지를 얘기해주는 동안 나는 그녀가 자신을 바보라고 했을 때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전에 할 줄 알았던 것들을 미국에서는 전혀 써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아닌가 생각했다. 남은 아이 아홉에게 너무나 훌륭한 엄마가 되어주는 것 말고는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마지막 남은 그 능력마저 미국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부정당했다.



나는 푸아에게 라오스가 그립냐고 물어보았다. 대나무 의자에 앉아 있던 그녀는 잠시 말 없이 몸을 앞뒤로 흔들흔들했다.



“먹을 게 모자라고 지저분하고 다 떨어진 옷을 떠올리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요. 여긴 대단한 나라예요. 살기 편하고 먹을 것도 많지요. 하지만 말을 못하잖아요. 나ㅣㅁ한테 기대서 살아야 하고. 복지 수당을 안 주면 굶어죽어야 할거고요. 라오스가 그리운 건 마음 편하고 자유로운 거지요. 원하는 대로 할 수 잇고. 자기 땅 있겠다. 자기 쌀 있겠다. 자기 채소 있겠다. 정말 내 것이 있던 게 그립지요.”



자부심 강하고 독립적인 그들이 땅을 잃고 복지수당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무력한 난민에 불과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들을 ‘석시시대에서 우주시대로 온 사람들’이라 부르며 그들의 비참함을 그들 탓으로 돌렸다. 베트남 전쟁으로 몽족만 미국으로 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몽족은 ‘가장 성공을 못한 난민’이라는 말을 든곤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미국인이 되기 위해 미국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전쟁과 학살을 피할 곳을 찾은 것 뿐이엇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은 몽족으로 남길 원했다.



“17년이 지난 지금 지금 푸아와 나오 키오는 미국의 가전제품들은 사용하지만 여전히 몽족 말을 쓰고 몽족 명절을 지내고 몽족 신앙을 믿고 몽족 음식을 해먹고 몽족 노래를 부르고 몽족 악기를 다루고 몽족 전래 이야기를 하고 정치에 대해선 미국보다 라오스와 태국 사정에 훨씬 밝다.”



“유럽 이민자들이 미국에 온 것은 미국의 주류 사회에 동화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몽족이 미국에 온 것은 19세기 중국을 떠난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즉 ‘동화’에 저항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몽족은 ‘비자발적 이주민’인 것이다.”



그런 그들이니 모든 것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그 충돌이 심했던 곳이 병원이엇다.



“치 넹은 아픈 사람의 집에 찾아와 8시간 동안 있기도 했다. 그러나 서양 의사는 호나자가 아무리 아파도 병원으로 오도록 했고 병상 곁에 기껏하애 20분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치 넹은 정중하고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는 환자의 생활에 대한 온갖 무례하고 은밀한 것들, 심지어 성적 습관이나 배변 습관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치 넹은 즉각적인 진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의사는 흔히 혈액 샘플을 요구하거나 엑스레이를 찍었고 결과가 오기까지 며칠을 기다리곤 했다. 치 넹은 사람 몸을 치유하면서 혼을 다루지 않는다는 게 명백히 어리석은 행위임을 알았다. 의사는 혼에 대해선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혼은 그 사람의 그림자 같은 거에요. 때로는 나비처럼 밖으로 떠도는데 그럴 때 그 사람이 슬퍼지거나 아파지는 거에요. 그러다 혼이 다시 돌아오면 다시 기분이 좋아지고 몸도 낫게 되지요. 이따금 혼이 다른 데로 가버리는데 의사들은 그걸 믿질 않지요. 의사들은 몸이나 피 때문에 아픈 병을 고치는데 우리 몽족은 혼 때문에 아픈 경우가 있고 그럴 땐 영적인 게 필요해요. 리아의 경우엔 약도 좀 쓰고 넹도 좀 하는 게 좋았어요. 하지만 약을 너무 많이 쓰면 넹이 효과가 없어져 버려요. 둘 다 적당히 할 때는 애가 별로 아프지 않았어요. 그런데 의사들은 약을 조금만 주도록 놔두지 않았어요. 혼을 이해하질 못하니까요.”



몽족만 의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몽족이 의사를 이해할 수 없다면 의사 역시 몽족을 이해할 수 없었다.



“초등학생인 아들의 가슴에 부항 자국을 본 학교 선생이 신고를 했다. 몽족 아빠는 감방에서 목을 맸다.” 이런 경우는 물론 극단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몽족이 가는 병원이면 어디서나 “통역자가 없으면 의사와 환자 모두 안개 속에서 마구 비틀거렷다. 그러나 ‘언어 장벽은 가장 분명한 문제이긴 해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어요. 제일 큰 문제는 문화 장벽이었으니까요.’”



“서로 세상을 보는 방식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하며 약간의 경이감을 갖게 됐지요. 전문가의 의견에 단호히 맛설 수 있는 그들의 행동은 저한테는 아주 생소한 것이었어요.”



“그와 페기는 환자 때문에 그만큼 화를 내 본 적이 없었다. ‘제발 이해를 좀 하라며 부모를 마구 흔들고 싶던 기억이 나요. 너무 답답했어요. 벽에다 계속 머리로 들이밀지만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기분이엇어요.’ 그만큼 열심히 하고서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감사는 커녕 기껏 애를 써도 매번 원망만 듣기 일쑤였다. 메디캘은 상환율이 낮았기 때문에 그들의 서비스는 사실 자선행위에 가까웠다. 당시 메디캘 환자를 받아주는 소아과 의사는 그들 뿐이었다. 그들이 수입이 제일 적은 가정의학을 택한 것은 대부분 이타적인 동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가장 비협조적인 미국인 환자일지라도 의사에 대해 기본적으로 보이는 공손함을 리 부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몽족에게 미국인 의사들은 어떤 권위도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이 많이 알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몽족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는 문외한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몽족은 병원을 다른 모든 방법이 실패하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찾는 끔찍한 곳으로 여겼다.



그런 몽족이니 의사의 권위를 인정할리도 없었다. 의사의 권위는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나 몽족은 그런 권위를 부여하는 문화를 공유하지 않았고 공유할 생각도 없었다.



“의료계 경력이 얼마 안되는 사람들은 배우는 데 어마어마한 시간과 에너지와 공을 들인데다가 자신들이 의대에서 배운 걸 건강 문제를 다루는 유일하고 적법한 접근법으로 알고 있어요. 제가 보기엔 그래서 아직 어린 의사들이 몽족 환자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발끈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서구 의학이 할 수 있는 게 대단한 게 아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니까요.”



그러나 의사들 역시 몽족을 인정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엿다. “그들이 다녔던 의대에선 떠도는 영혼 때문에 병이 날 수 있고 닭의 목을 따서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건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몽족이 이런 금기들을 자기 정체성 심지어 자기 혼을 지켜주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 길이 없었다.”



이책은 몽족과 의사의 신념이 충돌할 때 일어난 비극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쁜 의사들 같으니!’ ‘나쁜 부모들 같으니!’ 간질을 앓는 아이인 리아가 두 문화가 충돌하면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간질이 악화되어 식물인간이 되는 이야기이다.



“자신이 할 일은 좋은 약을 쓰는 것이고 리아의 부모는 따라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물론의사와 부모가 계속해서 협상을 한다면 서로 의견이 달라도 갈등은 신념 체계의 차이로만 그칠 수 있다. 그러다 경찰이 불려 오고 법원의 명령을 받게 되면 차이는 더 이상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의사는 경찰을 부르고 국가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만 몽족에겐 그런 힘이 없다.”



“리아의 케이스는 몽족 사회에는 의료 종사자들에 대한 최악의 편견을 의료계에는 몽족에 대한 최악의 편견을 확실히 심어주었다.”



이 비극에서 누구도 악의는 없었다. 그러나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자도 저자가 인터뷰한 의사들은 생각한다.



“캘리포니아의 머세드에 있는 군립병권에 가게 된 것은 그곳에서 몽족 호나자와 의료진들 사이에 이상한 오해가 벌어지고 잇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둘의 만남은 어지럽긴 했어도 정면충돌은 아니었ㄷ가. 그리고 둘 다 상처를 입었으나 양쪽 모두 무엇에 부딪친 것인지 어떻게 충돌을 피할 수 있는지 모르는 듯했다.



머세드 병원 역사상 최악의 분쟁이었던 리 부부의 딸 리아의 사례에 대해 듣고 그 가족과 의사들을 알게 된 후 나는 진심으로 양쪽 모두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깨달았다. 그리고 두 가지 질문을 자주 곱씹어보곤 했다. ‘어떤 의사가 좋은 의사일까?’ ‘어떤 부모가 좋은 부모일까?’



이따금 나는 그 녹음들을 밤늦게 들으며 몽족과 미국 두 문화를 합성할 수 있다면 어떤 소리가 날지 상상해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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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흔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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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 시절 중국편승론이 유행한 일이 있다. 저무는 미국과는 거리를 두고 뜨는 중국에 편승해 대세를 따르자는 논리였다. 그러나 그 무렵 터진 동북공정으로 반중감정이 높아졌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성화봉송 사태로 반중감정은 최고치를 기록한다.

“일부 국가에선 중국 유학생과 교민들이 성화를 ‘보호’하자면서 맞불 시위를 벌여 충돌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에서만큼 극렬한 양상을 보인 곳은 없다. 이 중국인들은 서슴없이 서울 한복판에서 돌과 보도블럭, 심지어 망치와 스패너까지 던지며 격렬하게 반응했다. 퇴근길에 서울 광장을 뒤덮은 오성홍기의 물결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서울 시청 앞이 자기네 안방인가… 아니지 저들은 정작 자기네 안방에선 끽 소리 못하고 살지 않나’ 그날 서울 시내에 모인 중국인 군중의 숫자만도 1만명이 넘었다. 지난 1989년 이후 베이징에서 그 정도로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시위나 집회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저자가 보는 중국은 두 얼굴을 가졌다. 본국에선 입도 벙긋 못하면서 외국에선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천안문 사태에 대해선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한국이나 일본, 대만의 정치현안에는 열변을 토한다.

중국인의 이중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런 이중성이 정상적일 수는 없다. 이중성의 이유를 저자는 화장실에서 읽는다.

“위화의 소설 ‘형제’에서는 화장실이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초자 허용하지 않는 당시의 중국 사회상이 잘 드러나 있다. 갑자기 홍위병들이 들이닥쳐 집 안의 화장실을 폐쇄하고 공동화장실을 사용할 것을 명령하는 대목 등 다양한 일화가 등장한다. 화장실 칸막이가 낮은 것도 ‘사적 공간’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사표시엿다. 그러다 보니 공중 화장실을 이용하는 입장에서도 완전히 밀폐된 것보다 약간 ‘열린’ 구조를 편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닐까. 조금은 노출돼 있어야만 ‘나는 화장실에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시절에 형성된 무의식 때문에 지금도 공중 화장실에서 문을 열어놓고 일을 보거나 공개된 곳에서 스스럼없이 용변을 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같다. 이런 점에서 비춰봐도 지금 중국의 화장실 문화는 이 나라가 아직 억압적인 사회라는 것을 보여준다.”

베이징에선 조용하면서 서울에선 마음대로 하는 중국인들. 저자는 그들의 이중성에서 억압을 읽는다. 그리고 그 억압이 풀리는 곳에선 마음대로 욕구를 배설하는 ‘무력감’을 읽는다.

“나는 그에게 대학생으로서의 비판의식 같은 것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는 저 멀리 참으로 ‘비정치적인’ 난쟁이 여인과 결혼한 장신 남자의 이야기로 도망쳐버렷다. 중국 젊은이들은 정치적으로 무력함에 빠져 있는 듯 보였다.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태도일 수 있다. 어차피 정치적인 부문에서 심한 무력함을 느끼지만 중국의 경제가 급물살을 타고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올라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어떤 이는 이런 상황을 ‘경제성장’이라는 ‘조증’과 정치적 무력감이라는 ‘울증’이 만나 사회적으로 조울증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스올 묘사하기도 한다.”

“중국 언론은 중국인들을 자신들의 나라 중국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로 만들고 있다. 중국언론에는 화제를 끌 만한 엽기적인 이야기가 넘쳐난다. 나는 이것이 정치적 금기에 대한 반작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의 포털에서는 일종의 ‘엽기 뉴스’ 코너의 콘텐츠를 중국 언론이 공급해주고 있다.

우리 집 아파트 출입구 근처에는 자동차 뒤쪽 번호판 범퍼에 부시(BUSH)라고 써놓은 뷰익승용차가 늘 주차돼 있었다. 어느 날 집에 돌오는 길에 가까이 다가가서 봤더니 이게 부시가 아니라 ‘BULL SHIT”이었다. L자 두 개와 I, T자는 가까이 다가가야 보일 정도로 작게 표시해 놓아서 못봣던 것이다. 당시 미국 대통령과 영어 욕설을 교묘하게 연결한 것이다. 한데 그 차를 이용하는 것은 30대 중반의 상하이 남자였다. ‘왜 중국인이 미국 대통령에 대한 욕을 자기 차에 적어놓고 다니지?’ 이런 의문이 들엇다. 뭔가를 비판하고 싶긴 한데 중국 정부를 비판할 수는 없고 그래서 미국을 대체재로 선택한 것인가.

현재 중국인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좋은 환경에서 ‘새장 속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대부분 그 새장의 존재를 모르거나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중국 인민들이 돈벌이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정치적 허무주의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80년 이후태어난 ‘바링허우(八零後)’ 세대들은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그럴만도 하다. 그들이 보고 자란 것은 ‘거대한 중국, 위대한 중국, 경제강국 중국’이었으니까. 이제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가 되지 않았는가? 그런 그들은 외국인이 중국을 비판하는 것은 참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알고 잇는 중국은 어떤 중국인가? 그들은 수천년의 역사와 왕조, 황제에 대해선 무척 잘 안다. 그러나 부모들이 겪은 문화혁명과 대약진운동의 아픈 과거에 대해선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 “불과 몇십년 전에 자기들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과 사람에 대해서는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청맹과니’ 같은 처지에 있다.

현재 중국은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대국이 되었지만 덩치만 커져버린 아이처럼 아직 자신들의 경제수준에 맞는 정치적인 성숙함을 갖추지 못한 불균형 상태에 있다. 이 반성 없는 민족주의가 젊은 유학생들로 하려금 남의 나라 서울으ㅢ 한복판에서 망치와 스패너를 던지고 경찰관을 폭행하도록 만들었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부강해졌지만 민주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못하는 ‘미성숙’ 상태를 스스로 드러내 보인 것이다. 앞으로 중국이 경제적으로 더욱 강해질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동북아 지역은 ‘신중화주의’의 시대로 접어들 것이다.”

그러나 그 신중화주의의 세계는 어떤 세상일까? 저자는 불안해 한다. “만약 중국이 지금보다 더 부유해진다면 노골적으로 주변 국가에 간섭할지도 모를 일이다.” 화평굴기를 말하고 조화와 화해를 말하지만 동북공정, 반일시위, 서울 한복판에서 폭력시위를 보면서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본다.

“중국이 현재 수준의 의식을 갖고서 G2의 하나로서 세상을 호령할 만한 위치에 쉽게 오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갑자기 덩치만 커져버린 사춘기 청소년은 아닐까 불안해진다. 그들은 ‘타자’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보는 데 익숙하지 않다. 정보가 바로 지식과 연결되는 세상에서 영원히 자신들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은 역사적인 괴물을 만들어낼 수도 잇다.”

중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돈은 중국에서 벌면서 미국과 붙어 중국을 경계한다’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불안이 이유가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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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서의 이해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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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도 역사가 있는가? 성경은 신의 말씀을 받아쓴 것인데 신의 말에도 역사가 있을 수 있는가? 이책은 그런 생각 때문에 기독교가 욕을 먹는다는 입장이다.

한국 대중문화에서 기독교의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독선적이다 오만하다 심하면 미치광이들. 이런 말로 요약될 것이다.

얼마 전 결혼정보회사의 조사를 보면 그런 인식이 일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잇다.

“'배우자 조건 중 특별한 기피사항은 무엇인가?(기본적인 조건 외)'라는 질문에 남성 41%와 여성 50%가 '특정 종교'라고 답했다.

뒤를 이어 여성의 경우 '부모님 또는 본인 연고지'(21%), '자취의 유무(부모님과 동거)'(18%), '특정 혈액형'(10%), '기타'(1%)의 순으로 답하였다. 기타 답변에는 '머리 숱의 많고 적음', '특정지역 유학 경험 유무' 등이 있었다.

남성의 경우 '자취의 유무(부모님과 동거)'(32%), '부모님 또는 본인 연고지'(16%), '특정 혈액형'(9%), '기타'(2%)의 순으로 답했다.”

‘특정종교’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뻔하다. 그리고 그 이유도 뻔하다. 교만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지 않은가? 중세 기독교에서 지옥에 갈 7대 죄악으로 으뜸을 교만으로 꼽았다. 교만한 자는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종교든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죽일 수 없다면 믿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산상수훈’에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요” 하는 말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는 믿음 자체가 ‘기적’이라 말한다. “기적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활동이다. 나의 한계를 절망하는 자들에게만 하나님께서 직접 나에게 자유롭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나의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을 때만이 기적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기적에 대한 믿음은 결국 나의 주체적 삶의 신앙의 표현이다. 그것은 나의 일상성을 지배하는 자연적 인과에 대한 신념의 포기마저도 야기할 수 있는 ‘가까움’이다. 신앙은 궁극적으로 나의 모든 아집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럼 그 교만한 자들의 믿음은 뭐란 말인가? 저자는 무지의 믿음이라 말한다.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는 자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바른 믿음의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기독교에 관한 한 믿음의 근거는 성서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성서라는 책이 어떻게 만들어졌다는 것조차 모르기에 그 믿음은 교만해진다는 것이다. 이책의 내용은 별 것이 아니다. 신학대 학부과정에서 다 가르치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 기초지식 조차 없기에 ‘개독교’란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모든 책이 그렇듯이 성서 역시 책일 수 밖에 없고 책인 이상 오자, 탈자가 있을 수 밖에 없으며 필사 과정에서의 실수 또는 의도적인 변형, 전승 계통의 차이에서 오는 판본의 문제, 번역의 오류 등 셀 수 없는 오류에 노출된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번역의 오류로 널리 알려진 경우를 보자.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근거로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라는 구약의 예언을 근거로 복음서에 인용된다. 그러나 이 인용은 그리스어 구약에서 인용한 것이며 그 인용구의 히브리 원문은 처녀가 젊은 여자였다. 복음서 저자는 히브리어를 모르는 그리스어를 쓰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히브리어 원문을 몰랐던 것이다.

저자는 동정녀 잉태설은 문헌학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복음서 기자의 픽션일 뿐이라 말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검토하면서 저자는 그런 예를 몇가지 더 든다. 동정녀 잉태설과 같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저자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억지로 끼워진 그런 픽션을 당시 예루살렘이 말살되고 디아스포라가 되어야 햇던 유대인들의 처지에서 이유를 찾는다.

“그런데 성서는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면 사실에 접근하기는커녕 점점 그 본질로부터 멀어져만 간다는 것이다. 성서를 이렇게 한 줄 한 줄 분석해들어가면 사실과 부합하는 것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사가 별로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분석방법이 근원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것이 사실인가? 과연 가능할까? 이러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복음서의 기자들에게 사실의 기록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기쁜 소식을 복음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선포할 수 있을까? 그들은 복음의 역사를 말하려는 것이지 인간의 역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이 그랫듯이 성서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이상이 이책의 주된 내용이다. 저자는 바울에서 요한까지 초기 기독교가 완성되었다고 본다. 그외에도 밀라노 칙령을 전후하여 정경이 어떻게 선정되었고 그런 과정을 거치게 된 교회정치적 논리, 라틴어 번역의 성립과정, 구약의 번역과정, 판본의 문제, 외전의 의미 등을 지적하고 있지만 주 내용은 신약의 주 텍스트가 어떻게 성립되었고 어떤 해석학적 틀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이책의 주 목적이다.

저자는 복음서를 문학으로 다룬다. 효과를 기대하고 쓰여진 문학으로서 문학적 진실을 갖는다는 것이다.

“김소희 선생의 청아한 진양의 소리가 너무도 구슬프게 울려퍼질 때 나 어린 도올은 매번 울고 또 울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뻔히 아는 이야기일지라도 심청의 죽음은 나 어린 도올의 통곡을 자아내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렇게 ‘믿는’ 자에게 그만큼 감동은 크다. 그리고 그녀가 연꽃에서 부활했을 때 그리고 가까스로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 그 얼마나 기뻤던가? 이것이 ‘기쁜 소식(복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헬라세계에서 유앙겔리온(복음)이란 단어가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 곳은 전승의 소식장면이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케리그마의 핵심은 예수의 드라마가 아니라 예수의 말씀이다. 예수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이 케리그마의 어떠한 양식을 통하여 어떠한 드라마적 배열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든지간에 그 말씀의 진실성은 확보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최종적 소통이다. 그 말씀을 효과적으로 드러나게 만드는 여러자기 내러티브나 드라마적 장치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게 되면 우리는 케리그마의 핵심을 상실하게 될 수도 있다.”

저자는 복음서와 판소리를 비교하면서 복음서의 ‘진실’은 판소리의 진실과 마찬가지였다고 말한다.

공관복음에서 마가복음이 처음 나온다. 마가복음 이전에는 바울의 서신들이 널리 읽혔다. 그러나 바울의 예수는 불교식으로 말하면 법신(진리)이지 색신(역사적 예수)가 아니었다. “바울의 지평에서 예수는 매우 추상적이었다. 그는 근원적으로 역사적 예수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는 부활한 예수의 의미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성령의 계시를 통해 직접 해후했을 뿐이다. 그의 관심은 지상에 살았던 예수가 아니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에게 새로운 의미를 던져준 은혜와 믿음과 사랑과 정의의 예수였다. 따라서 그의 예수는 매우 추상적인 예수였다.”

저자는 복음서가 바울의 예수관에 대한 반동이었다고 말한다. “바울의 예수가 법신적 예수였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색신적 예수였다.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논술했다고 한다면 마가는 나사렛 예수의 삶을 기록했다. 여기에 최초의 복음서라는 문학장르의 탄생의 역사적 의의가 있다. 초대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기적과 영광과 권세의 수퍼 히어로, 신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마가는 그러한 교인들에게 완전히 다른 복음의 드라마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마가의 예수는 힘이 없었고 연약했으며, 사람들을 치유하고 권면했으며 수난 속에 죽어갔다. 이러한 십자가를 통해 그는 역설적으로 그이 케리그마를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수난극이었다.’

저자는 여기서 복음서와 판소리는 진실만이 아니라 그 형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한다. 당시 교회에서 바울의 서한이나 복음서는 읽히는 것이 아니라 낭송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드라마와 같은 내용의 복음서를 낭송하는 것은 판소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마가복음은 빅 히트였다. 그 감동은 여기저기 교회마다 소문으로 퍼져나갔고 낭송자는 유랑극단처럼 여기저기로 순회공연을 다녓다. 70년에서 100년 사이는 유앙겔리온의 전성시대였다. 그리고 복음과 동시에 기독교가 놀라웁게 팽창했다.”

“예수의 말씀이라고 전승되어온 파편이나 다양한 목격담, 그리고 사도들의 편지가 케릭스(낭송자)에 의해 낭송되는 것이 그들의 예배엿다. 낭송문화는 반드시 운이 들어가고 인토네이션의 리듬이 들어가고 때로는 노래가 삽입되기도 한다. 그것은 거의 ‘판소리’라는 장르와 유사한 것이다. 낭송이 끝나면 성찬이 베풀어진다. 성찬이라는 것도 요즘처럼 쬐끔쬐금 상징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 먹고 마시는 것이다. 끼니를 때우는 것이ㅏㄷ. 예수에게는 금욕주의라는 것이 없었다. 바로 이러한 음악성 있는 메시지와 음식문화의 풍요로움과 자유로움 때문에 초기교회에는 사람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매우 새로운 문화였다.”

그리고 그 문화를 완성한 것이 요한복음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희랍의 신들은 술이나 처먹고 근친상간이나 강간, 질투와 음모와 살상을 일삼는 아주 퇴폐적인 존재들이었으며 인간의 비극적 운명이나 상기시킬까, 전혀 인간의 구원과는 무관한 존재들이엇다.

희랍인들에게 인간의 구원을 말하는 유일신 신앙은 참으로 신선하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만나온 신들은 전혀 도덕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가 선포하는 복음 속의 하나님은 강렬하게 도덕적이었고 매우 체계적인 구원의 논리를 설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마태, 누가 복음의 수준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의 교양인들에게는 그런 이야기전승으로는 ‘그들의 지적, 종교적, 예술저그 문화적 취향을 만족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요한복음은 짙은 철학적 사색을 도배질하면서도 기실 공관복음서가 노리고 있는 모든 케리그마적 성격을 더 드라마틱하고 더 선명하고 더 실존적으로 듣는 이의 가슴에 와닿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위대성이다. 사실 오늘 우리가 알고있는 기독교는 요한복음 기독교라 해도 과히 어긋나는 말이 아니다.

요한복음의 해석의 지평에는 (교리사에서 말하는 가현론이 아닌 헬레니즘 문화의 종합으로서) 영지주의라는 우주론이 깔려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철저히 영지주의적 세계관을 이해하고 그러한 어휘로써 새로운 복음의 해석의 지평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ㅜ역설적으로 기독교는 험난한 2,3세기를 살아남을 수ㅜ 있었다. 바울이야말로 기독교를 헬라화시킨 장본인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헬라세계에서 기독교의 지속성을 보장한 것은 요한의 해석의 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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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 속치마를 벗기다 - 구석구석 만져보는 인도이야기
오화석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이책은 인도에 대한 체계적인 소개로 쓰인 책은 아니다. 이책은 저자가 인도의 사회과학 명문인 네루대학에서 2년동안 강의를 하며 겪은 인도에 대한 단상들을 책으로 모아놓은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쏟아지는 인도여행기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차이가 있다. 우선 저자는 전에도 인도에 관한 책을 냈었다. 이책이 처음이 아니고 저자가 인도를 알아온 세월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말이다.

둘째 저자는 인도경제 전문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여행을 하며 스치는 인상을 적어놓은 다른 책들과는 차별된다. 과거와 달리 요즘 인도 서적은 단순한 여행기를 넘어 종교, 문화, 인도인/인도사회론 등 주제별로 차별화된 책이 많이 나온다. 이책도 그런 트렌드를 따른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책이 다루는 주제는 인도에서 생활하면서 겪은 단상들도 나오지만 인도의 정치, 경제, 사회에 여러가지 주제를 다룬다. 가령 파키스탄과 인도는 같은 영국식민지를 겪었으면서 왜 인도는 군부 쿠테타가 일어나지 않았는가? 인도인들은 영어를 잘한다고 하던데 왜 그런가? 인도에서 운전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인도에선 매춘이 정말 없는가? 온순한 사람들인 인도인들이 왜 군중이 되면 폭력적이 되는가? 와 같은 주제들을 다룬다. 대개 인도를 다룬 영미권 매체의 특집기사들에서 나올 법한 주제들로 가볍다면 가볍지만 나름 진지한 주제들이다.

여기선 맛보기로 독립 이후 인도의 경제사를 다룬 부분을 요약해보려 한다.

“”세계 10대 억만장자’ 순위에 가장 많은 갑부 명단을 올려놓은 곳도 인도이다. 미국도 다른 선진국도 아니다. 10명 가운데 4명이 인도인으로 미국92명0보다 2배나 많다. 큰 부자뿐 아니라 작은 부자도 빠르게 늘고 있다. 지난 200년 연간 소득이 1천만 루비(약 2억 5천만원) 이상인 가구는 총 2만가우였다. 그러나 이 숫자는 3년 후 2005년에는 5만 3천가구, 2008년에는 10만 5천가구로 급증햇다. 금융소득 100만 달러 이상인 백만장자도 2008년 14만명에 달했다.”

“일부 한국인들은 인도의 국민소득이 1천달러에 불과한 것만 보고 인도에 와 돈 자랑을 한다. 이 돈이면 인도 시장을 흔들어놓을 수 있지 않겠느냐며 투자처를 문의한다.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다.”

“인도 부동산 시장의 열기는 한국에도 잘 알려졌다. 대도시에선 부동산 값이 한 해 몇 배씩 뛰는 곳도 많다. 바닷가인 뭄바이의 반드라웨스트, 말라바힐 등은 국내외 부자들의 최고 투자처로 각광받는다. 이들 지역 주택값은 서울 강남을 호가한다.”

인도의 성장률은 경제개혁이 시작된 90년대 연 5-6%, 2000년대에는 연 8-9%에 달했다. 그런 성장률이라면 위와 같은 결과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인도경제의 성장세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 예상한다. 이유는 경제성장을 결정하는 4가지 변수가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첫째 노동. 인도는 12억 인구대국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인구의 크기가 아니라 그 인구의 60%가 25세 이하라는 것이다. 물론 인도의 문맹률은 30%에 달한다. 문맹률이 높으면 노동인구 연령층이 자동으로 쓸만한 노동인구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도의 굥육열이 갈수록 뜨거워지는 것에서 저자는 장래를 낙관할 수 있다고 본다.

둘째 자본. 경제성장세를 타고 자본이 빠르게 축적되고 있고 해외자본의 유입도 급증하고 있다.

셋째 기술. 인도는 기술후진국이다. 그러나 인도는 해외기업을 M&A해 기술격차를 해소하는 전략을 택하고 잇다.

넷째 정책. 3가지 조건을 갖추어도 정책이 올바르지 않으면 경제성장은 요원하다. 그러나 현 수상이 재무장관으로 있었던 91년 경제개혁을 주도한 이후 인도의 정책은 올바른 방향을 가고 있다.

그러면 91년 이전엔 어떠했다는 말인가? 인도경제를 언급하면 반드시 나오게 마련인 라이선스 라즈가 문제엿다. 저자는 라이선스 라즈로 상징되는 간디와 네루의 유산이 인도경제의 족쇄였다고 말한다.


간디하면 물레를 돌리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실제 간디의 삶도 철학도 그랬다. 독립운동 기간 내내 간디는 산업화를 비판하고 반대했다. “산업화는 인간에게 저주가 될 것이다.” “산업화는 농촌 사회에 치열한 경쟁을 초해하기 때문에 반드시 농촌사람들에 대한 착취로 귀결될 것이다.”

“간디가 산업화에 반대한 이유는 인간의 이상적 삶의 형태가 목가적 시골생황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간디의 반 산업화, 반 테크놀로지, 반 도시화, 반 외국상품 운동은 인도인을 자각시키고 독립을 달성하는 힘이 되었다.”

네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네루는 더 부정적인 유산을 남긴다. 그는 생각만이 아니라 수상으로서 국가정책 차원에서 인도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간디의 반감은 결국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이었고 그 제국주의가 상징하는 문명의 방식에 대한 반대엿다.

네루 역시 그런 반감을 공유햇고 간디의 목가적 농촌에 대한 이상도 공유했다. “네루는 간디의 ‘농촌이 인도 사회의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정책으로 충실히 수행했다. 그는 인도 면화 산업을 부추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면화? 하품이 난다.

네루는 간디의 낭만적 이상에서 한술 더 떳다.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택하게 했고 시장경제를 온갖 규제로 조이고 간섭했다. “사업에 대한 극심한 규제로 빈곤자와 실업자는 더욱 늘어났다.”

독립 이후 91년까지 인도의 경제성장률은 2-3%였다. 보통 힌두 성장률이라 비아냥댄다. 그러나 라이선스 라즈란 족쇄를 차고도 그런 성장률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술주정뱅이 남자가 있어 해고한 적이 있습니다. 그랫더니 그는 소송을 제기했고 우리가 이기기까지 15년 동안 경영진의 시간을 빼앗지요.”

“그래서 기업들은 기업을 확장하면서도 직원 채용을 꺼린다. 경기가 후퇴하면 직원 해고를 못해 파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가는 물론 농민들조차 높은 세금과 규제정책으로 피해를 호소할 정도였다. 사업에 대한 극심한 규제로 빈곤자와 실업자는 더욱 늘어났다.”

농촌의 이상도 좋고 자립경제도 좋다. 그러나 가난은 어쩌란 말인가? “인도의 가난은 끔찍하다. 하루 500원도 안되는 돈으로 살아가는 극빈 인구가 자그마치 8억명이나 된다. 이들이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려면 산업화가 절실하다. 그리고 산업화가 이루어져야 수천 년간 내려온 카스트도 해체될 수 있다.”

경제의 목을 죄는 라이선스 라즈를 벗기 까지 인도는 1966년과 1991년 두번의 외환위기를 겪어야 했고 IMF에 손을 벌려야 햇다. 경제정책의 실패로 무역과 재정, 자본수지의 트리플 적자 때문이엇다. 그리고 두번의 위기를 겪고 나서야 인도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결국 2차례에 걸쳐 루비화를 평가절하했고 다시금 IMF에 도움을 요청했다. 자립경제란 자존심은 만싱창이가 됐다. 제2차 외호나위기를 계기로 인도는 자립경제정책을 벗어던지고 개장적 시장경제로 대전환을 시도한다. 네루 이후 40년간 이어져온 스와데시와의 결별이엇다.”

인포시스의 전 CEO 닌단 닐레카니의 말이다. “인도 엘리트들의 상당수는 아직도 농촌부락에 미련을 두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 중 아무도 농촌에 살고 잇지도 않으면서요. 인도는 지금보다 빠르게 그리고 바람직한 도시화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중국에서 지금 일어나고 잇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는 지구의 모든 선진국에서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인도는 이런 역사적 추세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항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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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책을 골랐다면 아마도 저자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출간된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가 쓴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책처럼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교양서를 기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목적이라면 틀린 선택이 아니다. 그러나 이책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학부의 전공강의를 책으로 펴낸 ‘정의란 무엇인가’는 간단히 말해 ‘정치철학 101’이라 할 수 있다. 정치철학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학부생을 위해 정치철학의 ABC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백과사전식으로 나열하기 보다 저자는 현재 영미권의 정치철학에서 유의미한 3가지 학파를 소개하는데 강의를 집중하고 있다.

이책 역시 마찬가지로 3 학파가 책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강의에선 소개에 집중했다면 이책에선 그 학파들이 실제 정치에서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정치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영미권에서 정치철학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본격적으로 대학의 학과로서 받아들여진 것은 19세기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정치철학의 역사는 종교의 위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영미권에서 종교의 위기는 1859년 ‘종의 기원’이 출간과 함께 시작되었고 1867년 영국인의 참정권을 노동자들에게까지 확대한 2차 개혁법으로 공식화되었다.

신의 죽음과 대중민주주의의 시작은 종교가 정당화 해주었던 개인의 행위와 사회질서가 어떻게 정당화될 것인가란 문제를 낳았다. 무엇이 종교를 대신한 신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 대안은 두가지였다. 이책에서 다루어지는 칸트주의적인 직관주의와 공리주의이다.

두 철학을 간단히 말하자면 ‘선한 동기에 기초한 철학’과 ‘선한 결과를 추구하는 철학’이다. 직관주의는 행위의 정당성을 양심에서, 인간 이성의 직관에서 찾았다. 그러나 그 직관은 어떻게 정당화될 것인가? 직관주의와 공리주의의 논쟁은 빅토리아식 타협을 낳는다.

“직관주의자들은 효용을 교의와 행위의 최종 시금석으로 확신하게 되었고 공리주의자들은 그들대로 기존의 사회제도들도 결국은 일정한 공리주의적 정당성을 지닌다는데 동의했던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융합을 통해 진보적 보수주의라는 영국 특유의 전통이 지적 정당성을 얻었으며 산업시대와 성공적으로 타협할 수 있었다.”(스키델스키)

이러한 공리주의적 타협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롤스의 ‘정의론’이 이전까지 공리주의적 합의를 뒤흔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공리주의적 타협이 가능했던 것은 효용이란 개념이 ‘공동체’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엇다. 다시 스키델스키의 말을 들어보자.

“지적 종합이 결코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철학적 합의는 논의의 대상이 사회일 때만 가능했다. 문제는 사회적 행위와 개인적 행위의 관계에 있었다. 결국 사회철학과 도덕철학을 비신학적안 하나의 틀 안에서 결합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판명되엇다. 사회철학은 공리주의 없이 성립될 수 없었고, 도덕철학은 공리주의와 함께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회철학과 도덕철학의 균열은 공동체가 정치의 근거일 때는 문제가 없엇다. 미국의 맥락에서 보자면 카운티를 단위로 주민의 자치가 이루어지고 그 카운티들의 합산이 미국이란 연방일 때는, “사람들이 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동질감을 느끼는 공동의 삶에 참여하여 자신의 운명을 통제한다고 느낄 때는” 사회철학과 도덕철학의 균열, 다시 말해 사회와 개인의 균열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균열이 표면화된 것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갈 때엿다. 시장의 힘이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 초창기 공화주의 분권정치를 구닥다리로 만들었을 때 균열은 표면화되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대규모 제조업에 반대햇다. 농업이야말로 고결한 시민들을 위한 것이며 공동체의 자치를 실현할 때 가장 적합한 생활방식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땅을 일구며 사는 것이 진정한 미덕의 구현이라고 주장햇다. ‘종속관계는 아첨과 굴종을 낳고 미덕의 싹을 짓밟는다.’며 제퍼슨은 대규모 제조업이 독립성이 결여된 무산계급을 낳을 것이라고 우려햇다.”

그러나 19세기 말 제퍼슨이 우려한 대로 “거대기업이 지배하는 국가경제는 지방공동체의 자치권을 축소시켰다. 그러는 동안 점점 더 증가하는 이민자들과 빈곤, 무질서, 비인간적인 도시의 성장은 많은 이들에게 국가를 통치하는 데 필요한 도덕성과 결집의식이 부족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앗다. ”

제퍼슨이 우려한 대로 “독점자본은 직접적으로 민주제도를 압박하고 그 통제를 무시하며, 간접적으로는 노동자들이 한 명의 시민으로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훼손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윌슨의 진보주의 시대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은 그러한 도전에 대한 응답이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던 시대에 진보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살아남으려면 경제적 힘이 집중된 것처럼 정치적 힘도 집중되어야”한다고 생각햇다. 그러나 정부의 중앙집권화만으로 민주주의가 구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 역시 국가 단위가 되어 정치공동체 역시 국가적 규모로 커져야 햇다(정치의 전국화). 경제적 삶이 전국화되면서 사회도 전국화되었고 그에 맞춰 정치도 전국화되어야 했다.

정치의 전국화는 뉴딜에 의해 완성된다. “작은 규모의 민주적 공동체들로 이뤄진 고결한 공화국이 가능하지 않다면 민주주의의 차선은 하나의 국가를 만드는 것이엇다. 그것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공동선을 지향하는 정치였다. 국가의 역할은 서로 경쟁하는 이해관계들을 위해 중립적인 틀이 되어주는 존재가 아니다. 현대의 사회, 경제에 부합하는 공동의 삶을 만드는 공동체엿다.”

그러나 저자는 ‘정치의 전국화’ 프로젝트는 실패햇다고 말한다. “20세기 중후반에 이르자 국가 공화국은 소멸했다. 전쟁처럼 극도로 예외적인 순간을 제외하면 국가는 그 전반에 걸쳐 공동체에 필수적인 자기 이해를 배양하기에는 너무 광대한 규모인 것으로 드러났다.”

정치현실이 더 이상 공동선을 위한 것이 되지 않을 때, 효용의 기준이 되는 공동선이 모호해졌을 때 공리주의적 합의는 무너졌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공동체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은 환상에 불과해졋을 때 정치현실은 “선의 정치에서 권리의 정치로, 국가 공화국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로 옮아”갔고 정치철학은 “공동의 목적을 지향하는 공공철학에서 공정한 절차를 지향하는 공공철학으로 옮겨간다.”

저자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다루엇듯이 정치철학의 주류가 공리주의에서 (칸트주의적) 자유주의로 옮겨간 것은 공공의 삶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자유주의가 그리는 삶은 대중사회의 삶이다. 그러면 그 삶은 어떤 모습인가?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한다. “대중사회를 견디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그 구성원들의 수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그들을 결집시키고 관계시키고 분리시키는 힘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 공동체주의자들의 공격이 시작된다. 자유주의자들도 공동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동체는 개인들의 합의에 의해 루소의 ‘사회계약’에 의해 만들어지는 공동체이다. 그러나 그런 ‘인공’의 공동체가 과연 현실적인가? 더군다나 자유주의가 그리는 개인이란 어떤 개인인가를 말할 때 상황은 더 끔직하다. 그 개인은 “자유로운 이성적 행위자가 아니라 개성과 도덕적 깊이가 전혀 없는 사람이 그려진다.” 마치 대중사회의 모래알 같은 개인들처럼 말이다.

삶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린 시대, 자신을 뛰어넘는 무엇과의 동질감을 느낄 수 없는 시대, 그런 시대에 가능한 철학은 무엇인가? 공동체주의자들의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반론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이다. 저자는 두 철학 모두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 생각하는 것같다.

그리고 그런 실패가 예정된 시대에 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이책을 읽으며 생각해볼 주제일 것이다. 그런 주제를 생각할 때면 로마제국의 역사가 떠오른다. 명예를 말하고 조국을 말하고 충성을 말하고 의무를 말하던 공화정 시대에서 제정시대로 옮겨갔을 때 로마의 예술은 개인주의화되엇다. 더 이상 제국은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크기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은 더 이상 명예나 국가의 운명 같은 것을 말하지 않았다. 오직 사랑 만을 말했다. 개인을 넘어설 수 없을 때 가능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사랑만이 구원일 수 밖에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되는가?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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